1980년 5월 18일 전후의 공안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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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5-03-06 22:40 조회5,77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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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전후의 공안 분위기
전국 분위기
1. 1980년 4월 3일부터 학생시위가 점증했고, 이들 시위는 김대중이 이끄는 재야세력이 배후조종했다.
2. 김대중은 4월 10일, 5월 1일, 5월 10일, 5월 12일 4회에 걸쳐 북악파크에서 문익환, 예춘호, 이문열, 한완상, 한승현, 서남동, 이해동, 심재권, 장기표, 이헌배, 계훈제 등 김대중 내란음모 집단을 이끌고 전국 폭력시위에 의한 국가전복 계획을 수립하고 김대중의 혁명내각을 구성했다.
3.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10만 학생시위로 경찰관이 버스에 치여 사망했다.
4. 이에 고무된 김대중은 5월 16일에 최규하 정부에 최후통첩을 했다. “계엄을 해제하고 내각을 총사퇴시킬 것을 5월 19일까지 결심하지 않으면 5월 22일에 전국적 시위를 단행할 것이다.”
5. 5월 17일 전군지휘관 회의가 긴급히 열리고 내각회의 결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선포했다. 자정을 기해 김대중 내란음모 집단인 김대중 등 26명과 권력형 부정축재자들(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치열 등)을 밤중에 체포했다.
6. 전국 분위기 급랭했다. 예비검속자를 광범위하게 체포ᐨ고문함에 따라 대학생 및 청년들이 경찰에 보일까 무서워 칩거 또는 잠적했다.
광주 분위기
2001~2006년에 걸쳐 5⋅18기념재단에서 발간한 5⋅18의 기억과 역사 1, 2, 전남대학교출판부에서 발간한 5⋅18항쟁증언자료집 I~IV의 내용, 5⋅18단체들이 유네스코에 등재한 사이트(http://archives.518.org/)에 기재된 내용의 공통분모는 다음과 같다.
1. 광주도 전국 분위기와 다르지 않았다. 대학생, 교수, 지식인 모두가 다 폭동기간 내내 숨어 있었다. “비겁하다”는 비판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 광주ᐨ전남 지역에서 최고로 위대했다는 윤한봉은 5월 17일 며칠 전부터 극도의 공포감에 떨며 이리 저리 도망다녔다. 광주ᐨ남평ᐨ대전ᐨ이철용(삼양동 빈민촌, '어둠의 자식들' 저자)ᐨ미국 밀항
3. 정동년은 5월 17일 밤 체포
4. 박관현(전남대 총학생회장)은 하루 전에 잠적
5. 끝까지 저항한 사람들은 무개념의 10대 학생과 20대의 최하층 개별 노동자들
6. 이들이 5월 25일 밤 10시부터 27일 새벽 점령당할 때까지 결사항쟁에 동참했지만 항전 주동세력인 20대들은 도청에서 작은 문제 하나를 놓고도 끝없이 논쟁하고 다투었다. 이들은 오합지졸이었다. 기동타격대장은 총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구두공 윤석루였는데 그는 겨우 20세였다. 예비군 출신들은 끝까지 참가 안했다. 총기 다루는 사람이 매우 귀했다.
7. ‘5⋅18의 영웅 윤상원’은 5월 21일까지 녹두서점과 도피처를 왕복하다가 22일에야 도청에 들어갔다. 항쟁본부 사령관 김종배는 운동권도 아닌데 5월 25일 윤상원이 어디서 갑자기 데려왔다.
8. 화염병으로 MBC를 소각하려고 아무리 노력했지만 못했다. 그런데 어떤 기찬 사람이 대형변압기를 폭파시켜 순간적으로 불이 붙었다.
9. 계엄군이 떠난 22일, 도청에 들어가려니까 매우 위엄 있어 보이는 고급 공무원처럼 보이는 사람이 “곧 계엄군이 들어오니 위험하다”고 했다. 다음날부터 그런 사람들은 없어졌다.
10. 윤상원은 녹두서점에서 우리도 무기가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만 막연히 하고 있었는데, 5월 21일 무기가 갑자기 쏟아졌다.
11. 항쟁을 지도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2015.3.6.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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