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여성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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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10-13 22:47 조회3,31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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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여성의 삶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제1권 2부(2006)에는 ‘식민지 하의 여성의 삶’이라는 주제가 있다. 여기에는 일본의 오사카산업대학 후지나가다케시 교수, 미 시카고대학 최경희 교수,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의 소정희 교수, 이 3인의 글이 방대한 분량의 논문으로 실려 있다.
이 세 편의 논문을 보면 빨갱이들의 주장들이 얼마나 허황된 것들인가를 낱낱이 알 수 있다. 아울러 논문이 인용한 근거자료들을 보면 일본인들의 조사가 매우 많은 반면 한국인들의 조사가 매우 빈약하다. 국내학자들은 이 분야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고, 정대협은 객관성이 결여된 감정적 주장을 해왔기 때문에 오히려 이 분야를 연구하는 수많은 국제인들에게 망신스러운 결과만 초래했다는 게 이들 자료에 시사돼 있다.
식민통치의 마지막 10년(1935-45)은 조선의 산업혁명 시기였다. 농민들이 토지로부터 추방되고, 노동계급이 태동하고, 인구의 유동성이 증대하고, 도시 사회가 폭넓게 확산됨에 따라 여성계에서는 소위 신여성에 대한 선망이 확산됐던 그런 시기였다.
1917년 이광수의 소설 '무정'이 신문에 연재되었다. 신문명의 보급서였다. 서구의 신문명이 유입되고, 개화사상이 확산되고, 신청년과 신여성들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청춘남녀의 로망인 연애과정을 아름답게 그려낸 신소설이었다. 1935년 심훈의 상록수도 나왔다.
가출이 골드러시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농촌을 계몽하기 위한 계몽서였다. 당시의 농촌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고루하고 원시적이었는가가 적나라하게 묘사됐다. 위안부 역시 이러한 개화기 시대의 산물이었다. 190명의 위안부를 조사했더니 88%에 해당하는 168명이 바로 탈농촌 시기인 1937-44년 사이에 위안부가 되었다. 도시를 흠모하는 일종의 골드러시가 한창이었던 시절에 가정을 뛰쳐나온 여식들이 인신매매단의 좋은 먹잇감이 된 것이다.
181명의 위안부를 조사한 결과 그중 4분의 1 이상이 이미 가족과 떨어져 식모, 공장노동자, 식당 및 기생집 접대부 등으로 일하고 있다가 위안부가 되었고, 그 중 66% 정도가 만주, 대만, 중국 등으로 이송되어 갔다. 위안부로 가는 경로는 가정을 이미 탈출해 있던 여성에게만 열려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조선여성은 어려서부터 일하는 노예
가정에서 부모나 오빠들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있던 어린 여식들이 가정의 폭력을 피해 달아났다가 곧장 인신매매단의 덫에 걸려들기도 했고, 배움의 신기루를 찾아 넓은 세상으로 도망쳐 나온다는 것이 곧 인신매매단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당시 인신매매단의 앞잡이는 대부분 조선인들이었고, 군대 위안부를 경영하는 사람들 중에는 조선인들도 꽤 있었다.
위안부로 가는 길은 두 가지 경로였다. 가정-노동시장-위안부업소로 가는 과정이 있었고, 곧바로 가정-위안부업소로 가는 과정이 있었다. 이런 과정을 촉진한 매개체가 인신매매단이었다. 인신매매단에 걸려들 수 있었던 환경은 곧 여성에 대한 가정폭력과 학대 그리고 배움에 대한 선망을 무조건 억압하는 무지몽매한 조선 가정의 여성비하 문화 때문이었다. 위안부를 모집하는 광고들이 자주 있었다. 강제로 체포해간 것이 아니라 광고를 내서 희망자들을 모집해 간 것이다. 위안부들 중에는 아버지에 의해 팔려온 이들도 꽤 있었다.
이렇게 더러웠던 조선을 미화하는 빨갱이들, 부끄러운 줄 알아야!
2022.10.1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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