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전라도를 새로 인식했던 순간은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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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5-02-19 17:06 조회7,66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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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라도를 새로 인식했던 순간은 1985년
이런 내 이야기가 젊은이들에 혹 도움이 될까 해서 올린다. 나는 40-46세를 국방부 계열의 국책연구소에서 보냈다. 1981년 초, 내가 처음으로 연구소에 보직돼 갔을 때, 그 연구소는 육사를 나온 3인의 호남인들이 휘어잡고 있었다. 한 사람은 선배이고 다른 두 사람은 여러 해 후배였다. 이들은 각기 경제, 경영, 정치 분야 박사들이었지만 모두가 육사 출신 현역장교들이었다.
그들은 육사를 졸업하고 곧장 서울대 3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한 후 육사에서 생도들을 가르치다가 미국에 가서 석사와 박사를 하고 온 사람들이라 연구소 창설 시부터 터를 잡은 사람들이었고, 나는 육사를 졸업하고 곧바로 월남전에 가서 44개월 동안 전투생활을 하고 다시 전방근무와 합참근무 국방부 근무를 한 후, 한국 나이 39세로 미국에서 수학박사 학위를 딴 후 국정원에 1년 있다가 1981년에야 뒤늦게 연구소에 왔기 때문에 그들보다 호봉과 급여가 훨씬 낮았다.
연구소에는 많은 육사 출신들이 있었지만 이들 3인에게 ‘육사 선후배’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한 고려 요소가 아니었다. 이들은 선배들을 그들 방으로 불러 따지고 지시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그들의 텃세는 정도를 지나쳤다. 연구소에 먼저 들어와 높은 호봉을 향유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중령 박사가 대령 박사보다 높은 보직을 차지했고, 대령 박사를 중령 박사 사무실로 오라 가라 불러대는가 하면, 심지어는 브리핑까지 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내가 연구소에 부임하자 3총사는 나를 자기들의 영향력 하에 두려 했다. 대령 시절, 선배 대령이 자기 말대로 야합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를 그의 사무실로 불러 욕을 하고 멱살을 잡아 몸싸움까지 벌인 적이 있었다. 싸웠다는 이유로 예비역 2성 장군인 연구소장이 나를 불러 국방대학원으로 보내 줄 터이니 연구소를 나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에서부터 나는 투사가 되지 않고서는 이 연구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연구소장을 똑바로 보고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양 손에 해야 할 일을 가지고 연구소에 왔습니다. 소장님은 이 연구소에 무엇을 하러 오셨습니까? 저는 연구소에 할 일이 있어서 왔고, 연구소장님은 그냥 발령만 받아 오셨습니다. 이 연구소는 국가를 위해 존재합니다. 저는 국가를 위해 할 일이 있는 사람이고, 연구소장 자리는 아무나 와도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 중에 연구소를 나가야 한다면 누가 나가야 하겠습니까? 나이 어린 학자들이 싸울 수도 있습니다. 싸웠으면 자초지종을 따져 주시든지 화해를 시키셔야지, 어째서 소장님은 3총사 세력만 감싸십니까? 저는 그렇게 호락호락 나갈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소장님께서는 3총사를 싸고도시기 때문에 연구소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계십니다. 제가 나가면 소장님도 함께 나가야 합니다. 같이 나가시지요”
언제부터 내게 이렇듯 대담한 기운이 담겨져 있었을까! 아마도 월남에서 베트콩 지역에 들어가 포위되었을 때 살아남으려 생사의 게임을 벌였던 그런 기질이 다시 살아났을지 모른다. 만만하게 보였던 나로부터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지 그의 얼굴은 일거에 백지장이 됐고, 손과 얼굴에 심한 경련이 일었다. 연구소장실에서 고성이 오갔다.
소문이 일시에 퍼졌다. “지박사가 삼총사 수장 아무개 박사와 붙었대.” “연구소장하고도 붙었대” 소문이 퍼진 것만큼 그들의 체신도 땅에 떨어졌다. 그 후부터 연구소장과 3총사가 한편이 되어 틈만 있으면 나를 왕따 시키려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연구소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나를 응원했다.
남들은 편하게 사는데 어째서 나만 괴롭게 세상을 사는가. 혹시 내 운명에 내가 모르는 그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괴로웠던 어느 날 새벽, 나는 평창동에 용하다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실타래처럼 얽긴 일을 풀 사람은 임자뿐이야. 누구도 이 문제를 풀어줄 수가 없어. 다행이 임자에게는 총명함이 있으니 가서 풀어 봐요. 수학문제처럼 말이야” 아! 저렇게 연로하신 할머니가 어떻게 이렇듯 과학적일 수 있을까! 역시 내 운명은 내가 헤쳐 나가야 했다. 그 할머니는 내게 이 엄청난 진리를 확인시켜 주었다. 할머니가 참으로 고마웠다.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한 나는 목포 출신인 윤성민 국방장관에게 달려가 그들의 파행을 털어놨다.
“장관님, 저들이 장관님과 동향임을 내세워 힘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연구소장도 저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저는 대령입니다. 아무개는 중령입니다. 연구소이기 때문에 대령도 장군도 중령 밑에 있어야 한다면 군 인사규정에 그런 예외조항을 넣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 인사규정을 복사해 가지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떳떳하게 보여주면서, 대령이 중령 밑에서 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는 한, 제게 달아주신 이 대령 계급장은 명예스러운 게 아니라 치욕스러운 것입니다. 장관님, 제게 대령을 달아 주셨으니, 이제 대령을 떼어가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장관님은 노기를 숨기며 말씀하셨다. “이런지 얼마나 됐니?”, “1년쯤 됐습니다” “왜 진작 내게 말하지 그랬니. 그동안 얼마나 마음의 고생이 컸겠니. 그래, 알았다. 이후부터는 내가 나서마”
당시 윤성민 국방장관은 나의 연구결과를 가지고 전군에 예산개혁을 주도하고 있어서 나를 보배라고 공언하며 총애했다. 그는 공식석상에서 “앞으로 비서실은 지박사가 장관을 만나려고 하면 2일 이내에 계획하라. 하루에 8시간도 좋다”라고 할 정도로 나를 아꼈다.
내가 1년간의 고통을 참아 온 것은 불미스러운 일을 가지고 장관님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인격적인 관계를 허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장관님을 그런 일로 써먹으면 아무래도 장관님과 나 사이가 이전처럼 부드러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후에 들으니, 국방장관은 장관보좌관을 불러들여 화를 냈는데,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국방장관은 3총사 모두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연구소장을 파면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3총사들은 교묘하게 비호세력을 이용해 미국의 연구소 등으로 피신을 했다. 연구소장은 1주일 내내 매일같이 국방장관실로 출근했다. 겨울 새벽 7시부터 국방장관실 문 앞에 꿇어 앉아 장관의 출근을 기다려 용서를 빌은 것이다. 3총사가 해체되고 난 후부터 연구소장은 연구소 일을 나에게 의논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나를 신임했고 좋아했다. 그 후 연구소에는 자유와 평온이 찾아왔다. 조용히 연구만 하면 되는 연구소에서 왜 그쪽 사람들은 패를 짓고 다른 사람들을 제압하려 하는 것일까. 내가 전라도에 대해 눈을 새로 뜨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2015.2.1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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