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번째 고소자 강철환(230광수)
페이지 정보
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08-11 15:12 조회5,316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10. 강철환(230광수)
출생: 1968
한국 도착: 1992.8.
고소 이유:중국을 거쳐 1992년에 입국했다. 5.18 당시 나는 12살이었다. 1977~1997까지 요덕수용소에 수감돼 있었다.
총평: 그의 탈북스토리는 낮은 지능으로 그를 ‘조로’(The Legend of Zorro)로 치장한 싸구려 만화다.
증거 자료 목록
① 2017.1.14., isabel truelove 강철환대표의 탈북과정을 통해, .
https://www.youtube.com/watch?v=NNiBBkZoo5I
5분 30초~6분 30초
13분 00초~19분 20초
22분 00초~25분 00초
② 2017.1.23. (ENG SUB)[탈탈탈] 22회 1부 - The aquariums of pyoungyang, North Korean prison camps, torture, Interview
https://www.youtube.com/watch?v=6Z7y9YpINX8
4분 00초~6분 00초
6분 30초~12분 50초
16분 20초~ 18분 40초
25분 40초~ 29분
③ 2017. 1. 14. 강철환대표의 탈북과정을 통해,
https://www.youtube.com/watch?v=NNiBBkZoo5I
5분 30초~6분 30초
13분 00초~19분 20초
22분 00초~25분 00초
④ 2017. 1. 23. (ENG SUB)[탈탈탈] 22회 1부 - The aquariums of pyoungyang, North Korean prison camps, torture, Interview
https://www.youtube.com/watch?v=6Z7y9YpINX8
4분 00초~6분 00초
6분 30초~12분 50초
16분 20초~ 18분 40초
25분 40초~ 29분 45초
36분 29초~37분 45초
41분 45초~1시간 03분 00초
⑤ 2017. 1. 24. [2부](ENG SUB)[탈탈탈] 22회 2부 - North Korean, Interview, human rights movement, The aquariums of pyoungyang,
https://www.youtube.com/watch?v=AlM0FII_aW4
2분 20초~ 9분 50초
10분 10초~ 15분 00초
16분 30초~40분 30초
45분 30초~47분 50초
⑥ 2020. 6. 18. 왈가왈북tv, "김정은은 허수아비"라는 북맹탈북자, 조선일보 강철환기자
5분 50초~9분 00초
이상 ①~⑥은 녹취업체에서 녹취하였음
⑦ 2020. 2. 20. <공병호tv> 북한의 실상을 고발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dYW5dWO17g0&t=310s
3분 30초~16분 30초
36분 29초~37분 45초
41분 45초~1시간 03분 00초
⑧ 2014.2.18. 인터뷰 - 한양대학교 - 자유를 위한 노래
http://www.newshyu.com/news/articleView.html?idxno=13362
⑨2002. 12. 13. RFA 인터뷰
[기획 인터뷰] 평양의 어항의 저자 강철환 씨 - Radio Free Asia
https://www.rfa.org/korean/in_focus/94875-20021213.html45초
⑩ 2019.10.29. 메디칼트리뷴 ,'우리 아이 성장판 언제 닫힐까'...적절한 검사시기는?
http://www.medical-tribune.co.kr/news/articleView.html?idxno=88617
⑪ 2008. [수용소의 노래]
1) 기본 사항
1968년생
1977.8 부터 1987.2.16.까지 요덕생활
녹취서 86쪽,“딱 9년 8개월. . 9살 들어오고 19살 때 나왔죠. . 여기 나이로는 10살에 들어오고 20살에 나온 거죠”
요덕 동행 가족: 아버지, 할머니, 막내삼촌, 여동생
녹취서 96쪽, “어머니하고 되게 친했던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이제 김책공대 교수였어요, 그분이. 교수였는데 이제 나를 불러가지고 설명을 해주더라고요, 그러니까 가려고 했는데 못 갔다고. 그때부터는 오해를 풀고 용서를 했죠, 그 전까지는 되게 원망을 많이 했어요.
수용소의 노래 46쪽,감독보위원이 그 중 행동이 느릿한 한 사람의 등허리를 몽둥이로 개 패듯 사정없이 내리쳤다 . . 너무나도 충격적인 장면을 본 우리는 다리가 후들후들거려서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누가 다가와 “어머니”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막내 삼촌 강창남이었다. “아니, 네가 웬일로 여기. . ”. .“저는 어제 왔습니다. 나중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 자, 우선 빨리 집으로 가자요”
제357쪽: 수용소 출소일은 1987년 2월 16일이었다.
제362쪽: 수용소 출소 가족은 할머니, 아버지, 삼촌, 철환, 여동생이었다.
의 견
김영순의 경우, 양부모가 요덕에 동행할 의무가 없었는데 의붓딸을 못 잊어 요덕에 자진 동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강철환의 경우, 친어머니가 아들 따라 남편 따라 요덕에 가려 했는데 갈 수 없었다 한다. 그리고 강철환의 말로는 어머니가 혁명열사 가문의 여자라서 강제 이혼당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7남매를 데리고1961년에 만경봉호라는 북송선을 탔고, 이들은 모두 북한에서 좋은 직업을 가졌다고 했다. 그런데 3족을 멸한다는 북한의 연좌제에서 7남매 중 막내 삼촌과 아버지를 제외한 5남매는 연좌제에서 제외됐다.
2) 평양 아파트
2008 수용소의 노래 제21쪽, “이 아파트는 해방전쟁(6.25사변) 후 소련사람들이 건축한 것으로, . .
2017.1.23. 탈탈탈 22회(녹취록 80쪽), “독일에서 지어준 아파트예요.. 아파트는 독일식으로 짓다보니까 되게 천장이 높고 집이 되게 좋아요, 방이 4개가 있고. .”
의 견
강철환과 그 여동생은 아버지와 함께 조부모의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그 아파트를 놓고 2008년에는 소련이 지어준 아파트라 말했고, 2017년에는 독일에서 지어준 아파트였다고 말한다. 조부모는 7남매를 데리고 북한에 왔는데 모든 삼촌, 모든 고모들이 어엿한 직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독립해 산다는 뜻이다. 강철환의 아버지만 조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한다. 강철환은 삼촌과 고모들의 이름과 직업은 이야기하면서 자기 아버지의 이름과 직업은 말하지 않았다.
3) 할아버지의 자녀
2003, 수용소의 노래 제25쪽,“삼촌 강화정은 평양 철도성 기자이며, 강복남은 평양의과대학 의사였다. 막내삼촌은 평양 리과대학을 졸업하고 혁명소조로 검덕산에 나가 있었다. 고모 강신자는 일본에서 약학대학을 나와 약사로 일하고 있었고, 막내고모 강경희 역시 평양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로 있었기 때문에, 우리 집안은 명실상부한 모범집안으로 알려져 있었다.
의 견
할아버지 슬하에 4남 2녀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2020.2. 공병호TV에서는 아버지 형제가 모두 7남매였는데 모두를 북으로 데려왔다고 증언했다.
4) 강철환의 금붕어
➈ 2002.12.13. RFA 인터뷰,'평양의 어항'이라는 책인데요. 이 책의 제목이 된 동기는 제가 어릴 때 금붕어 등을 키우기를 좋아했습니다. 77년도 당시에 평양시에서는 어린이들이 금붕어 등을 키우는 것이 유행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우리 가족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게 되면서 저는 영문도 모르고 금붕어 어항을 가지고 가겠다고 때를 썼습니다. 보위부 요원들이 저희 가족을 잡아가면서 하도 떼를 쓰니까 금붕어를 가지고 가게 했습니다. 20마리 정도요 그러나 수용소에 끌려간 후에 금붕어가 한 마리 한 마리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3마리 남았는데 그 금붕어가 수용소에 겨울이 찾아오면서 저희 거처가 영하로 내려가자 그 어항이 얼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금붕어는 다 죽었으며 그 이후 바깥 세상과 결렬이 시작되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 됐습니다.
⑪ 수용소의 노래 2003.5. 26~28쪽: 집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어항은 산산조각이 나 금붕어들이 바닥에 나둥그러져 펄떡대고 있었고, 다른 가재도구들도 뒤엉켜 널려 있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집안은 험상궂게 생긴 침입자들로 꽉 차 있었다(26쪽). . . 우리는(9살 강철환, 8살 여동생 미호) 죽은 금붕어를 가지고 놀기도 하였고, 침대에 올라가 뛰며 구르기도 하였다.
② 2017.1.23. 탈탈탈 22회 1부(녹취록 82~83쪽), 우리집에 내 어항이 5개인가 있었어요 . . 애들한테 다 나눠주고, 나눠주고 이제 내가 제일 아끼던 고기들을 다 골라가지고 어항에 담았어요, 하나에다가. 이거는 내가 가지고 간다 해가지고, 그래서 그거를 담아가지고 이제 그 준비를 하니까 그 보위부 요원이 하도 어이가 없으니까 그거 놓으라고, 놓고 가라고. 그러니까 내가 막 그 보위부 요원한테 막 욕, 같이 막 싸움질하면서 막 가져가겠다고 막 떼를 썼거든요, 거기에서. 떼를 하도 쓰니까 그 보위부 요원이 가져가라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거 금붕어 어항을 이제 아예 통째로 가져왔어요, 그거를 수용소까지.
의 견
수용소의 노래'는 2003년에 출간되었다. 이보다 1년 전인 2002년에는 [Aquariums of Pyongyang 평양의 어항]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어항이라는 테마는 강철환의 국제 차원의 로고인 것이다. 그런데 그 '어항'에 대한 설명이 거짓말이다. 2003년의 [수용소에서의 노래]에서는 어항이 산산조각이 났고, 금붕어들이 땅바닥에 나둥굴었다고 했고, 2002년과 2017년에는 어항에 금붕어를 담아 요덕으로 가져갔다고 했다. 어항과 금붕어가 모두 임기응변식으로 지어낸 허위인 것이다.
북한 보위부 사람들이 트럭에 일가족을 태워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장장 10시간' 동안에 걸쳐 수용소로 실어가면서, 깨지면 물이 흐르고, 비린내 나는 물고기가 나뒹굴고, 유리조각이 벌창할 물 담긴 어항을 관리능력이 없는 어린아이에게 트럭에 싣고 가라 했겠는가? 아마도 포장도로를 타고 피크닉을 가는 부모라 해도 9살 난 아이에게 물과 고기가 담긴 어항을 가져가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비포장도로를 타고 죽음의 계곡으로 끌려가는 어른들이 9살 난 아이에게 물과 물고기가 담긴 어항을 트럭에 싣고 가라 허락할 리도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염라대왕과 같은 보위원들이 이를 허락할 수 있겠는가? 강철환의 선전 로고, 어항과 금붕어는 지어낸 허위였던 것이다.
5) 할아버지의 혐의
② 2017.1.23. 탈탈탈 22회 1부, 녹취록 84쪽),“동료들과 함께 술 마시면서 실수로 한 마디 한 것 같아요, 실수로. 그러니까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가는 것은 이제 봉건주의적인 어떤 그런 이제 문제이기 때문에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그런 말을 했는데 . .”
⑦ 2020.2.20., 공병호tv: 77년 4월, 할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 1개월 후 보위부 요원들이 들이닥쳐 우리 가족을 요덕으로 끌고 갔다. 할아버지가 숙청된 이유는 김덕수가 조총련 의장에 출마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 사실 때문이었다. 조총련에는 두 개의 파벌이 있었는데 하나는 한덕수파이고, 다른 한편은 교토 패였다. 할아버지는 교토 패에 속했는데 한덕수가 의장에 출마하자 조총련에 공을 쌓지 못한 낯선 존재가 출마한다며 반대했다. 한덕수가 김일성의 총애를 받음으로 인해 한덕수를 반대했던 도쿄 패들이 숙청당했다. 할아버지 역시 이 숙청의 일환으로 수용소에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할아버지는 제1급 정치범 수용소인 평남 소재의 승호리 수용소로 갔다 했다. 그 수용소는 요덕보다 더 비참한 수용소다.”
의 견
1917년에는ㅍ술김에 김일성의 세습행위를 비판했다가 걸려들었다 했고, 2020년에는 조총련 의장 한덕수가 함량미달자라고 비판한 죄로 걸려들었다고 한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한덕수는 1955년부터 2001년 사망할 때까지 줄곧 조총련 의장을 했다. 그런데 강철환은 자기 할아버지가 1955년에 저지른 [한덕수 반대] 의사 표현으로 인해 22년 후인 1977년에 정치범으로 잡혀갔다고 주장한다. 1955년의 행위를 1977년에 범죄로 규정했다는 말인 것이다. 김일성을 비판한 행위와 조총련 의장 한덕수를 비판한 것에는 형량의 격차가 있다. 만일 할아버지가 요덕보다 더 비참한 곳으로 추방됐다면 한덕수에 대한 비판 행위 정도는 아닐 것 같다. 그것도 1955년에 일본 조총련계 파벌싸움에 김일성이 1977년에 끼어들어 한 쪽 파별에 속했던 사람들을 무더기로 북한 최악의 수용소로 보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6) 할머니의 정치적 배경
⑦ 2020.2. 공병호tv, “할머니 이름은 성옥선이며 독학으로 공산주의를 학습한 골수 공산주의자다. 조총련 창립 멤버였고, 조총련 교토 지구 여맹위원장을 했다. 김일성으로부터 노력훈장과 2급 국기훈장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조총련 교토지구 상공회장을 했다. 북한에 많은 돈을 바쳤다. 두 분은 7남매를거느리고 1959년 재일교포 북송작전에 의해 만경봉호를 타고 청진항에 도착했다. 조부모는 북한에 와서 대우를 받았다. 할아버지는 평양시 상업관리소 부책임자가 되었고, 할머니는 북조선 전체의 여맹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 때 여맹 위원장은 김일성의 부인이 하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여맹위원회에 나갔다가 김일성 부인을 보았고, 김일성 부인은 나더러 똘똘하고 귀엽게 생겼다는 말을 했다.
⑪ 2003. 수용소의 노래 제24쪽, 귀국사업(북송사업)이 시작되자 할머니는 자신이 솔선하여 할아버지를 설득했다. 그리고 친척들의 완강한 만류를 뿌리치고 그 많던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만경봉호를 타고 북조선으로 온 것이었다. 1961년의 일이었다.”
② 2017.1.23. 탈탈탈 22회 1부, 녹취록 80쪽, 할머니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국회의원을 15년 하셨고, 할아버지는 평양시 상업관리소 부사장을 하셨다.
의 견
2003년 수용소의 노래에서는 조부모 일가족이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에 건 해가 1961년이라 했고, 2020년 공병호tv에서는 1959년이라 한다. 2017년에는 할머니가 15년 동안 국회의원을 했다고 말했고, 2020년에는 여맹부위원장을 했다고 말했다. 1961년부터 15년 동안 국회의원을 했다면 1976년 또는 1977년이 된다. 요덕에 간 해와 일치한다. 위키백과사전을 보면 김일성의 처 김성애가 여맹 위원장을 했던 시기는 1971~98년이다. 강철환은 또 할머니가 북송된 이후 15년 동안 국회의원(인민위원)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상임 직책인 여맹 부위원장을 어떻게 겸임할 수 있었는가? 강철환은 1968년생이다. 김성애가 여맹위원장이 된 1971년에 강철환은 3살이었다. 강철환은 9살에 요덕에 갔다. 여맹 부위원장인 할머니가 여맹위원장 김성애와 접촉을 했다면 어떻게 3~9살 사이였다. 여맹이 동네 부인들이 만나는 카페쯤 된다는 것인가?
7) 9세 때의 강철환 기억력
⑪ 수용소의 노래 28쪽, 여덟 살배기 여동생 미호는 울고 있는 할머니 옷깃을 잡고 겁에 질려 떨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얼른 달려왔다. . . 노친네 남편 강태휴는 우리 민족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졌소. 그래서 지금부터 동무네 전 재산을 몰수할 것이오. 또 살림 나간 자식들은 어쩔 수 없지만 여기 있는 전 가족도 압송하겠소. .
수용소의 노래 제29쪽, 침입자들은 닥치는 대로 세간을 뒤엎으면서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간나’, ‘에미나이’, ‘새끼’라고 욕지거리를 했다.
2003. 수용소의 노래 45쪽, 우리를 태운 자동차는 첫 초소에서 30분 더 달려 어느 부락 앞에 멈춰서더니 완전히 시동을 껐다. 우리는 400여 리의 길을 장장 10시간 만에 달려온 것이다.
② 2017.1.23. 탈탈탈 22회(녹취서 84쪽), 평양에서부터 요덕까지 5시간 반 정도 걸린 것 같아요. 그래서 도착한 곳이 이제 간판을 보니까 함경남도 요덕군 구읍리라고 돼 있어요, 거기는. 그런데 수용소 간판은 조선인민경비대 제2915군부대, 그러니까 2015를 안 돼가지고 15관리소라고 불러요,”
② 2017.1. 녹취서 85쪽, 정문에 딱 내려가지고 호송한 보위부 요원이 그 수용소 보위부 요원하고 무슨 이렇게 서류상 절차를 뭐 따지더니 문을 딱 열더라고요. 그래서 차가 딱 진입했는데 처음 진입한 집은 이제, 거기 처음 진입한 마을은 그 수용소를 지키는 이제 경비대나 국가안전 보위부 요원들이 사는 마을이었어요,. . 처음에는 걸어서 가다가 다시 또 차를 탔는데, 그래서 그 1반 마을에서 이제 10반 마을까지 가는 거리가 한 40분정도 걸렸어요
⑪ 수용소의 노래 28쪽, 철부지 미호와 나는 . . 어른들의 근심은 아랑곳없이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죽은 금붕어를 가지고 놀기도 하였고, 침대에 올라가 구르고 뛰기도 하였다. . 그러다가 어둡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답답하고 지겨워 미호와 나는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고 할머니를 졸랐다.
의 견
강철환은 '수용소의 노래' 제28쪽에서 자신을 철부지라 했다. "죽은 금붕어를 가지고 놀기도 하였고, 침대에 올라가 구르고 뛰기도 하였다. . 그러다가 어둡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답답하고 지겨워 미호(여동생)와 나는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고 할머니를 졸랐다" 그런데 위의 다른 기재들을 보면 9살짜리 아이가 가질 수 있는 관찰력과 기억력의 범위를 넘는다. 그는 2003년 저서에서 평양에서 요덕까지 장장 10시간에 걸쳐 갔다고 했다. 하지만 2017. 탈탈탈에 나와서는 평양에서 요덕까지 5시간 30분 걸렸다고 했다. 기억한 자료가 아니라 지어낸 거짓말인 것이다.
8) 요덕에서 받은 교육
② 2017.1.23. 탈탈탈 22회(녹취서 87쪽), 거기는 교육과정이 중학교 3학년까지밖에 없어요
② 녹취서 88쪽, 교원이라고 나온 사람들이 전부 다 국가안전 보위부 요원들이에요, 다 총 차고 나와 가지고, 그러니까 이제 그 애들에 대한 교육의 목적이 아니고 . . 통제하기 위한 그런 목적이 더 강하다 보니까 일을 엄청나게 시키고 나게 되면 애들이 앉아가지고 공부를 할 수가 없어요, 힘들어 가지고. . . 공부하라는 말도 안 하고 그냥 이제 공부하는 시간에는 다 잠을 자고 있고, 또 오후에 이제 일을 또 나가고, 이런 식으로 이제 하루 일과가 되다 보니까 제가 뭐 수용소 학교에서 뭐 배운 기억은 거의 안 나요. .
⑪ 수용소의 노래 제58~59쪽, 9월 1일 신학기가 가까워지자 인민학교 학생감독이라는 남자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 . “내래 학생 감독이오. 이 집에 학교 갈 아이가 있디요?” “인민학교 4학년 올라갈 남자 아이와 2학년 올라갈 여자아이 이렇게 둘이 있습네다” . . 드디어 9월 1일, 첫 등교일이 밝았다.
⑪ 수용소의 노래 제306쪽,1983년 7월 28일, 수용소 학교를 졸업했다. 인민학교 4학년부터 다녔고, 중교 5년을 다녔다. 합쳐서 6년을 다녔다.
의 견
북한의 교육 체제는 유치원 입학 6세, 인민학교 7~11세, 중학교 11~14세, 고등학교 14~17세를 갖는 구조다. 강철환의 위 말들에 의하면 강철환은 수용소에서 인민학교 4학년으로 시작해 중고등학교 과정 5년을 이수했다고 한다. 15세에 수용소가 제공하는 정규교육을 모두 마쳤다는 뜻이다. 그런데 수업시간에는 과도한 노동 때문에 모두가 잠을 잤다고 하니 시간적으로는 6년 간 학교에 다녔어도 본인 말 그대로 배운 게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출소 후 요덕군 소재지에서 반체제 동무들을 모아 밤낮으로 반정권 활동을 했고, 전국을 안 가본 데 없이 두루 돌아다녔다고 한다. 이와 병행하여 김책공대를 가려고 5년 동안 독학을 했다고 말한다. 이런 그가 1993년 한양대학교 무역학과에 입학했고, 졸업 후 10여 년 동안 조선일보 기자를 했다고 한다. 한양대학을 다녔고, 기자 생활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까지 이르게 된 그의 경로는 모두 상식선을 초과한다. 설령 독학을 했다해도 그것으로 한양대학교에 입학하는 지격이 될 수는 없다. 요덕교육과 한양대가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9) 요덕군 군청 소재지 활동
(1) 요덕군 농촌 송도리에서 군청 소재지로 이동한 동기
② 녹취서 91쪽,갑자기 이제 다른 이제 지역에 있는 저희 친척들이 또 몰려왔어요, 저희 도우려고. 몰려왔는데 저희 큰삼촌이나 이 삼촌들이 와가지고 한번 농장원으로 찍히게 되면 영원히 거기에서 빠져 못 나온대요. 그래서 농장원으로 찍히기 전에 빨리 빠져나와야 된다고, 그래서 이제 요덕군에 와가지고 요덕군당 책임비서, 조직비서, 보위부장 다 뇌물 줘가지고 빠져나왔죠, 거기에서. 빠져나와서 이제 요덕군 소재지에 저희 집을 받게 됐고, 그리고 이제 요덕군에 직장을 하나 얻어가지고 거기에서 이제 생활을 시작했죠.”
② 녹취서 92~93쪽, 옷을 그냥 일본제 옷으로 막 싹 뿌리고 막 그래, 돈 막 하고 나니까 하루아침에 그냥 부자가 된 거죠, 저희 집이 하루아침에. 그러다 보니까 이제 뭐, 뭐 코빼기도 안 보이던 군당 책임비서가 놀러오죠,그리고 뭐 또 저기 뭐 국가 보위부들, 보위부장도 올라오고, 간부들 다 한번씩 방문하는 거예요, 이렇게. 올 때마다 다 뇌물 또 주고, 그러다 보니까 이제 수용소 나왔지만 하루사이에 그냥 갑자기 이제 돌변을 해가지고 제가 이제 그 수용소 10년 때를 굉장히 빠르게 벗었어요. . 수용소 나올 때 키가 1m 60cm 중반됐었어요. . 20살이었잖아요. . 지금 거의 70몇이 됐는데, 그러니까 거의 클 나이 다 커서 왔는데 저희 친척들이 와가지고 이제 저희 몸보신 시킨다고 한 달에 한 번씩 개를 잡았어요, . . 한 달에 한 번씩 개를 잡아가지고 개고기를 먹였더니 제가 1년 사이에 10cm가 훅 큰 거예요”
② 녹취서 93~94쪽, 뇌물을 주는 순간 모든 게 다 해결돼요, 그냥. 그러니까 저도 이제 농촌에 갈 뻔했지만 뇌물 딱 주니까 바로 농촌에서 나왔죠. 그리고 이제 직업을 고르는데 돈을 주니까 또 좋은 직업을 고를 수가 있어요.. . 처음 나와 가지고 이제 뭐 거기 우마사 사업소라고 달구지 끄는, 일해 보니까 너무 한심한 거예요, . . 다시 돈을 주고 편의봉사위원회라고 또 있어요. . 각 군마다 편의봉사위원회라는 게 있는데 이거는 군 단위로 이제 인민들의 생활편의를 보장해주는 단위죠. 그러니까 뭐 신발부터 뭐 생활필수품들을 갖다 만들어주고, ,. 생필품 공급해주는, 그러니까 되게 쉬운 직종이죠. 인기가 좋고, . . 거기에 이제 자재지도원으로. . 스카우트 돼가지고, 돈이 있으니까. . 그때부터 전국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죠. . 주로 평양 쪽으로 많이 가기는 갔지만 어쨌든 전국에 안 가본 데가 거의 없을 만큼 거의 막 여행을 많이 다녔죠.
② 녹취서 78쪽, 제가 지방에 있다가 임수경씨 보려고 평양에 몰래 들어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89년도에 평양 이제 학생, 청년축전을 했는데 그때 제가 이제 그 수용소 나와서 … 거든요.
② 녹취서 94~95, 막내삼촌은 북한에 리과대학이라고 여기 한국으로 말하면 카이스트죠, 리과대학이. 그 리과대학에 생화학 분야에 권위자였어요, 저희 막내삼촌이. 그래 가지고 리과대학 10점 채운, 그러니까 만점 채운 우등생은 국가가 다 채용을 사실 쓰게 돼 있대요. 그런 규정이 또 있더라고요. 만점 채운 우등생은 어디에 가든 다 쓰게 돼 있대요. 그래서 우리 삼촌이 거기에 만점 채운 거의 천재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러다 보니까 저희 막내삼촌이 이제 수용소 나온 다음에 국가과학원 친구들하고 연락을 해가지고 거기 들어간 거예요, 사실은 또 다시. 그래서 이제 과학원으로 들어갔고 나도 이제 과학원에 가려고 사실은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래서 준비를 하면서 제가 이제 북한에 김책공대라는 대학이 있죠? 그 대학에 누가 넣어준다 그래 가지고 , . 10만 엔만 내면 붙일 수 있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김책공대 가려고 사실은 공부를 죽기 살기로 했어요, . 저희 삼촌의 친구들 동원해가지고, 거기 김책공대 교수들 다 있잖아요, 또 거기. 그래서 교수들 다 삶아놓고, 너 적당한 점수만 나오게 되면 대학에 붙여준다고, 그렇게 이제 공부를 하다가 탈북을 했죠”
의 견
2019.10.29자 메디컬 트리뷴 “우리 아이 성장판 언제 닫힐까'...적절한 검사 시기는?”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성장판 닫히는 시기는 개인마다 다르지만 평균하면 여자 아이는 만 14~15세경, 남자 아이는 만 16~17세경에 완전히 닫힌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강철환은 수용소에서 10세부터 20세까지 만 9년 동안 영양실조 환경에서 중노동을 했는데도 키가 160을 넘었고, 출소 후에 개고기를 많이 먹어서 20세의 1년 동안 10cm 이상 자라 170cm 이상 자랐다고 한다.
출소 후 일본에서 수많은 친척들이 몰려왔고, 벼락부자가 되니까 군당 수뇌부 요원들이 자주 찾아왔고, 20세의 강철환은 그들에게 뇌물을 주어 자기에게 굽신거리게 했다고 한다. 뇌물 주고 편의봉사위원회 지도원이 되었는데 그 보직을 가지고 전국을 다 돌아다녔다고 한다. 군 단위에는 수많은 종류의 지도원이 있다. 모든 군 단위 지도원은 군 경계선 밖을 관할하지 못한다. 가장 높은 군당 지도원이라 해도 자기 군 내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강철환은 막내삼촌이 수재이기 때문에 국가과학원 교수를 했고, 김책공대 교수들을 다 구워삶아 놓았다고 한다. 강철환의 말에 의하면 요덕에 수용되기 전, 막내삼촌은 겨우 이과대학을 나와 검덕산에 혁명소조로 파견돼 있었다. 이런 막내삼촌이 수용소에서 해방되자마자 국가과학원에 들어갔고, 김책공대 교수들 다 삶아놓는 괴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함경남도 요덕군에서 22세(1989)의 청년이 그것도 요덕 전과자가, '붉은 줄 2개가 그어진 평양행 여행증'을 획득하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다. 국경연선지대(중국과의 국경지대)에 가려면 푸른 줄 2개가 그어진 특별여행증을 받아야 한다. 여행증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강을 건너기까지는 수많은 인적, 물적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 돈만 뿌리면 해결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강철환 등 모든 탈북자들은 그들에게 달러가 얼마든지 많이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보안요원과 경비병들을 구워삶았다고 말한다. 장진성이나 김영순이나 강철환 등 이 사건 고소인들 모두가 탈북과정을 희극화한다. 강철환은 요덕군에서 평양을, 김정아는 함경북도에서 평양을 마음대로 드나들었다고 말한다. 한국 국민들을 바보요 호구로 보는 것이다.
(2) 반정부 체제 구축
② 녹취서 96~99쪽,수용소 안에는 이제 저 같이 어릴 때 간 친구들도 많았지만 다 커서 온 친구들도 많았어요. 그러니까 이제 해외 유학 갔다가 온 친구들, 또 이제 중앙당 간부의 자식들도 많이 왔었고, 그러니까 평양에서 온 애들이 많다 보니까 다들 이제 반정부 그룹을 만들었다.. 김정일이 개새끼라고 욕도 했다. . 너무 친구들이 많이 오니까 담당 보위부 지도원이 저한테 하는 말이 너 애들 묶어가지고 뭐 하려고 그러냐. . 그런데 그 보위부 지도원하고 또 사귀게 됐죠. . 누군가가 나를 밀고했어요. 그러니까 우리 가까운 친구들은 1명도 고발 안 했는데 나하고 친하려고 노력한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굉장히 노력한 친구가 있었는데 얘가 이제 막 와가지고 먼저 나쁜 얘기 막 하고, 나한테. 먼저 김정일이 욕도 막 하고, . 내가 넘어갔죠. . 걔를 굉장히 내가 신뢰를 해가지고 이 녀석하고 내가 할 말 못할 말 얘기를 다 했죠,. . 어느 날 갑자기 이제 보위부에서 나를 부른 거예요. 불러가지고 이제 그 요덕군 행정위원회 3층 사무실에 갔더니 . . 책을 이렇게 딱 펼치는 거죠. . 분당 초 단위로 다 기록돼 있는 거예요, 여기에 내가 한 얘기가. . 보위부 지도원이 딱 보더니 이 책을 딱 덮는 거예요, 이렇게. 덮으면서 이제 ‘앞으로 그러지 말아라.’ 나를 이제 한번 봐주는 거죠. 봐주는 건데 봐주는 이유가 있었어요. 그 보위부 지도원이 너무 가난한 거예요. . 자기 애들 결혼시키는데 결혼할 돈이 없는 거예요, . 내가 딱 보고 알았죠. 그래 가지고 내가 도와주겠다고, 그러면서 같이 이제 뭐 친한 형, 동생하기 시작했죠.”
② 녹취서 100쪽, 정말 친한 친구가 1명 있었는데 이 친구가 나하고 이불 속에 앉아가지고 별 얘기 다 하는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이 친구가 보위부에 끌려갔어요. 끌려가 가지고 아직도 못 나왔는데 내가 걔가 끌려가는 순간부터 나는 ‘나도 끌려가겠구나’ 생각을 했었어요. 했는데 나중에 이제 보위부 지도원이 나를 불러가지고 하는 얘기가 “‘가 너 하나도 안 불더라.’ 나보고 그러더라고요.. .
⑤ 녹취서 104쪽, 저희가 이제 약간 보위부하고 좀 친해지면서, 그 친해지면서 약간 자중을 해야 되는데. . 더 기를 받아가지고 더 세게 나간 거죠, 이게. 더 세게 나가다 보니까 이제 평양에서도 소문이 났어요, . .북한에서 내놓으라 하는 당 간부의 아들들이 수용소에 거의 다 한 번씩 왔었어요, 수용소에 와가지고 혁명화 되는 것이 아니라, 반동화가 돼 가지고 나가는 거죠.. 요덕은 혁명가 양성소.
의 견
보위부 지도원과 형 동생 하면서 지냈기에 보위부 간부가 자기의 반정부 활동을 눈감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도망가라 알려주었고, 자기와 친하다는 사실을 숨겨달라 했다고 한다. 가난한 보위부 간부에게 돈 자랑을 하면서 '최고의 수준으로 통제되는 국경연선지역 여행증'을 2개나 발부받아 하나는 자기가, 다른 하나는 안혁이 사용하여 혜산으로 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허풍의 극치로 인식된다. 더구나 강철환이 함경남도 요덕군에서 벌인 반체제 활동이 평양에까지 소문나 있었다고 하니 이솝우화를 능가한다. 요덕수용소에서 으리으리한 배경을 가진 친구들을 많이 만났고, 출소해서 이들과 똘똘 뭉쳐 반체제 반동 활동을 하였다고도 말한다. 한편으로는 수용소에서 죽도록 노동시키고, 굶어죽이고, 자유 시간 없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말해놓고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의 자식들이 몰려다니며 김일성 개새끼를 마구 발설했다고 말한다. 이런 수용소는 북한에 없을 것이다. 이에 더해 강철환은 반체제 인물로 부각되어 평양에까지 소문이 났다고 말한다. 인터넷도 없고 교통수단도 열악하고, 여행이 통제되는 시대에 함경북도 요덕군에 있는 강철환이 반체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머나먼 평양에까지 알려졌는데 어떻게 그가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인가.
11) 탈북과정
⑤ 녹취서 105~108쪽, 어느 날 이제 그 저하고 친했던 보위부 그 간부가 저를 이제 불러가지고 야, 요새 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그래서 무슨 분위기가 어떻냐? 물어봤더니 너 나중에 잡히게 되면 자기하고 관계를 . . 불지 말라고, 그래서 내가 딱 그때 눈치 챘죠. 내가 그때 눈치가 빨랐으니까, .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아이 뭐 내가 어떻게 그거를, 의리를 내가 지키지, 당연히' 그러니까 나를 믿는대요. 그래서 믿으라고, 그래서 이제 내가 그 한번 여행 좀 갔다 와야 되겠다. 여행증 좀 떼어달라고 했죠. 했더니 ‘너 도망가려는 건 아니지?’ 그래서 내가 도망을 어디 가냐고, 그래 놓고 내가 여행증을 받았어요, 몇 개를. 받아가지고 내 친구들한테 연락을 쫙 했죠. ‘위험한 순간이 왔으니까 다 튀자.’ 해가지고 이제 암호화 된 걸로 다 보내가지고 이제 튀자고 딱 결심을 했죠. 했는데 압록강가에 한 열댓 명이 오기로 했는데 저하고 같이 온 친구 안혁이하고 저하고 2명만 딱 왔어요, . .다 잡히고 다 끌려가고, 그때 압록강까지 오는 것도 굉장히 힘들었어요, 사실은. 그러니까 이제 여행증을 위조해가지고 오는 거니까, 이게 이제 남의 이름 써가지고 남의 공민증 가지고 왔는데, 나는 내 걸로 왔지만 내 친구가 걸릴 때마다 담배 한 목때기씩 던져주면서, 뇌물을 뿌리면서 올라왔어요. 올라와가지고 그 양강도 혜산으로 가는 길로 쭉 가는데 길주역에서 갈아타고 올라가요, 이렇게 기차가. 올라가는데 그 혜산까지는 여행증이 안 나와요, . .정치범들은 국경까지 여행증이 안 나와요. . .혜산 바로 역전 전에 우능역이라고 있어요, 우능역.그 우능까지 떼고 나오는 거예요, 이게. 그래서 우능이라고 딱 써가지고 그 여행증에 비밀번호가 있는데 그 비밀번호 내가 딱 알아서 쓰고, 해가지고 . .비밀번호 내가 알았으니까, 다 들었으니까. 그래서 이제 비밀번호 써고 이제 우능이라고 썼죠. 써가지고 쭉 와보니까 그게 이제 그 북한에 백두산 지역까지 쭉 올라가게 되면 이 고산지역이라는데 그런 이제 그 향기가 나요. 그러니까 자작나무숲이 막 쫙 나오면서 아주 이제 이상한 느낌이 나더라고요. 그러니까 눈이 이렇게 깊이 쌓였는데 기차가 이렇게 천천히 올라갑니다, 올라가는데 우능역 가까이 오다 보니까 애들이 막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거야, . 왜 뛰나 하고 보니까 저하고 똑같은 애들, 그러니까 여행증 없이 국경으로 가는 애들이 다 뛰는 거예요, . .우리도 같이 뛰었죠, , . 혜산에 내 친구의 친구가 거기 있다고 하니까 그 친구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가 강을 건널 수가 있겠다. 그래서 이제 일단 혜산으로 목표를 잡고 혜산으로 갔죠. 갔는데 이제 우능역에서 기차에서 뛰어내려 가지고 한 15리 길을 걸어왔어요, 혜산역까지. . . 혜산 안에 같이 온 친구네 친구가 별명이 좁쌀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 . 권투선수였어요, . 혜산 바닥에서는 아주 유명한 깡패, 그래서 그 친구를 만나가지고, . 술 마시고 돈 먹이고 하니까 얘들이 이제 경비대하고 저희하고 이제 줄을 놔준 거죠.. 군인들 만나가지고 너네 언제언제 교대를 하는 시간인지 알았어요, 새벽 2시에 교대를 한대요. 그래서 얘네들 술을 왕창 먹여놓고 막 잘 때 우리는 새벽에 2시에 깨가지고 이제 강 건넜죠.”
의 견
혜산선은 길이 141.7㎞. 20개역으로 구성돼 있다. 함경선 길주역에서 분기하여 재덕·합수·백암·보안 등을 거쳐 압록강변 혜산진까지 연결된다. 강철환이 말하는 우능역은 '위연청년역'을 의미한다. 그가 국경을 넘는 과정은 스릴이 아니라 코미디로 묘사됐다. 보위부 간부에게 국경 지역 여행증을 여러 개 떼어 달라 해서 받았다고 한다. 열댓 명이 만나자고 했다면 여행증은 15매 정도일 것이다. 15명이 오기로 돼 있는데 자기와 안혁만 왔고, 나머지는 잡혀서 끌려갔다한다. 13명이 잡혔다면 강철환과 안혁의 탈출사실도 곧바로 알려졌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혜산역에서 깡패 도목들과 어울리고 경비요원들과 술을 먹으면서 여러 날을 보내는 동안 강철환과 안혁은 무풍지대에 있었다. 요덕은 함경남도 남단에, 길주역은 함경북도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그 사이에 대한 설명이 없다. 20개 역을 가는 동안 보위부의 검문이 사실상 없었다고 한다. 그는 보위부 비밀번호까지 알아내 기록해서 완벽하게 여행증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런 여행증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째서 여행증 없는 사람들과 똑같이 열차에서 위험하게 뛰어내렸는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행증 없이 감시가 가장 심한 국경연선을 가는 기차를 타고 갈 수 있었을까. 돈으로 깡패를 구워삶아 친구를 만들었고, 그 깡패들이 경비병들을 소개했고, 그 경비병들을 사귀어 교대 시간이 새벽 2시라는 것을 알아내고, 그 시각 이전에 경비병들에게 술을 왕창 먹여놓고 새벽 2시에 유유히 압록강을 건넜다고 한다. 겨우 23세인 청년이 무협지 주인공처럼 행동한 것이다. 이건 조잡하게 쓴 만화이지 탈북스토리가 아니다.
12) 중국 6개월
⑤녹취록 109~쪽,약간 좀 이렇게 좀 폼 나게 사는 뭐 그런 모습 보이려고 이제 김일성 배지 당 깃발상을 딱 달고 이제 왔어요, 혜산까지. 그래서 강을 딱 건너는 순간에 그 배지, 우리 친구도 같이 달았으니까 친구더러 배지 떼라 해가지고 바위에다 올려놓고 돌로 이제 그거를 깠어요,. . 혜산 바로 앞에 창빠이라고 중국에 도시가 있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그 창빠이 풍경이 되게 막 정겨운 풍경이었어요. . 아기자기하기도 하고 되게 먹을 것은 많은데 아주 소박한 그런 마을, 그리고 이제 밤에 무도회장에 가봤는데 중국에 촌구석에 그 중국인들이 춤을 추는데 너무 멋있는 거예요, 그게 또 춤추는 게. 그래서 그런 경험도 하면서 새벽 1시인가 그 혜산에서 연길까지 가는 트럭에 이제 몰래 탔죠.타가지고 영하 한 25도 떨어지는, 30도 떨어지는 강추위 속에서 차 타고 이제, 이렇게 팩을 하나 가지고 탔는데 한 몇 시간 쭉 가다가 내려서 보니까 몸이 얼어가지고 이렇게 딱 내렸는데 허리가 안 펴지는 거예요, . . 동사 직전까지 갔다가 이제 내려가지고 연길역에 처음으로 내렸죠. . 연길까지 와서 거기에서 이제 아는 분들하고 같이 알게 돼 가지고 한 두 달 정도 살다가 그분들이 도움을 줘가지고 심양으로 빠졌죠. 그래서 심양(주: 선양)에서 좀 있다가 베이징 가면 한국 대표부가 있대요.
⑤ 녹취서 110~111쪽, 한국 대사관에 가자고 했더니 북한 대사관 앞에 세워주는 거예요, 얘들이. 모르니까, . .한국 대표부, 도와줄 수는 없고 돈은 좀 줄 테니까, . 조그만 비용을 좀 주면서 숨어있으라고,
⑤ 녹취서 112쪽,대련이라고 바닷가 있는 데 대련까지 나가서 거기에서 이제 우리가 우연하게 정말 친한 어떤 귀인을 만났죠, . .중국인 누나같은 분인데 이분이 이제 자기 친척이 평양에 있어요. 그 인연 때문에 저희가 평양에서 온 거 알고 아주 정말 도와주려고 노력을 했죠. 그런데 마침 그때 평양에 있는 동생이 또 대련으로 놀러왔어요, 가정 방문으로. . 우리는 이제 화교로 위장하고, 그런데 이 친구가 와가지고 처음에는 막 뭐 김일성이 막 칭찬하고 막 그래. 그래서 내가 막 김일성이 그 개새끼 무슨 칭찬하냐고 막 욕을 했더니 나보고 막 싸우려고 그래, 그래서 “너 하루만 더 있어봐.” 그리고 내가 걔를 끌고 나와서 대련시장을 한번 쭉 보여줬어요. 쭉 보여주면서 딱 들어오니까 얘가 아무 말도 없는 거야, 갑자기. 그래서 3일 만에 돌아오더니 자기 북한에 안 가겠대, 갑자기. 그 누님이 너무 황당해가지고 너 북한에 안 가면 어떡하냐고,
⑤ 녹취서 113쪽, 대련항에 또 나갔더니 북한 선박이 또 하나 온 거예요, 거기에. 선박이 와가지고 선원들이 한 20명이 내리는데 내가 거기 마중 나가 가지고 걔네들 안내했어요, . .달러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얘들이 1달러짜리 막 이러면서 막 되게 불쌍하게 노는 거예요, 이게. 그래서 막 대련시장에 나갔더니 애들이 막 그 벨트 하나 사고 싶은데 중국 돈으로 25원 하는데 그거 살까말까 막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더 불쌍해가지고 내가 하나 사줬어요, 누구냐고 묻기에 내가 화교다. 북한에 살았던 화교다 그랬더니 믿더라고요, 내가 안내할 테니까 따라오라고, 그래 가지고 걔네 끌고 다니면서 이제 막 뭐 사주기도 하면서 얘기도 해주면서 그랬는데 이제 김일성 배지 다 달고 있더라고요, 이렇게. 그래서 그거 다 떼라고 했어요. 떼라, 막 떼라, 여기에서 그거 달고 있으면 여기에서 망신당하니까 떼라고 그러니까 다 떼더라고, . . 내가 평양 얘기도 좀 해주면서 같이 다녔죠. 밥도 사주고, 그래서 이제 다음번에 이제 나오게 되면 자기가 금괴를 하나 가져오겠대, 금괴. . 그래서 가지고 나오라고, 내가 뭐 진심은 아니지만 걔가 나를 믿고 지금 하는 얘기니까, 그러니까 그놈들이 그때부터 보니까 그런 밀수를 한 것 같애. 마약이나 금괴나 이런 것들을 몰래 훔쳐다가, . . 그게 선원들인데 북한에서 선원들이라는 것은 약간 성분이 되게 좋은 애들이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위간부네 친척들을 골라가지고 선원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원을 하게 되면 돈을 많이 버니까 그런 좋은 직종을 이제 애들이 해주는 거죠. 그러니까 얘들이 이제 다 빽이 있으니까 이제 해외에 나올 때마다 그거를 팔려고 이제 하는 거죠.
⑤ 녹취서 114쪽, 중국에서 6개월 있는 동안 인권 활동도 하면서, . 그 당시만 해도 탈북자라는 개념이 없다 보니까 공안이 그렇게 잡으려고 안 했어요, 공안이 잡아도 나는 한국에서 왔다 그러면 다 놔주더라고요. 그러니까 한국인에 대한 굉장한 어떤 그런 존경심은 아닌데 되게 높이 우대하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그때는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다 가라고 그래요, 그래서 한국인 행세를 하면서,. .다행히도 내가 북한에서 배운 한국 노래가 워낙 많아가지고, . 그거 부르니까 다 한국사람이라고 믿더라고요, 또 잡혔을 때 여권 집에 있다고 했을 때, 공안이 집에 전화하게 되면, 그 누이가 있다고 그래, 그러면 공안이 가라고 하죠. . 다 그렇게 짜고 했기 때문에 약간 신변은 약간 반은 보장 받았죠. . 그런데 한 6개월 있다 보니까 야, 이게 또 한국에 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신분이 불안정하고 내가 온 목적이 한국에 가서 그 북한 인권을 내가 폭로하려고 마음먹고 왔으니까, 그래서 이제 가려고 했는데 가는 길은 없고, 그런데 마침 이제 거기 흑룡강성에서 깡패 무리들이 한번 우르르 몰려와가지고 그 집으로, 왜 몰려왔나 했더니 그때 한국에서 뱀 장사가 굉장히 유행했어요, . .뱀 팔려고 애들이 몰려온 거예요, 거기에. 칼 차고 막 이렇게 와가지고, 그런데 그 깡패 두목하고 또 우리는 또 같이 술 먹으면서 또 친해져가지고 또 의형제 맺자고 또 그래. 또 우리 보고 또 의형제 하자고, . 말이 통해가지고 너 만약 한국에 안 가게 되면 흑룡강성으로 오라는 거예요. 같이 깡패짓 하자고, ”
⑤ 녹취서 115~117쪽, 그렇게 보내다가 이제 안 되겠다 해가지고 한번 갈 길을 한번 모색해보자, 마침 이제 거기 대련항에 한국인들이 많이 왔어요, .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던 누님이 그 선장 몇 명을 잘, 친한 분들이 있더라고요. . 선장한테 약간 거짓말을 했죠. . 한국의 어떤 중요한 기관에서 북한에 파견됐다가 나오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너 선장이 우리를 한국에만 데려다 주면 한국 정부가 니네를 엄청나게 보상해줄 것이다. . 누나가 그렇게 설득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선장이 딱 와가지고 우리를 보니까 북한 사람 같지 않거든요. 약간 남한 말도 쓰는 것 같기도 하고 남한 노래도 하니까, . . 선장이 엄청나게 긴장을 해가지고 진짜냐고, 그래서 자기가 하루 고민하더니만 도와주겠대요. 그래서 이제 그 다음 날에 선원증 2개(주: 강철환, 안혁)를 가지고 나왔어요. 다른 선원 걸 빌려서 나온 거죠. 그래서 그 선원증 가지고 나왔는데 그 선원의 나이가 40살이야, 우리는 24살이었고, 그러니까 공안이 딱 보면 잡히게 돼 있어, 그런데 그 당시만 해도 한국 선원들은 그냥 선원증만 딱 보이면 그냥 통과시켜줬어. . 프리패스, 우리가 자세히 보니까 다 프리패스 하는 거예요, 그 선원증 하나씩 받아가지고 결행을 했죠. 그래서 세관을 통과를 하는데 한 20m 좁은 골목으로, 쇠 난간으로 돼 있는 골목으로 쭉 나가는 거예요, . 공안들이 조금씩 서있어요, . . 선장이 먼저 나가고 내 친구(주: 안혁)가 두 번째 나가고 내가 세 번째로 나가는데 둘은 통과를 하는데 나보고 보자는 거예요, 갑자기. 그래서 내가 꺼내가지고 주는데 그냥 가래, . 딱 통과를 하고 나서 바닷바람이 확 부는데 그 바람의 느낌이 자유의 바람, 정말 나는 자유다, . . 진짜 그 느낌이었어요. 혹시 공안에서 배를 검열을 하기 때문에 엔진실에 들어가 있으래, 그래서 엔진실에 들어갔는데 거기 기름이 차있더라고, . 한 2시간 정도 이제 바다 쪽으로 떠난 다음에 나왔죠. 기름때 목욕을 하고 거기에서 이제 맥주 한 잔 하면서 이제 선장하고. . 선장이 공해상에서 한국 해군한테 우리가 탈북자가 2명이 오니까 받으라고 이제 소스를 친 거죠. 그래서 한국 해군함정이 오는 거예요. . 공해상에서 배에 탔죠. . 그 해군 배 안에 TV가 있더라고요. TV가 있는데 그 TV 안에서 북한 청년 2명이 지금 바다로 오고 있다고,. 그래서 인천항에 내려가지고 바로 이제 승용차에 딱 태워 가지고 서울로 들어갔죠.”
의 견
강철환은 새벽 2시에 압록강을 건넌 후 폼을 잡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강가 바위에 김일성 배지를 올려놓고 돌로 깼다고 한다. 이어서 나타난 창빠이라는 변방 산도시에서 몇 날 묵으면서 무도회장에 나가 춤 구경을 했다고 한다. 이어서 연길로 갔고, 심양으로 갔다가 베이징으로 가서 한국 대사관(당시 대표부)을 찾아갔다고 한다. 택시를 타고 한국 대사관에 가자했더니 북한 대사관 앞으로 갔다고 한다. 이 레퍼토리는 탈북자 박세현도 공유했다. 한국 대사관에 갔더니 한국행을 도와주지는 않고 그 대신 달러를 주면서 어디 가 숨어 있으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 대사관 직원이면 공무원이고, 자기 사비를 그런 용도로 사용할 리가 없다. 천상 대사관에 할당된 예산으로 주어야 하는데 결재 과정 없이 즉석에서 내줄 수는 없을 것이다. 결재 과정을 거치려면 시간이 여러 날 걸리는 것이 당시의 행정이었다.
강철환이 이동한 경로는 ‘혜산-연길-심양-베이징-다렌’이다.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경로는 대략 1만km에 육박한다. 그 엄청난 거리를 공안에 대한 우려 없이 지유자재로 다녔다 한다. 강철환은 대련에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많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북한 사람을 만나면 화교 행세를 하고, 중국 공안을 만나면 한국인 행세를 했다고 한다. 공안이 여권을 보자고 하면 2가지 방법으로 해결하였다고 한다. 여권을 집에 두고 왔다고 하면 공안이 집에 전화를 걸고, 전화를 걸면 중국인 누나가 카버를 했다고 한다. 때로는 공안 앞에서 한국 노래를 부르면 한국인인 줄 알고 놓아주었다고 한다. 중국인 누나는 어떻게 해서 사귄 여성인지는 몰라도 강철환과 안혁을 위해 집에 대기하여 언제 올지도 모를 공안의 신문에 응해주었다고 한다. 어린애도 아니고 중국 공안 앞에서 한국 노래를 불렀다 하니 그 모습도 상상하기 어렵고, 공안이 그 노래를 들어주었다는 모습도 상상이 가지 않는다. 중국 공안은 한국 노래를 하는 강철환을 한국 사람으로 인지하고는 여권 없이 보내주었다고 한다. 중국 공안이 한국 노래를 들으면 그것이 한국 노래인 줄 어찌 알겠는가?
대련항에 나갔더니 북한 선박이 들어왔고, 거기에서 20명의 선원이 내렸는데 강철환이 안내를 맡아 여러 날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 선원들은 북한 고위급 끄나풀이어서 마약과 금괴를 밀수하여 돈을 버는 사람들이라 했다. 돈이 강철환보다 많은 20명의 선원들을 놓고 강철환이 꾸며낸 스토리는 실로 가관이다. 1달러를 가지고 불쌍하게 놀고, 중국돈 25원 하는 벨트가 갖고 싶은데도 살 돈이 없어 강철환이 사주었다고 했다. 그들에게 김일성 배지를 떼라고 했더니 다 떼어버렸고, 그들을 시장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먹을 것을 사주었다고 한다.
뱀 장사하는 깡패들이 칼을 차고 몰려왔는데 그들과 술을 마시며 교제해 의형제를 맺자고 할 정도로 친해졌다고 한다. 드디어 중국인 누나가 한국 선원들을 알고 있었는데 하루는 누나가 선장을 데려와 강철환과 안혁은 한국 기관이 북한으로 보낸 사람들인데 이들이 임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가는 중인데 이들을 도와주면 후공이 있을 것이라고 설득해서 선장의 긍정적인 결심을 얻어냈다고 한다. 한국 기관이 두 사람을 북한에 보내 공작 임무를 수행케 했다면 한국의 국정원이 그들의 조직을 이용하여 귀환시킬 일이지 어떻게 중국인 여성이 감히 한 국가의 공작원을 민간 선장에게 부탁할 수 있는가? 더구나 나이 24세에 불과한 애송이들을 북한에 공작 요원으로 보낼 국가는 없다.
선원증에 대한 강철환의 이야기는 코미디 그 자체다. 선장이 다른 선원의 선원증 2개를 빌려가지고는 강철환과 안혁에 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선원증이 없는 본래의 선원들은 어떻게 공안을 통과해 배에 탈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중국 공안은 선원증만 보여주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통과시켰다고도 한다. 빌린 선원증을 가지고 선장의 뒤를 따라 배에 오르는데 공안이 선장과 안혁에게는 선원증을 보자는 말조차 하지 않았고, 자기에게 보자고 해서 보여주려 하자 갑자기 패스시켰다고도 한다. 그야말로 신 내림의 연속인 것이다.
공해상에서 한국 해군 함정에 인계되었는데 함정 내 TV에서 자기들의 탈북 사실을 생중계하고 있더라고 했다. 나는 국정원에 근무했기 때문에 국정원 생리를 잘 안다. 귀순자들에 대한 조사를 적어도 1주일 이상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귀순 사실을 밝히는 경우는 없다. 만일 해군 함정에서 그런 생중계에 가까운 뉴스를 보았다면 이는 기획 입국일 것이다.
총체적 결론
강철환의 모든 발언은 ‘구라’에 속한다. 발언할 때마다 다르고, 모든 발언이 이치에 어긋난다. 나이 20에 개고기를 먹었더니 1년 만에 키가 10cm 컸다 하고, 가능데마다 보위부 간부들을 돈으로 매수하고, 혜산과 다렌에서는 깡패 두목들과 친구로 사귀고, 누나로 삼은 중국 여인이 한국행 배를 태워주는 데까지의 탈북스토리는 지능 낮은 헛소리들뿐이다. 정상적인 탈북자들은 눈물 젖은 가시밭길을 걷고서야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그런데 강철환은 화려한 조로의 모습으로 한국에 왔다. 그의 탈북스토리는 따로 있다. 그가 들려준 탈북스토리는 창작의 고통 없이 마구 지어낸 싸구려 거짓말들이다.
2021.8.11. 지만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