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9.15. 강철환에 물은 질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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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9-17 00:17 조회4,65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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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 강철환에 대한 신문사항
신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쉽게 공유되기 어려운 다소 생소한 사안이기 때문에, 이후 피고인이 신문하는 내용에 대해, 재판장님, 검사님, 변호사님 그리고 증인께서, 혹시 피고인이 엉뚱한 질문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실까 염려됩니다. 그래서 먼저 배경을 설명드리는 것이 피고인 권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간단히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신문사항의 첨부1쪽 사진 두 컷은 질서가 없었던 1980년 당시 전남도청 앞에서 질서를 갖춘 상태에서 촬영된 단체사진이고, 집합한 사람들은 ‘사망자명단’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사진은 한 개의 장면을 다른 각도, 다른 시각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영상 분석가 필명 노숙자담요는 이 두 개의 사진 속 인물들에 대해 붉은색과 주황색을 표시했습니다. 붉은색은 현재 북한에 있는 인물이고, 주황색은 현재 남한에 와서 TV 등에 출연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는 탈북자들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사진에는 남녀노소가 혼합돼 있습니다.
피고인은 이 사진을 북한이 촬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당시의 광주현장에 대한 촬영 주권이 북한에 있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피고인에게는 광주현장을 촬영한 42분 분량의 동영상(광주 비디오)이 확보돼 있는데, 거기에는 1980년 조선기록영화소가 광주상황을 촬영해 편집했다는 붉은 자막이 있습니다. 따라서 피고인은 첨부 1쪽 두 장의 사진이 당시 우리나라 정부군이 무고한 시민들을 살해했다는 것을 선전 선동하기 위해 연출한 무대사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두 장의 사진에는 언론 등에서 유명해진 탈북자들 50여 명의 얼굴이 있고, 그 얼굴 하나하나에 대해 영상분석이 제시돼 있습니다. 이 50명 중 12명이 이 사건 고소자들입니다.
첨부의 2~3쪽 사진들을 잠시 보여드리겠습니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5시, 광주를 지키던 계엄군이 수십만 시위대에 포위됐다가 구사일생으로 광주시 밖으로 도망갔습니다. 그 후 광주시민들은 무법천지가 된 시내에 나가지 못하고 대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총알이 마구 시내를 날아다닌다는 소문에 광주시민들은 어린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쪽의 위 사진을 보시면 남녀노소들이 아이를 업고 안고 손잡고 나와 질서 있는 모습으로 집단사진들을 찍었습니다. 이들 질서 있는 북한 집단은 첨부 2-3쪽에 나타나 있듯이 이른바 시체 장사에도 동원되었습니다. 첨부 3쪽 아래 사진을 보면 3살 정도의 아이가 있습니다. 노숙자담요는 그 아이가 장성택의 딸 장금송이고, 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을 탈북자 강명도라고 판독하였습니다. 장성택은 물론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 김정일의 첫 부인 홍일천, 김일성의 사촌여동생 김정숙 등 이른바 로열패밀리는 물론 당시 북한의 2인자라는 대남사업부장 김중린도 현역 부장 신분으로 온 것으로 분석돼 있습니다. 북한식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광주에서 실증된 것입니다.
그러면 북한은 어떻게 적지의 깊숙한 후방에 이렇게 많은 어린이, 아녀자들을 수백 명씩 투입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유병현 회고록에는 이 때 합참의장이 해군총장에 명령하여 전남해안 해안 감시 부대를 전북 변산반도 이북으로 이동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일반 여객선으로 대량 수송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군 지휘부가 이렇게 이상한 이적 행위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6.25발발 직전에도 수상한 지휘가 있었습니다. 군번 1번 이형근 대장 회고록에는 ‘10대 불가사의’라는 제목으로 군을 간첩이 지휘했다는 의혹들이 제시돼 있습니다.
이러한 어린아이들과 남녀노소를 짜임새 있게 구성한 이유는 그들을 가족 단위의 광주시민으로 보이게 하여, 국군을 살인집단으로 세계만방에 모략하기 위한 사진을 촬영하고 600명의 특수군의 사전 정찰활동을 위장시키기 위한 들러리로 삼기위한 것이었다고 피고인은 생각합니다.
4-5쪽 사진은 살인기계로 훈련됐다는 북한특수군의 일단입니다. 6쪽은 광주현장사진 한 장 속에 있는 29명이 최근 김정은과 함께 촬영된 한 장의 사진 속에 다 들어 있다는 것이 노숙자담요의 분석입니다.
이상은 피고인이 왜, 증인을 포함한 50여 명의 탈북자들을 광수명단으로 발표했느냐에 대한 공익적 동기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증인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 노숙자담요는 첨부 7쪽에 붉은 원으로 표시한 인물을 증인이라고 판독하였는데, 증인은 1980년 당시 12살로 요덕수용소에 수감돼 있었기 때문에 광주에 올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2. 증인은 또 12살짜리 특수군이 어디 있느냐는 발언을 종종 하신 것으로 아는데요?
3. 증인은 북한이 5.18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나요?
4. 증인은 북한의 게릴라전에 위와 같이 남녀노소가 기본 편제조직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5. 증인은 탈북자들 중 광주에 파견됐던 사람들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6. 증인은 영상을 분석하는 학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나요?
7. 기자이기도 한 증인은 중국에서 은행거래도 얼굴로 하고, 비행기, 버스. 지하철도 얼굴로 결재하고, 식당에서 밥값도 얼굴로 결제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해보셨는가요? 증인은 영상분석이라는 과학의 신뢰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8. (첨부 8쪽)노숙자 담요는 사진 속 얼굴과 증인의 얼굴을 여러 페이지에 상세하게 분석하였는데 그 일부를 요약적으로 발췌한 첨부 8-9쪽 사진을 제시합니다. 이 사진에서 좌측 얼굴은 광주현장의 얼굴이고, 우측은 증인이 남한에 왔을 때의 사진입니다. 노숙자담요는 좌우측 얼굴의 발제선이 일치하고 머리 스타일이 일치한다고 지적하였는데 이 2 가지에 대해서는 동의하시는가요?
9. (첨부 8쪽) 좌우측 사진에서, 미간의 형상이 일치하고, 오른뺨에 나 있는 2개의 점이 일치하고, 턱선이 일치한다고 적시하였는데 어떤가요?
10. (첨부 9쪽)머리 스타일, 이마 면적, 얼굴 윤곽, 작은 입과 작은 턱, 위 아래 입술 표정과 형상이 모두 일치한다고 했는데 어떤가요?
11. (첨부 9쪽) 최근에는 영상기술이 발달해서 손가락 지문보다는 얼굴 지문이 더 정확하다는 보도들이 많이 나옵니다. 가장 정확한 비교수단이 얼굴의 각 부위와 부위 사이의 길이와 부위 사이의 각도가 일치하면 두 개의 얼굴은 한 사람이라는 것이 언론에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이른바 기하학적 분석이라는 것인데요, 더러의 매체들은 얼굴에서 3개의 점을 이은 삼각형이 일치만 해도 두 얼굴은 90% 이상 한 사람의 얼굴이라고 보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첨부 9쪽 사진에서 노숙자담요는 얼굴의 9개 포인트를 연결한 결과 양쪽 얼굴의 연결도면이 정확히 일치한다고 분석하였는데, 증인은 이 기하학적 도면이 얼굴 분석 과정의 필수라는 점에 동의하시나요?
12. 증인은 1968년생이고, 1977.8부터 87.2.16.까지 요덕수용소 생활을 하였다 하였지요? 퇴소한 날은 있는데 입소한 날이 없어서요. 정확히 며칠인가요? 트럭에는 밖을 볼 수 없도록 포장이 쳐져 있었나요? 끌려갈 때 수갑이나 포승줄이 채워졌는가요? 증인과 여동생 미호에게도 포승줄이 채워져 있었나요?
13. (증25, 86) 증인은 2017.1.23. 탈탈탈 22회 1부 방송에 출연하여 요덕수용소 이력에 대해 “딱 9년 8개월. . 9살 들어오고 19살 때 나왔다”고 했지요? 1977년 8월부터 9년 8개월을 보태면 87년 4월이 되는데, 출소일이 87년 2월이라는 말인가요?
14. (증33, 33쪽 하단) 증인은 위의 2017년 탈탈탈에서 1977.8.에 요덕수용소로 끌려갔다 하였는데 2020.2.20. 공병호tv에서는 77년 4월, 할아버지가 행불이 되었고, 그 한 달 후인 5월경에 보위부원들이 들이닥쳤다고 했습니다. 앞에서는 요덕으로 끌려간 시기가 77년 8월이라 했고, 여기에서는 77년 5월이라 했는데 어떤가요? 8월인가요 5월인가요?
15. 증인은 평양 아파트에서 요덕에 동행한 가족은 할머니, 아버지, 여동생 그리고 증인이었고, 이 4식구가 다 트럭에 실려 갔고, 어머니는 제외되었다고 하였지요? 어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났는가요, 북한에서 태어났는가요?
16.(증25,80) 20171.23. 탈탈탈)에서 증인은, 할아버지가 반역죄 혐의로 가장 혹독한 정치범 수용소로 납치돼 갔고, 그에 따른 연좌제로 한 아파트에 살던 4식구 모두 - 즉 증인, 여동생 미호, 아버지, 할머니가 수용소로 끌려갔고, 할아버지의 직계자손 6남매 중 2명의 삼촌, 2명의 고모, 이렇게 4명은 빼놓고, 오직 아버지와 막내삼촌만 연좌제로 수용소에 끌려갔고, 어머니도 제외되었다 하였지요?
17. 어머니가 제외된 것은 어머니가 일본에서 김일성의 어려웠던 처지를 도와주었던 혁명열사 가문의 딸이라 당에 의해 강제이혼 당했기 때문에 수용소로 동행하고 싶어도 동행할 수 없었다 했지요? 그렇다면 할아버지의 직계 자손 4남매는 무슨 이유로 연좌제에서 제외되었는가요?
18. (증40) 증인은 [수용소의 노래] 46쪽에서, 막내삼촌이 증인보다 하루 먼저 요덕에 들어와 있다가 그 다음날 증인을 포함한 4인 가족을 마중 나와서 집으로 안내해 갔다고 하였지요? 그래서 수용소에서는 5명의 식구가 한 집에 살았다 했나요?
19. 평양 아파트에는 증인의 남매,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이렇게 5명만 함께 생활했고, 어머니는 별거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됐는데, 부모님은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별거하게 되었는가요?
20. 부모님이 당에 의해 강제 이혼을 당한 시기는 언제였나요?
21. (증40, 수용소의 노래 24-25). 증인의 조부모는 일본에서 살다가 1961년에 만경봉호를 타고 6남매를 데리고 위대한 수령님 곁으로 왔다 하였지요? 할아버지가 6남매 이외에 며느리까지 데려왔다는 증인의 말은 없었는데요. 어머니는 언제 어떤 식으로 일본에서 북한으로 왔는가요?
22. 어머니는 북한에서 증인의 아버지와 결혼하여 증인과 증인의 여동생을 1968년과 69년에 출산하였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부모님은 1961년과 1967년 사이에 북한에서 결혼을 하였다는 것인데, 부모님의 결혼 시기는 언제인가요? 결혼 전과 결혼 후 어머니와 아버지의 직책은 각 무엇이었나요?
23. (증25, 80) 2017.1.23. 탈탈탈 22회에서 증인은 증인이 살던 아파트에 대해 “독일에서 지어준 아파트예요.. . 독일식으로 짓다보니까 되게 천장이 높고 집이 되게 좋아요, 방이 4개가 있고. .” 이렇게 소개했지요?
24. (증40, 21) 그런데 그보다 15년 전인 2003년에 증인이 저술한 [수용소의 노래] 21쪽에서는 “이 아파트는 해방전쟁(6.25사변) 후 소련사람들이 건축한 것, .”이라고 소개했는데 왜 15년 사이로 ‘소련사람’에서 ‘독일국가’로 말이 바뀌었는가요?
25. (증40, 25) 증인이 2003년에 저술한 [수용소의 노래] 제25쪽에서 “삼촌 강화정은 평양 철도성 기자이며, 강복남은 평양의과대학 의사였다. 막내삼촌은 평양 리과대학을 졸업하고 혁명소조로 검덕산에 나가 있었다. 고모 강신자는 일본에서 약학대학을 나와 약사로 일하고 있었고, 막내고모 강경희역시 평양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로 있었기 때문에, 우리 집안은 명실상부한 모범집안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삼촌이 3명, 고모가 2명, 아버지까지 보태면 조부모님은 4남 2녀를 두었다는 뜻인데요. 아버지는 몇 번째 아들이고, 이름과 직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피고인의 설명을 아직 접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몇째 아들이고, 소속과 직책이 무엇이었는가요?
26. (증42) 증인의 대표적인 저작물은 [수용소의 노래/평양의 어항]이지요? 이로 인해 증인은 2005년 6월 당시 부시 대통령을 40분 동안 면담하였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맞는가요?
27. 국내외로 각광을 받았던 이 책의 부제는 ‘평양의 어항’이고, 이 어항이 [수용소의 노래]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통했지요?
28. 지금 현재 증인이 운영하는 ‘강철환tv’를 열면 증인의 첫 방송멘트가 “평양의 어항 강철환tv를 시작하겠습니다” 이것이지요? 이만큼 증인과 ‘평양의 어항’은 자타에 의해 동일시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평양의 어항’에 모순이 들어 있다면, 증인에 대한 신뢰도 훼손되는 것이겠지요?
29. (증41) 2002.12.13. RFA 인터뷰 내용에 있는 기재입니다. “'평양의 어항'이라는 책인데요. 이 책의 제목이 된 동기는 제가 어릴 때 금붕어 등을 키우기를 좋아했습니다. 77년도 당시에 평양시에서는 어린이들이 금붕어 등을 키우는 것이 유행되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우리 가족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게 되면서 저는 영문도 모르고 금붕어 어항을 가지고 가겠다고 떼를 썼습니다.보위부 요원들이 저희 가족을 잡아가면서 하도 떼를 쓰니까 금붕어를 가지고 가게 했습니다. 20마리정도요. 그러나 수용소에 끌려간 후에 금붕어가 한 마리 한 마리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3마리 남았는데 그 금붕어가 수용소에 겨울이 찾아오면서 저희 거처가 영하로 내려가자 그 어항이 얼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금붕어는 다 죽었으며 그 이후 바깥세상과 결렬이 시작되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 됐습니다.”
<1> <2> <3> 쿠피
증인은 북에서 관상용 물고기를 키우는 것이 신분을 가리킨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특히 쿠피를 키웠다며 강조한 적도 있습니다. 20마리의 금붕어가 살려면 어항은 위 사진에서 <2>번 어항이 아니라 <1>번 수조여야 하고, 금붕어의 생명은 물갈이에 있으며 20마리를 수용하려면 최소한 물이 10리터 이상 되는 어항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증인이 말하는 어항은 <1>번식 수조인가요 아니면 <2>번식의 대형 어항인가요? 얼마나 큰 어항이었나요?
증인은 수용소에 5월에 입소하였다고도 했고, 8월에 입소했다고도 했는데, 설사 8월에 입소했다고 해도 방에 있는 어항이 얼었다면 12월은 넘었을 터인데 그렇다면 증인은 그 고되다는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수용소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금붕어 먹이를 어떻게 구했고, 물은 어떻게 자주 갈아주었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30. (증40, 26-28) 2002.12.13. RFA 인터뷰 이후 6개월 만인 2003.5.에 발행된 [수용소의 노래] 26~28쪽에는 ”집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어항은 산산조각이 나 금붕어들이 바닥에 나둥그러져 펄떡대고 있었고, 다른 가재도구들도 뒤엉켜 널려 있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집안은 험상궂게 생긴 침입자들로 꽉차 있었다(26쪽). . 우리는(주: 강철환 9살, 여동생 미호 8살) 죽은 금붕어를 가지고 놀기도 하였고, 침대에 올라가 뛰며 구르기도 하였다.“ 이렇게 기재돼 있습니다. 보위부원들이 어항들을 산산조각내서 금붕어가 현장에서 다 즉사했다고 했는데요. 6개월 전에는 금붕어와 어항이 보존되었다 발언했고, 6개월 후에는 보위부원들에 의해서 어항도 박살나고, 금붕어가 바닥에 떨어져 다 죽었다 했는데, 어느 것이 사실인가요?
31. (증25, 82~83) 그로부터 15년 후인 2017.1.23. 탈탈탈 22회에서 증인은 “우리집에 내 어항이 5개인가 있었어요 . . 애들한테 다 나눠주고, 이제 내가 제일 아끼던 고기들을 다 골라가지고 어항에 담았어요, 하나에다가. 이거는 내가 가지고 간다 해가지고, 그래서 그거를 담아가지고 이제 그 준비를 하니까 그 보위부 요원이 하도 어이가 없으니까 그거 놓으라고, 놓고 가라고. 그러니까 내가 막 그 보위부 요원한테 막 욕, 같이 막 싸움질하면서 막 가져가겠다고 막 떼를 썼거든요, 거기에서. 떼를 하도 쓰니까 그 보위부 요원이 가져가라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거 금붕어 어항을 이제 아예 통째로 가져왔어요, 그거를 수용소까지.”이런 발언을 했습니다. 5개의 어항에 있는 물고기들 중 4개 어항 분은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고, 1개 어항에 증인이 아끼는 금붕어 20마리를 넣어가지고 수용소로 가져갔다는 것인데, 가족들을 체포하러 온 보위부 요원들 앞에서, 벌벌 떨기에 바쁜 시각에 여러 명의 친구들에게 물고기를 나누어주고, 증인이 좋아하는 물고기 20마리를 한 어항에 담아 보위부요원들에게 수용소로 가져가겠다고 떼를 썼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데요.
32. 20마리를 수용할 수 있는 어항이라면 부피가 상당히 컸을 텐데요? 9세의 증인이 혼자 들었나요, 아니면 증인의 아버지와 할머니가 거들었나요? 어른들은 포승줄에 묶여있지 않았는가요? 낡은 트럭이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털털거리며 달리는 트럭의 적재함이라면 사람도 퉁퉁 튀어 올라 몸을 가누기 어려웠을 텐데, 10시간 동안 어항을 깨트리지도 않고, 물도 쏟아지지 않게 하고, 출렁이는 물에 금붕어가 밖으로 튀어나오지도 않게 했다는 것인가요? 보위부원들 입장에 서보더라도, 어항은 깨질 것이고, 물도 쏟아질 것이고, 비린내 나는 물고기도 트럭 바닥에 나뒹굴 것이 뻔할 것으로 예측되었을 텐데 정말로 보위부원들이 어항을 허락했다는 것인가요? 그리고 어항은, 생명과 싸워야 하는 수용소에는 어울릴 수 없는 사치품인데, 보위부가 역적의 자식에게 인자하게도 그걸 허락했다는 것인가요?
33. 할아버지는 무슨 혐의로 숙청되었는가요?
34. (증25, 84) 2017.1.23. 탈탈탈 방송에서 증인은 할아버지가 동료들과 술 한 잔 하시면서 실수로 김일성-김정일 세습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한 것이 이유였다고 했지요?
35. (증33, 34~35쪽) 그런데 2020.2.20. 공병호tv에서는 할아버지가 조총련 의장에 출마한 한덕수를 반대했기 때문에 제1급 수용소인 평남 승호리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고 했는데요? 앞에서는 김일성 세습을 술김에 비판했다는 이유로 처벌되었다 하고, 여기에서는 1955년 일본 조총련의장에 출마하는 한덕수의 반대편에 섰었다는 이유로 처벌받았다 했는데, 어느 것이 사실인가요? ‘나무위키’를 보니, 승호리 수용소라는 것은 없고, 승호수용소 또는 승호교화소로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평안남도가 아니라 평양직할시 승호구역에 있다 하는데 어떤가요?
36. 한덕수는 1955년부터 2001년 사망할 때까지 줄곧 조총련 의장을 했습니다. 증인의 말대로라면 할아버지는 1955년에 한덕수에 반대했다가 6년 후인 1961년에 만경봉호를 타고 북으로 와서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까지 16년 동안 극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북으로 온지 16년 만인 1977년에 22년 전 일본에서 한덕수의 반대편에 섰었다는 것을 이유로 1급 수용소에 갔다는 것은 이해가 잘 안 되는 데요?
37. 증인은 심화조를 아시는가요? 북한에서 주요 인물들에 대한 과거를 어린 시절로부터 샅샅이 뒤진 사례는 김정일이 북한주민 300만 명을 굶어 죽인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 위해 1997-2000년에 전개했던 숙청작업 심화조 사업뿐인 줄로 아는데요? 증인의 말대로라면 1977년에도 비슷한 숙청작업이 있었다는 뜻인데, 어떤가요?
38. (증25,80) 증인이 2003에 저술한 [수용소의 노래] 24쪽에는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설득해 1961년에 만경봉호를 타고 북에 왔다고 했고, 2017.1.23. 탈탈탈 22회 1부에서 증인은 할머니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국회의원)을 15년 하셨고, 할아버지는 평양시 상업관리소 부사장을 하셨다고 했지요?
39. (증33의 33쪽) 증인은 20202.20. 공병호tv의 2~4분 사이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할머니 이름은 성옥선이며 독학으로 공산주의를 학습한 골수 공산주의자다. 조총련 창립 멤버였고, 조총련 교토 지구 여맹위원장을 했다. 김일성으로부터 노력훈장과 2급 국기훈장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조총련 교토지구 상공회장을 했다. 북한에 많은 돈을 바쳤다. 두 분은 7남매를 거느리고 1959년 재일교포 북송작전에 의해 만경봉호를 타고 청진항에 도착했다. 조부모는 북한에 와서 대우를 받았다. 할아버지는 평양시 상업관리소 부책임자가 되었고, 할머니는 북조선 전체의 여맹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 때 여맹 위원장은 김일성의 부인이 하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를 따라 여맹위원회에 나갔다가 김일성 부인을 보았고, 김일성 부인은 나더러 똘똘하고 귀엽게 생겼다는 말을 했다.” 맞지요?
40. 위키 백과를 보면 조총련은 1955년 5월 25일에 결성되었고, 초대의장은 한덕수였는데 그는 46년 동안 장기 집권을 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증인의 말에 의하면 할머니는 조총련 창립 멤버에다 교토 지구 여맹위원장까지 했고, 할아버지는 조총련 교토지구 상공회장까지 했다면, 조부모는 다 같이 한덕수의 신임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인데, 선거과정에서 할아버지가 한덕수의 반대편에 서서 한덕수와 대적했다면 어떻게 한덕수 휘하에서 상공회장을 할 수 있었는가요?
41. 2003년 [수용소의 노래]에서는 조부모 일가족이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에 간 해가 1961년이라 했고, 2020년 공병호tv에서는 1959년이라 했습니다. 왜 다른가요? 어느 해가 맞는가요? 앞에서는 조부모 자식이 6남매라 했고, 여기에서는 7남매라 했는데 어느 것이 맞나요?
42. 2017.1.23. 탈탈탈에서는 할머니가 15년 동안 인민위원(국회의원)을 했다고 했습니다. 인민위원은 몇 년부터 하셨는가요? 북에 도착한 1961년부터 곧장 시작해서 15년 동안 국회의원을 했다면 1977년이 되는데, 요덕에 수용되기 직전까지 인민위원을 하셨는가요?
43. 반면 증인은 2020.2.20. 공병호tv에서 할머니가 여맹부위원장을 했다고 했습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하셨는가요? 인민위원과 여맹부위원장은 겸직될 수 있었는가요?
44. 증인이 몇 살 때, 김일성 부인 김성애를 만났는가요?
45. 위키백과사전을 보면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가 여맹 중앙위 위원장을 했던 시기는 1971~98년이었습니다. 증인은 1968년생입니다. 김성애가 여맹위원장이 된 1971년에 증인은 3살이었습니다. 증인은 9살에 요덕에 갔습니다. 여맹 부위원장인 할머니가 여맹위원장 김성애와 접촉을 했다면 증인의 나이 3~9살 사이였습니다. 몇 살 때, 김성애를 만났는가요?
46. 여맹부위원장이 하늘과도 같은 김성애를 만나는데 어린아이를 대동하고 만났다는 것인가요? 그랬다면 비공식적인 자리였을 터인데 어떤 자리였는가요?
47. (증40, 45) 2003년 [수용소의 노래] 45쪽에는 평양 아파트에서 요덕 수용소까지 400여 리의 길을 장장 10시간 만에 달려왔다고 했지요? 400리는 160km인데 그 거리를 10시간에 걸쳐 트럭으로 달려왔다면 그 트럭은 1시간에 16km의 속도로 운행했다는 말인가요?
48. (증25, 84쪽) 2017.1.23 탈탈탈 프로에서는 평양에서 요덕까지 5시간 반 걸린 것 같다고 했는데요? 시속 29km로 달렸다는 뜻이네요? 2003년의 기억과 2017년의 기억이 2배 차이로 다른데 왜 그런가요?
49. (증40, 28) 2003년 [수용소의 노래] 제28쪽에는 이런 기재가 있습니다. “여덟 살배기 여동생 미호는 울고 있는 할머니 옷깃을 잡고 겁에 질려 떨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얼른 달려왔다. . . 철부지 미호와 나는 . . 어른들의 근심은 아랑곳없이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죽은 금붕어를 가지고 놀기도 하였고, 침대에 올라가 구르고 뛰기도 하였다. . 그러다가 어둡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답답하고 지겨워 미호와 나는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고 할머니를 졸랐다”
여기에서 보면 증인은 9살 때, 가정에 어떤 일이 닥쳤는지 모르고 죽은 금붕어를 가지고 놀기도 하고 침대에서 껑충껑충 뛰고 구르다 밖으로 나가 놀았다고 했을 만큼 철부지였는데, 2017.1.23.(증25 ,84)에 증인이 한 말에는 “도착한 곳의 간판을 보니까 함경남도 요덕군 구읍리라고 돼 있고, 수용소 간판은 조선인민경비대 제2915군부대, 그러니까 2915를 안 돼가지고 15관리소라고 불러요, . . 1반 마을에서 10반 마을까지 가는 거리가 한 40분 정도 걸렸어요”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9살짜리 아이가 160km를 사이에 두고 출발 직전에는 천방지축 철부지였는데 도착해서는 정보원도 기억하기 어려운 간판 내용, 부대 번호, 1반에서 10반까지 가는 데 걸린 시간 등을 관찰했고, 그것들을 외워두었다가, 2017년 즉 40년 후에 기록했다는 것인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가요?
50. (증25, 89쪽) 증인은 증인의 가족이 출소된 이유가 증인의 일본 친척들이 돈 많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 했지요? (증25, 91) 요덕에서 나온 증인 가족은 요덕군 농촌 송도리로 강제 입주됐는데 다른 삼촌들이 몰려와 군청 소재지로 옮겨주었다 하였지요?
51. (증25, 92-93) 군청 소재지에 와서는 증인의 가족이 돈을 막 뿌리니까, 당 간부들이 자주 찾아와 가문의 입지가 대폭 상승하였다고 했지요?
52. (증25, 92-93) 증인은 몸보신 하느라 매월 개 한 마리씩을 잡아먹어서 20세에서 21세 사이, 1년 동안에 키가 160cm에서 170cm 이상으로 부쩍 자랐다고 했지요?
53. (증43 ) 2016.8.4.자 헬스조선, 기사에는 ‘성장판 닫히는 시기는 여자 아이가 15세경, 남자 아이가 17세경’이라 했는데요. 증인은 수용소에서 10세부터 20세까지 10년 동안 영양실조 환경에서 중노동을 했는데도 키가 160을 넘었고, 출소 후 20세가 되어서 개고기를 1년 먹고, 1년 만에 10cm 이상 자라 170cm이 넘었다고 합니다. 과학적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데 어떤가요?
54. (증25, 93-94) 증인은 요덕군‘ 군청에서 ’편의봉사위원회’의 ‘자재지도원으로 스카웃되어 전국을 다 돌아다녔다고 했지요?
55. 다른 탈북자들의 말을 들어 보아도, 요덕군의 자재지도원이면 요덕군 안에서만 자유자재로 여행 다닐 수 있는 것이지, 전국을 자유자재로 다닐 수는 없다 하던데 어떤가요?
56. (증25, 96-99) 증인은 요덕군 소재지에서 중앙당 간부들의 자식들, 해외유학 했던 친구들을 모아 반체제 그룹을 형성했는데 그 악명이 평양에까지 소문이 나있었다고 했지요?
57. (증25, 100) 반체제 그룹 중에 한 친구가 보위부에 밀고를 했는데, 보위부 요원이 증인을 부르더니 처벌하기는커녕 아이들 결혼자금이 아쉬워 증인을 봐주었고, 형님동생 하고 지내다가 사태가 위험해지자 도망가라고 해서 도망쳤다 하였지요?
58 (증25, 106) 가난한 보위부 간부에게 돈 자랑을 하면서 '최고의 수준으로 통제되는 국경연선지역 여행증'을 열댓 개를 발부받았다 하였지요?
59. (증25, 105~108), 어느 날 보위부 간부가 증인을 불러가지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너 잡히면 나와의 관계를 불지 말라”는 말을 하기에 증인은 절대로 불지 않겠다고 대답한 후 여행증을 떼어달라 했더니, “너 도망하려는 것 아니겠지?” 하면서 여행증을 여러 장 주더라 했지요? 도망갈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면서도 여행증을 여러 장 떼어주었다는 것인가요? 정확히 몇 장이었나요?
60. 여행증을 떼어준다는 말과 여행증 양식을 주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텐데 그 여행증 양식은 어떻게 생겼나요? 국경연선지대로 가는 여행증 양식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무슨 색깔의 선, 몇 개가 어떤 방식으로 쳐져 있나요? 여행증을 떼어주었다 하셨는데 여행증 양식에 무엇무엇을 기재하고 무슨 도장을 찍어 확인해 주나요? 여행자 이름, 목적지, 여행목적이 기재돼야 하고, 마지막으로 중앙당 직인이 찍혀야 하는 것인데, 한낱 군당의 한 보위부 간부가 중앙당 직인을 찍어주었다는 것인가요?
61. 기차표, 비행기 표에도 일련번호가 기재되고, 권총에도 시리얼 넘버가 있어야 권총의 행방을 추적할 수 있듯이, 국경연선지대로 가는 여행증에도 여행증 양식에 일련번호가 인쇄돼 있을 텐데 그것을 지방보위부 간부가 마구 내주었다는 것인가요? 이는 가능하지도 않지만 자살행위일 텐데요?
62. (증25, 106) 친구들한테 쫙~ 연락을 해가지고 열댓 명이 압록강 가에 오기로 했는데 막상 온 사람은 안혁 뿐이라 하였지요?
63. 통제가 가장 엄격한 국경연선지대로 가는 여행증을 열댓 개씩이나 무더기로 얻었다는 것인가요?
64. (증25, 106) 증인이 알아냈다는 비밀번호는 어떤 비밀번호이며 어떻게 사용했는가요?
65. (증25, 106) 증인은 증인의 공민증을 가지고 왔고, 안혁은 남의 이름과 남의 공민증을 가지고 오다가 여러 차례 걸렸는데, 걸릴 때마다 담배 한 목때기씩 던져주고 뇌물을 뿌리면서 혜산으로 갔다고 했지요? 다른 사람의 공민증을 얻었다면 그 다른 사람은 북에서 살기가 어려워, 건네주지 않을 텐데, 훔쳤다는 것인가요?
66. (증25, 106) 증인은 열댓 명 중 증인과 안혁만 제외하고 모두가 다 잡혔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보위부 당국은 증인과 안혁에 대해서도 곧장 추격을 했을 텐데 이후 증인이 도강 이전에 취했던 여유만만한 태도를 보면 보위부의 추격을 의식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67. (증25, 107)증인은 혜산에 ‘좁쌀’이라는 별명을 가진 깡패두목이 친구의 친구라 했는데 좁쌀이 안혁의 친구였다는 말인가요? 요덕에 있는 친구가 어떻게 혜산에서 활동하는 조폭두목을 친구로 만들었다는 것인가요? 20대 초반의 조폭두목이 존재했다는 것인가요?
68. (증25, 108) 보위부의 추격은 아랑곳하지 않고 증인은 혜산에서 여유롭게 깡패들에게 술도 사고 돈도 주고 하면서 사귀었다는 것인가요? 증인이 구워삶은 그 깡패들은 국경 경비대와 증인 사이를 연결해 주는 것으로 임무를 끝냈고, 증인은 또 경비대와 직접 사귀면서 어느 날 경비대 교대시간이 새벽 2시라는 것을 알아냈고, 근무 중인 경비대에게 술을 왕창 먹여놓고 그들이 곯아떨어진 새벽 2시에 깨가지고 강을 건넜다 하였지요? 소설처럼 여겨지는데 이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69. 요덕군청 소재지에서 혜산까지 이동한 과정을 교통편과 보위부 검문 그리고 걸린 시간 위주로 설명해 줄 수 있는가요?
70. 첨부 10쪽의 지도에서 보듯이 요덕은 함흥시의 서남쪽으로 2개 군을 타넘어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요덕과 길주 간의 거리는 길주에서 혜산 간의 거리의 2배 정도 됩니다. 길주-혜산 간의 직선거리가 150km 라면 요덕-길주 간의 거리는 300km 정도로 보이는데요. 요덕에서 길주까지는 어떻게 갔으며 얼마 정도 걸렸는가요? 갔던 과정을 설명해 줄 수 있는가요? 안혁은 어디에서 만나 함께 갔는가요?
71. 길주에서 혜산까지는 어떻게 갔는가요? 가는 도중에 보위부 검문이 몇 번 있었고, 어떻게 대처했는가요? 안혁은 남의 공민증을 가지고 탔다 했는데 남의 공민증을 가지고 어떻게 수많은 검문을 통과했는지 설명하실 수 있는가요?
72. 몇 년 몇 월 며칠에 길주에서 차를 탔고, 며칠 만에 혜산청년역 직전에서 뛰어내렸나요? 혜산청년역 바로 직전의 역 이름이 정확히 무엇인가요?
73. (첨부 11쪽) 길주-혜산간 철로 이름이 무엇인가요? 역은 몇 개가 있는가요? 피고인이 검색한 바로는 길주-혜산을 잇는 철로는 백두산청년선이고, 22개 역이 있고, 종착역인 혜산청년역 직전의 역은 위연청년역이던데 맞는가요?
74. 압록강을 건넌 연월일을 기억하나요? 어떻게 건넜는지, 중국의 어디로 건너갔는지 기억하나요?
75. (증25, 108) 혜산에서 강을 건넌 후 증인은 안혁과 함께 김일성 배지를 바위 위에 올려놓고 돌로 깼다고 했지요? 도망가는 처지에 상당히 여유가 있어 보이는데 당시 중국 경비병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는가요?
76. (증25, 109) 강을 건너자마자 중국의 창바이라는 도시에 도착해, 밤 시간에 무도회장에 가서 춤추는 것도 구경을 하였다 하셨네요? 경험을 쌓기 위해 갔었다 하였지요? 누가 안내했나요? 탈북자들은 모두 중국공안을 가장 무섭게 여기는데, 증인은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경험 삼아” 무도회장을 찾아갔다 합니다. 현실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77. (증25, 109) 밤 1시에 혜산에서 연길까지 가는 트럭에 몰래 올라탔다고 하셨는데 그 트럭이 북한의 혜산에서 연길로 가는 트럭이었는가요? 북한 트럭이 중국을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는가요? 연길에 가는 트럭인지 어떻게 알고 두 사람씩이나 몰래 탔는가요?
78. 창바이에서 연길까지 가는데 몇 시간 걸렸나요? 도로는 포장이 돼 있던가요?
79. (증25, 109) 연길(엔지)에 아는 분들이 있어서 2개월 정도 있다가 심양으로 가서 좀 있다가 베이징으로 갔다 하였지요? 1987년에 출소하여 요덕군에서 4-5년 동안 거주했던 증인에게 연길에 사는 지인이 중국공안의 위험을 따돌리면서 2개월씩이나 지원해 주었다는 것인가요? 증인은 중국에서의 이동을 아주 쉽게 기술하셨는데 연길에서 심양까지는 직선거리로 500km가 넘어 보입니다. 교통수단은 무엇이고, 중국공안에 대한 대비는 어떻게 했는가요?
80. (증25, 110-111) 첨부 12쪽 지도를 보면 심양에서 베이징까지의 거리는 직선거리만으로도 1,200km가 넘어 보이는데 어떻게 이동했고, 중국공안이라는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81. 베이징에 있는 한국 대표부에 갔는데 한국 대표부는 한국행을 도와줄 수는 없으니 숨어 있으라 하면서 돈을 좀 주었다고 했지요?
82. 한국 대표부 직원들은 다 공무원들이라 여러 날의 결재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증인에게 주머니에서 꺼내 주듯 그런 돈을 줄 수가 없는데 어떤가요?
83.(증25, 112) 첨부 12쪽을 보면 베이징에서 다렌시로 가려면 줄잡아 2,000km는 되는 듯한데 어떻게 갔는지 가는 과정을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84. 다렌시에서 누나 같은 동방의 의인을 사귀게 되었다 했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85. (증25, 114) 다렌시에 6개월 있는 동안 인권운동도 하고 한국인 행세를 하면서 시절좋게 지냈는데, 중국공안에 잡힐 때마다 한국노래를 부르면 한국인인 줄 알고 가라했다 했지요? 또는 중국공안이 여권을 요구하면 집에 두고 왔다 했고, 공안이 집에 전화를 하면 누나가 다 해결해 주었다 했지요? 그래서 신변의 절반은 보장을 받았다 했지요?
86. (증25, 115) 흑룡강성에서 뱀 장사를 하는 깡패들이 누나집으로 몰려왔는데 그 깡패 두목과 술 먹고 의형제 맺었다고 했지요? 한 마디로 시절이 좋았는데 갑자기 북한의 인권 실태를 폭로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행을 결심했다 하였지요?
87. (증25,115-117) 누나가 한국 선장들을 많이 아는데, 누나가 설명하기를 이 두 사람은 한국의 중요한 기관에서 북한에 파견한 사람으로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니 도와주면 큰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소개했고, 한국노래도 부르고 하니까, 선장이 수용했다고 했지요? 마치 같은 탈북자 박수현의 승선 스토리와 매우 흡사한데 두 분은 서로 알고 계시는 사이인가요?
88. 다른 선원의 선원증을 두 개 빌려가지고 중국공안을 통과하는데 선장과 안혁과 증인 순으로 승선을 하는데, 앞의 두 사람은 그냥 무사통과시키고, 증인에게는 여권을 보자 했는데 증인이 긴장하는 순간 그냥 승선하라 했다 했지요? 중국공안이 중시하는 증명서는 여권이지, 선원증이 아닙니다. 친구인 안혁이 선원증만 가졌는데도 무시통과했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인데 어떤가요? 설사 중국공안이 선원증만 조사한다 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증인과 함께 조사대를 통과했기 때문에 선장이 승선했다가 두 개의 선원증을 가지고 나올리는 없고, 그렇다면 선원증을 빌려준 다른 선원들은 증명서 없이 어떻게 승선할 수 있었다는 것인가요?
89. 한국선장에게도 이상한 점이 있는 것 같은데요. 정보기관이 북한에 정보원을 보내면 돌아오는 과정 모두를 철저히 관리하는데, 일개 선장이 한 여인의 말을 듣고 증인 등을 한국 정보기관이 보낸 공작원이라 믿었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데요? 또한 증인의 한국 노래를 듣고 증인 등이 한국의 북파공작원이라고 믿었다는 점도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공안에 걸리면 중국에서 심한 감옥살이를 할 텐데, 선장이 이런 위험한 일을 했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데 어떤가요.
90. 그렇게 오다가 해상에서 한국해군 함정에 인계되었다 했지요? 민간 선박에서 해군함정으로 해상에서 인계된 과정을 설명할 수 있나요?
91. 1987년 2월 요덕에서 20세로 출소한 증인이 1992년 한국 땅을 밟을 때까지 5년 동안 증인이 겪었다는 발자취를 보면, 20대 초반 청년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능수능란한 홍길동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이 한국 땅에서는 증인의 발자취를 흉내 낼 수 있는 20대 초반의 청년을 상상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증인이 겪었던 가장 어려웠던 순간이 있다면 하나만 말씀해 주시고, 그 순간을 간단히 묘사해 줄 수 있나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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