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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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9-24 21:21 조회5,58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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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원전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이승만의 핵
원자력 에너지는 군사용 무기에도 사용되고, 전기 공급용으로도 사용된다. 북괴는 핵무기를 만드는 데에만 원자력을 이용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전기에너지를 공급하는 목적으로만 사용한다. 우리나라의 원자력 개발 시도는 이승만으로부터 시작됐다. 북진통일이 소원이었던 이승만은 1953년, 미국 몰래 국무위원들을 대동하고 진해 앞 바다에서 수소탄 폭발 시험을 했다. 그런데 그것은 철통에 수소가스를 압축해 놓고, 원격으로 폭파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한 일본 사기꾼이 벌인 해프닝에 불과했다. 얼마나 핵무기가 간절한 소망이었으면 이런 사기를 당했을까.
1953년 12월,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UN 연설을 통해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국가들에 기술을 제공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미국과 ‘원자력 비군사적 사용에 대한 정부간 협력’ 문서에 서명했고, 이어서 1957년 8월, IAEA(국제원자력기구)에 가입했다. 57년 11월에는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신설하고, 58년 2월에는 ‘원자력법’을 제정했다. 이어서 100명을 선발해 미국에 유학을 시켜 이 인력으로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했다.
해방 당시 일본이 건설한 전력 발전소는 북한에 85%, 남한에 15% 있었다. 남한은 북한으로부터 송전되는 전기를 사용했다. 그런데 건국일을 3개월 앞둔 1948년 5월 14일 밤, 북한은 더 이상 남한에 전기를 주지 않겠다며 송전을 중단시켰다. 이것이 우리가 겪은 최초의 에너지 쇼크였다.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 군정의 주선으로 미국 에디슨사가 발전함을 들여와 일부 수요자들에 전기를 공급해 주게 했다. 바로 이 에디슨사의 회장 시슬러가 이승만에게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조언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1958년,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했다. 미국은 도입 비용의 절반을 부담해 줌과 동시에 연구원을 교육시키기 위해 100여 명의 유학생을 받아주었다.
박정희의 핵
이 상태에서 박정희가 등장했다. 그는 연구용에만 한정돼 왔던 원자로를 실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원자로로 확대했다. 김신조 사건이 있었던 1968년 1월, 박정희는 ‘원자력발전소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이듬해인 1969년 1월,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고리1호기’ 건설 계약을 체결하고 1971년 3월 착공했다. 이어서 1978년에는 고리 2,3,4호와 중수로 원전 월성1호기가 차례로 착공됐다. 계약만 맺으면 미국 회사가 완전히 지어주고 열쇠만 건네주는 이른바 ‘턴키’(Turn Key) 방식으로 도입된 것이다.
이렇게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박차를 가하자 미국이 의심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몰래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것이 아닌가?’ 사실상 의심의 빌미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제공했다. 이 두 대통령이 핵무기 개발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감시와 통제가 심해지자 박정희는 미국 웨스팅하우스를 제쳐놓고 캐나다와 프랑스로부터 기술도입을 전제로 하는 거래를 틀려고 시도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미국의 방해가 심해졌다.
전두환의 핵
전두환 시대가 열리면서 안보환경이 개선됐다. 카터의 철군 계획이 중단되고, 1978년 11월 7일, 한미연합사령부가 설치됐으며, 레이건의 확실한 연합의지가 주한미군 전력 증강과 핵우산에 대한 강한 약속으로 가시화된 것이다. 이런 마당에 한국이 구태여 국제사회로부터 따돌림과 감시를 받으면서 경제를 추락시킬 이유가 없었다. 전두환은 원자력을 오로지 평화적 목적으로만 사용하겠다고 대외적으로 약속했다. 그리고 미국과 IAEA 등으로부터 불필요한 감시와 견제를 받지 않는 상태에서, 오로지 원자력에 대한 독자적 기술을 확보하는 것에만 목표를 두었다.
최근 신재생에너지라며 태양광, 조력, 풍력 등이 시도되지만 이들은 온실가스 배출양이 상대적으로 많고, 전기 생산 단가가 상대적으로 비쌌기 때문에 전두환은 오로지 안전한 원자력 발전 기술을 독자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했다. “원자력 기술의 자립"이 전두환의 구호였다.
1883년 7월 전두환은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 에너지연구소, 원자력연료주식회사, 한국중공업 등을 총망라하는 회의체(원자력발전기술자립촉진 대책회의)를 설치했다. 핵연료 국산화가 첫 목표였다. 마침 국방과학연구소에 있다가 한국에너지연구소 대덕공학 센터장으로 전임된 한필순 박사가 중수로 연료 국산화에 성공했다. 매우 질이 좋은 연료였다. 현장에 나간 전두환은 한필순 박사에게 "적극 지원할 테니 반드시 경수로 연료를 국산화하라."고 주문했다. 한필순은 전두환이 꼬옥 잡아준 손길에서 전두환의 의지를 확인했다.
전두환은 한필순 박사를 대덕공학센터의 센터장 자리와 핵연료주식회사 사장 자리를 겸임케 했다. 동시에 한전 사장에 한국중공업 사장으로 있던 육사 14기 박정기를 임명했고, 과기처 장관에 체신부 장관을 하던 김성진 박사를 임명했다. 에너지연구소가 경수로 연료를 개발하려면 한전으로부터 용역을 받아야 했고, 한전의 '예산 배정권'은 과기처 장관이 쥐고 있었다. 한필순 연료개발팀을 밀어주기 위해 인사를 단행한 것이다. 1983년 전두환이 직접 지휘한 시스템에 의해 그 어렵다는 경수로 원료의 국산화가 대성공을 거두었다.
전두환은 또 1984년에 한필순 에너지연구소장에게 ‘한국형 표준 원전’을 개발하도록 지시했다. 1985년 7월, 에너지연구소가 원자로 시스템설계 사업을 따냈다. 에너지연구소는 설계기술을 가진 미국회사 CE(컨버스천 엔지니어링)를 하청업체로 선정했다. 연구소 선임연구원 이병령 박사가 인솔하는 70여 명의 과학자들이 대거 미국 CE사로 건너가 원자로 설계에 공동으로 참여함으로써 원전 설계기술을 본격적으로 획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영광 3-4호기가 한국형 표준원전의 시효로 탄생했다. 이후 울진 3-4호기가 한국의 독자적 기술로 설계되었다.
탈원전 작태는 반국가행위
중수로 연료의 국산화, 경수로 연료의 국산화, 한국형 경수로 개발을 통해 한국은 불과 10년 만에 원자력 선진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는 그리고 여느 선진국 원전보다 10배나 더 안전성이 높다는 원전 기술을 확보해 인기리에 수출까지 하기에 이른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지휘 아래 수많은 과학자들이 10년 동안 열과 성을 다해 쌓은 이 기술과 원전산업 기반을 빨갱이 신분으로 대통령이 된 문재인이 파괴하지 못해, 북한에 주지 못해 안달을 했던 것이다.
문재인의 정신 나간 ‘탈원전’ 정책으로 인해, 실직된 기술자들이 해외로 나갔다. 문재인의 의도는 바로 그동안 형성해놓았던 기술팀을 해체하고, 기술을 보유한 기업들을 도산시켜 이 나라 먹거리 기술을 소멸시켜 버리려는 것이었다. 반국가 이적행위를 저지른 범법자가 아닐 수 없다. 국가를 건설한 전임 대통령을, 국가를 도둑질하고 파괴한 후임 대통령이 독재자요 살인마라 매도하는 이 세상, 수천만이나 살고 있는 이 공간에서 언제까지 허용돼야 할 것인가? 국가를 지키고 기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런 대통령은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없다. 일벌백계가 필요한 것이다.
2022.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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