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탐험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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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8-19 23:11 조회4,10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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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탐험 [22]
임기 후반에 대한 전두환의 구상
임기 중반에 이른 전두환은 그간의 성과를 스스로 평가해 보았다. ‘숨 돌릴 틈 없이 공부하고 혼신을 다해 노력했기에 후회가 없다’고 회고했다. 수십 년 동안 고질병으로 여겨왔던 물가를 잡아, 경제성장의 동력을 회복한 것에 대해 만족해했다. 1983-84년의 GNP 성장률이 10.2%, 도매물가 상승률이 0.5%, 저축율이 26.6%에 이르렀다는 것에 대해 만족해했다. 10% 이하의 가동률을 기록했던 중화학공업을 구조 조정하여 활기를 불어놓고, 반도체, 컴퓨터, 통신기술를 선진국보다 앞서 먹거리 산업으로 선정하여 성공시킨 사실에 대해 뿌듯해했다. 국민연금, 의료보험 등 복지 혜택을 업그레이드시키고, 문화진흥을 의한 시설을 확충하고 국민 에너지의 상당 부분을 문화 창조 분야로 돌린 사실에 대해 만족해했다.
특히 취임하자마자 금기시돼 왔던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한 사실, 컬러TV 방송을 결단해서 흑백문화를 컬러문화로 전격 전환시키고, 해외여행과 해외유학을 자유화시키고, 달러 송금을 대폭 완화시키고, 학생들에게까지 강요됐던 통제문화를 개방문화로 탈바꿈시킨 사실에 대해 자긍심을 느꼈다. 86년 아세안게임과 88서울 올림픽을 위한 준비가 착착 차질 없이 이행돼 나가고 있는 것에 대한 자신감도 느꼈다. 특히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88올림픽 유치권을 따내고,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모두 참가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아프리카, 아세안 비동맹국들과 서방 국가들을 부지런히 방문하여 보이콧도 없고, 테러도 없는 완전한 올림픽을 치루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동분서주함으로써 긍정적인 신호를 자아낸 데 대해 만족해했다.
단임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임기 중반에 이른 전두환의 다음 목표는 단임제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5공 헌법을 통해 5년 단임제를 약속한 이상 임기가 종료되면 그대로 물러나면 될 일이었는데, 전두환의 머리는 왜 그리도 복잡했을까? 자기가 떠난 이후에도 대한민국이 번성하는 길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자기의 뒤를 누가 이어야 하나. 차기에도 대통령제를 해야만 하는가. 1986년 4월 초, 그는 영국, 서독, 프랑스, 벨기에 4개국을 순방했다. 서방의 주요 국가들을 올림픽에 유치시키기 위한 외교가 주목적이었지만, 민주주의가 발달해 있는 이들 나라의 권력 구조에 대해 각 지도자들로부터 조언도 듣고 싶었다.
대처 총리와의 대화
전두환: 저는 1988년 초에 대통령 단임제를 규정한 대한민국 헌법에 의해 물러납니다. 저는 제가 물러난 이후 한국정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게 하고 싶습니다. 저는 권력 구조 선택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미국은 대통령 중심제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 선거는 간선제입니다. 만일 대통령제를 선택하면서 대통령을 직선으로 선출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지, 각하의 고견을 알고 싶습니다.
대처 수상: 유럽에는 의원내각제를 실천하고 있는 나라가 많습니다. 대통령제를 택하면서 직선제를 하는 나라는 남미나 아프리카 국가들이고, 유럽국가들은 간선제를 택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영국은 지역감정의 골이 매우 깊습니다. 축구 국가팀을 구성하는 데에도 지역들이 싸웁니다. 이런 상태에서 만일 영국이 대통령 직선제를 택한다면 국론분열로 인한 낭비가 엄청났을 것입니다.
내각제에 대한 참모들과의 토론
두 번째 방문국인 서독에서는 올림픽 참가에 대한 확답을 얻었을 뿐, 전두환의 고민에 대해 얻는 것이 없었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날 밤, 전두환은 그를 수행한 참모들을 불러 모았다. 안현태 경호실장, 정두호 공보수석, 김병훈 의전수석, 박근 제네바 대사, 안재석 스위스 대사를 비롯해 수행원들을 대거 불렀다. 그리고 그의 고민을 피력했다. 1986년 4월 초였다. 아래 내용은 전두환 회고록 제2권의 594~595에 기재된 내용이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처음 말하는 거지만, 나는 솔직히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두려운 때가 많았다. 대통령 결심을 얻어내기 위해 다들 서류를 잔뜩 챙겨들고 들어오는데 결심을 해야 하는 사안들이 하나같이 중요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거기다 결재를 해야 하는 사람인 나한테 무슨 전문지식이 있겠는가. 일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지만 그저 상식적이고 평범한 능력밖에 없지 않나. 바로 얼마 전에도 미국에서 무기를 사들이겠다는 재가서류가 올라왔는데 도대체 제시된 그 가격이 비싼 것인지 싼 것인지, 속는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또 비싸면 비싼 만큼 국가에는 어떤 보탬이 되는 것인지, 도무지 판단할 길이 없어서 아주 고심해야 했다. 그래서 내가 느낀 것이, 한국의 대통령 중심제는 작은 일에서 국가의 생존과 관련되는 큰일까지 너무 모든 것이 대통령의 두 어깨에 짊어지워 있다. 수많은 문제들을 대통령 한 사람이 자기 판단으로 결심하고 또 책임을 져야 하는 이런 대통령 중심제는 정말 대통령이 되는 사람에게도 두려운 일이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우리나라의 대통령 권한은 거의 제한이 없는, 거의 무제한적인 권력이다. 무제한의 권력이란 곧 무한책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같은 대통령제인 미국을 보자. 권한이 아무리 막강하다 해도 대통령이 주지사조차 임명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지자체로 선출하기 때문이다. 대법관을 임명할 권한이 있다 해도 임명되면 종신제가 보장되기 때문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국무총리, 장관, 도지사는 물론 대법원장, 대법관, 주요 자리라는 자리를 모두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임명하도록 되어 있지 않은가. 국회의장을 여당 총재안 대통령이 선택한다. 그 권력의 막강함은 상상 이상이다. 아주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는 것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권한이 그토록 절대적이니 대권싸움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유럽에 와보니 다르지 않은가. 어느 나라도 우리처럼 극한적으로 싸우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네 싸움은 얼마나 부정적이고 극한적인가. 그 이유가 대통령 권한이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정권을 잡으면 다 갖고, 못 잡으면 다 잃는 막장 결투가 아닌가.”
이렇게 불을 지피자 각자는 기탄없이 자기들의 생각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두환은 내각제가 바로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프랑스의 예를 보면 대통령은 사회주의 정당에서 나왔고, 수상은 우파 정당에서 나왔지만 싸우는 일이 없었다. 영국과 독일도 이와 유사했다. 당시 세계에는 170개 국가가 있었다. 그런데 직선제를 채택하는 나라는 40개 국, 모두 중진국 이하의 국가들이었다는 것이 전두환의 통계였다.
내각제란?
의원내각제를 택한 영국, 국왕인 엘리자베스 여왕은 국제적인 행사에 등장하긴 하지만,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고 있지 않다. 의회 다수파가 권력의 핵심이 된다. 여소야대라는 현상이 없는 것이다. 내각이 의회에 의해서 선출되기 때문에 내각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할 경우 의회가 내각을 불신임하면 내각이 총사퇴를 해야 한다. 대통령은 명목상의 국가원수이며, 의회 다수당의 대표가 수상이 되어 내각을 운영한다. 캐나다, 일본, 유럽제국, 오세아니아의 나라들이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다.
의원내각제는 행정부와 입법부가 상호 협조관계에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내각의 각료는 의원직을 겸할 수 있다. 총리를 교체하기도 하고, 연립정부를 구성하기도 하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권력이 1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행정부의 존립이 의회에 의해 결정되므로 국민의 대표로 선출된 의회의 통제가 용이하다. 반면에 단점도 있다. 의회의 다수파가 권력을 잡고 횡포를 부릴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집권당의 의원 수가 과반이 되지 않을 경우 다른 당과 세력을 합하여야 한다.
야당의 개헌 요구 수용
1986년 4월, 전두환은 윤보선, 최규하를 초청해 야당이 주장하는 직선제 개헌에 대해 대화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어서 3개 야당 대표를 불러 재임기간 중에 개헌하자는 야당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임기 내에 개헌을 하자는 데 동의한다. 개헌 내용에 대해서는 직선제뿐만 아니라 대통령제냐, 내각제냐에 대한 권력구조도 포함하자" 이렇게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의 야당은 주사파 세력과 동조도 했다가 서로 갈등을 빚기도 하면서 오로지 야당 인물들 사이에 누가 차기 정권을 잡는가에 대한 욕심으로 사회적 갈등만 고조시키고 있었다. 당시의 언론들은 겉으로 나타난 복잡한 갈등의 현상들을 보도했지만, 갈수록 혼돈해지는 현상들의 뿌리는 어디까지나 북한의 공작이었다. 회오리의 눈은 언제나 북괴의 대남공작이었다. 86년 10월 14일, 신민당 유성환 의원이 국회에서 “반공은 국시가 아니다”라는 발언을 해서 체포되었다, 10월 28일에는 27개 대학 1,000여 명이 건국대 건물을 점령하고 “반공 분쇄”를 주장하며 농성에 들어갔다가 전원이 구속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은 오로지 사회를 교란시켜 혁명정권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유성환 의원의 발언도 27개 대학생들의 소요도 모두 다 여야가 평화롭게 합의하는 꼴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공작이었다.
1986년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열린 86아세안게임, 27개국으로부터 4,839명이 서울에 왔다. 하지만 그럴수록 북괴의 배후조종은 날로 열기를 더해갔다. 86년 10월 14일, 신민당 유성환 의원이 국회에서 “반공은 국시가 아니다”라는 발언을 해서 체포되었다, 10월 28일에는 27개 대학 1,000여명이 건국대 건물을 점령하고 “반공분쇄”를 주장하며 농성에 들어갔다가 전원이 구속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은 오로지 사회를 요란 시켜 혁명정권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유성환 의원의 발언도 27개 대학생들의 소요도 모두 다 여야가 평화롭게 합의하는 꼴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공작이었다.
4.13 호헌조치
태풍의 눈은 언제나 김대중이었다. 1986년 12월 22일, 정당 대신에 '민추협'이라는 재야세력을 거느린 김대중이 신민당 상임고문에 불과했던 김영삼과 야합하여 신민당 당수 온건파 이민우 당대표를 축출하기로 했다. 이에 이민우가 반발했지만, 양김의 공동전선에 항복하여 잠적해 버렸다. 이런 와중에 87년 1월 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불거졌다. 이를 언론들에서는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발표를 희화화하여 전두환 정권을 공격했다. 이후의 혼란스러운 정국의 주연은 김대중, 김영삼, 이민우, 이철승이 담당했지만, 결국 이들은 오로지 우리 사회를 혼란으로 치닫게 하려는 북괴 공작의 배우들에 지나지 않았다.
전두환은 직선제, 내각제, 조기 개헌의 카드를 던졌다. 야당이 늘 주장해 왔던 것들이지만, 김대중, 김영삼, 이민우, 이철승은 각기의 계산에 따라 오로지 정국을 휘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만 몰고 갔다. 이에 전두환은 이들로부터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87년 4월 17일, 특별담화를 통해 현행 헌법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단임 약속을 지키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꼬투리만 잡으려는 야당은 이를 ‘호헌조치’라고 이름 지었다. 호헌론이 장기집권 음모라는 것이었다. 신부들이 단식기도에 나섰고, 교수, 지식인과 재야세력의 시국선언들이 이어졌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군 사건이 축소 은폐되었다고 발표했고, 이어서 재야인물 134명이 ‘박종철 군 고문치사 은폐 조작 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를 발족하는 등 공산주의식 교란 공작에 불을 지폈다. 사회는 4.13호헌조치와 박종철로 인해 극도로 혼란해졌다. 여기로부터 6월 항쟁이라는 급물살이 발원되었다. 이에 전두환은 ”무조건적인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는 6.29선언을 기획했고, 이를 노태우로 하여금 발표케 하는 민첩한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2022.8.1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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