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탐험 [24]
페이지 정보
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8-21 18:25 조회3,509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전두환 탐험 [24]
지미 카터의 철군 행진
미국의 제37대 대통령 닉슨은 1969년 1월 20일 취임했다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1974년 8월 9일에 퇴임했다. 그가 취임했던 시기는 미군이 베트남전에서 많은 인적, 물적 손실을 보고 있을 때였다. 베트남전은 1955년 11월 1일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20여 년 동안 지속됐다. 베트남 남북 간의 내전임과 동시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과의 전쟁이기도 했다. 1964년 8월 2일 통킹만에서 월맹 어뢰정 3척이 미 해군 구축함을 공격하면서 미국이 자동 개입하여 캄보디아와 라오스로까지 전선이 확대되었고, 한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이 1964년 8월부터 1973년 3월까지 참전했다.
지리하고 지루한 전쟁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는 반전여론이 일기 시작했고, 이러한 여론이 비등하고 있는 가운데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닉슨은 미국 국민들의 여론에 부합하고 미국의 손실을 멈추게 하기 위해 1969년 7월 25일 괌에서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한마디로 아시아는 아시아 국가들끼리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미국이 고립주의로 회귀하는 정책이었으며, 미국의 이익은 아시아에 있지 않고 유럽에 있다는 유럽중심주의 외교정책을 천명한 것이다. 이때부터 베트남전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고, 이를 눈치챈 월맹은 주월 미군과 주월 한국군을 더욱더 세차게 몰아붙였다.
이런 가운데 닉슨은 71년 3월 주한미군 제7사단 2만여 명을 전격 철수시켰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패닉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지상군 32,000명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운 지미 카터가 1977년 1월 20일 제39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매우 과감한 방법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서둘렀다. 1978년까지 6,000명을 철수할 것이라 발표하면서 그 첫 단계로 3,400명을 철수시켰다. 2,600명은 1979년에 철수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여기에 역대의 주한미군 사령관을 지낸 장군들이 반기를 들었고, 급기야는 UN군 사령부 현역 참모장으로 재직 중이던 싱글러브 소장이 감히 대통령을 향해 반기를 들었다. 그는 1977년 5월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5년 이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카터 대통령의 계획은 곧 전쟁의 길로 유도하는 오판”이라고 정면 비판했다. 분노한 카터는 그를 즉시 예편시켰다. 이후 한 관계자가 “당시 주한미군 철수 계획에 반대하지 않았다면, 별 몇 개를 더 달 수 있었을 텐데…”라고 하자, “내 별 몇 개를 수백만 명의 목숨과 바꿨다고 생각하면 그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목이 달아날까 무서워, 마땅히 해야 할 건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한국군의 역대 수장들과는 전혀 딴판인 장군들이었다. 싱글러브는 1953년 '철의 삼각지대' 김화지구 전투에서 미군 대대장으로 활약했다. 싱글러브의 발언은 미국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카터의 인기가 추락했다. 이후 추가적인 병력 감축은 없었다. 2022년 1월 29일, 그는 향년100세로 별세했고, 8월 19일 알링턴 묘지에 안장되었다.
한국 장군들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미국 장군들
6.25 전쟁 초기에 제24사단장 딘 소장이 중상을 입고 은신해 있다가 한국인의 밀고로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가 3년 동안의 혹독한 고통을 받고 포로교환의 일환으로 귀국했다. 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이 아들을 잃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아들을 바쳤고, 클라크 UN사령관도 아들을 바쳤다. 워커 중장은 아들과 함께 참전했다가 스스로는 목숨을 잃었다. 밴플리트 대장의 경우에는 아들이 공군조종사로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전투기 추락으로 전사했다. 밴플리트 사령관의 예하 장군들이 아들의 시신을 구하는 작전을 건의했지만 사령관은 거부했다. 내 아들 시신 찾자고 또 다른 희생자를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또한 “미국 육사 웨스트포인트와 똑같은 육군사관학교를 한국에 세워달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간절한 부탁으로 현재의 4년제 육군사과학교를 세워주었다. 이에 비해 한국의 장군들 중 아들을 전쟁터로 보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지금과 같은 평화 시에도 군복무를 지능적으로 기피했던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어 있는 우리의 현상을 여기에 대입하면 한국방위는 더더욱 풍전등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한국은 미국의 우산이 필요한 것이다.
레이건 회담 효과
주한미군에는 보병 사단 2개가 있었다. 2사단과 7사단이었다. 그런데 1971년에 닉슨이 2만여 명으로 구성된 7사단을 철수시켰다. 이어서 카터가 1978년에 3,400명을 철수시킨 상태에서 추가 철군 계획이 동결된 것은 오로지 한국을 사랑하는 미국 장군들의 덕분이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한국의 방위라는 것이 얼마나 미국 의존적인가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전두환이 1981년 2월 2일, 레이건 대통령과 회담을 한 것은 낭떠러지 위에 서 있는 국가를 내륙으로 깊숙하게 밀어놓은 중대한 ‘안보 이정표’였다.
레이건을 만남으로 해서 주한미군 철수가 백지화됐다. 이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선물이었다. 레이건의 선물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당시 F-16은 한국군이 가장 탐내던 무기였다. 미국은 신병기가 생산되면 한동안 절대로 대외 판매를 하지 않는다. 시간이 충분히 경과하여 차 세대의 무기가 나와야만 해외 판매를 하는데 그것도 국가 간에 차별이 있었다. NATO에 가장 먼저 팔고 한국은 우선수위에서 뒤져 있었다. 그것도 반드시 FMS(Foreign Military Sales) 방식으로 구매해야 했다. 미국 장비를 구매할 때에는 미국의 연방은행(FRB)에 미국으로부터 얻은 차관을 몽땅 거치해놓고, 장비가 구입될 때마다 미국 정부가 연방은행에 예치돼 있는 차관 달러를 빼내가는 식이었는데 그 이자가 연 14%나 되었다.
그런데 레이건은 전두환에게 F-16기 판매를 지극히 예외적으로 허가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F-16 전투기 2개 대대를 한국군에 배치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한국이 처음이었다. 전시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신속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국에 이동시켰다. 전투준비태세를 강화한 것이다. 당시 미국의 국방장관은 와인버거였는데 그 역시 레이건처럼 선이 굵은 매파였다. 대전차 킬러라는 F-10 전투기, 아파치, 코브라, 신형 장갑차와 전차 등 신형 무기들을 한국에 큰 인심 쓰듯 배치했다. 한미 밀월관계였다.
카터 시절에 한국에 들어와 있던 외국기업들이 불안감을 해소했고, 추가로 많은 외국기업들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미국과의 밀월시대가 열림에 따라 한국의 군용장비 국산화를 위한 기술 이전도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전두환은 군 방위 시스템 개선에도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육해공군 사령부를 모두 계룡대로 이전시켜 육해공 합동작전이 원활토록 했고, 전방을 홀로 담당했던 1군사령부를 동부전선만 담당케 하는 동시에 서부지역 작전을 담당하는 3군 사령부를 용인에 새로 설치했다. 그리고 백령도를 포함한 서해 5도를 요새화시켰다.
2022.8.21. 지만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