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탐험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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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8-22 18:12 조회3,38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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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탐험 [25]
6.25에 투영된 한국 안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18만 명의 인민군이 609문의 야포와 1,000여 문의 박격포를 쏟아 부으면서 272대의 탱크를 몰고 파죽지세로 남침을 감행했다. 전선은 걷잡을 수 없이 밀리고 있는데도 우리 방송은 국군이 연일 대승을 거두고 있다는 방송만 했다. 의정부가 유린됐을 27일 06시에야 비로소 한때나마 국군이 밀리고 있다는 방송을 했다. 놀란 150만 서울 시민들이 급히 짐을 꾸려 한강교로 몰렸다.
이때 방송은 국군이 의정부를 다시 탈환했다며 또다시 승전보를 방송했다. 피난길을 떠나던 일부 시민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일부 시민들은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6.28일 새벽 2시 15분, 어이없게도 한강교가 갑자기 폭파돼 버렸다. 다리를 메운 피난민과 국군들이 목숨을 잃었다. 포격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다가오자 집으로 돌아갔던 시민들이 한강으로 밀려와 아수라장을 이뤘다. 6월 28일 오전 11시 30분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고 중앙청에 인공기가 꽂혔다.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빨갱이들이 위장을 하고 있다가 때를 만났다며 북한군 앞잡이가 되어 완장을 차고 인민군을 끌고 다니면서 지도급 인사들을 학살했다. 개전 당시 98,000명이었던 국군은 6.28일 당시 불과 22,000명에 불과했다. 북괴군 18만 명에는 턱없는 군사력이었고, 그마저 오합지졸이었다. 방송이 사실을 사실대로 알려만 줬어도 그리고 한강 철교만 조기에 폭파하지 않았어도 수만 명의 지도급 인사와 시민들의 목숨을 절단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6.29일 06시 일본에 있던 맥아더 사령관이 발빠르게 C-54수송기를 타고 한강 남쪽 제방에 도착했다. 그는 한국군에 방어능력이 전무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6월 30일,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24사단에 출동 명령을 내려 인민군을 충주 이북에서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7월 1일 부산에 도착한 16,000명의 미24사단은 7.22일까지 오산, 옥천 전투를 거치는 동안 8,000여 명을 잃었다.
기억해야 할 딘 소장 이야기
사단장 윌리엄 F 딘 소장은 540명의 특임대를 편성, 수송기 편으로 급파하여 스미스 중령의 지휘 하에 북한군을 저지토록 조치한 후 7월 3일 대전에 24사단 지휘본부를 설치하여 연합군의 선봉장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 그가 워커 미 8군 사령관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는 지연작전 즉 과속방지턱의 역할이었다.
매복조들이 요소요소에서 사격을 가해 후퇴가 순조롭지 못했다. 충북 남단 지역을 나란히 방어하고 있던 25사단과 1기병사단은 피난민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임신부가 소형 무전기를 숨기고 접근해 와 북한군 관측장교 역할을 해주었고, 미군 보급차량이 갑자기 피난민들로부터 총격을 받기도 했고, 피난민이 묻어놓은 지뢰에 피해를 입었기도 했다. 북한군은 미군을 공격하는데 피난민을 총알받이로 이용했고, 지뢰제거용으로 이용했다. 미군은 이들 피난민을 쏘아야 할지 실로 난처해했다
딘 사단장은 부하들과 함께 산으로 도피하게 되었고, 무더운 날씨에 부상자들이 갈증을 호소했다. 딘 사단장은 병사들에게 물을 구해주기 위해 물소리를 따라 어둠 속 계곡을 내려가다가 낭떠러지에서 추락, 정신을 잃은 채 몇 시간을 보냈다. 다시 의식을 찾았을 때는 어깨뼈가 부러지고, 머리가 찢어졌으며 온몸에 멍이 들어 있었다. 부대원들이 딘을 찾아 다녔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외톨이가 되었다. 치료는커녕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낮에는 숨어서 자고 밤에는 별을 보고 우군이 있는 동남쪽으로 걸었지만 같은 지점을 맴돌기만 했다. 그가 헤맨 산속 거리는 대전에서 무주까지 어림잡아 60km에 이른다.
어느 날 딘은 산속의 민가 박종구의 집에서 오랜만에 식사다운 음식과 날계란을 얻어먹었다. 키 185cm, 체중 95kg의 거구가 59kg의 왜소한 늙은이가 되었다. 전북 완주군 상전면 운산리 부근에서 본 대와 합류하기 위해 대구로 가는 길을 찾는 딘에게 한두규란 청년이 접근했다. 그와는 영어가 좀 통했고 백만 원에 대구까지 안내해 주는 조건에 합의했다. 개울에서 군화를 벗고 잠시 쉬는 사이 갑자기 10여 명이 총을 들고 나타나 딘을 포박했다. 8월 25일, 실종된 지 36일 만이었다. 한두규가 밀고한 것이다. 이날은 그의 24주년 결혼기념일이었다. 1950.6.25.일부터 1953.7.27.일까지, 총1,789,000명의 미군이 참전했으며, 전투원 전사자 33,665명, 비전투원 사망자 3,275명, 부상자 92,134명, 실종자 8,176명이란 통계를 남겼다.
일본전사가 쓴 6.25 프로필
일본이 본 ‘한국전쟁’이 전집 10권으로 구성돼 있다. "日本陸戰史硏究普及會" 발행. 그 중의 일부를 발췌한다.
* 1950년 3월초, 1주일간 29회의 공비 습격이 있었고 38선 부근에서 18회의 분쟁이 있었다(p.37)
* 3월 위기설이 있었다. 북괴가 곧 남침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북괴군이 38선에 집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정보가 입수됐다(p.38).
* 5.11일, 이대통령은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북괴군의 남침이 임박해 있다. 미국의 원조가 부족하다. 그래서 5.6월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p.38).
* 북괴군은 18만4천 명, 야포 609문, 전차 272대, 전투기 168대였고, 한국군은 병력 9만8천, 야포 91문, 훈련기 10대였다(p 38-39).
* 6.9일, 채병덕 참모총장은 연대장과 사단장에 대한 대규모 인사를 단행했다. 이는 5.17일 국방차관으로 취임한 장경근의 입김이라는 설이 있다. 전방 사단장으로 임명된 장군들은 부대를 장악하고 지형을 익숙 시킬 여유 없이 전쟁을 맞았다(p.40).
* 6.24일(토요일), 육군장교 클럽(구락부) 개관 축하연회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서울 번화가에서는 1사단(백선엽 대령, 개성 포진) 및 7사단(유재흥 준장, 의정부 포진) 장병들을 위시해 연회에 참석했던 장병들이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각 사단에는 "내일은 좋은 날이니까 규정 외의 외출 외박을 허가해도 좋다"는 전문이 있었기 때문에 춘천에 포진한 6사단(김종오 대령, 춘천 포진)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장병들을 내보냈다(p.44).
* 육본은 6.25. 0시를 기해 비상경계령을 갑자기 해제하고 전 장병의 2분의1에게 휴가를 주었다.
* 6.25 남침 사실을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채병덕에게 보고하자 전속부관은 주무시는 총장님을 깨울 수 없다며 끝내 알리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그런 부관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지 않은 채병덕 장군도 수상했다. 수많은 예비역 장군들이 채병덕 장군을 수상하게 여기고 있다(참전 장군들 증언).
* 6.28일 0시 15분에 의혹의 미스터리 한강철교가 폭파됐다. 폭파 경위는 다음과 같다. 한강교는 한강의 유일한 교량이었다. 미 군사고문단과 채병덕 참모총장 사이에는 "적의 전차가 한강교 근처에 접근한 것을 채병덕 장군이 확인했을 때 폭파한다"는 약속이 이뤄져 있었다. 그런데 이 약속이 갑자기 깨졌다. 주 병력이 아직 강북에 있고, 모든 무기가 강북에 있는 상태에서 미 고문단 부참모장인 그린윗드 중령에게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한국군이 한강교를 폭파한다는 것이다. 그린윗드 중령이 육본으로 달려갔다. 김백일 참모 부장의 말이 "국방차관 장경근 장군이 01시 30분에 폭파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지금 곧 폭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제2사단장 이형근 장군이 와서 제2사단의 병력과 장비가 아직 시내에 있으니 폭파를 연기해달라고 건의했다. 김백일 장군이 이를 받아들여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에게 폭파중지를 명했다. 장창국 대령이 지프차로 달려갔지만 도로가 피난민으로 채워져 있어 시간이 지연됐다. 28일 02시 15분, 드디어 한강교 위에 3열로 뻗은 인파와 차량이 2회의 섬광이 번쩍 하는 사이에 희생됐다. 주력부대인 2,3,5,7사단 및 수도 사단이 서울 외곽에 있었다(p.87-89).
* 6.28일 11시30분, 서울이 함락됐다. 한국군은 퇴로가 차단된 사실도 모르고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목숨을 건 채 싸우고 있었다(p.89).
* 한강교 폭파 명령을 누가 내렸는가에 대한 군법회의가 열렸다. 채병덕 장군은 "군사지식이 있는 자가 그런 명령을 내릴 리 없다"고 증언했고, 국방차관 장경근은 "나는 명령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결국 공병감인 최창식 대령이 스위치를 누른 책임을 지게 되었다. 1950년 9.21일 부산 교외에서 총살 집행되었다(p.91).
* 인민군이 입성하자 서울시에는 적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인파가 의외로 많았다(p.91).
* 6.29일 0600시, 맥아더 원수가 그의 전용기 바탄호(C-54)로 하네다 공항을 이륙했다. 정상 조직을 갖춘 한국군이 불과 2만 2천명, 피난민과 섞여 뿔뿔이 철수해오는 병사들을 보고 파병을 결심했다(p.115).
* 6.30일 04:57분,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의 건의를 받아들여 2개 사단과 1개 전투 연대 파견을 전 세계에 공표했다(p.117).
* 미군 병사들의 70%는 19-20세였다(p.118).
* 6.30일, 맥아더 원수는 8군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제24, 제25사단의 출동을 전화로 명했다(p.128).
* 6.30일 밤,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이 24사단에게 전화로 한국 출동 명령을 내렸다(p.130).
* 7.1일 03시, 비가 쏟아지는 구마모도를 출발, 08:05분에 이다쓰게에 도착했다(p.131).
* 7.1일 08:45분,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4대의 C-54기에 탑승하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안개가 짙어 내릴 수 없었다. 10회나 회항하다가 15:00시에 겨우 착륙했다. 이들은 열차에 탑승하여 한국 국민의 환호를 받으면서 출발, 7.2일 08:00시에 대전에 도착했다(스미스 중령 지휘)(p.132).
* 7월 8-15일 사이 제25사단이 부산에 속속 들어왔다(p.193).
* 7.14일,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군 지휘를 UN군 사령관에게 위임했다(p.195).
* 24사단은 15,965명 중 1주일간의 지연작전에 4,525명을 잃었다. 이어서 오산-옥천 전투를 치르기까지 17일간의 전투에서 7,305명의 병력과 장비의 60%를 잃었다(P.237).
* 24사단장 딘 소장은 부상병이 요구하는 물을 뜨러 가다가 벼랑에 떨어져 어깨, 늑골, 머리에 부상을 입고 금산 지역을 헤매다가 자신을 도와주던 한국 청년의 밀고로 36일째가 되던 8.25. 북괴에 포로가 됐다. 평소 체중은 86kg이었으나 체포됐을 대의 체중은 58kg이었다. 그는 3년간의 포로생활을 하다가 1953년 9월 4일 판문점으로 돌아왔다(p.239)
* 당시 많은 피난민이 영동으로 몰려들었다가 다시 황간- 대구로 남하하고 있었는데, 북괴군과 게릴라들이 그 속에 끼어서 사단 진내로 들어왔다. 한 임산부의 모양이 수상하여 조사해 보니, 소형 무전기를 숨기고 있었다. 그녀는 미군의 포병 위치와 북괴군의 포탄사격을 유도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짐 속에는 경화기가 숨겨져 있었고, 쌀을 운반하는 바구니 속에는 박격포 탄약이 들어 있었다. 또한 미군 보초가 갑자기 피난민으로부터 사격을 받기도 했고, 지뢰탐지기에 의해 총기를 발각당한 무리들로부터 습격을 받는 등 그야말로 마음을 놓을 겨를이 없었다. 보급차량도 종종 습격을 당했고, 도로에는 지뢰가 매설돼 있었으며, 불시에 미군 포병이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p.252).
* 7.26일 영동의 날이 밝아올 무렵, 먼저 수백 명에 달하는 피난민이 횡대로 늘어서서 전진해 왔다. 그 후방에는 전차 4대와 약간의 보병이 뒤따르고 있었다. 피난민들이 진지로 접근해 왔을 때, 지뢰가 폭발하자 주위사람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차와 보병이 용서 없이 피난민을 사살했다. 피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대오를 정리하고 전진을 다시 계속했는데 지뢰는 또다시 폭발했다. 실은 북괴군이 미군이 설치한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피난민들을 앞세워 희생시키는 만행을 자행했던 것이다. 여기서 기병사단은 피난민을 사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뢰지대를 통과시킬 수도 없는 그야말로 난처한 입장이었다(p.254-255).
간첩이 지휘한 한국군
"군번 1번의 외길 인생 이형근 회고록"(중앙일보사) 제55족-57쪽에 군 수뇌부에 숨어있는 간첩을 의심하는 10대 불가사의가 기록돼 있다. 6.25당시 2사단장이었던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여기서 6.25전쟁 전후에 나타난 10대 불가사의를 지적함으로써 향후 국가방위를 위한 교훈으로 삼고 싶다. 그것은 군사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다. 나는 6.25 초전의 전후 사정을 종합 판단할 때 군 내외에서 좌익분자들이 긴밀하게 합작, 국군의 작전을 오도했다고 확신한다. 그러면 적과 내통한 자가 과연 누구냐? 나로서는 수상하다고 느껴온 사람이 있지만 심증만 갖고 있다. . 풀려야 할 가칭 10대 미스터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선 부대의 적정 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했다는 점이다.
둘째, 6.25가 발발하기 불과 2주일 전, 중앙 요직을 포함한 전후방 사단장과 연대장급의 대대적인 교류와 이동이 단행되었다. 모두가 지형과 병사에 익숙 치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았다.
셋째,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다. 6.13-6.20일에 걸친 전후방 부대 이동 역시 가장 부적절한 조치였다.
넷째, 북6.11부터 발령됐던 비상경계령이 6.24일 0시에 해제됐다.
다섯째, 이런 위기 상황에서 육본은 비상경계 해제와 더불어 전 장병의 2분의 1에게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다.
여섯째, 육군 장교클럽 댄스파티다. 장교들은 6.25일 새벽까지 술과 댄스를 즐겼다.
일곱째, 적의 남침 직후 우리 병력을 서울 북방에 축차 투입해 장병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여덟째, 적의 공세로 국군이 퇴각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6.25-27일 우리 방송은 국군이 반격, 북진중이라고 허위 방송함으로써 군부는 물론 국민들까지 상황판단을 그르치게 했다.
아홉째, 한강의 조기 폭파다. 병력과 군수물자가 한강 이북에 있는데도 서둘러 폭파했다.
열번째,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 사형집행이다. 최대령은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에 복종, 폭파했을 뿐인데 이에 책임을 지고 1950.9.21일 비밀리에 처형됐다.
6.25 전쟁, 미군이 없었다면?
이형군 대장은 1920년 생, 6.25때 제2사단장이었고, 이후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이형근 대장은 심증만 있었고, 물증이 없어, 그가 누구인지는 후대가 밝햐야 할 숙제라고 했다. 하지만 일본육전사연구보급회는 6.25 당시 국방차관이었던 장경근을 의심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장경근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1911년 평안북도 용천 출생. 1932년 교토제삼고등학교를 졸업, 1936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재학 중 1935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 1938년 5월 경성지방법원 판사, 1941년 경성복심법원 판사에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근무. 해방 후 1945년 미 군정에서 경성지방재판소 수석판사, 1948년 서울지방법원장, 1949년 내무부차관, 1950년에 국방부차관, 1953년 한일회담 대표.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 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에 자유당 소속으로 경기도 부천에서 당선. 1957년에 내무부장관, 1959년에는 자유당 정책위원회 위원장. 1960년 5월 3·15부정선거와 관련하여 체포되었다가 풀려나 일본으로 밀항. 1974년 브라질로 이민 갔다가 1977년에 귀국하여 1978년 7월 25일 사망.
6.25 발발 전후역사, 군 간부들 사이에서는 6.25때 누가 간첩질을 했느냐에 대해 여론들이 이어져 오고 있다. 군에 얼마나 많은 간첩이 있었는가? 1948년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빨치산에 의한 무장폭동이 발생했다. 이어서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 발생했다. 김일성과 김구, 김규식 등의 방해공작을 무릅쓰고 대한민국을 건국한지 불과 2개월 만에 군 내부의 반란이 일어났으니 이승만 대통령이 얼마나 긴장했겠는가? 남과 북에서 협공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정부는 전군적으로 숙군작업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부는 1948년 9월부터 육군정보국 내에 특별수사과를 설치하여 간첩 혐의자들을 조사하여 총살, 유기형, 파면 등의 조치를 취했다. 양개 폭동에 가담했던 공산주의자들이 산 속으로 도망했고, 일부는 1949년 5월, 2개 대대 규모를 만들어 월북했다. 반란군을 토벌할 임무를 수행하던 토벌사령관 송호성은 6.25가 발생하자 서울에서 인민군 복장으로 갈아입고 인민군 소장이 되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우군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었다.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1948년 12월 1일부터 시행하면서 6.25직전에 이르기까지 4회에 걸쳐 대대적인 숙군작업을 하여 군내의 좌익들을 청소했지만, 6.25가 발발하자 한국군은 간첩이 지휘했다는 흔적들이 매우 많이 나타났다. 숙군 작업은 6.25 전에 4차례, 6.25 이후 3차례 이어졌고, 특무대장 김창룡의 애국적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제1차 숙군은 여순10·19사건 직후부터 1949년 3월까지이다. 여수 제14연대 반란사건을 계기로 육군 정보국은 군내 공산 불순분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정보국 김안일 대위와 김창룡 대위의 지휘아래 단행됐다. 현역장병 324명과 군 관계 민간인 40명 등 364명을 검거했다. 검거된 주요 인물로는 최남근 중령(제15연대장), 김종석 중령(여단장 대리), 오규범 중령(제1공병단장), 오일균 소령(대대장), 조병건 소령(육사교수부장), 박정희 소령 등이었다.
제2차 숙군은 1949년 5월부터 9월까지 5개월 간 실시됐다. 1949년 2월 남로당 총책(이재복)의 비서였던 민간인 김영식을 체포, 3월에는 이재복의 뒤를 이어 남로당 특수부 총책이 된 이중업을 체포했다. 수사팀은 이들에게서 얻은 500명의 좌익세포조직 명단과 제1차 숙군 시 얻은 정보를 근거로 현역 장병 215명, 군 관계 민간인 30명 등 245명을 검거하여 남로당 특수부를 소탕했다.
제3차 숙군은 1949년 10월부터 1950년 3월까지다. 제1·2차 숙군이 끝난 시점인 1949년 10월 경 북한정치보위부 최금경이 정보수집, 군내 반란야기, 폭동, 파괴, 요인 암살 등의 지령을 받고 잠입하여 남한 내 요인들을 포섭하는 등 정보망을 조직하며 일대 음모사건을 획책했다. 이에 군 당국은 사태의 중대성을 직감하고 17개 수사반을 조직하여 3개월간에 걸쳐 증거자료를 수집한 후 수사선상에 오른 군인 212명, 군 관계 민간인 320명 등 532명을 검거했다.
제4차 숙군은 1950년 3월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대남정치공작대) 총책 성시백이 군사정보 수집과 군 내부 반란 야기 및 요인 암살 등의 임무를 띠고 잠입했다. 군인 및 군속 50명, 군 관계 민간인 136명 등 186명을 검거했다. 동시에 수사당국은 남로당 정치고문 이주하와 남로당 당수 김삼룡을 3월에 체포하고, 북로당 간부 성시백을 5월에 체포했다.
참고로 성시백은 김일성의 충견으로 김구를 포섭하여 북으로 데려갔던 최고의 간첩으로 지금도 그는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서 1등 공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남한에서 처형된 간첩들의 명단이 빠짐없이 화강석 1.5m의 비석으로 기념되고 있는 것이다. 평양 신미리 애국렬사릉에는 남한에서 활약한 거물 간첩들이 모셔져 있다. 조봉암의 이름도 있고, 최덕신, 홍명희, 김규식, 조소앙, 최동호, 조완구, 윤기섭, 엄항섭, 유동열, 오동진, 양세봉, 장철호, 김삼룡, 이현상, 허헌, 최원택, 박문규, 정진석, 김광진, 방준표(전북도당위원장), 박영발(전남도당위원장), 박우현(충남도당위원장), 김달삼, 이덕구, 현준혁, 강진건, 김용범, 이주연, 이영, 백남운, 이용(이준열사 아들), 홍명희. 정노석, 이만규, 안우생(김구의 비서), 최백근, 이현상, 박정호, 김종태, 최영도(전남위원장). 여운형, 여연구(여운형의 딸) 등의 비석도 있다.
이처럼 4차례의 대대적인 숙군을 통해 군 정보당국은 군인 801명과 군 관계 민간인 526명 등 1,327명을 검거함으로써 군내의 공산세력을 완전히 척결했다고 자신했다. 만일 이들을 처분하지 않고 6.25를 맞았다면 불리하게 내몰리고 있는 정세 하에서 이들은 집단으로 적에게 투항하여 군의 사기를 추락시켰을 것이다. 숙군은 전쟁기를 거쳐 전쟁 이후에도 김창룡 특무부대장에 의해 3차례 더 계속됐다. 숙군은 6·25전쟁을 전후하여 모두 7차례에 걸쳐 1,677명의 좌익분자를 색출 처리했다.
이렇게 철저하게 군내의 간첩들을 숙청했는데도 불구하고 공비토벌사령관 송호성이 서울에서 인민군 소장(원스타)이 되어 전투에 투입됐고, 10대 불가사의라는 결정적 반역질을 총 지휘한 간첩사령관이 있었다. 10대 불가사의를 만들어낸 장본인은 머리가 조직적이고 비상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당시 이 정교한 전략을 짜내서 손수 지휘한 사람이라면 국방차관, 육군참모총장, 이 3인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신성모인가, 장경근인가, 채병덕인가?
신성모, 그는 1891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영국, 인도 국적의 상선에서 기관장과 선장을 하다가 해방을 맞아 미 군정 당시 해군장교로 임관했다. ‘군대’의 ‘군’ 자도 모르고 개념도 없는 마구잡이 뱃놈으로 통했다. 6.25가 발발하자 그는 대통령에게 국군이 북으로 전진하고 있다며 헛소리를 했고, 방송에서는 “점심은 평양 가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 가서 먹는다”며 뻥을 쳤다. 군사적 개념도 지식도 없는 이 사람이 정교한 10대 불가사의의 시나리오를 고안해 냈다고 믿기는 어렵다. 해방 이후 이승만인들 어디에서 군 인재를 발굴했겠는가? 똑똑해 보이고, 조직에 있었던 경력만 있어도 귀한 인재였던 것이다.
채병덕, 그는 1915년 생으로 1933년에 일본육사에 들어가 병참장교로 임관했다. 상관들과 자주 불화를 일으켜 한직으로 돌아다니다 해방을 맞아 육군총장이 되었다. 167cm의 키에 몸무게가 136kg이나 되어 ‘먹보’ ‘뚱보’로 불렸다 한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발생하자 지리산 공비 토벌을 진두지휘하면서 자기부대의 남로당원 색출을 지시했다. 1949년 5월 4일, 6여단(현: 제6보병사단) 8연대 1대대장 표무원과 2대대장 강태무가 5월 2일에 훈련을 핑계로 병력들을 이끌고 월북하는 대사건이 터짐에 따라 5월 8일 이응준이 책임을 지고 육군참모총장에서 물러났고, 그 뒤를 이어 채병덕이 총장이 되었다. 1949년 5월 9일이었다.
채병덕은 장갑차를 앞세워 하동으로 남하하는 북한군 1개 대대를 섬멸하라는 지시를 받고, 새로 창설된 5사단 예하 15연대의 소수 병력만을 지휘하여 하동에 투입되어 무어 대령이 지휘하는 미군 19연대와 합동 작전을 벌이다가 1950년 7월 27일 35세로 전사했다. 이상을 보면 채병덕은 매우 어리고, 몸이 둔하지만, 공비토벌에 앞장섰고, 자기 부대에서 남로당을 색출해내려고 애를 썼다. 이런 사람이 그 정교한 10대 불가사의를 창조할 수는 없어 보인다.
결론적으로 1950년 당시 채병덕은 36세, 장경근은 40세. 신성모는 60이었다. 채병덕은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 보급 병참 등 물자관리를 하다가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공비토벌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갑자기 그의 전임자 이용준 참모총장이 2개 대대의 집단 월북 사태가 발생한 사실에 대해 책임을 지고 하루아침에 물러난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의 전임자 이용준 총장은 1890년 생으로 6.25당시 61세(1890년생)였고, 그는 1915년생이었다. 그것도 6.25발발 47일 전에 인수받아 그야말로 똥인지 된장인지 개념을 잡지 못할 때에 나이 35세로 참모총장이 되었는데 어떻게 그토록 정교한 10대 불가사의를 설계했겠는가? 신성모는 똥오줌 못 가리는 뱃놈으로 통했고, 채병덕은 애송이에 ‘먹보, ’뚱보‘로 불리다가 그보다 26세나 연상인 참모총장이 갑자기 물러나는 바람에 얼떨결에 그 자리를 이어받았던 삼국지 애송이였다. 채병덕, 신성모는 설익은 무개념의 존재였다. 10대 불가사의를 암암리에 지휘할 수 있는 두뇌와 그만큼의 두뇌를 개발시킨 사람은 아무리 보아도 일본제국과 대한민국에서 판사를 하고 내무부 차관에까지 올랐던 당시 40세의 노련한 장경근 밖에는 달리 생각되지 않는다. 이렇게 꼬집어 합리적인 의혹을 제기한 사람은 지금 현재까지 저자 말고는 없다.
2022.8.22.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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