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탐험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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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8-27 15:55 조회3,32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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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탐험 [33]
10.26과 12.12는 합쳐서 김재규-정승화의 내란사건
10.26사건과 12.12사건은 두 개의 별도 사건이 아니라, 10월 26일부터 12월 12일까지 46일 동안에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다. 이 46일 동안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고, 정승화와 함께 혁명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정확히 내란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김재규는 “내가 각하를 시해하면 국민들이 자기를 추앙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3단계 혁명 계획'도 실토했다. 김재규가 평소에 자주 만났던 정승화에게 이 내란 계획을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알려주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김재규가 구속돼 있는 동안 정승화가 취한 행동을 보면 정승화는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발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그의 정국 장악을 향한 행진에는 전두환이라는 장애물이 있었다. 전두환이 가지고 있을 정보가 그의 아킬레스건이었던 것이다. 정승화는 분명 김재규를 석방시켜 정국을 장악하려는 행보를 보였다. 정승화의 행보를 철저하게 내사했던 전두환은 그에게 시간을 더 주면 곤란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12월 6일, 결심을 했다. 그리고 6일 후인 12월 12일에 정승화를 ‘내란방조’ 혐의로 구속했다.
5.17과 5.18은 합쳐서 김대중의 내란사건
10.26 이후의 권력공백기를 맞이하여 국민은 북한의 남침을 가장 걱정했다. 실제로 김일성은 11월, 3호 청사에서 남한에 전민 봉기를 유도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고, 이어서 12월 20일에는 남조선에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인민무력부는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24시간 가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존재하지도 않던 ‘신군부’라는 말은 이때 김일성이 최초로 사용한 단어였다.
4월 21일, 사북탄광 노동폭력사태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노동자를 포함한 전 계급이 들고 일어나 전민봉기를 일으키라고 간첩들에 지시했다. 1980년 3월부터 5.18직전까지 색출한 간첩사건만 7건, 남침징후 첩보 5건에 이어 5월 10일에는 일본내각으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정보까지 입수되어 정부와 군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반면 안보에는 관심조차 없는 3김 시대의 정치권과 재야세력으로 불리는 불순세력들은 때가 왔다며 최규하 주도의 과도정부를 유신잔당이라 몰아치면서 즉시 퇴진하라며 압박을 가했고, 이에 최규하 정부는 연내에 헌법개정을 마치는 대로 정권을 이양할 것을 수차 약속하면서 재야세력이 요구하는 대로 학원자유화를 허락했고, 2월 29일에는 윤보선, 김대중, 지학순 등 긴급조치 위반자 687명에 대해 사면-복권을 단행하는 등 유화조치들을 취했다.
재야세력이 말하는 이른바 ‘서울의 봄’, 신나는 계절이었던 것이다. 김종필은 공화당, 김영삼은 신민당을 이끌고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민당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뛰쳐나와 학생 세력과 노동자 세력을 이끌어온 재야세력을 결집시켜 ‘국민연합’이라는 사실상의 혁명부대를 결성하고 학생과 노동자들을 선동하면서 폭력시위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4월 하순부터 시작된 대학생 시위는 5월에 접어들면서 전국 규모로 확산됐고 이에 고무된 김대중은 5월 7일, 제1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하여 최규하 정부의 즉각 퇴진, 전국내각구성, 모든 구속자 석방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며 정부를 압박했고, 학생들을 향해서는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김재규도 김주열이나 김상진 못지않은 애국 충신”이라며 과격시위를 선동했다.
김대중은 4월 10일, 5월 1일, 5월 10일 3회에 걸쳐 북악파크에서 문익환, 예춘호, 장기표, 심재권 등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 집단을 이끌고 전국 폭력시위에 의한 국가전복 계획을 수립하고 24명으로 구성된 김대중의 혁명내각을 작성했다. 5월 15일은 서울역에 10만 시위대가 모여 버스로 경찰을 깔아 죽이는 정도에 이르렀고, 당시 내무장관은 소요진압이 경찰의 범위를 넘는다며 계엄군의 개입을 요청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역 시위에 극도로 고무된 김대중은 5월 16일, 제2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했다. 5월 22일을 기하여 군인, 경찰을 포함한 전국의 모든 국민은 검은 리본을 달고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정부를 전복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이었던 것이다. 정부가 전복되고, 국가가 혼란에 빠져 남침조건을 마련하도록 해줄 것인가, 아니면 김대중이 이끄는 재야세력과 이들의 조종을 받는 복학생 조직을 분쇄할 것인가! 최규하 정부는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맞이한 정부의 선택이 바로 5.17 조치였다. 5월 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긴급히 소집하고, 10.26 이후 선포됐던 ‘지역비상계엄’(제주도 제외)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5.18일 새벽 2시를 기해 전국 136개 국가시설을 보호하고 31개 주요 대학을 점령하기 위해 25,000명의 계엄군을 배치하는 한편, 5.17 자정을 기해 이른바 김대중 내각을 구상했던 김대중, 김상현 등 24명의 내란음모자들을 체포하고 학생 주동자들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최규하 정부와 계엄당국이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전국은 무법천지가 됐을 것이고, 북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북한군은 제2의 6.25남침을 감행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소용돌이 정국에서 흔들리지 않고 국가를 지켜낸 사람들의 중심에 전두환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관들은 당시 북한의 위협은 별로 없었으며, 비상계엄전국확대 조치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국민에 겁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폭동이고, 신군부의 마음속에 내란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5.17은 내란을 위한 폭동이라는 우격다짐의 판결문을 썼다.
2022.8.2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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