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탐험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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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8-28 13:40 조회3,76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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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탐험 [35]
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뒤바뀐 과정
1988년 2월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태우의 목표는 국정이 아니라 전두환 죽이기로 출발했다. 전두환에는 GDP 600억 달러, 빛 200억 달러의 국가를 GDP 4,000달러에 흑자국으로 만든 엄청난 공로가 있다. 노태우는 취임하면서 곧바로 전직 대통령의 이 엄청난 공로를 치하하고 최고의 훈장을 수여했어야 했다. 하지만 노태우는 출마 시점에서부터 전두환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전두환은 그의 회고록 3권 138쪽에서 이렇게 썼다.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 드라마가 연출된 데에는 오랜 세월 줄곧 나의 그늘에서 지내오면서 콤플렉스가 쌓인 노태우, 김옥숙 내외의 보상심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홀로 한강변에 나가 눈물을 훔쳐야 했던 2인자 시절의 설움과 야속함은 언젠가는 반드시 보상받아야 했을 터이다.”
1988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한 노태우는 4월 1일,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규정했다. 이 역시 전두환을 짓밟기에 눈이 멀어 저지른 반국가 행위였다. 전두환은 그의 회고록 3권 156쪽에서 이렇게 썼다.
“마침내 선거전이 시작되자 야 3당은 나와 5공화국에 대한 공격에 초점을 맞췄다. 6공화국이 5공화국을 모태로 탄생한 정권인 만큼 5공 정권의 연장에 불과하다고 몰아세웠다. 5공과 6공을 싸잡아 민정당 정권에 대한 공세가 가열되자 정부와 여당은 5-6공의 차별화를 통해 공격을 피해나가려고 했다. 노태우 정부는 결국 4월 1일 광주사태를 민주화를 위한 학생과 시민들의 노력의 일환으로 규정하면서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시하고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을 약속했다. 정부가 광주사태에 대한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조치는 노태우 정권에 대한 반감을 가라앉히기는커녕 오히여 반정부 세력의 입지를 강화시켜 격렬한 시위를 촉발시켰을 뿐이다. 격렬한 학원소요는 선거분위기와 맞물려 과격한 정치집회로 확대됐고, 정국은 점점 통제불능 상태가 되었다. 그것은 야당 붐 조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88년 5공 청문회와 광주 청문회가 전국의 안방을 뒤흔들었다. 이 두 청문회는 노태우 정권이 야당 및 재야 반국가 세력과 야합하여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광주 청문회는 전두환을 발포명령자로 몰아갔다. 5.18과 전두환 사이에는 사돈의 팔촌 관계도 없었지만, 노태우와 공산주의자들은 오로지 전두환을 '5.18학살의 발포명령자'로만 몰았다. 전두환에 불리한 증언을 할 사람들만 증언대에 세웠다. 기자들은 허황된 혀위사실을 기사화할수록 박수를 받았다. 이렇게 치달아 오른 여론은 전두환을 완전한 괴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전두환과 이순자는 '악의 화신'이 되었다. 2성장군인 전두환이 4성장군들과 최규하 대통령을 졸개처럼 부려먹으면서 독재를 하고 온 가족들까지 덤벼들어 부정축재를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모략의 화신인 북괴 간첩들의 공작이 작용했을 것이고, 전라도 특유의 엄살과 눈물이 공작의 수단으로 이용됐을 것이다.
전두환과 5.18 사이에는 아무런 끈이 없다
당시 2성 장군에 불과했던 전두환은 지휘 계통상 5.18 진압에 대한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었다. 단지 정보를 획득하고, 그 정보를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짧은 진언을 하는 정보수집기관의 수장이었을 뿐이다. 박대통령을 시해한 중앙정보부는 반역죄를 저지른 기관이라 모든 요원들이 얼굴도 들지 못하고, 주눅 들어 있었다. 최규하는 이런 커다란 정부조직을 개점휴업 상태로 방치할 수 없었다. 중정을 가동시킬 수 있는 적임자가 전두환 밖에 없다고 생각한 최규하는 그를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했다. 업무가 전문적이고, 방대한 규모를 가진 중앙정보부와 또 다른 방대한 조직인 보안사라는 두 개의 조직을 지휘하다 보니, 그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신경을 쓸 여력조차 없었다.
전두환이 5.18에 관련하여 대통령에 진언한 것은 1980년 5월 24일, “각하께서 한번 광주에 가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한 마디뿐이었다. 그리고 최규하는 본인이 직접 광주시민 앞에 나서서 시위군중을 설득시켜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발표문을 써가지고 5월 25일, 광주로 내려갔다. 대통령이 직접 시민들 앞에 서서 연설을 하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을 장군들이 울면서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의 연설문은 공중 비행기 방송으로 대체됐다.
억울한 비극의 원천
저자는 21년 동안의 연구와 투쟁을 통해 5.18은 북한이 저지른 게릴라전이었다는 데 대한 42개의 팩트(사실 증거)를 정리했다. 저자에게 징역형을 선고한 재판부도, 광주 소재의 5.18연구소와 5월단체들이 나섰지만 이 42개 증거자료를 공격하지는 못했다. 오로지 “5.18은 민주화운동인데 왜 북한군을 개입시키느냐, 이는 5.18의 명예를 허물기 위한 범행이다” 이것이 저자를 단죄한 판결문의 핵심이다.
전두환은 그의 회고록 1권에서 저자의 연구결과를 인정하면서 5.18 직후 5.18의 실체에 대한 연구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첫째, 5.18시위 당시 현장 정보를 획득하려면 고급 정보요원들을 투입시켜야 했는데, 당시 광주의 치안 상태는 경찰이 모두 도주한 무법천지였기 때문에 정보요원을 사지로 보낼 수 없었다고 썼다. 광주소요가 진압된 이후에 사태에 대한 실체를 규명하려 대통령에 보고했지만 최규하는 “아서라, 그냥 무조건 덮고 가자” 강경하게 명령하는 바람에 조사를 하지 못했다고 했다.
2010년 천안함 폭침의 원인은 오바마의 아이디어와 이니시어티브에 의해 북한 소행인 것으로 증명됐다. 행정부 단위에서 미국, 영국, 호주 등 여러 나라에서 보낸 과학자들과 국내 과학자들을 끌어 모아 사고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니까 정치꾼들과 좌익들이 난장판을 벌일 수 없었다. 반면 2014년의 세월호 사고에 대해서는 박근혜가 행정부 단위에서 이명박이 취했던 과학적 이니시어티브를 취하지 않았다. 과학을 떠난 ‘이슈’는 정치꾼들과 협작꾼들의 난장판 세계로 넘어갔다. 5.18도 마찬가지다. 1980년 바로 그때에 분석관들이 북한군 개입에 대한 의혹을 제기됐더라면 5.18역사가 지금처럼 난장판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분석의 산물
역사가 어떻게 정리되는가는 당대 분석력의 함수다. 저자는 5.18당시 수집돼 있는 자료를 23년이 지난 2003년에 획득하여 진실을 밝혀냈다. 반면 똑같은 자료를 기록한 당시의 보안사령부와 안기부 분석관들은 5.18의 진실을 밝혀내지 못했다. 저자가 다른 분석관들과는 달리 이 엄청난 진실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저자의 학력과 경력이 그들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역사를 떼법 집단에 의해 강탈당한 원인은 바로 정보분석관들의 수준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역사가 ‘분석’의 공간에서 ‘정치집단’의 공간으로 넘어가게 된 분수령이 바로 당대 분석관들의 분석력 부족에 기인했던 것이다.
2022.8.28.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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