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탐험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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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8-29 01:13 조회4,00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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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탐험 [38]
이순자 여사의 1990년 10월 말 수기
전두환 내외는 1988년 11월 23일부터 1990년 12월 30월까지 2년 2개월 8일 동안 백담사에 유배되었다. 노태우는 2-3개월만 피해 있으라고 전두환을 설득했었다. 그런데 노태우는 약속을 어기고 ‘해외 장기 여행을 가라느니, 제3의 장소를 거쳐야 연희동에 갈 수 있다느니 언론플레이를 하면서 전두환의 연희동 귀환을 방해했다. 1990년 10월, [백담사에서 세 번째 겨울을 맞으며]라는 제목의 이순자 여사의 수기가 언론에 공개됐다. 전두환은 그의 회고록 3권 225쪽에서 이렇게 썼다.
“1990년 10월 말, 아내의 수기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 일이 나의 서울 귀환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 수기에는 . . 백담사 생활기록이 오롯이 적혀 있었다” 이순자 여사의 수기는 전두환 회고록 3권 226-245쪽, 20쪽에 걸쳐 소개돼 있다. 어떤 내용인지 독자들이 알고 싶어 할 것 같아 최대한으로 압축해 본다.
“지금이 1990년 동짓날이니 백담사에서 보낸 세월도 벌써 두 해가 돼가는 셈입니다. .아시다시피 그것은 즐거운 여행이나 외출의 길이 아니라 고통에 찬 은둔의 길이었습니다. . 그분께선 바로 그 정든 집, 응접실에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셨습니다, 청와대를 떠난지 아홉 달 반만의 일이었습니다. . 백담사로 떠나던 아침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침목을 지키고 계셨지만, 저는 차 속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몇 번이고 곁에 계신 분을 생각해야지 다짐을 했지만 침을 길이 없었습니다. . 백담사는 참 멀기도 했습니다. 며칠동안 잠을 자지 못한데다가 빈속이어서 멀미도 심했습니다. . . 38선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 곳을 지나고도 차는 북쪽을 향해 한참을 더 달렸습니다. 백담사 입구에서부터 다시 수십 리의 외길 끝, 계곡과 계곡 사이에 통나무로 얽어 만든 외나무다리가 보였습니다. . 그 외나무다리 뒤로 낡고 초라한 작은 절 하나가 보였습니다. 그것이 백담사였습니다. 스산한 초겨울의 저녁 빛 속에 비친 백담사는 매우 초라해 보였습니다. . .절에서 저희 내외에게 내어준 방은 현관도 덧문도 없이 해진 창호지문 하나가 출입문 구실을 하고 있는 두 평 남짓한 남루한 작은 방이었습니다. . . 아궁이에 불을 때자 매운 연기가 방안으로 들어와 눈을 뜰 수 없었습니다. 외풍은 또 얼마나 센지 . . 우선 연기가 들어오는 뒷문을 봉하고 담요에 끈을 내어 달아 외풍을 막았습니다. . 촛불을 켜고서 그분과 마주 앉았습니다. 입을 열어 그분을 위로해드려야 할 텐데 그 어떤 것도 말이 되어 나와 주지 않았습니다. . ."여보, 밖에 나가 좀 볼까?"그분이 먼저 제게 말을 건네주셨습니다. 묵묵히 두꺼운 옷을 입고 그분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 기자들이 달려왔습니다. 그분은 웃으시면서 "추운데 수고 많으십니다" 하면서 손을 내미셨습니다. 마음에는 눈물이 가득한데 웃음으로 애쓰던 제 모습이 기억납니다. . 자리에 누웠지만 물소리, 바람소리, 풍경소리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정황이 없어 말 한마디 변변히 나누지 못하고 떠난 막내아들 재만이가 떠오르자 가슴이 저며왔습니다. . 그 애가 받았을 충격에 뚠눈으로 밤을 지샜습니다. . 새벽 3시 50분, 목탁소리에 막내에 편지를 썼습니다. 백담사의 첫날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 . ”
“솔직히 말해 백담사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저희 내외는 종교를 갖지 않아 종교예식이나 기도의식이 낯설었습니다. 뚜렷한 신심도 없이 영하 18도의 추위 속에 법당에 나가 새벽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새벽 3시에 일어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목욕은 엄두도 못 낼 형편이어서 새벽이면 아랫목에 놓아둔 대야에 수건을 적셔 법당으로 나가곤 하였습니다. . 말이 은둔이지 제겐 '귀양살이‘처럼 느껴졌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눈을 감으면 잠 한번 실컷 주무시지 못하고 고단하게 살아온 그분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 오랜 군생활을 거쳐 청와대에 들어가신 후에도 7년 반의 세월을 새벽잠 한번 마음놓고 누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임기가 끝나시면 제일 먼저 하고 싶으신 일이 무엇입니까?" 묻는 질문에 그분은 말씀 하셨습니다. "우선 잠이나 실컷 자고 싶습니다.“
“ 1988년 2월 25일, 그분은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수현이 할아버지가 되어 이웃들 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소박한 행복도 잠시, 근거 없는 소문과 비리 보도가 저희 내외를 괴롭혔습니다. 거의 아홉 달 동안 저희 부부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고통스러울 때면 그분을 위해 목슴이라도 바칠 것처럼 충성을 다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세상이 변하니 저희 내외를 피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남에게 질세라 앞장서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정직하고 용기 있게 한 마디만 해주면 모든 것이 올바로 밝혀진 텐데 그 누구도 저희를 위해 입을 열려 하지 않았습니다. . 저를 아껴주시던 친척들이 감옥에 가셨습니다. 그분들의 정겹던 모습들이 떠올라 눈물이 났습니다. . . ”
“어느 날 법당문을 나와 뒷산을 걸으면서 저는 보았습니다.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과 거센 바람에도 꿋꿋이 버텨왔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밤사이 소리 없이 내린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 제 마음도 그 쓰러진 고목과 같았습니다. . 전 지금도 기억합니다. 며칠 밤, 단 한잠도 주무시지 못하고꼬박 앉아 밤을 지새우시던 그 분의 모습을 말입니다. . .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새해가 밝아오자, 저희 내외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 한 달 내내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 방에서도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앞에 있는 저희 내외가 갑자기 초라해 보였습니다. 자신들의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졸부로 보인 것입니다. . ”
“ 1989년 2월 6일, 음력 정월 초하룻날, 백일기도를 시작했습니다, . .새벽 3시 30분 찬물에 수건을 적셔서 냉수마칠을 한 후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고 법당에 들어갔습니다, 부처님전 다기에 올린 물이 곧 얼어붙었습니다. . 잡념을 몰아내기 위해 큰 소리로 불경을 외었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루에 세 번씩 올렸습니다. . 기도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 매 기도시간마다 108번 절을 해야 하는 일, 고기는 물론이고 멸치국물조차 없는 완전한 채식을 지켜야 하는 일, 그 어느 하나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백일 기도를 하던 도중 저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도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덜어내기 위한 싸움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영하 27도에서 음식 탐을 덜어내고, 고단하게 하루에 서너 번씩 108번씩 절을 하고, 불경을 외우면서 분노, 미움, 배신감, 억울함 등의 잡념을 몰아내는 일, 실천해보니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 잡념을 몰아내려 할수록 잡념은 더욱 집요하게 파고 들었습니다. . , 분노가 또 다른 분노를 선동하고, 미움이 또 다른 미움을 선동했습니다. .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울화병이 이해됐습니다. .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이곳에서 미워할 수도 분노할 수도 없다면, 아니 미워하고 분노할 권리마저 제 가슴속에서 덜어버린다면 저는 죽어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 100일 기도 중 70일이 지났습니다. . 저를 괴롭혀 왔던 억울함, 증오 등 모든 번민이 사라졌습니다. . 하지만 그것은 ‘덜어내어진 것’이 아니라 ’도려내어진 것‘이었습니다. . 빈 마음이 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내 탓이라는 것이었습니다. . . 제가 당하는 고통은 전생의 업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러한 깨달음은 제게 커다란 축복이었습니다. . 마음의 평안을 찾자, 저희 부부는 갑자기 젊어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 . “
“청와대를 떠나오던 날, 그분의 팔에 안겨 연희동 집으로 돌아왔던 손녀딸 수현이는 어느 날 백담사에 있는 저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왜 집에 안가고 여기에 사세요?’, 먼 훗날, 그 손녀딸에게 저희 내외가 왜 백담사로 나와 살았어야 했는지, 그리고 백담사가 저희 내외에게 얼마나 소중한 곳이었는지, 잘 말해주기 위해서라도 저는 이곳에 있는 날까지 그분을 모시고 열심히 정성 다해 살아갈 것입니다. . 법당에선 지금, 저녁기도 시간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들려옵니다.”
저자는 전두환과 노태우의 11년 후배로 육사를 졸업했다. 그 동안 저자는 육사의 상징적 인물인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육사 세계의 이야기들을 늘 접하면서 살았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바라보면서 영화<아마데우스>의 모짜르트와 살리에리와의 이야기가 연상이 된다. 모짜르트의 천재성과 뛰어난 음악성을 늘 시기, 질투하고 자신은 결코 모짜르트를 이길 수 없다는 자기 한계를 깨닫고는 마침내 그를 죽게 만드는 살리에리, 그의 모습에 노태우가 겹쳐서 보이는 것이다.
또한 전두환 회고록과 위의 이순자 여사의 백담사 수기를 읽으면서 그리고 저자가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 생각한 것이 있다. 노태우는 역사에 나타나서는 안될 ‘귀태’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그 ‘귀태’는 노태우 한 사람만이 아니라,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문제인에 공통적으로 붙여져야 하는 주홍글씨이지만.....
2022.8.2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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