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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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9-02 15:58 조회5,93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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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말은 영혼의 거울, 그 사람의 영혼이 실려 있다. 말에 의해 전두환은 ‘악’(Evil)의 화신이 됐고 막가파 독재자가 됐다. 전두환을 ‘악’으로 묘사한 사람들은 연구를 해서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영혼에서 분출되는 대로 말을 한 것이다. ‘악마’라는 이미지는 전두환이 실제로 악마이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악마의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상상해서 조각한 이미지다.
해방 이후에 등장한 우리 영웅들은 누구일까?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꼽을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에 관한 책들은 많은 사람들이 썼다. 하지만 전두환을 솔직하게 묘사한 책은 아직 없다. 아마도 국민인식 속에 ‘전두환 이미지’가 원체 험하게 각인돼 있는 데다 그에 대해 무서운 적개심을 분출해온 공산세력의 역린을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5.18이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김일성 부자가 주도한 게릴라전이었다는 결론을 냈고, 그런 결론을 뒷받침하는 정황증거를 무려 42개나 밝혀놓았다. 하지만 5.18세력도, 저자를 재판한 적색 판사들도 이 42개 증거가 허위라는 점을 밝히지 못했다. 공산주의자들은 5.18과 전두환을 동일체로 묶어 놓았다. 따라서 5.18이 민주화운동이 아니라는 것은 곧 전두환이 악마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연구해보니 전두환은 ‘악’(Evel)이 아니라 ‘선’(Good)이었다. 뒷골목 조폭의 두목이 아니라 공명정대한 노선에서 학습하고 사색하고 남을 배려하는 신사로 살았던 남다른 애국자였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앞으로 상당 기간 전두환과 같이 애국심 있고, 능력 있고, 비전과 직관력을 가진 ‘위대한 리더’를 다시는 대통령으로 갖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나라 대통령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젊은 엘리트 두뇌집단에 의한 ‘선진 경영’을 했다. 그 자신도 미국식 교육을 받았고, 그가 데려다 쓴 두뇌들도 미국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었다. 전두환 이후에는 엘리트 경영이 사라졌다. 정치모리배들이 대통령 되어 논리와 효율을 무시한 포퓰리즘 정치를 했고, 북괴에 굴종하고 퍼주지 못해 안달하는 정치를 했다.
전두환을 가장 많이 구박한 김영삼은 “머리는 빌려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는 말을 했다.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었다. 그러다 대형 사고를 연달아 내더니 종내에는 국치사건 IMF를 불러왔다. 머리가 빈 사람은 먼저 점령하는 사람이 임자다. 김영삼의 빈 머리는 공산주의자들과 잡배들이 점령했다. 머리가 없는 그의 눈에는 잡배들만 보였고, 잡배들과의 대화가 가장 편했다. 엘리트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효율이 뭔지도 몰랐다. 원전과 원자탄이 똑같은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반면 전두환은 독서광이고 학습광이라 엘리트 두뇌집단을 지도하고 지휘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잡초 속 노송처럼 혼자만 특출 난 인재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해방을 맞고 보니,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백성이 75%나 되었고, 문맹률이 85%나 되었고, 학교라고는 서당밖에 없었다. 이런 허허벌판에 이승만은 허허벌판에 미국식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를 세웠다. 껍데기는 세웠는데 인물들이 없었다. 인재를 구하려 하니, 일본 고등교육을 받은 지극히 소수의 조선인들뿐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슈퍼 거인’이었지만, 그 수하들은 잡동사니들이었다. 결국 이승만 리더십은 ‘시스템 리더십’이 아니라 ‘원 맨 플레이 리더십’이었다.
슈퍼 거인 박정희 역시 ‘원 맨 플레이 리더십’이었다. 똑같은 ‘원 맨 리더십’이었지만 두 대통령은 ‘개방의 폭’이 달랐고, 스타일이 달랐다. 전자는 지시형 리더였고, 후자는 수렴형 리더였다. 이승만은 철저한 반일주의자였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교육을 받은 식자들의 수가 적은 데다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들을 제외시키려 했다. 이러하니 인재가 어디 있었겠는가. 1948년 창군을 했지만 군의 수장인 국방장관은 ‘군(軍)자도 모르는 뱃놈’ 신성모가 맡았고, 육군참모총장은 일본군에서 군수물자를 다루던 34세 애송이 채병덕이 맡았다. 한 마디로 이승만은 인재 없는 황무지를 홀로 누빈 외로운 지휘자였던 셈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일본인, 한국인을 가리지 않고 널리 활용했다. 각 분야의 전문가를 폭넓게 찾아 조언을 구하고, 각기의 기술과 능력을 활용했다.1965년 일본과 화해를 했다. 일본으로부터 산업자금 8억 달러를 유치하여 경제 개발의 종자돈을 마련했다. 일본 관광객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와 한국에 돈을 뿌렸다. 그 돈으로 포항제철 등 수많은 플랜트와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했다. 그 중 포항제철은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건설의 상징이었다.
1978년 8월 26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한다는 등소평, 동경 부근의 제철소 ‘기미쓰’를 찾았다. 일본철강의 총회장 ‘이나야마’가 그를 안내했다. 등소평이 간청을 했다. “포항제철과 똑같은 것을 중국에 세워줄 수 없겠는가?” 이에 ‘이나야마’ 회장이 답했다. “포항제철은 돈과 기술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다. 박태준이라는 특출한 인물이 있었고, 박정희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이 그를 도왔다.”
제2대 주한 일본대사로 부임한 가나야마는 박정희의 부탁을 받고 강경했던 사토 총리와 일본 산업계 총리라는 ‘이나야마’를 설득해 포항제철을 탄생시켰다. 이어서 충주비료, 호남정유 등 박정희 대통령의 소원인 중화학공업을 건설하는 데 일본의 기술지원이 이어졌다. 지금의 공단들은 일본의 부품과 소재를 들여와 조립하여 주로 미국으로 수출하는 산업구조로 출발했다. 이런 일본의 인재와 기술과 협동관계는 반일정신이 투철했던 이승만에 어울릴 수 없었다.
박정희 리더십은 당시의 환경 하에서는 최상의 리더십이었다. 태평양 전쟁 이후 10여 년 동안, 일본의 목표는 ‘미국 제품을 카피하자’(Copy the West)였다. 트랜지스터로 라디오를 만들고, 워크맨을 만들고, 캠코더를 미국보다 먼저 만들어낸 1950년 중반으로부터는 “미국을 따라잡자‘(Catch up with the west)였다. 우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박정희는 ’카피 생산‘ 시대를 열었고, 전두환은 독자적 능력으로 오늘날 세계적인 IT 강국, 문화 강국, 체육 강국을 만들어 냈다.
건국 이후 지금까지, ‘시스템’ 차원에서 엘리트 경영을 한 대통령은 오로지 전두환뿐이었다. 전두환의 원 맨 플레이 능력도 매우 뛰어났지만, 전두환 시대에는 원 맨 플레이가 통할 수 없이 사회가 복잡하고 방대해졌다. 1860년대의 히어로우, 에디슨은 발명의 신이었다. 그의 발명품은 당시 미국 경제에 6%를 기여했다. ‘전구’는 에디슨의 로고였다. 지금은 인공위성의 시대, 에디슨 혼자 탄생시킬 수 있는 발명품이 아니라 시스템의 산물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에디슨이었다. 반면 전두환은 ‘시스템 리더’였다.
이처럼 모든 리더십은 시대적 산물이다. 논리적 분석에 의하면, 이승만의 리더십은 1940-50년대 환경에서의 최고 결작이었고, 박정희의 리더십은 1960-70년대 환경에서 피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꽃이었고, 전두환 리더십은 1980년이라는 20세기에 어울리는 선진 리더십이었다.
보석보다 더 귀한 배움의 교재 ‘시스템 리더십’,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그리고 무식했던 정치꾼들에 의해, 머나먼 태평양 깊은 물속에 침몰돼 있었다. 저자는 침몰돼 있던 ‘전두환 호’를 인양해 [전두환 리더십]으로 포장해 놓았다. 이를 접하게 될 독자들은 책의 첫머리에서부터 최종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단 한순간도 경이로운 감정을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감탄과 존경과 애잔함이 쉼 없이 이어질 것이고, 끝 모르게 그를 구박해온 옳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에 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종내에는 뜨거운 눈물을 주체하기 어려울 것이다.
2022. 9.
2022.9.2.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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