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는 왜 갑자기 전두환을 감옥에 넣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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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4-03-27 14:30 조회11,06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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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는 왜 갑자기 전두환을 감옥에 넣었나?
민주화투사라는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자 그는 하나회를 정리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인기의 요체를 실감한 김영삼은 군사정권까지 때리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인기는 더욱 올랐다. 민주화에 대한 막연한 열기가 전국을 휩쓸었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김영삼은 자신이 민주화의 로고로 등장하려 있다. 빨갱이들의 조종에 놀아난 것이다, “12.12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지만 역사 평가는 후대에 맡겨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을 가다렸다는 듯이 12.12에 관련된 정승화 일파와 5.18에 관련된 빨갱이들이 동시에 일어섰다. 1993년7월19일 정승화, 장태완 등 22명이 전두환-노태우 등 34명을 반란 및 내란죄 등 혐의로 대검에 고소장을 냈다. 12.12사태는 군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정권찬탈을 목적으로 일으킨 군사반란이라는 것이 요지였다.
이로부터 1년 3개월 10일 후인 1994년 10월 29일, 검찰은 12.12고소-고발사건에 대한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12.12를 “군형법상의 군사반란사건”으로 규정했고, 피고소-피고발인 전원에 대해 반란죄를 인정했다. "12.12사건은 소장파 군부세력의 리더인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군권을 탈취하기위해 치밀한 사전계획 하에 군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승인 없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연행하고, 병력을 불법동원 해 군 지휘체계를 무력화시킨 명백한 군사반란 사건이다."
하지만 검찰은 이들 모두를 법정에는 세우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38명중 전두환-노태우 등 34명에 대해서는 14년간 국가발전에 기여한 점을 평가하고, 법정에 세울 경우 국가적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이유로 기소유예를, 공소시효가 지난 정호용 등 4명에 대해서는 ‘공소권 없음’이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서울지검 조준웅 1차장검사는 12.12가 내란죄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당시 대통령 등 헌법기관이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에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한 내란죄는 인정되지 않는다. 이제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후세에 맡기고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이번 검찰의 결정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상은 ‘죄는 있지만 역사평가는 후대에 맡기자’는 김영삼의 발언에 검찰이 법적 고무도장을 찍어주는 것이었다.
이어서 5.18 시위를 획책했던 정동년 등 구속자-부상자-사망자가족 등 322명이 주동이 되어 1994.5.13일 오후3시 전두환-노태우 등 5.18 당시 대대장급 이상 신군부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죄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고소장이 접수 된지 1년 2개월만인 95년 7월 18일, 서울지검 공안1부(부장 장윤석)는 피고소-피고발인 58명 전원에 대해 ‘공소권 없음’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이들을 불기소 처분했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고소인과 피고소인, 참고인 등 모두 269명의 진술과 관련 자료를 종합해 본 결과 신군부가 취한 행위들은 10.26으로 야기된 권력공백기에 12.12를 통해 군을 장악하여 제5공화국이라는 새 정권을 창출해내기까지의 전형적인 통치행위이기 때문에 내란죄 등에 해당되는지 여부를 판단할 사법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한마디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죄는 인정하지만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김영삼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검찰이 철저한 김영삼의 시녀였던 것이다.
1995년 10월 19일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의 비자금을 폭로했다. 불똥은 노태우에게만 튄 것이 아니라 노태우로부터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던 김영삼과 김대중에게도 튀었다. 김대중은 1995년 10월 25일부터 그달 31일까지 중국 ‘조어대’(영빈관)에 있었다. 비자금 문제가 터지자 김대중은 동행했던 참모들과 한마디 의논도 없이 그가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만일 검찰이 노태우 비자금의 향방을 추적하게 되면 그가 노태우로부터 받은 비자금 전모가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사전에 양심선언을 한 것으로 보였다. 여기에는 김영삼을 향한 비수도 꽂혀있었다. 김대중의 폭로는 김영삼의 가슴에 꽂히는 화살이었다. 김대중이 노태우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면 김영삼은 얼마나 큰돈을 받았겠느냐, 이런 여론이 확산된 것이다. 이 따가운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김영삼은 특유의 승부수를 띄워 국면 전환을 시도했다.
그를 향해 집중돼 있는 검은돈의 의혹을 피해가기 위해서는 노태우와 전두환을 희생양으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전직 두 대통령을 희생시키면 전 사회가 충격에 빠질 것이고, 이 충격에 의해 노태우 밥상머리에서 대통령이 되었다는 세간의 조롱도 묻어 버릴 수 있을 것이고, 그에게 집중됐던 비자금 수수 여론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따라 1995년 11월1 6일. 노태우가 2,358억 9,600만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전격 구속되었고, 11월 24일. 김영삼이 5.18특별법을 제정하라 지시함으로써 11월 30일에 특별수사본부가 발족되고 정당과 국회가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대통령의 발언이 바뀌자 검찰의 입장도 바뀌고 헌법재판소의 권위도 추락했다.
12월 3일 전두환이 경남 합천에서 경찰에 의해 전격 구속되어 안양교도소에 구속수감 되었다. “노태우 등 33명의 군부 장교들과 공모하여 대통령의 사전재가 없이 5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육본 중앙청 등을 장악하여 군권을 탈취하였다는 혐의”인 것이다.
이런 약사가 말해주듯이 5.18에 대한 재판은 순전히 김영삼의 상황 돌파 필요성에 의해 시동되었고, 빨갱이 검사들과 빨갱이 법관들이 인민재판식 여론몰이에 영합하여 판결문을 쓴 정치재판이요, 역사를 뒤집는 역사쿠데타였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학문이다. 분석에 훈련된 학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신중하게 써야 하는 것이지, 법을 다루는 법관들이 단기에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1996년의 법관들은 12.12 및 5.18에 대한 역사를 다시 썼다. 법이 학문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법은 광활한 사회 분야 속에서 극히 좁은 한 부분을 차지하고, 이 속에 사는 검사들과 법관들은 역사를 쓸 만큼 훈련되어 있는 사람들도 아니고, 역사를 조명할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었다. 더구나 빨갱이 법관들이 시간에 쫓기면서, 법정에서 쓴 역사를 진실한 역사요 완전한 역사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2014.3.2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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