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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으로 가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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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4-03-08 00:13 조회9,1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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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으로 가는 배


오음리! 파월 장병들에게 월남의 기후, 지형, 작전요령에 이르기까지의 기본지식을 알려주고 새로운 환경에 대비하기 위한 전투훈련을 시켜주는 "파월장병교육대"가 설치돼 있던 곳이다. 설치 목적으로 보아서는 한없이 고마워해야 할 곳이지만 막상 경험해 보니 기억하기조차 싫을 만큼 기분 나쁜 곳이었다. 춘천에서 오음리 행 버스를 탔다. 험준한 산을 여러 구비 넘었다. 달팽이처럼 꼬불꼬불한 비포장 도로를 아슬아슬하게 오르내릴 때마다 천야만야 새카맣게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가 그야말로 아찔했다. 두 시간 정도 마음을 졸이고 나니 깊은 분지가 나타났다.

항아리처럼 푹 파여진 분지는 완전 찜통이었다. 바람 한 점 없고, 땅이 뿜어내는 열기에 숨이 콱콱 막혔다. 악질적인 기후가 월남을 쏙 빼 닮았다. 이 찜통 속에서 6월 무더위를 견뎌낸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말이 교육대이지 교육과 훈련은 시간 때우기였다. 솔잎마저 축축 늘어지는 땡볕 더위에 새롭게 배우는 것도 없이 하루 종일 철모를 쓰고 뜨거운 직사관선에 노출된다는 건 고마운 훈련이 아니라 일부러 주는 고통으로 보였다.

대위나 소령 급의 피교육자들이 나서서 돈을 걷었다. 기간 요원들에게 잘 봐달라는 뜻으로 전달되는 돈이었다. 약효는 곧바로 나타났다. 많은 훈련이 생략되고 축소됐다. 막상 월남에 가보니 오음리 교육대는 전혀 불필요한 곳이었다. 월남에 필요한 지식은 월남 현지에 가서 야 비로소 흡수할 수 있었다. 오음리에서 들려준 이야기는 교육관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지어낸 소설에 불과했다. 파월장병교육대는 군의 자리를 늘리기 위해 이용한 그럴듯한 명분을 악용한 부정한 곳으로 보였다. 몇몇 장군들의 빗나간 발상으로 인해 국가예산이 낭비되고 32만 명의 파월 장병이 불필요하게 생고생을 하게 된 것이다.

전쟁터로 떠나는 마당이라 누구나 가족을 그리워했다. 살아서 돌아올지 죽어서 돌아올지 모른다며 풀들이 죽어 있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전우들의 심리적 약점을 악용하여 적은 돈이나마 착취한다는 것은 상상 밖의 야비한 행위들이었다. 출국하는 날 아침, 파월장병들은 춘천까지 다섯 시간에 걸쳐 뙤약볕 아래 도보 행군을 했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발목이 아파 거의가 절뚝거렸다. 더위를 먹고 쓰러지는 장병도 많았다. 군대 상식대로라면 이들은 차량으로 수송됐어야 했다. 수송 예산도 이미 반영됐을 것이다. 아마도 문서상에는 차량으로 수송한 것으로 꾸며 놓고 그 휘발유를 내다 팔았을 것이라는 불평들도 있었다. 고통의 오음리에서 나와 같이 훈련을 받고 파월한 하사관들 중 여러 사람들이 전사했다. 전사한 전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주머니에서 코 묻은 돈을 받아낸 교육대 간부들의 모습들이 오버랩 되어 대조되기도 했다.

1951년 1.4 후퇴 때 충청도 음성으로 피난을 나갔다 돌아오니 온 마을이 불타 있었다. 구둘 밑에 파묻은 쌀과 김치가 불에 끄을려 매연 맛이 배어 버렸다. 주민들에 먹을 게 없었다. 20대 후반의 젊은 여인이 머리에 꽃을 달고 히죽 히죽 웃고 다녔다. 어쩌다 제 정신이 돌면 4살 난 여아를 부둥켜안았고, 정신이 나가면 팽개쳤다. 어느 날 그 여인은 마을 밖 신작로 배수로에 하늘을 보고 잠들었다. 여아는 엄마의 젖에 입술을 대고 이따금씩 눈만 깜박였다. 파리 떼가 여아의 눈에 몰려들었다. 쫓을 힘도 없었다. 어쩌다 눈을 감았다 뜨면 조금 날아올랐다 다시 내려앉았다. 눈 속에 마지막으로 남은 습기를 빨기 위해!

우리 사회에는 위의 여아의 처지로 상징될 수 있는 불상한 인구가 있고, 파리 떼로 상징될 수 있는 냉혈의 인구들이 있다. 위의 교육대 이야기는 일반 사회와 비교해보면 애교급에 불과하지만 순수해야 할 군에서 더군다나 목숨을 걸고 이역만리로 떠나가는 전우들을 상대로 이런 일을 저지른다는 것은 액수에 관계없이 성격 자체로 일단은 서글픈 일이었다.

춘천역이었다. 부산행 특별열차에 몸을 실었다. 고국을 등지고 전쟁터를 향해 떠난다는 기막힌 절박감보다는 우선 지긋지긋한 악마의 소굴을 빠져 나왔다는 안도감이 앞섰다. 여기 저기서 콧노래가 들렸다. 웅성웅성 이야기 소리도 들렸다. 기차가 춘천역에서 점점 멀어지자 차츰 이별의 아픔과 전쟁의 공포감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부산에 이르기까지, 기차는 무거운 침묵만 싣고 달렸다. 부산항. 군악대가 경쾌한 군가와 유행가를 쉴 새 없이 연주했지만 배웅 나온 가족이나 떠나는 병사들의 무거운 마음에 별로 기별을 주지 못했다. 여학생들이 단체로 나와서 쉴 새 없이 노래를 불러줬지만, 장병들의 눈망울은 가족을 찾는 데만 분주했다. "'사랑해", "몸조심해", "무사히 돌아와야 해, 꼭, 알았지?"; 이리 저리 가족을 찾아내서 몇 마디 나누기도 바쁘게 환송행사는 끝이 나고 말았다. 생전 처음 보는 2만 톤 짜리 군함에 승선했다. 고층 아파트 몇 개를 포개놓은 것만큼 거대했다.

투박한 뱃고동 소리가 무겁게 깔리면서 배는 부두로부터 한 뼘씩 멀어져 갔다. 몇몇 병사가 가지고 있던 라디오에서 "당신과 나 사이에"라는 애조 띈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몇 번씩 울려 퍼지는 뱃고동 소리는 터질 듯한 이별의 아픔을 더욱 아프게 했고, 파월장병과 그 가족들 모두의 가슴에 일생 내내 지워지지 않는 긴 여운을 남겨놓았을 것이다. 살아서 돌아온 용사들에게는 추억의 연주곡으로, 전사한 용사들의 가족에게는 가슴을 에이는 진혼곡으로 길이 남아있을 것이다. 부산항 전체가 손바닥만하게 멀어져 가더니 이내 수평선 밖으로 사라졌다. 가슴을 에이던 이별의 애절함도 몽롱한 과거 속으로 희미하고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서서히 배멀미가 찾아들었다. 청소구역이 할당됐다. 함상 생활이라는 또 하나의 군대 생활이 강요되었다. 상냥하고 통통하게 생긴 대위가 오음리에서부터 나를 친근하게 대했다. 그는 나를 보좌관이라고도 불렀고 때로는 애인이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그가 또 함상에서 나를 보좌관으로 이용했다. 그가 맡은 일은 모조리 나의 차지가 됐다. 나는 그를 대신해서 동료들에게 청소구역을 할당하고 청소상태를 검사하고 다녔다. 원래 나는 위가 약해서 배멀미가 남보다 더 심했다. 나도 남들처럼 주어진 구역만 청소하고 침대에 누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때마다 대위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더러는 청소를 하지 않고 꾸물대며 짜증을 내는 장교들도 있었다. 나보다 훨씬 튼튼한데도.

3일이 지나니까 배멀미가 가시고 차츰 얼굴들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갑판 위로 올라와 항해를 즐겼다. 망망 대해를 마치 내 몸으로 직접 가르고 가는 것 같은 쾌감도 들었다. 시커먼 바다 물을 내려다보면서 깊고 험한 물살에 공포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르는 물고기,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에 한동안 정신을 빼앗기기도 했다. 망망대해의 밤하늘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손을 길게 뻗으면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별들이 내려와 있었다. 수없이 많은 별똥별이 ‘늘어진 연줄’처럼 기다란 곡선을 그리며 쉴 새 없이 떨어져 먼바다 위에 내렸다.

흰 가운을 입은 필리핀 종업원이 딸랭이 종을 흔들고 다니면서 식사시간을 알렸다. 함정의 장교식당은 넓고 깨끗했으며 피아노도 한 대 놓여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피아노에 앉아 째즈곡을 치고 나가는 미국인 종업원이 멋있어 보였다. 식탁에는 영어로 쓰여진 메뉴판이 놓여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내가 앉은 식탁 사람들은 나에게 메뉴를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라고 해서 영문 메뉴판에 익숙한 건 아니었지만 단지 필리핀 종업원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그들은 나의 영어 실력을 신뢰했다. 내가 메뉴를 정해 종업원에게 알려주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미투 미투"(me too)를 반복했다. 미투 식 주문 때문에 주방에는 몇 일 안 가서 닭고기와 쇠고기가 동이 났다. 반면 다소 낯선 양고기와 칠면조 고기 같은 것들은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하여튼 식탁에 앉아서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껏 주문하고 서비스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옛날옛적 황금시절(good old days)의 상징이었다.

일 주일만에 나트랑이라는 유명한 항구에 도착했다. 누구도 그 항구가 무슨 항구인지를 알지 못했다. 내리라고 해서 배에서 내렸고, 타라고 해서 트럭에 탔다. 트럭은 나트랑 시의 후미진 골목길을 통과하여 태양열에 검게 타버린 대지 사이를 뚫고 달렸다. 억세게 생긴 검은 색 가시나무 관목들이 도로변에 듬성듬성 늘어서 있었다. 그 후 3년이 지나 나는 나트랑 항구를 휴양 차 들렸다. 이때 다시 본 나트랑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끝없이 길게 뻗어간 백사장을 따라 야자수가 줄을 이어 늘어섰고, 길고 긴 실파도가 쉴새 없이 밀려와 한가롭게 부서지고 있었다. 밤이면 또 다른 정취가 무대의 제2막을 장식했다. 낮게 드리워진 십자성, 교교히 비치는 달빛, 화려한 전등불이 어우러져 일궈내는 앙상블이 남국의 정취를 한껏 북돋아주었다. 야자수 밑에 모여 앉은 선남 선녀들은 조개구이 한 접시를 앞에 놓고 술잔을 기울여가며 밤 가는 줄 몰랐다.

        

                                  이 순간을 무를 수만 있다면 !

밀가루 반죽을 두 손으로 늘려놓은 것 같이 기다랗게 늘어진 베트남 국토. 동해안을 따라 1번 도로가 남북으로 길게 그려져 있다. 이 도로를 따라 광활한 농토가 전개돼 있었고, 미군이 설치한 송유관도 끝간 데 없이 이어져 나갔다. 한국군은 바로 이 1번 도로 주변을 지키고 있었고, 미군은 월맹 국경지대에서 월맹 정규군과 전쟁을 했다. 한국군은 주민과 친구가 되는 선무작전을 펴면서 베트콩 지배지역을 평정했고, 미군은 국경선에서 월맹군을 상대로 사투를 벌였다.

맹호사단은 퀴논 시를 중심으로 한 북부 지역을, 백마부대는 나트랑과 투이호아 시를 잇는 남부 지역을 보호하고 있었다. 백마 사단 중에서 28연대는 북쪽 투이호아 지역에, 29연대는 사단 사령부와 함께 닌호아라는 중간 지역에, 그리고 30연대는 맨 남쪽인 나트랑 지역을 맡고 있었다. 28연대 지역은 베트콩과 월맹군의 소굴이었다. 육군소위가 가면 ‘죽지 않으면 병신’이 된다고 전해지는 지역이었다.

30연대 지역은 소위가 가도 1년 내내 베트콩 구경 한번 못하는 그야말로 안전 지대였다. 파월 신내기들은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에야 사단사령부 보충대에 도착했다. 숙소로 지정된 우중충한 군용 텐트가, 대낮에 받은 고열과 특유의 천막 냄새를 뿜어내고 있어서 숨이 막혔다. 해가 지면서 모기가 달라붙기 시작했다. 월남 모기! 어찌나 극성맞던지 촘촘히 짜여진 작업복까지 뚫고 들어왔다. 월남의 밤은 모기 약 없이는 견디지 못한다. 보충대장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테지만 그 흔해 빠진 모기약 하나 지급하지 않아 모기와 싸우느라 밤새 고생을 했다.

군함에서는 멀미를 핑계로 청소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던 친구들이 보충대에 오면서부터는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에 전화를 걸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일하는 데에는 꾀를 부리던 사람들이, 살아남는 데에는 재주가 참으로 뛰어나구나 싶었다. 이튿날이었다. 맹활약(?)을 벌이던 친구들은 사령부에 남게 됐다며 즐거워했고, 나 같이 빽 없는 30여명의 장교들은 시누크(CH-47)라는 검은 깻망아지처럼 생긴 육중한 헬리콥터를 탔다. "따따따. . ", 시누크 지붕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두 개의 프로펠러가 내는 굉음이었다. 밖은 볼 수 없고, 소리는 고막을 울렸다. 비행하는 40분! 입들은 굳게 닫히고, 눈에는 공포의 빛들이 역력했다.

나는 28연대의 파트너인 30포병 대대에 배치됐다. 보병 연대본부와 포병 대대본부는 해안 가 넓은 백사장에 함께 위치해 있었다. 군수부대, 병원, 간호장교 숙소, 보병 제1대대 본부, 한국군 PX, 헌병대, 보안대도 같이 있었다. 기지 주변에는 둥근 철조망이 5중으로 설치돼 있었고, 밤에는 기지 밖에서 기어 들어올지도 모를 베트콩을 감시하기 위해 전등불이 촘촘히 밝혀져 있었다. 위치가 적나라하게 노출돼 있기 때문에 1년에 몇 차례씩은 베트콩으로부터 심한 박격포 사격을 받았다. 한때는 십여 명의 특공조가 철조망을 뚫고 들어오다 우리 초병들의 집중사격을 받아 사살된 적도 있었다.

적에게 언제나 노출돼 있는 기지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공격 수단을 강구해야만 했다. 때로는 대 규모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고, 큰 작전이 없는 날에는 매일 같이 베트콩이 다니는 길목에 나가서 매복을 했다. 베트콩은 야간에 활동하기 때문에 그들이 다닐만한 길목을 소대 단위로 지키고 있다가 그 길을 따라 오가는 베트콩을 잡는 작전이다. 이렇게 늘 공격작전을 하는 이유는 마을을 베트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베트콩을 늘 공격하지 않으면 반대로 한국군이 공격을 당하기 때문이다.

연대기지로부터 3km 떨어진 서남쪽 지역에는 삼각산보다 더 우람한 바위산이 우뚝 서서 한국군 기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집채보다 더 큰 바위들, 더러는 25층 아파트보다 더 큰 바위들로 엉켜져 이루어진 산이었다. 정상에는 높이 150 미터나 되는 깎아 세운 듯한 쌍 바위가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밑에는 천길 만길 시커먼 바닷물이 호수 물처럼 잔잔하게 고여있었다. 월남에서도 유명한 봉로만이었다. 동그란 봉로만의 저 편에는 눈이 부실만큼 하얀 백사장이 띠를 이루고 있었다. 그 띠에 갇혀 있는 깊은 물은 태양의 위치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연출해 냈다. 때로는 검푸른 색, 때로는 에메랄드 색, 때로는 투명한 가을 하늘 색들이었다. 아침으로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바라볼 때마다 색깔이 다르고 느낌이 달랐다. 평화시라면 가히 환상적인 풍경이었을 것이다.

정상적으로라면 나는 도착하자마자 포병 대대본부로 가서 대대장과 포대장에게 신고를 해야 했다. 그러나 내가 도착한 날은 그 유명한 ‘한 달간의 홍길동 작전’이 시작되기 하루 전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대장과 포대장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곧바로 보병 3중대로 직송됐다. 보병 제3중대는 기동타격 중대였다. 급한 상황이 전개되거나 다른 부대에 작전 지원을 나갈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는 5분 대기조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제3중대는, 연대가 가지고 있는 14개 중대 중에서 전과가 가장 많았다. 백마 사단 전과의 90%는 28연대가, 연대 전과의 50%는 제3중대가 올렸다. 제1대대는 연대기지 내에 위치했고, 제2대대와 제3대대는 각기 북쪽과 서쪽으로 30-40분간의 차량거리에 뚝뚝 떨어져 위치해 있었다.

모든 보병부대들은 베트콩의 활동을 감시할 수 있는 수많은 거점 지역을 선정해서 중대 또는 소대 단위로 벙커진지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를 홈베이스라고 불렀다. 마치 옛날 일본의 성처럼 중요한 거점 지역에 성을 구축함으로써 거점과 거점 사이에 산재해 있는 민간마을들에 베트콩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개념이었다. 월남전은 게릴라전이었다. 게릴라는 민간 복장을 하고 다녔다. 마을에서 만나는 민간인이 양민인지 베트콩인지는 누구도 몰랐다. 게릴라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주민이다. 주민의 도움 없이는 작전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모택동의 게릴라 전술이다. 게릴라는 고기요, 주민은 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군은 게릴라전의 전문가인 채명신 장군을 초대 주월군 사령관으로 보냈다. 그는 주민과 게릴라를 분리시키기 위해 대민 활동을 강조했다. "100명의 베트콩을 놓지는 한이 있어도 한 사람의 양민을 보호하라". "병사 한사람 한사람은 모두가 다 외교관이다". "예의를 가지고 주민을 대하라". 이러한 명령적 구호에 따라 한국군은 마을 주민에게 쌀을 주고, 교량과 건물을 지어주고, 태권도를 가르쳐 주고, 잔치를 열어주고, 치료를 해주었다. 월남에서 "따이한" 하면 친절의 대명사였다. 같은 물자라도 미군이 주면 거부하지만 한국군이 주면 고마워했다. 낮에는 민간 마을에 따이한의 이미지를 심어 주민의 마음을 한국군 편으로 만들고, 밤에는 이러한 민간인들이 베트콩에게 사살되지 않도록 마을을 지켜주었다.

이 지역에는 "피의 계곡"이라 불리는 베트콩 요새가 있었다. 집채만한 크기의 바위들로 구성된 계곡이라 항공기들이 아무리 많은 폭탄을 퍼부어도 끄떡없었다. 지하 2층 3층 심지어는 5층까지 동굴이 형성돼 있어 난공불락이었다. 용감한 청룡부대가 이 기지를 공격하다가 많은 희생자를 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돌격 앞으로!" 식으로 공격하다가 숨어서 쏘는 베트콩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제3중대 중대장은 육사 16기생으로 깡마르고 작은 키를 가졌지만 생도 때에는 럭비 선수였다. 관측장교는 중대장과 같이 행동하면서 중대에 포병화력을 지원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나에게 자리를 물려준 장교는 1년 선배였다. 전에는 별로 친해 본 적이 없던 선배였지만 나를 보자마자 너무나 반가워했다.

           

                     '야, 육사 선배라는 게 이렇게 좋은 거로구나!'

그는 하루 종일 싱글벙글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나의 도착이 하루라도 늦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근심을 했다는 것이다. 하루만 늦었어도 그는 한 달간의 험한 작전에 투입될 뻔했다는 것이다. 많은 장병들이 귀국을 불과 몇 일 앞두고 전사했다. 이는 모든 장병에게 징크스로 작용했다. 귀국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나를 보자마자 그토록 기뻐했다는 건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됐다. 병사들은 굳어진 얼굴을 해 가지고 다음날부터의 작전에 필요한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나의 당번병과 무전병이 와서 첫인사를 하고는 내가 짊어지고 나갈 군장을 꾸려왔다. 4개의 수통에 물을 담아왔다. "소대장님, 물을 아껴 드십시요. 남에게 물을 주지도 말고 달라지도 말아야 합니다. 규칙입니다. 정글 속에는 식수가 없습니다. 산 속에 있는 물은 독성이 있어 마시면 큰일납니다. 더러는 베트콩이 물에 독을 넣는다고 합니다. 수통 물만 드셔야 합니다. 시장에서 수박을 사먹어도 큰일납니다. 수박에 독침을 넣는다 합니다"

이튿날 여명에 각자는 군장을 메고 헬리콥터 장에 나갔다. 무거운 군장을 지고 나선 행렬이 마치 밤 도깨비 같았다. 승객정원 5명, 헬리콥터가 땅에 닿는 둥 마는 둥 기우뚱거리며 병사들을 태웠다. 모두가 말이 없이 눈만 반짝였다. 생전 처음 타보는 헬리콥터! 옆문을 닫지 않은 상태에서 옆으로 누워서 날아갔다. 안전벨트를 맸지만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아 있는 힘을 다해 앞 의자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렇게 움켜쥘 필요가 없었다.

광활한 평야가 보였다. 뽀송뽀송하게 보이는 푸른 벼가 융단처럼 깔려있었다. 그 사이로 간간이 강물이 나타났다. 새벽빛에 강물이 반사됐다. 꼬불꼬불한 물길에 희뿌연 흙탕물이 담겨져 있었다. 정글로 뒤덮인 산이 끝도 없이 전개됐다. 검푸른 솜을 뭉글뭉글 깔아놓은 것처럼 보드랍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넓고 평평한 고산 지대가 펼쳐졌다. 산정에 뾰족한 봉우리가 있는 게 아니라 또 다른 평야가 전개된 것이다. 사람 키를 훨씬 넘는 갈대밭이 전개됐다. 하지만 위에서 보기엔 아름다운 잔디밭이었다. 낯선 이국의 경치였다. 신기하고 아름다웠다. '낮게 떠가는 헬기를 향해 정글 속에서 총이라도 쏘면 어떻게 하나'. 마음을 졸였다. 사람 키를 넘는 갈대밭 위에 헬기가 정지했다. 뒤뚱거리는 동안 병사들이 2미터 정도의 높이에서 뛰어내렸다. 쏜살같이 사방으로 튀어나가 엎드렸다. 몸에 밴 동작이었다. 중대마다 내리는 곳이 달랐다. 광활한 정글 산에 2개 사단 병력이 이런 식으로 바둑판처럼 깔렸다. 가장 길었다는 홍길동 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정글 속에서의 행군은 언제나 일렬 종대였다. 1996년9월 강릉에 출현한 잠수함 사건에서 한국군은 달아난 몇 명의 승무원을 잡으려고 매일 7만 명의 병력을 산에 깔았다. 당시 합참의장은 병사들이 일렬 횡대로 늘어서서 산을 샅샅이 뒤질 것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나무가 우거진 산 속에서의 행군은 절대로 횡대일 수 없다. 길을 따라 일렬 종대로 행군하기에도 벅찬 것이 산악작전이다. 그래서 길목을 잡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베트콩은 이렇게 행군하는 한국군을 잡기 위해 길목을 지켰다. 부비트랩을 설치해놓기도 했고, 웅덩이를 파서 독침을 꽂아놓은 후 위장을 해놓기도 했고, 매복을 하기도 했다. 강릉작전을 지휘한 그 4성 장군은 이런 기본적인 상식조차 없이 태백산 일대에 병사를 저인망식으로 깔아 포위망을 좁혀가고 있다고 했다. 병사들이 일렬 횡대로 산정을 향해 올라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두가 종대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병력은 요지와 거점 단위로 운용해야 하며, 이를 위한 지휘관의 전략적 판단이 중요한 것이다.

정글 속에는 집채만한 바위들로 뒤엉켜 있는 곳이 많다. 그런 곳에는 베트콩이 서식하는 동굴이 마련돼 있다. 나무 밑에는 열대림에서 떨어져 내린 잎들이 수백 년 지나는 동안 검은흙으로 변해 있었다. 아름드리 나무가 들어서 있는 곳은 행군하기에 편했다. 걸을 때는 한없이 땀이 흘렀지만 몇 분만 쉬고 있으면 한기가 돌만큼 추웠다. 그러나가도 가시나무 관목 숲이 나타나면 사정은 달랐다. 두꺼운 가죽 장갑을 낀 병사가 행군대열의 맨 앞에 서서, 장수의 칼처럼 생긴 정글도를 가지고 통로를 개척해 주었다. 한 시간에 몇 십 미터밖에 전진할 수 없었다. 햇볕은 여과 없이 내려 쬐고, 얼굴은 빨갛게 익고, 몸과 얼굴의 여기저기에는 생채기가 나있었다. 오후 2시가 되자 물이 동나 버렸다. 작업복이 소금가루로 하얗게 뒤덮였다. 입이 타들었다. 침조차 말라버렸다. 처음으로 당해보는 목마른 고통이 참으로 가혹했다. 바로 이때, 50미터 정도로 앞서 나간 선발대로부터 날카롭게 째지는 총성이 들려왔다. 모두가 반사적으로 바위틈에 몸을 숨겼다. 순간, 부산항에 나왔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이 순간을 다시 무를 수만 있다면! 세상 끝, 절벽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초등하교 1학년 때의 늦가을. 국방군이 마을로 진격해 왔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을과 논둑이 마주보고 있었다. 외딴 이 마을에는 겨우 다섯 채의 집이 있었다. 마을에서 하루를 묵은 2명의 인민군 패잔병이 갑자기 개울을 향해 "쏘리 쏘리?"하고 소리를 쳤다. 개울 건너 논두렁에는 국방군이 길게 늘어서서 마을 쪽을 바라봤다.

"그래, 쏴라".

서울에서 피난 나온 누나가 있었다.

"누나, 저쪽에 늘어선 군인들은 누구야?"

"국방군이야. 이제 곧 싸울 거야"

"야, 신난다. 우리 구경하자"

"그래, 그러자"

대문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누나가 나를 잡아챘다.

"야, 총 쏘면 우린 죽어. 얼른 느 집 방공호로 가서 숨어야 해"

대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양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한동안 조용해졌다. 나는 누나 손을 잡아끌며 구경가자고 졸랐다. 벽에 바짝 붙어 살금살금 나왔다. 대문을 조금 열고 내다보았다. 국방군 아저씨가 앞집 지붕위로 날쌔게 올라갔다. 누나 말로는 국방군 소위라 했다. 인민군과 서부활극이 벌어졌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동그랗게 올려진 콘크리트 우물 벽이 있었다. 그 벽에 몸을 숨기고 인민군이 지붕을 처다 보려던 찰나, 지붕 위의 소위가 먼저 보고 쏘았다. 우물가에 피가 낭자했다. 이게 내 머리 속에 있는 전투의 모습이었다.

선발대에서 요란하게 울리던 총소리가 멈추고 적막이 흘렀다. 나는 전후 좌우는 물론 빽빽하게 들어 찬 나무 가지들을 바쁘게 살폈다. 베트콩은 나무 위에서 총을 쏠 수도 있었으며 바위틈에서 솟아날 수도 있었다. 선발대에서 무전을 통해 상황보고가 들어왔다. 총소리는 검은 옷을 입은 베트콩 소년이 유발시켰다. 한 나무 뒤에서 다른 나무 뒤로 날아다니듯 잽싸게 움직이는 소년에게 가해진 사격이 그토록 요란한 것이었다. 중대 본부가 현장으로 접근했다. 조금 전 긴박했던 분위기와는 전혀 달리 현장은 평화롭기까지 했다.

검은 옷을 입은 맨발의 미동을 잡아놓고 몇 명의 병사가 말을 걸고 있었다. 얼굴이 어찌나 예쁘던지 병사들이 저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그 미동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발바닥은 군화 바닥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발가락 사이가 넓게 벌어져 있었다. 오랜 동안 산에서 활동한 베트콩으로 놓아주면 한국군의 위치를 베트콩 본부에 알려줄 수도 있었다. 병사가 주어들은 몇 마디의 월남어 실력으로 소년에게 물었다. "브이씨, 어 더우?" 하니까 "콩비억"하고 고개를 저었다. 베트콩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모른다는 답변이었다. 서울의 소년들과 비교해보니 무섭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측은한 생각이 앞섰다. C-레이션 깡통을 까주고 과자와 쵸코렛을 주었더니 참으로 맛있게 먹었다. 장난 끼 있는 병사가 어쩌나 보려고 담배를 주었더니 눈을 지긋이 감고 담배 맛을 즐겼다.

                                (나의 산책 중에서) 



2014.3.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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