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탐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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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8-07 14:05 조회3,75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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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탐험[5]
국산품 애용이라는 국수주의 결산
진취성은 합리적 사고방식에서 탄생한다. 박정희 시대에는 국산품 애용이 곧 애국이었다. 양담배, 양주는 매국으로 인식됐다. 남한 공산주의자들은 외채를 매판 자본으로 규정하고, 매판 자본가를 매국노라고 선동했다. 매판자본, 영어로는 Compradore, 외국자본가의 부역자라는 뜻이다. 이들의 눈에는 박정희와 전두환이 매국노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오로지 애국자를 격하시키기 위한 정치적 공격행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수입은 싫고 수출만 하려는 에고이스트 탈피
전두환은 경제 성장의 동력을 자율과 창의력에서 찾았다. 국산품을 애용하고, 외제는 적대시하면 한국은 한국제품을 사기만 하고 팔 수 없는 나라가 되라는 것인가? 전두환은 이런 에고이스트는 신사의 나라로 대우받을 수 없을 뿐더러 결국은 국제 사회로부터 얌체국가로 따돌림 당할 것이라는 데 착안했다. 먹자골목 음식점들이 품질 좋고 값싼 음식을 판다. 경쟁이 되기 때문이다. 경쟁이 없으면 나태해진다. 전두환은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는 기업의 제품은 발전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개인이나 조직은 자극이 없으면 나태해진다. 나태함은 곧 ‘암덩이’이다.
보호받는 기업은 태만병에 걸려
오늘의 파나소닉사를 창설한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결재서류를 이면지에 작성해 오리고 지시했다. 그런데 한 중역이 이면지 결재를 불손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새 종이로 결재 서류를 만들어 갔다. 이에 마쓰시타가 화를 내고 그를 강등시켰다. 간부들이 매우 이상한 결심이라며 물었다. “회장님, 전에는 기업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중역의 어깨를 두드려 주시더니 이번에는 어째서 사소한 이면지 불사용을 이유로 강등까지 시키시는 것입니까?” 마쓰시타가 말했다. “열심히 하려다 잘못된 결과가 나왔다고 벌을 주면 그 누가 일을 열심히 하겠느냐, 그래서 벌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면지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사소한 것이지만 태만의 상징이다. 태만은 기업의 암이다”
기업에 자유 주고 개척정신 강요
강한 기업으로 키우려면 과감히 외제품 수입을 개방하여 자극을 주고 창의력을 스스로 발휘하여 국제경쟁력을 갖추야 한다는 것이 1980년의 전두환 생각이었다. 경제를 정부가 주도하게 되면 기업은 주인 의식과 개척 정신을 사장 또는 퇴화시키게 되고, 정부 부처는 행정 편의와 부처이기주의로 기업의 자유를 옥죄는 규제를 많이 만들어 낸다. 그래서 전두환은 경제 동력의 주체를 민간으로 대폭 전환함과 동시에 규제를 대폭 풀었다. 관의 문턱이 눈에 띄게 낮아졌다. 1970년 전후였다. 오전에 동회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발부받으려 신청을 하면 오후에 오라고 했다.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신청서에 돈을 숨겨서 내면 즉시 떼어준다 했다. 그런데 전두환 시절, 이런 관공서 문턱이 없어졌다. 고압적이고 쌀쌀했던 공무원들의 태도가 상냥하게 바뀌었다. 국민 우선주의 정서가 확산됐다.
소련의 붕괴가 자유무역 강요
1995년 1월 1일, 국경 없는 무역의 세계가 공식적으로 열렸다. WTO가 공식 창설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1986년에 타결된 우루과이 라운드의 연장선상에 있다. 1986년은 냉전 시기여서 동서간의 벽이 무너지지 않았을 때였다. 전두환 시절, 우루과이 라운드는 한국에 농산물 수입을 강요했지만, 전두환은 이것만은 끝까지 개방하지 않고 버텼다. 보호 무역의 상징, 무역 장벽은 어떻게 풀리게 되었는가? 소련의 붕괴로 풀렸다. 소련은 누가 붕괴시켰는가? 레이건이었다.
레이건이 미국의 군사비를 대폭 올려 이른바 스타워즈 전쟁시대를 열었다. 1983년 3월 23일, 레이건은 TV연설을 통해 소련의 핵-미사일의 위협에 대해, 더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여 보복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포기하고, 우주공간에서 레이저나 입자 빔, 인공위성과 같은 첨단 우주 장비를 배치하여 소련의 미사일을 우주 공간에서 격파할 수 있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른바 스타워즈 계획(Starwars)이었다. 이런 기술을 개발하려면 달러가 아주 많이 필요했다. 소련이라는 경제 촉새가 경제의 황새로부터 경쟁을 강요받은 것이다. 소련의 경제가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경제가 붕괴되자 소련 연방도 붕괴됐다.
이데올로기 시대에서 삶의 질 시대로
1988년 12월 7일, 고르바초프가 UN 연설을 했다. 253자의 짧은 연설이었다. 그 간단한 연설이 냉전의 벽을 스스로 부숴버렸다. NATO에 대응해오던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해체하겠다는 것이었다. 냉전시대 최고의 가치는 이데올로기였다. 고르비의 연설 직후, 세계 제1의 가치는 ‘삶의 질’로 이동했다. 삶의 질을 추구하는 하는데 방해 요소가 됐던 이데올로기의 벽이 무너지자 세계는 완전히 자유시장 규칙에 따라야 했다.
정경유착 사라져
만일 전두환이 1980년부터 미리미리 보호 무역을 풀지 않고 속 좁은 국수주의를 견지했다면 한국 경제는 1990년부터 충격을 받아 와르르 무너졌을 것이다. 과감한 개방과 기업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으로 수입 자유화 비율을 74.8%에서 94.6%로 올라갔고, 관세율을 32.9%에서 25.2%로 대폭 내려갔다. 전두환이 이렇게 미리미리 경제 체질을 강화시켰는데도 불구하고 1993년에 취임한 김영삼 시대에 외국 상품들이 물밀듯 들어오자 노태우-김영삼 시대에 경영을 자생력이 아닌 정경유착에 의해 연명했던 많은 기업들이 도산했고, 결국 국가는 IMF를 맞게 됐다.
2012년에 골목 상권 보호하자?
전두환이 1980년 당시 국가를 완전 국제화의 레일 위로 올라서게 한 사실, ‘음미’(appreciate)를 생활화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이 뭐 큰 대수냐고 후려칠 수도 있을 것이다. 2012년 초, 박근혜 시대를 한번 살펴보자. 골목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대형마트와 SSM의 영업시간을 통제하지 않았는가? 전두환의 사고력이 10차선 도로였다면 박근혜의 사고력은 골목길이었던 것이다.
2022.8.6.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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