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탐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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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8-07 23:30 조회3,52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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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탐험[7]
기술강국만이 살길이라 확신
다시 상기하지만 전두환은 애국을 추구하는 학도였다. 그는 박정희시대의 기술을 모방기술이고 개량기술이라고 정의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엔진을 중화학공업, 기계공업이라고 정의했다. 그의 주변에는 육사가 기른 과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꼽히는 과학두뇌는 육사 11기 김성진 박사와 오명 박사였다. 이 두 사람은 전문분야, 기술분야를 전두환에게 통역하는 재주를 가졌다. 하지만 전두환은 이들로부터 지식을 흡수해도 그들에게 정책을 일임하지는 않았다. 판단력이 인격이요 판단력이 지도력인 것이다. 과학은 과학자가 하는 것이고, 경영을 위한 판단은 어디까지나 최고경영자의 몫인 것이었다.
레이건의 IT, BT는 1988년부터
1980년대, 미국 대통령은 레이건이었다. 대통령이 되어 보니 미국 굴지의 기업들이 일본 기업들과의 경쟁에 번번이 패하여 도산했다. 미국 사회 전체가 일본기업의 경쟁력 앞에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 당시의 일본 기업의 경영방식이 미국의 경영방식을 크게 앞서 있었다. 미국사회에서 일본을 배우자는 소리가 높았고, 미국경제가 일본 경제에 밀리고 독일 경제에 밀려 3류경제로 추락하고 있다는 소리들이 하루 종일 방송됐다.
1988년, 레이건은 경쟁력 제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불루리본위원회를 설치했다. 제갈공명 위원회였다. 이들은 레이건에게 경쟁력 향상방안을 보고했다. 미국의 3대 DRAM 및 IC 제조사인 모토롤라, 인텔, 몰스텍이 일본의 집중공격을 받아 폐쇄되었고, 미국의 반도체 품질이 일본에 뒤져 있기 때문에 반도체 칩을 사용하는 미국의 모든 전자 및 가전, 기계제품들의 품질이 심히 걱정스럽다고 보고했다.
일본에서는 13개 대기업이 공동 투자하여 반도체를 만드는 새로운 제조공법을 공동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레이건 대통령의 관심이 주목되었다. 기업들이 힘을 뭉치지 않으면 미국이 일본에게 패한다는 결론이었다. 공작기계 분야는 서독과 일본에 밀려 맥도 못 추고 있다고 보고 했다. 미국이 정밀도에서 뒤진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내는 데만 주력하고, 이를 제품으로 연결해서 돈을 버는 데는 무관심했다는 사실도 지적됐다. 미국이 개발해놓은 ‘문서기술’(paper technology)을 일본이 먼저 '생산기술’(production technology)로 전환하여 미국보다 앞서 돈을 버는 데 귀재라는 사실도 지적됐다.
미국이 앞서 있는 것은 핵심 소프트웨어이기 때문에 그 소프트웨어 기술을 상품화해야 미국적 비교우위가 확보될 것이라고 건의 했다. 일본을 이기는 방법은 IT(정보기술)와 BT(생명기술)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사실 이 한마디의 건의가 계기가 되어 미국은 오늘날의 소프트웨어 산업의 선두주자가 된 것이다.
전두환의 IT, BT는 1980년부터
전두환은 육사 18기 오명 수석에게 지시해 기계식 교환기를 전자식 교환기로 바꾸어 모든 가정에 전화를 놓을 수 있도록 하라 지시했다. 기계식 전화교환기는 전화가 걸려오면 교환여성이 코드를 전화번호 단자에 전화선을 꽂아주는 식이었다. 그래서 전화기를 놓으려면 아파트 한 채를 바쳐야 했다. 전화기가 신분을 의미했다. 전두환이 과학수석에게 물었다. “야, 전자식 교환대가 뭐야?” “예. 워키토키 아시지요? 국민 모두가 워키토키를 하나씩 가지고 마음대로 원하는 시간만큼 오래 통화하는 것입니다. 그거만 되면 한 가정에 전화기를 아주 싼 값에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런 게 다 있어? 그거 빨리 해” 1 가구 1 전화기가 매우 싼 값에 제공되었다. 1985년에 설립된 ETRI(전자통신 연구소)가 한국식 핸드폰을 개발했다. 레이건보다 10년 앞선 지휘였다.
박정희시대의 공장에는 일본과 서독이 만든 공작기계가 설치돼 있었다. 모두가 이른바 CNC(“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 시스템이었다. 전두환은 한국에서는 생산이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됐던 이런 공작기계를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한국에서나 그 어느 나라에서나 최고지도자가 명령의 진수를 알면서 내리는 지시는 반드시 이루어졌다.
레이건이 불루리본위원회로부터 터득한 명령용 지식을 전두환은 1980년대 초에 터득했다. 1982년 6월, 히타치와 미쓰비시가 미국 IBM사로부터 기술정보를 빼내오다 국제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다. 이에 전두환은 즉시 이병철을 불렀다. 외국 기술을 몰래 스파이 해 올 생각을 하지 말고 첨단기술을 가진 사람에게 파격적인 값을 당당하게 지불하고 기술을 확보하라며 반도체 개발을 부탁했다. 이병철은 실리콘밸리를 접촉했다. 1983년 2월, 이병철은 상기된 채로 삼성이 64KD RAM 개발에 착수한다는 이른바 [동경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성공했다. 한국이 미국, 일본에 이어 세 번째 반도체 생산국이 됐다. 이어서 삼성은 1986년에 1메가 DRAM을 생산했다.
1986년 전두환은 4MD를 정부개발 방침으로 선언했다. 여기에는 엄청난 돈이 필요했다. 당시 반도체를 생산하는 회사는 삼성과 현대와 LG였다. 레이건은 1988년에야 불루리본위원회로부터 일본의 13개 업체가 공동출자하고 정부 자금을 보태서 반도체 산업의 핵심인 제조공정을 개발해 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전두환은 1986년에 이미 삼성, 현대, LG의 연구개발비를 합치고, 정부의 예산을 보태 4MD개발에 착수했다. 400억으로 추산된 개발비를 전두환은 배분했다. 100억 원은 3개회사로부터, 200억 원은 체신부가, 100억 원은 과기처가 부담하도록 했다. 민간 100억, 정부 300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988년 2월, 4MG DRAM이 전두환 정권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오늘날의 먹거리는 공부하는 전두환이 마련해 준 것이다. 개발 연구원 모두에게 전두환이 술을 따라주었다. “다음으로는 64MD입니다. 성공하면 내가 내 머리카락을 팔아서 한턱 쏘겠습니다” 전두환에게 머리카락은 매우 소중했다. 한 가락이 엄청 비싸다는 조크도 했다.
전두환이 세운 공적, 김대중이 북에 제공
한국형 핸드폰이 세계를 제패한 것에는 전두환이 1986년에 대덕에 세운 전자통신연구소(ETRI)가 있었다. CDMA, 오늘날 우리를 먹여 살리는 기술이 바로 한국식 핸드폰과 반도체가 아니던가. 전두환은 또 다른 육사 천재 김성진 박사로 하여금 국가 전산망을 설계토록 했다. 오늘날의 국가 전산망은 전두환이 만든 것이다. 이는 IT의 기념비로 평가됐다. 지금 정보기술과 인프라는 일본보다 100리는 앞서 있다. 전두환은 PC를 학생들에게까지 공급했다. 그야말로 한국을 IT 강국으로 만든 것이다. 전두환은 IT 분야에서 여기까지만 했다. 이후 김대중은 전두환이 기술자 전문가들의 고혈을 짜내 이룩한 IT 인프라를 공산화 확산을 위해 악용했다. 그 전형적인 도구가 KAIST 교수 박찬모였고, NAVER, DAUM이었다.
2022.8.6.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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