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탐험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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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8-10 15:32 조회3,11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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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탐험 [11]
장영자외 이철희
1982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은 이순자 여사를 통해 한 사채업자가 호텔에 거창한 사무실을 차려놓고 청와대를 사칭하면서 사기 행각을 벌인다는 소문을 접수했다. 즉시 이학봉에게 사실 관계를 조사하라고 지시했고 5월 4일, 검찰은 장영자-이철희 부부를 구속했다. 이어서 은행장 2명, 기업체 간부, 전직 기관원 등 32명이 구속됐다. 이 순자 여사의 작은 아버지인 이규광도 장영자와 연루됐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장영자는 이규광의 처제였다. 이규광은 1925년생으로 1961년 기갑병과 준장으로 예편하였고, 전두환이 1958년 이순자 여사와 결혼하면서 처삼촌이라는 족보관계가 형성된 사람이다.
장영자는 1944년 10월 25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숙명여대 교육학과에 입학하여 숙대 ‘메이퀸’으로 뽑힐 만큼 미모와 화술이 뛰어났다고 한다. 1966년, 김 모 씨와 결혼했다가 이혼, 1977년 사업가 홍 모 씨와 재혼했다가 이혼한 후 1981년, 세 번째 남편 이철희와 결혼했다. 이철희는 1923년 9월 10일 청주에서 출생하여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후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냈다. 장영자와는 21년 나이 차이가 났다. 이철희와의 결혼식은 예식 비용만 1억 원, 초호화판이었다. 당시 평검사 월급이 50만 원, 이 사건을 수사했던 박주선 의원은 "장 씨가 주변 사람들에게 수백만 원의 용돈을 뿌릴 정도로 큰손다운 씀씀이를 보였다"고 했다.
단군 이래 최대 어음사기 사건
당시 이철희와 장영자는 건설사 등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기업을 찾아다니며 현금을 빌려주고, 채권의 2~9배에 달하는 어음을 챙겨 사채시장에서 다시 할인 유통하는 방법으로 사기를 쳤다. 현금이 다급한 기업들로부터 총 7,111억 원의 어음을 받아, 그 중 6,404억 원을 할인해서 사용했다. 이 6000억은 당시 정부 1년 예산의 10%에 해당하는 천문학적 금액이었다. 이 돈으로 장영자 부부는 한 달 생활비로 3억 원을 썼다고 한다.
1981년 2월 공영토건이 이들에 걸려들었다. 중동 공사 수주에 실패해 자금 압박을 받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장영자가 남편 이철희의 이력을 내세워 접근했다. “이 돈은 특수 자금이니 절대 비밀로 하라” 장영자가 건네 준 현금은 130억 정도였지만 공영토건으로부터 받은 어음의 액면가는 9배가 넘는 1,200억 원이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기에 은행장과 기업인들이 장영자의 말 한마디에 속아 넘어 갔는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심지어 태양금속의 경우에는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고 어음만 주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포항제철 다음으로 규모가 큰 일신제강이 무너졌고, 도급 순위 8위의 공영토건이 분해됐다.
살인적 유언비어
장영자가 처삼촌인 이규광과 연결돼 있다는 소문만으로 전두환과 이순자에 대한 유언비어가 사실인 것처럼 떠돌았다. 이로 인해 이순자 여사는 남편에게 대통령 재임 기간만이라도 별거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했을 정도로 대통령부부를 향해 쏟아지는 눈총들이 엄청났던 것이다. 그래서 전두환은 내키지 않는 개각을 두 차례씩이나 했다.
장영자의 DNA가 사기
장영자와 이철희는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형과 미화 40만 달러, 엔화 800만 엔 몰수형, 추징금 1억 6254만 6740원을 선고받았다. 장영자는 형기를 5년 남겨둔 1992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그 후 2년만인 1994년 140억 원 규모 차용 사기 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구속되어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고, 1998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됐다. 또 다시 2년만인 2000년 구권화폐 사기 사건으로 세 번째로 구속됐다가 2015년 1월 출소했지만 6개월 만인 2015년 7월부터 2018년까지 지인들에게 6억여 원을 가로챈 혐의로 출소 3년 만에 4번 째로 또다시 구속되었다.
세상은 처삼촌의 처제가 전두환의 친인척이라고 몰아갔다. 속담에 “처삼촌 벌초하듯 대강대강 한다”는 말이 있다. 처삼촌은 모르고 지내도 되는 사이라, 친인척의 범주 내에 들어있지도 않다. 그런데 그 처삼촌의 부인의 여동생이 장영자였던 것이다. 이 나라의 그 누가 처삼촌의 처제를 가까운 친인척이라 인정할 것인가? 그런데 세상은 이런 장영자가 단군 이래 최대의 사기를 친 것이 대통령 탓이라며 입을 삐죽거렸다.
장영자가 촉발시킨 금융 실명제
전두환은 즉시 김재익을 불러 다시는 장영자 사건이 재발하지 않기 위한 방안을 연구 보고하라고 명했다. 7월 2일, 김재익과 재무장관 강경식이 금융 실명제를 보고하자 전두환은 그 자리에서 서명을 했다. 전두환 역시 비실명제의 폐해에 대해 국보위 때부터 생각해 왔다. 비실명제는 조세 정의에 역행하고, 비리와 사회악을 키우는 온상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장영자 사건이 불거진 지 2개월만인 1982년 7월 3일, 전두환은 더 이상 좌고우면하지 않고 '7.3조치'를 발표했다. 1년 후인 1983년 7월 1일부터 금융 실명제를 전격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1961년 7월 29일 지하에 숨어있는 음성 자금을 양성화시킬 목적으로 ‘예금과 적금 등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차명, 가명 등에 의한 비실명 거래를 허용하였다. 고도 성장 과정에서 기업들은 기업 규모를 경쟁적으로 확장했다. 모든 게 빚이었다. 이 틈을 타 사채 거래가 음성화되어 지하 사채업자들이 번성했다. 장영자가 그 중 하나였다. 전두환은 음성적인 사채 거래를 양성화하고, 부당한 재산의 축적을 방지하고, 은닉 자금을 기업으로 환류시키고, 탈세를 방지하고, 조세의 평등을 꾀할 수 있는 수단이 금융 실명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금융 실명제를 추진하겠다는 ‘7.3조치’가 발표되자마자 뭉칫돈이 빠져나갔다. 과소비 현상이 나타나고, 물가가 오르고, 부동산 투기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는 전두환의 물가잡기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악재였다. 김재익과 강경식이 코너에 몰리고, 허화평과 허삼수를 위시한 모든 각료들이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경제기획원 장관 김주성 부총리가 간절하게 읍소했다. 전두환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국회를 통과한 법안의 부칙에 “1986년 1월 1일 이후 대통령이 정하는 시기에 시행한다”는 단서 조항을 삽입하는 것으로 없던 일로 매듭되었다. 대통령이 재가하고, 국회에서 법률로 통과된 정책이 무산된 첫 번째 사례가 바로 전두환의 금융 실명제였다고 한다.
금융 실명제는 금융 전산화 시스템이 없으면 시행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금융 전산화는 전두환이 시작했고, 완성했다. 1993년 2월에 취임한 김영삼은 6개월만인 그해 8월 12일 목요일 저녁 19시 45분, 기습적으로 긴급 명령권을 발동했다. 발표 직후 서둘러 은행 인출 사태가 발생할 것을 예상해 은행이 문을 닫은 시각에 발동시킨 것이다. 결국 전두환이 단서 조항으로 삽입해 놓은 “1986년 1월 1일 이후 대통령이 정하는 시기에 시행”으로 마무리해놓은 그 “대통령이 정하는 시기”가 1993년 8월 12일이었던 것이다. 김영삼은 전두환이 통과시켜놓았던 ‘금융 실명제법’을 명령 한마디로 간단하게 시행시킨 것이다.
2022.8.6.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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