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탐험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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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8-11 23:29 조회3,95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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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탐험 [15]
88올림 방해 공작 제1호, 수공 위협
88올림픽이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은 이 세상에 없었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설상가상으로 1986년의 아시안 게임 성과에 눈이 뒤집혔다. 북한은 1980년 아시안 게임을 훼방하려 노력했지만 여건을 인정받지 못해 탈락해 자존심이 상했다. 아시안 게임은 1986년 9월 20일부터 10월 6일까지 열렸다. 사관학교에서 축구 선수로 활약했던 전두환은 스포츠맨이자 독서가였다. 중국이 금메달이 94개, 한국이 93개, 북한은 명함도 없었다. 김일성의 눈이 뒤집히는 일이었다.
김일성은 어떻게 하든 88올림픽만은 절대적으로 훼방을 놓아야만 했다. 88올림픽은 남한과 북한의 위상을 하늘과 땅 차이로 갈라놓은 분수령이었다. 그래서 1986년에는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금강산 댐 공사를 통해 전 세계에 밝혔다. 서울이 물바다가 되는 데도 서울 올림픽에 참가할 것인가? 국제 사회를 협박하는 공작이었다. 그 다음이 1987년 11월 바그다드에서 중동 특수의 엔진 역할을 했던 근로자들이 탄 KAL858기를 공중분해시킴으로써 세계 각국을 향해 서울에 올 생각을 접으라는 공갈 협박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88올림픽이 극성맞게 성공하여 세계로부터 극찬을 받자 그 이듬해인 1989년 세계 청년을 평양에 모아 평양축전을 열어 남한의 성공을 물타기했던 것이다. 여기에 임종석과 이수경이 동원되었다.
1986년 봄, 우리 군이 예상하지 못한 이상 상황을 관측했다. 대동강 갑문공사에 동원됐던 북한군 병력 15만 명이 금강산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탐지한 것이다. 1986년 8월 4일, 평양방송이 금강산에 최대발전소가 건설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8월 20일 장세동 안기부장이 가상 시나리오에 대해 분석 보고를 했다. 이 보고 내용은 전두환 회고록 제519~524쪽에 걸쳐 그 수치가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다. 북한에 대해서는 많이도 속아온 전두환은 이를 수공 전략의 핵심이라는 결론을 냈다. 안보는 단 1%의 가능성에 대해 대비하는 것이라는 말은 그냥 해보는 빈말일 수가 없다. 김일성의 심성은 악마의 심성, 금강산 댐이 건설되고, 이를 제어할 방법이 없으면 우리는 불안 속에서 살다가 북한의 노예가 될 수 있다. 이를 훗날 함부로 공격한 뚝건당 출신 김영삼이 알겠는가? 평생 법조문 갖고 샌님 노릇하던 이회창이 이해하겠는가? 김영삼이나 이회창은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가방끈이 없었다. 단지 그들을 조종하는 아랫것들에게 놀아날 수밖에 없는 허당들이었다. 이 시점에서는 아마도 대부분의 의식 있는 국민들은 우리도 대응 댐을 건축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댐에 대한 기초 상식
금강산 댐은 북에 있고, 평화의 댐은 남에 있다. 휴전선으로부터 북한강을 따라 북으로 26km 지점에 금강산 댐(북한 호칭은 ‘임남댐’)이 있고, 휴전선으로부터 남으로 10km 지점에 평화의 댐이 있다. 두 댐은 북한강을 따라 36km 떨어져 마주보고 있다. 금강산 댐은 남한을 수공으로 멸망시키려는 음모의 무기로 1986년 4월부터 건설되기 시작했고, 평화의 댐은 이를 방어하기 위한 방어용 댐으로 1986년 10월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서부전선의 황강댐이 수공을 위한 댐이고, 군남댐이 이를 방어하기 위한 댐인 것과 같은 성격의 댐들이다. 모두가 다 북한의 수공용 댐이고 남한의 방어용 댐인 것이다.
전두환이 건설한 평화의 댐
이 평화의 댐은 민주화운동이 하늘을 찌를 때 전두환 정권이 건설한 댐이다. 1986년 10월 30일, 이규호 건설부 장관이 중대 발표가 있다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북한이 비밀리에 금강산댐을 짓고 있는데 그 댐을 무너트리면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MBC 등은 “금강산댐 건설음모”라는 특집방송을 하여 금강산댐의 물 200억 톤이 쏟아지면 서울은 12-16시간 내에 물바다가 되고, 국회의사당은 꼭지만 남고, 63빌딩은 3분의2가 수장될 것이라는 모의 동영상까지 제작하여 안방을 경악시켰다.
86년 12월, 모든 방송과 뉴스 매체들은 국민 성금을 독려했다. 달동네 아이가 생활비의 20%를 털어서 성금을 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도 소개했다. 정부는 평화의 댐을 1986년 10월에 착공하여 15개월 후인 1988년 5월에 1단계 공사를 마쳤다. 1단계 공사는 댐 높이 80m, 저수량 5억 9천만 톤을 수용할 수 있는 댐이었고, 나머지 공사는 금강산 댐 공사를 지켜보면서 대응하기로 했다. 공사비는 639억 원. 이것으로 88년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수공에는 충분하다고 했다. 금강산 댐은 북한이 먼저 쌓기 시작했지만, 우리가 평화의 댐을 건설하자 공사 진도가 늦어졌다. 그리고 1987년 5월, 공사가 돌연 중단됐다. 전두환이 발 빠르게 대응 댐을 건설하자 수공에 대한 희망을 접은 것이다. 김일성과 전두환의 한판 승부에서 전두환이 압승한 것이다.
김영삼과 이회창에 의해 사기극으로 몰린 평화의 댐
평화의 댐이 건설되기 시작하자 북한은 금강산 댐의 공사의 매력을 잃었다. 그리고 김영삼 시대를 맞았다. 1993년 김영삼이 들어서면서 5-6공을 청산하자는 열기가 높았다. 5-6공의 3대 의혹이 지목됐다. 12.12, 평화의 댐, 차세대 전투기 사업, 이렇게 세 가지였다. 12.12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공동으로, 평화의 댐은 전두환이, 차세대 전투기 사업은 노태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추진한 사업은 모두가 사기라는 정서가 팽배했다. 이때부터 '평화의 댐'이 뭇 언론의 몰매를 맞는 동네북이 됐다. 야당 의원들과 민주화 세력이 바람을 일으키자 모든 언론들이 인민재판에 나섰다. 대법관 출신이라 하지만 이회창은 기회주의자요 생쥐 같이 왜소한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대쪽 이미지로 부각되면서 감사원장이 됐다. 그는 분석 능력이 전무한 반면 공명심이 강해 여론에 편승하기도 하고 아부하기도 했다. 참고로 저자는 이 3가지 사업에 대한 전문가였다. 12.12는 ‘전두환의 쿠데타’가 아니라 ‘전두환이 김재규-정승화의 쿠데타를 차단한 사건’이었다. 차세대 전투기 사업은 지극히 타당-정당한 사업이었다. F/A18을 F-16으로 뒤바꾸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은 바로 저자였다. 그리고 평화의 댐은 적의 수공으로부터 이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한 생명 댐이었다. 사기꾼은 전두환이 아니라 김영삼이고 김대중이었다. 그리고 이들에 부역한 이회창은 분석 능력 없는 생쥐형 좁쌀이었다.
정권과 시류에 아부했던 조선일보
이런 효자댐을 놓고 조선일보는 1993년 6월 17일에 감사원장의 감사 결정을 “시의적절한 일”이라 극찬하면서 과거에 평화의 댐 건설을 앞장서 홍보했던 뭇 언론들을 대신하여 반성한다는 사설을 썼다. 옛날에 평화의댐 건설과 국민 성금 모금에 앞장섰던 언론들이 이제는 그 모금 행위가 대국민 사기극이었다고 몰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언론이 정권의 시녀였던 것이다. “정권안보용 댐” “독재 정권유지를 위한 전시용 댐” “국민을 기만한 사기극” “우스개 된 평화의댐”(1993.6.17 조선일보 사설).
생쥐 닮은 이회창의 경거망동
1993년 9월 4일, 이회창 감사원장이 3개월에 걸친 감사 결과를 내놓았다. 한마디로 존재하지도 않은 위협을 여론 호도용으로 만들어 낸 사기극이라는 취지의 발표였다. 9월 1일, 조선일보는 감사원 감사 결과를 미리 내보냈다. “수공 과장 정권안보 이용”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감사원의 발표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다. 이 감사원장의 발표는 야권과 야당에 권위와 힘을 실어 주었다. 이때부터 국민들은 평화의 댐을 '정권 안보용' '국면 전환용' '사기극'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런 사기극을 벌인 전두환은 몹쓸 사람으로 짓밟히게 되었다. 감사원 발표는 국회청문회를 촉발시켰다.
이회창이 촉발시킨 평화의 댐 관련 국회청문회
93년 9월, 국회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에 불려 나온 증인들을 향해 국회의원들이 죄인 다루듯 고성을 쳤다. 증인들은 인격이 없는 존재들이었고, 의원들의 성에 차지 않는 말을 하면 불호령들을 쳤다. 건설부 장관, 통일부장관 들이 주눅들은 모습으로 나가 증언을 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북괴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결정한 정당한 조치였다고 항변했다. 북한이 금강산 댐을 쌓다가 중지한 것은 우리가 평화의 댐으로 대비를 했기 때문에 더 쌓아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라고 항변했다.
이는 맞는 말이었다. 이렇게 정당하고 논리적인 답변들이 많은 야유와 증오에 찬 눈길들을 받았다. 93년 9월 8일, 국회건설위원회는 영등포 구치소 회의실에서 청문회를 열었다. 86년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이 영등포 구치소에 수감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듭된 질문에도 그는 한결같이 이렇게 답했다, “건설된 평화의 댐은 적의 기도를 말살했다.” 하지만 당시 평화의 댐은 전두환과 그 시대의 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이 주도했다는 여론이 팽배했었다. 평화의 댐은 순전히 전두환이 건설했기 때문에 사기극이 됐다. 전두환이 한 것이면 모든 것이 사기였다고 몰아붙였던 마녀사냥 시절에 이회창은 민주화 여론에 영합하면서 대쪽이미지를 창출해냈다. 그러나 금강산 댐은 군사 전략적 측면에서 보아야 하는 것으로 골방의 법 샌님이 간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2002년 김대중 말기, 언론들이 또 전두환에 아부
2002년 5월 7일, ‘평화의 댐을 사기극으로 폄하했던 조선일보’가 전혀 뜻밖의 기사를 실었다. “15년 동안 천덕꾸러기로 여겨왔던 평화의 댐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동아는 2002년 7월호에서 “금강산 댐은 제2의 노동 미사일이고, 또 하나의 핵무기다. 고의든 부실공사 때문이든 터지면 전시 체제로 돌입할 수밖에 없다”. 뜻밖의 기사들에 여러 신문들이 이에 가세했다. “평화의 댐 존재 가치 다시 부각” 언론들은 이렇듯 정권에 춤추는 기생들이었다. 2002년 인공위성 사진에 의하면 26억톤 이상을 저수하는 금강산 댐에 커다란 함몰 부분이 생겼다고 했다. 위험하게 보이는 이 댐을 북한은 7월부터 증축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가 불안을 느꼈다. 2002년 8월 30일, 남북경협추진위가 열렸다. 여기에서 양측은 금강산 댐의 안전 문제를 공동조사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북한은 20일 만에 그 약속을 깼다.
금강산 댐 함몰로 겁이 난 김대중, 부랴부랴 평화의 댐 나머지 부분 증축
김대중은 부랴부랴 기존의 80m 높이의 댐을 125m로 높이는 공사를 시작했다. 2002년 9월에 착공하여 2004년 12월까지 총 공사비 1,95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그리고 실제는 2005년 5월에 26억 3천만 톤의 저수량을 갖는 한국 제3위의 댐으로 증축됐다. 이는 금강산 댐보다 1천만 톤이 더 많은 저수량이다. 소양강 댐의 저수량이 29억톤, 충주탬이 27.5억톤이다. 평화의 댐은 현재 홍수조절 기능이 아주 훌륭한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2018년의 한겨레, 그래도 전두환은 사기꾼
2018.7.25. 한겨레신문이 “전두환 사기극’ 평화의댐, ‘평화의 물길’로 다시 태어날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제2의 박원순 정도로 보이는 최문순이 도지사로 있는 강원도가 평화의 댐과 임남담(금강산 댐)을 물길로 연결하고 육로로 내금강을 연결하는 ‘평화물길’ 관광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는 뉴스를 전했다.
“‘대국민 사기극’으로 지탄을 받았던 ‘평화의 댐’이 남과 북의 물길을 잇는 ‘평화물길’ 출발지로 재탄생한다. 평화의 댐은 ‘북한이 금강산에 있는 댐을 무너뜨리면 서울 여의도 63빌딩 중간까지 물이 차올라 서울이 모두 침수되는 만큼 이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 아래 전두환 정권 당시인 1987년 착공돼 18년 뒤인 2005년 완공됐다. 모두 3,995억 원이 투입됐다. 하지만 이후 감사원 조사에서 전두환 정권이 시민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무마하기 위해 북한의 수공 위협을 크게 부풀린 것으로 드러나 국민적인 지탄을 받았다. 이후 평화의 댐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물도 채우지 않은 채 전 세계 유일한 군사용 댐으로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 앞으로 남북 관계가 더욱 개선되면 더욱더 쓸모가 없어질 처지다. 하지만 평화물길 관광사업이 추진되면 금강산 댐에 물을 채우는 등 현재 군사용 댐을 소양강댐과 같은 다목적 댐으로 용도를 바꿀 수 있다.”
2015년의 오마이뉴스: 전두환은 애국자, 웬 일?
아래는 2015년 3월 25일, 오마이뉴스 기사는 “평화의 댐에 대한 진실 혹은 의혹-평화의 댐 그리고 금강산 댐, 그 진실을 해부한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아래와 같이 썼다.
금강산 댐의 실체, 국민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유
"한겨울, 비도 내리지 않았는데 웬 홍수?"
2002년 1월, 북 한강 상류 이북지역에서 갑자기 엄청난 흙탕물이 밀려 내려왔다. 초당 206톤. 19일간 3억5천만 톤 규모였다. 북한지역에 장마 예고도 없었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던 한겨울에 엄청난 수량이 평화의 댐으로 밀어 닥친 것이다. 80m 높이의 평화의 댐이 범람 위기에 놓인 상황. 노무현 정부는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한 조사를 착수했다. 그러나 딱히 '이것 때문이다'라는 뚜렷한 발표를 하지 않았다. 언론도 침묵했다. 다수의 국민들이 모르는 이유다.
'대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금강산 댐 때문이란 결론이 났다. '존재하지도 않다던 금강산 댐은 뭐고, 붕괴는 또 뭐란 말인가'. 일부 국민들의 의구심이 일자, 정부에선 '금강산 댐은 1999년에 착공을 했고,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일부가 붕괴되는 문제가 발생했다'고 밝혔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것에 대해 보도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
'남한처럼 장비가 현대화 되어 있지 않은 북한에서 금강산 댐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인력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곡괭이와 삽을 가지고 그 거대한 댐을 막았다면 큰 문제다' 일부 학자들이 금강산 댐 위험론을 제기했지만, 큰 이슈는 되지 못했다. 정부는 2003년 평화의 댐 2단계 공사를 착수해 2005년 10월에 준공했다. 높이 125m, 길이 601m, 담수 용량은 무려 26억 3천만 톤에 이른다. 20억4천만 톤의 담수량이 늘어난 규모다. 공사비만 2천489억이 투입됐다.
금강산 댐, 위협이 될 수 있다
"안 왔다고 들었어요. 잘 모르겠지만, 아마 국장급 정도의 사람이 참여했었을 겁니다." 2005년 10월, 평화의 댐 2단계 공사 준공식이 열리던 날, 초청을 받아 참석했었다던 화천군 화천읍 김 아무개 이장은 "그렇게 큰 공사 준공식이 열리면, 장관이나 차관급 정도는 참석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당시 정부의 고위 관료가 참석하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언론 또한 '단신 정도로 처리하는 수준'이었다고 덧붙였다. 정치권에서 평화의 댐에 대해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없다던 금강산 댐의 실체가 드러나면 난처하지 않았겠냐"는 김 이장의 말에서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한다. 2009년 9월, 북한에선 사전 예고도 없이 군사 분계선으로부터 42.3km에 위치한 황강댐 물을 임진강 하류로 무단 방류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시설물 파괴 등 수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그렇다면 평화의 댐은 안전한가? 일부 의식 있는 사람들의 관심은 평화의 댐으로 모아졌다.
금강산 댐 저수용량 26억2천만 톤. 평화의 댐은 26억 3천만 톤이다. 평화의 댐은 발전용이 아니다. 그렇다고 농업을 위한 저수 기능도 하지 못한다. 계곡을 가로질러 막아 놓은 커다란 콘크리트 구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125m 높이의 댐에 물이 차는 일은 없다. 평화의 댐에 서서 좌측을 보면 커다란 원형 수로 네 개가 보인다. 물이 차기 전에 단계적으로 방류되는 구조다. "금강산 댐 규모가 26억2천만 톤이란 것은 정확한 데이터냐? 그리고 물이 내려오는 속도는 감안했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가정이다. 2012년 11월 30일, 정부에서는 630일이란 공사 기간을 정해 평화의 댐 3단계 공사에 착수했다. 다수의 언론은 '혈세 낭비'라는 기사를 쏟아냈다. 논리정연하게 금강산 댐 부실이나 붕괴 려 또는 평화의 댐의 대응 한계에 대해 말하는 언론은 없었다. 세금 낭비로만 몰아갔다.
2011.7.7.자 최보식 칼럼
“'평화의 댐' 사기극과 진실”
“평화의 댐에는 '김대중' 사진은 있고 '전두환' 이름은 없다.”
“북쪽 눈치를 보면서 몰래몰래 쌓았다, 정말 희극과도 같았다”
. . '평화'에 초점을 맞춰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동판 사진과 핸드프린팅이 전시돼 있다. . .댐 주위를 둘러봐도 찾을 수 없는 것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흔적이다. 공사 연혁도 없었다. 이 댐이 어떻게 시작됐고,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고,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그런 안내문도 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평화의 댐에 '김대중'은 있는데, '전두환'은 없다는 게 묘했다. ‘. . 화천군에서 나고 자라서 그 지역 공무원이 된 정갑철 군수나 김세훈 관광정책과장은 직접 겪은 사실을 말했다.
‘1999년 여름 700~800mm의 대폭우가 쏟아졌다. 화천댐은 넘치기 직전이었다. 그때 평화의 댐이 막아주지 않았다면 화천댐은 무너졌고 연쇄적으로 북한강 수계(水系)의 다른 댐들도 무너졌을 것이다. '서울 물바다'가 현실이 될 뻔했다. 1996년 홍수 때도 그랬다. 평화의 댐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이 워낙 욕을 먹으니까 입을 다물었다.’
2002년 초 공사를 재개한 금강산 댐에서 초당 206t씩 흙탕물이 쏟아져 내렸다. 19일에 걸쳐 3억5000만t의 물폭탄이 터진 것이다. 선두에서 막고 있던 평화의 댐은 무너질 뻔했다. 방류 중단과 공동조사를 요구했으나 북한은 응하지 않았다. '햇볕정책'의 김대중 정부 시절 일이었다.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는 평화의 댐을 보강하고 더 높이기로 결정했다. . . 좌파 정권도 평화의 댐 존재 이유를 알았다. 다만 5공의 산물이기 때문에 숨기고 싶었다. 댐을 더 높이는 역할은 정말 맡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수공(水攻)이 될 수 있음을 알았기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 실제 댐 높이를 125m로 더 올린 것은 노무현 정부 때다. 국내 댐 중에서 가장 높은 소양강 댐을 추월했다. 5공 사업비보다 증축할 때의 사업비가 훨씬 많았다. 거대한 역사(役事)였으나, "북쪽 눈치를 보면서 몰래몰래 쌓았다. 정말 희극과도 같았다. . 이상은 이 지역 공무원들의 말이다. 댐 완공식에는 국무총리가 참석하는 걸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무장관조차 내려오지 않았다. 수자원공사 사장과 원주국토관리소장만 참석했다. 이런 연유로 아무런 기록도 하지 않았다. 기록이 없으면 '숨겨진 사실'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진상은 더욱 아득해질 것이다.
“생전에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여기에 와본 적이 없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2009년 처음으로 평화의 댐을 구경했다. 그의 흔적은 없었지만, ‘내가 잘못 만든 댐이 아니구먼’ 했다고 한다. 당초 금강산 댐 규모를 200억t으로 과장 혹은 판단 미스를 한 것을 빼면 말이다.
2022.8.1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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