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탐험 [16]
페이지 정보
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8-14 00:34 조회3,881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전두환 탐험 [16]
세기의 살인마 김일성
이 나라는 지금 ‘주사파’(주체사상파) 운동권들이 장악하고 있다. 주사파라는 인간들은 김일성을 신으로 모시는 정신병자들이다. 김일성은 과연 신적인 존재인가? 이 부분에서 독자들은 김일성이 사람의 목숨을 얼마나 가볍게 생각하는 요마악귀인가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김일성은 6.25를 일으켜 동족들은 물론 전쟁에 참가한 연합군들의 생명을 도륙했다. 히틀러 이후 우리는 유고에서 인종을 청소했던 밀로셰비치, 미국의 초고층 무역센터 빌딩을 가루로 날렸던 오사마 빈 라덴, 목숨을 파리처럼 여겼던 이라크의 후세인 그리고 리비아의 카다피 등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김일성에 비하면 왜소한 악한들이다. 김일성은 6.25전쟁을 시발점으로 하여 인간살육을 알삼았다. 아래는 육군사관학교 교재 한국전쟁사 555쪽의 통계 자료로 1950.6.25.~1953.7.27 기간에 발생한 피해 현황이다.
<연합군 피해>
국가 전사자수 부상자수
한국 --- 227,800 명 --- 717.100 명
미국 --- 33,747 명 --- 92,134 명
영국 --- 710 명 --- 2,278 명
터키 --- 717 명 --- 2,246 명
오스트레일리아 - 291 명 --- 1,240 명
캐나다 --- 309 명 --- 1,055 명
프랑스 --- 2888 명 --- 818 명
태국 --- 114 명 --- 793 명
네 덜란드 --- 111 명 --- 589 명
콜롬비아 --- 140 명 --- 452 명
에티오피아 --- 120 명 --- 536 명
필리핀 --- 92 명 --- 299 명
벨기에 --- 97 명 --- 355 명
뉴질랜드 --- 34 명 --- 80 명
남아프리카 공화국 - 20 명 --- 16 명
룩셈부르크 --- 7 명 --- 21 명
< 공산군의 손실 >
전투손실 --- 인민군 --- 520,000 명
중공군 --- 900,000 명
비전투손실 --- 406,000 명
< 일반주민 피해 >
남한 -- 사망자수 --- 230,000 명 (인민재판, 폭격, 등)
실종자수 --- 290,000 명 (拉北 등)
학살자수 --- 120,000 명 ( 인민재판)
북한 -- 사망, 실종, 등 총계 -- 2,000,000 명
이후 김일성은 무장공비 침투, 미루나무 도끼학살, 암살, 폭파, 무장 폭동, 민중 봉기, 지하당 조직, 간첩단 조직을 통해 수많은 목숨을 소모품으로 증발시켰다. 북한의 목숨이든 남한의 목숨이든 가리지 않았다.
88올림픽에 눈 뒤집힌 김일성
1980년 대통령 자리에 오른 전두환은 IMF 직전의 경제 상황을 맞았다. 미국의 힘을 이용해 일본으로부터 40억 달러를 안보차관이라는 명분으로 빼앗아왔다. 1965년 박정희가 줄다리기 끝에 얻어온 차관이 모두 8억 달러, 1945년 일본이 남한에 남기고 간 귀속 자산이 23억 달러였다. 이에 비하면 전두환은 엉뚱하고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로 엄청난 차관을 획득해 온 것이다. 이로부터 얻은 자신감을 가지고 그는 주위의 모두가 불가능한 욕심이라며 손사례를 쳤던 88올림픽에 도전했다. 그리고 지구인의 상식을 뒤엎고 1981년 바덴바덴에서 일본을 상대로 벌인 올림픽 유치 경쟁에서 기적의 승리를 쟁취했다. 김일성의 눈에서는 질투와 오기의 불꽃이 튀었다. 전두환을 죽이자! 1981년에는 필리핀에서 전두환을 암살하려 했고, 1982년에는 아프리카 가봉에서, 1983년에는 버마의 아웅산 묘소에서 암살하려 했다가 국제적 망신을 자초했다. 그동안 비동맹권 외교를 파고 들어 한국보다 월등하게 우위를 차지했던 외교망들을 스스로 파괴했다.
망신을 당하면서도 고약한 버릇은 그대로였다. 끝까지 88올림픽을 방해했다. 88올림픽은 국제 사회에서 북한이 완패당하는 원년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 걸기’를 한 것이다. 1986년에는 금강산 댐을 축성하여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어 수장시키려는 야심적인 공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공사 사실을 전 세계에 알렸다. 1988년에는 서울이 수장될 것이니, 세계 각국은 알아서 서울올림픽을 보이코트하라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이에 전두환이 매우 빠른 속도로 평화의 댐을 건설함으로써 저들의 의표를 찌르자, 드디어 우리 민간 항공기를 공중에서 폭파시키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중동 모래사막에서 얼굴을 새까맣게 태우며 건설 공사에 동원됐다가 고국에 가서 가족을 만난다는 부푼 꿈을 안고 귀국하는 115명의 생명을 공중에서 가루로 분해시킨 것이다.
KAL858기의 비극
노태우가 출마하는 제13대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 열을 올리고 있던 1987년 11월 29일, 안기부장 안무혁이 갑자기 전두환에 긴급 보고가 있다고 알려왔다. 전두환은 북괴가 또 일을 저질렀겠구나 미리 짐작하고 기다렸다. 아니나다를까 중동에서 근로자들을 태우고 오던 KAL기가 공중에서 폭파당한 것 같다는 실로 충격적인 보고였다. 김일성은 올림픽을 공동 주최하자는 요구를 귀찮게 해왔다.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테러도 불사하겠다고 협박도 했다. KAL기가 레이더망에서 갑자기 사라진 지점이 버마 상공이었다. 보고를 받은 전두환은 북한의 소행이 분명하니 거기에 초점을 맞춰 범인을 추적하라고 지시했다.
추적 과정은 실로 007 못지않게 스릴 있고 그만큼 복잡하다. 그래서 먼저 조사 결론부터 정리한 다음 설명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국제 기관들이 공동으로 전개한 불꽃 튀는 그물망 작전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던 테러리스트 김현희가 바레인 공항에서 극적으로 붙잡혔다. 12월 15일, 새벽 4시, 말보로 담배에 위장돼 있는 자살용 앰플을 깨문 상태에 있었던 김현희를 극적인 외교전을 통해 데려올 수 있었다.
중동 지역 바다 한 가운데 한 쪽 조각배 같이 떠 있는 작은 왕국, 바레인은 인구 170만 명, 면적 778평방키로, 서울 면적 605 평방키로보다 조금 넓은 나라다. 북한의 공작을 받았는지 처음과는 달리 한국 정부의 간여를 쌀쌀맞게 배격했다. 바레인 당국과 치열한 외교 협박전을 벌인 후 드디어 12월 15일 오전 4시 김현희의 신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드디어 오후 2시, 김현희는 안기부 수사관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김포공항에 내렸다.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서울에 온 김현희는 일본말만 하고, 일본인 척하면서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측 여성수사관의 인간적인 접근에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김현희가 고백한 사실들은 국제 수사관들과 공항 직원들, 대한항공 직원들이 공조하여 추적한 객관적 사실과 정확히 일치했다.
김현희의 정체
김현희는 1962년 1월 29일, 북한에서 출생하여 노동당 해외 정보 수사부 2과 소속의 공작원이 되었다. 1977년 9월 김일성 종합대학에 입학하여 예과 1년을 수료했다. 이때 나이 16세. 1978년 9월 곧바로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에 입학하여 1980년 3월에 중앙당 조사부 공작원으로 소환되어 가명 김옥희를 부여받았다. 18세였다. 그해 4월부터 1987년까지 6년 8개월 동안 군사 훈련, 간첩 교육, 해외 실습을 받았다. 25세였다.
1987년 10월 7일, 김현희는 공작 파트너 김승일과 함께 평양 룡성 43호 초대소에 불려가 대외정보조사부 ‘리 부장’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번에 동무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는 남조선 비행기를 제끼는 것이다. 남조선 비행기 폭파 목적은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남조선 괴뢰의 두 개의 조선 책동과 준동을 막고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 임무는 중요하고 어려우며 특히 비밀이 담보돼야 한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완전한 임무 수행을 위한 준비 사업을 철저히 하라. 이번 임무수행 과정에는 완전한 일본사람으로 위장해야 한다. 김현희는 일본인 여자로 위장할 수 있도록 일본어 학습에 열중하고 임무 수행 중에는 일본인 부잣집 딸처럼 행동하라” 공작 목표는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를 떠나 아부다비를 거쳐 서울로 가는 KAL858기를 폭파하는 것이었다. KAL858 항로가 이라크-UAE-서울이었던 것이다.
김현희에게 일본어를 전담해서 가르친 사람은 일본인 ‘다구치 야에코’(田口 八重子)로 알려져 있다. 다구치 야에코는 일본에서 1955년 8월 10일 태어나 1987년 실종되어 북으로 납치돼 갔다. 김일성은 다구치 야에코를 '자기의 은혜를 입은 여성'이라는 뜻으로 리은혜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김현희의 존재를 부인한 북괴는 일본으로부터 끊임없이 추궁을 받으면서도 김현희는 물론 ‘다구치 야에코’ 납치 사실도 부인해왔다. 이런 상태에서 2002년 9월 27일,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과 회담을 했다. 고이즈미는 단도직입적으로 김정일에게 북한이 ‘다구치 야에코’를 납치한 사실을 인정하라고 압박했다. 이에 고이즈미도 놀랄 정도로 김정일은 납치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사과도 했고 재발 방지도 약속했다. 당시의 북한은 일본의 도움이 필요했다.
다구치 야에코가 북한에 납치됐다는 사실을 김정일이 일본 수상 고이즈미에게 직접 확인해 준 데다 김현희의 증언이 이와 일치하는 이상 적색 세력들이 끊임없이 제기하는 안기부 음모론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안기부의 음모라면 김현희는 한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었어야 했다. 김현희와 이웃에 살았던 사람도 한국에 있어야 했고, 친척도, 초-중고-대학 동창들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김현희의 얼굴이 그토록 도배되었는데도 그녀를 안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김현희가 한국인이었다면 그녀는 다구치 야에코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어야 했다. 그런데 김현희는 ‘다구치 야에코’가 그의 일본어 선생이었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은 각기 수사팀을 파견해 김현희를 조사했고, 독자적 결론에 따라 북한을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하게 되었다.
.
김현희의 공작 과정
공작조는 김승일 조장, 조원, 김현희, 안내조 2명이 평양을 출발하여 복귀할 때까지 인솔하기로 돼 있었다. 이 둘은 폭발 무기인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사용법을 훈련받았다. AM/FM 겸용인 파나소닉 모델 RF-882, 폭파 시간을 자유자재로 타이밍을 조작할 수 있도록 했고, 기본으로는 설치 후 9시간 후에 폭파하도록 시간이 장입돼 있었다. 신분 노출 위험이 있을 때에는 말보로 담배갑에 설치돼 있는 독약 ‘앰플’을 씹어 먹도록 훈련돼 있었다.
1987년 11월 10일, 김승일과 김현희는 부장으로부터 마지막 지령을 받았다. “이번 임무는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친필 비준이 나있는 것으로 KAL858기를 폭파하는 것이다. 김현희의 임무는 김승일 동무의 딸로 행세하면서 항공료, 호텔료를 제외한 생활비 소모를 담당하고, 김승일 동무가 라디오를 작동하지 못할 상황이 발생하면, 대신 작동시키는 일이다. . 최악의 경우에는 소지하고 있는 앰플을 깨물어 비밀을 고수함으로써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권위와 위신을 백방으로 보장하라.” 맹세문을 낭독하게 했고 서명하게 했다.
김승일-김현희 등 일행은 1987년 11월 12일, 오전 8:30분경, 북한 항공기로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에서 다시 소련 비행기를 타고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가서 5박 6일 체류했다. 이후 자동차로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갔다. 비엔나로 넘어가던 도중 승용차 안에서 북한 관용 여권을 반납하고, 일본인 명의로 된 일본 여권을 받았다. 비엔나에서 또 5박 6일 머물렀다. 11월 23일, 오스트리아 항공기를 타고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 도착해서 또 다시 5박 6일 머물렀다. 그 사이인 11월 27일, 위장한 두 남녀는 그들이 머물던 호텔에서 안내조장을 만나 비닐 쇼핑백에 들어 있는 KAL858 비행기를 폭발시킬 무기,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액체 폭약이 들어 있는 700cc 병을 인수했다. 안내 조장은 중국산 약주 상표가 붙어 있는 약주병에서 약주를 쏟아버리고 그 안에 액체 폭발물을 채운 것이다.
11월 28일, 오전 11시, 일행은 쇼핑백을 들고 호텔을 나와 유고의 베오그라드 공항에서 이라크 바그다드로 가기 위해 이라크 항공기를 타려던 참이었다. 출국 마지막 검색대에 섰다. 유고슬라비아 여승무원이 소지품 검사를 했다. 여승무원은 트랜지스터에서 4개의 배터리를 빼앗았다가 바그다드에 내려서 되돌려 받도록 해주었다. 이라크 항공기를 타고 바그다드에 내렸다. 유고에서 비행기를 탄 김현희가 이라크에서 KAL858기를 타려면 통과 여객 대합실(transit room)을 거쳐야 했다. 쇼핑백을 들고 대합실로 가는 도중, 보안 검색대에서 또 배터리가 적발됐다. 검색원은 여지없이 배터리를 수거했다. 이 배터리가 없으면 폭파 임무 수행은 불가능했다. 통사정을 했지만 바그다드 보안 검색원은 들은 체도 않고 배터리를 빼앗아 쓰레기통에 던졌다. 김현희는 검색대를 통과해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김승일에게 이 사실을 보고한 후 잽싸게 쓰레기통을 뒤져 배터리를 꺼내 김승일에게 건넸다.
김승일은 잽싸게 배터리를 라디오에 끼운 후 소리가 나게 해서 검색원에 들려주면서 “이것 봐라, 이 배터리는 순수하게 라디오를 작동시키기 위한 것이다. 다른 데서는 이렇게까지 안 하는 데 왜 유고에서만 유난하게 구느냐” 큰 소리를 항의를 했다. 노인네가 큰 소리로 억울한 척 하면서 항의하니까 검색원은 눈감아 주었다.
아슬아슬하게 배터리를 되찾은 김현희는 통과 여객실에 대기하다가 KAL858기 출발 20분 전인 밤 11시 5분 경, 9시간 후에 폭발하도록 시간을 장입해 선반위에 얹어놓았다. KAL858기는 UAE의 아부다비 공항에서 착륙했다가 다시 서울로 향했다. 김현희 공작조는 도주하기 위해 UAE의 아부다비에서 내렸고, KAL858은 아부다비에 착륙했다가 김현희 조를 내려놓고 서울로 직행하기 위해 이륙했다. 그리고 한국시간 11월 29일 오후 2시 5분, 버마 근처인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가루가 되었다. 이후 아부다비에서 내린 김현희 팀은 로마로 튀려다 아부다비 공항 직원에 의해 강제로 가고 싶지 않았던 중동의 작은 섬나라 바레인에 내리게 됐다. 북한 초대소가 짠 시니리오의 작은 실수가 빚어낸 저들의 낭패였다. 김현희 조는 2일 후 바레인 공항에서 로마행 항공권을 가지고 출국 수속을 마친 상태에서 바레인 주재 일본 대사관 직원과 바레인 경찰에 의해 독안에 든 쥐가 되었다.
김현희 추격 과정
정부는 두 사람이 바레인으로 간 사실까지는 확인했다. 이들은 여기에서 로마로 가려 했다. 이들이 로마로 가지 못한 것은 UAE 아부다비 공항의 특이한 수속 관행 때문이었다. 아부다비 공항은 비행기를 갈아타는 승객의 탑승 수속을 대신해 준다고 한다. 테러리스트 김현희 조는 두 개의 항공권을 가지고 있었다. 한 개는 아부다비를 거쳐 바레인으로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부다비에서 로마로 가는 항공표였다. 김승일-김현희가 계획한 여정은 아부다비-암만-로마 경로로 탈출하는 것이었다. UAE- 요르단- 이태리 노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예기하지 못했던 장애물이 나타났다. UAE의 아부다비에서 요르단으로 가기 위해 통과 여객실로 가는 도중 공항 안내원이 항공권과 여권을 보자고 한 것이다.
뜻밖의 요구에 이 둘은 매우 당황했다. 아부다비-암만-로마행으로 되어 있는 티켓을 보여주면 출발점이 아부다비이기 때문에 통과 여객실로 올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 둘은 다시 통과 여객실을 나가 처음부터 아부다비식 탑승 절차를 밟아야만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비엔나 베오그라드-바그다드-아부다비-바레인을 통과하는 항공 티켓과 일본 여권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공항 안내원이 티켓과 여권을 확인 한 후 곧바로 돌려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UAE 안내원은 자신이 직접 탑승 수속을 하겠다고 고집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직접 탑승 수속을 하겠으니 티켓과 여권을 돌려달라고 반복 요청했지만, 공항 안내원이 해주는 대로 예정에도 없던 바레인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로 로마행 비행기를 타려다 만원이라 그 다음날로 예약했다.
한편 이들의 소재를 백방 추적한 전두환 정부는 김현희가 바레인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다행히 바레인은 북한과는 수교가 없고, 한국과만 수교를 맺고 있었다. 다음날은 12월 1일 새벽 6:30분, 긴장한 김승일은 호텔 객실에서 김현희에게 말보로 담배갑을 건네주었다. 바삐 호텔을 나와 택시를 타고 30분 만에 바레인 공항에 도착해 로마행 비행기의 탑승 수속을 마쳤다. 타기만 하면 이들은 영웅이 되는 것이었다.
공황에서 한숨 돌리고 난 후 비행기를 타려고 출국 검색대를 통과하려는 순간, 대기하고 있던 일본 대사관 직원이 여권과 출국 신고서를 보자고 했다. 요구에 응한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대합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돌아온 대사관 직원은 김현희가 소지한 여권은 ‘하치야 마유미’ 명의의 여권인데 이는 위조 여권인 것으로 판명되었으니 두 사람은 곧장 일본으로 가야한다고 했다. 이후 이 둘은 바레인 경찰관 5명의 감시 하에 들어갔다. 로마 비행기는 이미 떠났다. 12월 1일, 오전 9시였다.
김승희가 비장한 어조로 김현희에 말했다. “우리의 정체가 들통났다. 일본에 끌려가면 고생하다 죽는다. 여기서 자살하자. 나는 살만큼 살았지만 네가 안 됐구나. 미안하다” 이에 김현희는 5명의 경찰을 향해 보란 듯이 김승일이 건네주는 ‘말보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피웠다. 최후의 순간에 독약 앰풀을 꺼내 물어도 의심받지 않으려는 사전 포석이었다. 이때 경찰관이 가방을 달라고 했다. 김현희는 가방에서 말보로 담배갑과 개스라이터를 챙긴 후 가방을 경찰에 내주었다. 경찰은 김현희가 꺼내든 담배갑도 내놓으라 했다. 김현희는 앰플 표시가 돼 있는 담배 개비를 재빨리 꺼냈다. 경찰은 그 담배 개비를 빼앗았다. 다급해진 김현희는 경찰관 손에서 그 담배 개비를 낚아채 깨물었다. 그리고 기절해버렸다. 경찰관은 손가락을 입에 넣어 담배를 긁어냈다. 이런 승강이가 벌어지는 동안 옆에 있던 김승일은 여유 있게 앰플을 씹어 삼켰다. 그리고 곧장 죽었다.
바레인과의 외고 전쟁
전두환은 무슨 수를 쓰든지 김현희를 한국으로 데려오라고 명했다. 안기부 대공수사 부서에는 앰플 전문가가 있었다. 한 과장이었다. 30년 동안 북한 간첩들을 조사해온 최고 전문가였다. 그는 자살용 독약 변천사를 정리하고 김현희가 사용했을 앰플을 챙겨 가지고 바레인으로 날아갔다. 12월 3일이었다. 그런데 북한은 외교적으로 중동 일대를 관장하고 있었다. 바레인이 태도를 급격히 바꾸었다. 한국으로부터 오는 사람을 일체 만나지 않겠다고 버틴 것이다. 한 과장은 미국 대사관을 통해 바레인측 수사책임자 ‘핸더슨’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정해융 주 바레인 한국 대사는 바레인이 고용한 영국인 핸더슨 수사 책임자를 만나 “확실한 증거가 있다"고 설득했다. 결국 한 과장은 합리적인 핸더슨 수사 책임자를 만났고, 설득에 성공했다.
하지만 바레인은 북한의 압력을 받아가면서 차일피일 미루었다. 서울에서 급파된 박수길 외무부 차관보가 마지막 카드를 꺼내 바레인을 협박했다. “김현희는 여객기를 공중에서 폭발시킨 엄청난 범죄자다. 국제적 폭발력이 엄청난 존재인 것이다. 바레인은 그 엄청난 국제적 폭발력을 견뎌내기 어렵다. 바레인 당국이 재판을 하게 되면 그 과정이 길 것이다. 그 사이에 북한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김현희를 납치하거나 죽이려 할 것이다. 며칠 내로 북한이 김현희의 숙소를 폭파하러 올 것이라는 첩보도 있다. 북한은 테러리스트를 고용해 중동 지역에 파견돼 있는 당신네 대사를 납치해 김현희와 맞바꾸자고 협상할 수도 있다. 한 순간이라도 빨리 손을 털어야 당신의 나라가 안전할 수 있다. 왜 망설이는가?”
협박한지 정확히 12시간 후, 아랍에메리트 공화국 외무장관 ‘칼리프’로부터 연락이 왔다. “데려 가시오.” 외교의 충력전이요 위기 관리의 FM이었다.
사건이 발생한지 464일만인 1989년 3월 7일, 1심 재판이 열렸다. 그 후 47일 만인 4월 25일, 1심은 사형을 선고했다. 1990년 3월 27일, 대법원은 사형을 확정했다. 그후 보름만인 1990년 4월 12일, 노태우는 그를 특별사면했다.
2022.8.14. 지만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