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탐험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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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8-21 00:31 조회3,55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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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탐험 [23]
노태우 지명과 6월소요
4.13호헌조치와 박종철 사건으로 한참 시끄러울 때인 1987년 6월 2일 밤, 전두환은 민정당 간부들을 청와대 한옥 상춘재로 초대했다. 비공식적으로나마 내부 주변 간부들에게 노태우를 후계자로 추천한다는 뜻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은 노태우가 차기 대통령을 맡을만한 인물이라는 이유를 설명했다, 안보 식견이 뛰어나고, 여러 개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경륜을 쌓았고, 현재는 올림픽조직위원장과 집권당 대표를 역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성의를 다해 소개했다. 전두환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예견했다는 듯 박수를 쳤고, 현장에 나온 노태우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1주일 만인 6월 10일, 노태우는 올림픽공원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민정당 전당대회를 통해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날 노태우는 수락연설을 했다. “평화적인 정권 이양이 실현되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돼 있는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시기상 여야가 합의하는 합의 개헌은 평화적인 정권 이양이 이루어진 이후에 할 수밖에 없다”는 요지의 메시지를 내놓았다. 4.13호헌조치를 고수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5공헌법이 규정한 ‘간접선거’에 의해 안전하게 대통령 자리에 오른 다음, 자기 주도 하에 개헌절차를 밟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그 나름으로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평화적인 정권 이양에 대한 역사적인 선례를 기록해야 하는 시점이 불과 10개월 밖에 남지 않았고, 88서울올림픽도 1년 남짓하게 성큼 다가와 있었다. 이 짧은 기간 내에 억지와 장외 소요를 일삼는 야당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절차를 밟다가는 국가적 대사를 그르칠 가능성이 있었다. 평화적 정권 이양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정치 일정표였다. 따라서 노태우가 호헌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6월 10일, 노태우가 민정당 차기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고 그 역시 ‘호헌’을 고수하겠다고 선언하자, 서울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호헌반대 규탄 집회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전국 22개 지역에서 40여만 명이 참가하는 시위로 치달았다. 이에 당황한 민정당은 6월 15일, 4당 대표회의를 하자, 여야 영수회담을 하자 유화 제스처를 취했다. 강경 노선에서 유화 노선으로 후퇴하는 민정당 모습을 보자 민주당은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김대중을 연금에서 해방시켜라’, '6.10.소요에 관련한 구속자들을 무조건 석방하라’는 등의 요구들이 빗발쳤다. 설상가상으로 6월 9일, 연세대 교문 앞 시위를 하다가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은 이한열이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사망했다. 이것이 또 민심을 자극했다. 전국 16개 지역에서 150만 명이 참가하는 ‘최루탄 추방대회’가 동시다발로 열렸다. 부산에서는 30-40만 명이 시위를 벌여 경찰이 아예 진압을 포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민정당은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를 만났지만, 김영삼은 관심을 받을수록 더욱 기세등등하여 억지 요구의 수준을 높여갔다. 경찰서, 파출소, 민정당 지구당사들이 소실되거나 파괴됐다. 전국 180만 명이 시위에 동원됐다. 3,000여 명이 연행되었다. 바로 이런 것이 김영삼과 김대중이 노리는 교란이었다.
과거 같았으면 당연히 위수령이나 계엄령이 발동되어 군이 진압에 나섰겠지만 평화적 정권 이양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군을 풀어 소요를 진압하게 되면 계획에 차질이 올 수 있었다. 이에 전두환은 계엄령이 선포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가도록 했다. 시위자들에 겁을 주어 심리적 위축을 가함으로써 시위가 과열화되는 것을 어느 정도 진정시켜놓고, 경찰 선에서 시위를 진압케 했다.
만일 군을 동원했더라면 약속한 바의 평화적 정권 이양은 불가능했을 수 있었다. 전두환은 전두환 회고록 제2권 614쪽에서 '이 시기가 자신에게는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고 술회했다. 저자는 1980-81년 사이에 중앙정보부에서 차장 특보를 1년 정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차장과 국장들로부터 여러 차례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늘 주위에 강조하기를 자기가 정권을 더 잡으려 하는 눈치가 보이면 가차 없이 총으로 쏴 달라”는 말이었다.
노태우의 후계 행진
전두환이 노태우를 후계자로 지정한 것은 1987년 6월 2일이었지만 전두환은 그의 회고록에서 '노태우를 마음에 찍었던 시기는 그보다 훨씬 전이었다'고 기록했다. 그가 노태우를 후계자로 선택한 것은 그가 절친이어서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객관적으로 심사숙고한 결과라고 했다.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은 군에 대한 식견이라고 생각했다. 노태우가 애국심과 능력 면에서 군내외로부터 가장 높은 신망을 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런 내심은 쉽게 당사자인 노태우에게 전달할 수 있는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이하의 스토리는 전두환 회고록 2권 614-657쪽을 저자의 버전으로 요약 정리한 것이다.
[노태우를 마음속에 후계자로 점을 찍었다고 해서 그가 저절로 대통령감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키워주어야 했다. 키우는 과정을 남에게 눈치채게 헤서도 안 되었다. 나는 군에 더 남아있기를 원하는 그를 설득해서 예편과 동시에 정무장관에 기용했다. 체육부를 신설해서 그를 체육부장관에 앉혔다. 올림픽 준비업무도 맡겼다. 전국의 행정조직을 관리하는 경험을 쌓아주기 위해 내무부 장관도 시켰다. 88올림픽과 86아세안 게임의 조직위원장도 맡겼다.
그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염려했던 대로 노태우 내무장관이 이권에 개입됐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나는 노태우를 불러 주의를 주고 내무부에서 올림픽조직위원장 자리로 옮기게 했다. 조직위를 맡길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단 그를 바람 잘 날 없다는 내무부장관직에서 피난시킬 목적이었다. 훗날 들으니, 노태우에게 꿈을 키워주었던 박철언도 노태우가 내무부장관으로 있는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염려했다고 한다.
나는 안기부장 장세동에게 노태우 주변에 이권청탁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을 차단하라고 지시했다. 노태우가 민정당 대표가 된 후에도 업자들이 들락거리기에 장세동이 업자들을 불러 경고했다. 노태우는 이를 자기를 견제하려는 것으로 곡해하면서 나를 향해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남덕우, 노신영, 장세동이 차기 주자로 거론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노태우는 안절부절하고 있다는 말도 들렸다.
최고 권력을 이어받을 사람은 몸을 사리고 신중하고 인종하는 기간을 보내야 하는데 노태우는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고, 한 단계만 더 가면 최고 권력자가 된다는 생각이 앞서 있는 것으로 보였다. 특히 1985년 2.12. 총선에 노태우가 출마하는 문제를 놓고 노심초사 초조해하는 마음을 여러 차례 보였다. 나는 노태우를 여당의 대표를 맡기고 싶었다. 여당의 대표가 원외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노태우에게 지역구 출마를 권유했다. 서울의 지역구에서 당선이 되면 단박에 정계 거물로 등장하게 되고, 자연스레 대통령 후보로 거론될 것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그런데 노태우는 서울 출마에 자신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곡해 하는 노태우
나는 서울이 자신 없으면 지역 연고가 있는 대구에서 출마해보라고 했다. 이에 노태우는 지역구 출마는 도저히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선선히 그러면 그만 두라며 전국구 자리를 주었다. 이에 대해 노태우는 또 나를 곡해했다. 야당이 우세한 지역에 자기를 보내 망신을 주려했다는 것이다. 노태우는 안전한 길로만 다니려 했다. 패기도 없고 투지도 없었다. 이런 그의 모습은 6.29선언을 탄생시키는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나고야 말았다.
수석비서관들, 보좌관을 지낸 몇몇이 나에게 시중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노태우가 깜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별한 이유는 달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평만 있었다. 노태우는 사관학교에서 만나 늘 친구로 지냈다. 나는 군대 시절로부터 노태우에게 네 차례에 걸쳐 내 자리를 물려주었다.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 경호실 작전차장보, 보안사령관, 민정당 총재였다. 대통령 자리까지 합하면 다섯 차례다. 이렇게 절친한 사이였는데도 주위에서는 노태우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는 소리들이 들렸다.
포커판의 노태우
우리나라 공군 창설 멤버로 공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역임했고, 5.16 이후 공화당 초대당의장과 미국 대사를 역임했던 김정렬 전장관이 노태우를 공식 후계자로 지명하기 직전에 나를 찾아왔다. “노태우를 잘 아십니까?” “네, 잘 압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예, 그렇고 말고요”, “노태우가 대통령직을 잘 수행하리라고 보십니까?”, “그럼요, 그래서 후임자로 고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정렬 전 총리가 왜 이런 다짐하는 질문을 했을까? 김정렬 전총리는 한 포커 게임 멤버들의 좌장 같은 존재였다. 나의 동기생인 민석원, 노태우, 김복동, 권익현, 안교덕, 김식, 이원조 등이 어울리는 포커 게임이었다. 이들은 모두 나와 같은 동기생들이지만 나를 형님처럼 여기며 어렵게 대했다. 나는 원래 포커 게임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끼리는 흉허물 없이 지냈을 것이다. 아마도 김정렬 전총리는 노태우의 포커판 매너를 보고 노태우를 평가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 든다.
6.29 앞에 선 노태우
나는 내각제에 대한 미련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직선제만이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야당과 대수 국민들에게는 먹힐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1987년 6월 15일 아침, 김윤환 정무1수석이 직선제를 수용할 것과 김대중의 사면복권을 강력히 건의해왔다. 이튿날인 16일에는 김용갑 민정수석과 박영수 비서실장이 같은 건의를 해왔다. 나는 마음을 굳혔다. 직선제를 수용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노태우에게 나의 결심을 알려주고, 낙담할 그에게 용기를 넣어주어야 했다. 6월 17일, 노태우를 불렀다. “직선제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이기는 대책을 마련하라”
노태우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낭패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일언지하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노태우는 그에게 안전한 간선제만 고대하고 있었는데 직선제라니!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노태우는 잠시 후 평정심을 되찾은 듯 직선제를 받아들일 수 없는 2가지 이유를 내놨다. 민정당은 이제까지 호헌의 입장을 취하다가 내각제의 장점을 홍보해왔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직선제로 가야한다면 민정당 당원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느냐, 둘째, 직선제 하에서 과연 노태우가 승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는 반대의견이 아니라 반발이었다. “너는 간선제로 쉽게 대통령이 되었는데 나더러는 떨어질 수도 있는 직선제로 대통령을 하라는 것이냐?”
“직선제로 가면 저는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겠습니다”, 강력히 반발했다. 나는 이런 그를 붙들고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첫째, 직선제를 수용하지 않으면 정국이 소용돌이쳐서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으면 질서를 잡을 수 없다. 게엄령이 선포된 상태에서 어떻게 88올림픽을 치를 수 있느냐, 어렵게 회복한 경제에도 악영향을 주게 되고, 더구나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이룰 수 없게 된다. 둘째. 직선제를 수용하지 않으면 야당이 선거를 보이콧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여당 후보가 단일 후보가 된다. 그러면 당신이 당선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셋째, 만일 야당이 의표를 찔러 간선제를 채택하겠다고 하면 여론은 야당으로 쏠리게 된다. 이럴 때 당신이 과연 간선제로 당선될 수 있겠는가? 넷째, 설사 간선제로 당신이 당선된다 해도 개헌 요구가 불거질 것이다. 사회가 혼란해지고 경제가 곤두박질할 것이다. 다섯째, 당신은 직선제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
6월 18일, 김용갑 민정수석이 보고를 했다. 직선제 수용하면 여론의 60%가 우리 편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많은 참모들이 직선제를 건의해왔다. 6월 19일 김용갑이 노태우를 만난 결과를 보고했다. 노태우는 절대로 직선제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노태우는 이재형 국회의장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는데 ‘직선제로는 당선이 어려우니 자기를 위해 각하를 만나 마음을 바꾸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이재형 국회의장은 노태우에게 “나도 전두환 대통령과 동감이다. 직선제 채택 말고는 답이 없다. 직선제 해도 이길 수 있다” 이렇게 조언했다고 한다.
나는 즉시 노대표를 비밀리에 불렀다. 그는 내 앞에서 “직선제를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말을 이었다. ”노태우가 각하에게 직선제를 수용할 것을 건의 드렸더니 각하께서 크게 노해 호통을 치셨다. 이런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십시오. 꼭 그렇게 해주십시오“ 노태우가 열린 자세로 직선제와 민주화를 대통령에 건의했는데 대통령이 노발대발하면서 민주적 건의를 묵살했는데, 노태우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전두환 대통령을 딛고 나서서 민주화와 직선제를 선언하고 나섰다는 시나리오를 전두환더러 연기해달라는 것이었다. 전두환은 반민주적인 폭군, 자신은 민주적인 영웅으로 대조시켜야만 자기가 당선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역사에는 비밀이 없다. 나는 국민을 속이고 기만하는 대통령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노태우의 욕심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6월 22일 나는 노태우를 다시 불렀다. 그리고 노태우의 건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첫째, 비밀이 없는 세상에 ‘정치는 쇼’라는 것이 밝혀지면 우리 두 사람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된다. 그리고 6.29선언(직선제 선언)의 의미도 사라진다. 둘째, 비밀이 알려지면 국민이 분노해서 표를 주지 않을 것이다. 셋째,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면? 나는 민주화를 끝까지 반대한 사람으로 영원히 낙인찍히지 않겠는가. 그 대신 이렇게 하자. “당신이 직선제 수용을 발표하고 그 발표문 말미에 만일 전두환이 노태우의 직선제 건의를 거부하면 나 노태우는 모든 공직과 후보직을 전면 사퇴하겠다” 이런 문구를 넣으면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노태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며칠 후 나는 노태우를 다시 불렀다. “나더러 당신의 직선제 건의를 반대해 달라”는 당신의 요청은 없었던 걸로 하자. 나는 국민을 속이고 싶지 않다. 다만 발표문 내용은 당신 자유에 맡기겠다. 노태우는 저항 없이 돌아갔다. 그런데 노태우는 바로 그날 밤 안현태 경호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직선제 수용의사를 밝힐 테니 전두환 대통령이 자기를 야단치며 반대하는 모습을 연기해달라”고 또 집요하게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6.29의 직선제 선언은 순전히 전두환의 생각이었다. 6.29는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준 둘도 없는 귀한 선물이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선물을 받은 노태우는 그것이 자기 작품이었다고 선전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인기를 높일 수 있는 내용으로 6.29선언문을 작성했다.
발표하기 하루 전인 6월 28일, 노태우는 안현태 경호실장에게 또 전화를 했다. “내가 직선제를 수락하는 6.29선언문을 낭독하면, 바로 뒤를 이어 각하께서 호통을 치시면서 각하는 직선제에 반대한다는 반응을 보이게 해달라.” 참으로 못 말리는 치사한 집념이었다.
결국 노태우는 1987년 9월 29일 오전 9시, 민정당 중앙당 회의실에서 “국민 대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직선제를 수용하겠다는 것이어서 인기가 대단했다. 10월 1일 나는 담화를 통해 노대표가 발표한 내용을 적극 수용한다는 뜻을 밝혔다. 12월 16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한국 정치 역사상 처음으로 실현된 것이다. 민주주의 종주국이라는 영국에서도 1215년의 마그나 카르타 이후 413년이 지난 후에야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믿은 사람은 당시에 아무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22.8.20.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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