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내란 음모 사건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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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7-29 13:12 조회3,86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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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내란 음모 사건 정리
반역행위
1980년에 단죄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요지는 아래와 같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 패하자 김대중은 신병 치료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1972년10월 유신 계엄령이 선포됐고, 국회가 해산됐다. 이렇게 민감한 시기에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며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 및 군사원조를 중단시키고자 노력했고, 망명정부를 수립했고, 김일성 정권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등 반국가적 행위를 감행했다.
북과 연계 반국가단체 결성
1973년 북한을 방문했던 친 북괴 분자들을 미국에서 만나 반국가 단체인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을 결성한 데 이어 일본에서도 한민통을 결성하여 의장에 취임했다. 그야말로 극렬 좌익이었다.
저격범 문세광, 간첩 김정사 배출
한민통의 핵심 요원은 김종충, 조활준, 배동호, 김재화, 곽동의, 정재분 등 소위 베트콩들이었으며 이들은 조총련과 북한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일본 우익을 표방하는 자민당 출신이면서도 좌파의원인 우스노미야 등 일본 국회의원들의 지원을 받았다. "한민통"은 좌익들로 구성된 조직이다. 육영수 여사를 저격사살한 문세광이 한민통의 일원이며, 육여사 저격 직후에 국내에 잠입했다가 간첩으로 체포된 김정사도 한민통의 일원이다. 이로 인해 대법원은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다. 김대중이 대통령 끝내고 재심을 진행했지만, 대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조총련 자금 받아 미국원조 방해
조총련이 한민통에 매월 1,000만 엔 내지 2,000만 엔씩 자금을 공급했다, 또한 한민통은 광동회라는 좌익단체가 발행하는 공산당 선전지 "민족시보"를 기관지로 활용했다.
1973년 4월, 김대중은 미국 하버드대 코헨 교수에게 한국의 박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 미국이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한다며 미의회 지도자에게 그런 압력을 넣어달라 호소했다.
오죽하면 일본에서 납치해와
그의 이른바 반역활동에 분개한 중앙정보부는 1973년 8월 8일, 그를 도쿄 팔레스 호텔에서 납치하여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했다. 이에 대해 박정권은 국내 야당 지지자들의 강한 반발과 주권침해라는 일본의 비난에 직면했지만 미국의 주선으로 일본 정부와 막후접촉을 벌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을 해임하고,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행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고, 김종필 총리가 일본을 방문하여 사과하는 선에서 86일 만에 마무리됐다. 국제적 비난이 확산된 것만큼 김대중의 자유공간도 넓어졌다. 그는 일본에 있는 김종충, 배동호 등과는 전화로, 다른 구성원들과는 김녹영 및 일본기자 등을 통해 통신연락을 취하면서 반정부 음모를 계속했다.
국민회의는 한국판 한민통
1974년 12월, 가택연금 중에 있던 김대중은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국민회의)에 참여해 재야활동을 다시 시작하면서 이른바 명동사건을 저질렀다. 1976년 3.1절 기념 미사에서 그는 윤보선, 함석헌, 문익환, 김승훈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주장하는 '3.1민주구국선언'(명동사건)을 발표해 대통령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죄로 구속되어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확정 받아 진주교도소에 수감됐다.
국민연합은 혁명의 도구
그의 투옥에 대한 국내외 비판이 고조되자 박대통령은 1978년12월 그를 형집행정지로 석방한 후 가택연금으로 전환했다.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그는 1979년3월1일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국민연합)을 결성해 윤보선, 함석헌 등과 함께 공동의장을 맡으며 본격적인 재야활동을 시작했다.
서울의 봄 열어준 생쥐인생 최규하
1979년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되면서 유신체제가 붕괴되자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동년12월에 그를 가택연금에서 해제했고, 이어서 1980년 2월 29일, 그를 포함한 모든 시국사범들에게 사면복권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안겨줬다. 시국사범들은 이를 '서울의 봄'이라 부르면서 마음껏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김영삼, 김종필 등과 나란히 가벼운 몸으로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서면서 3김정치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노력했다. 당시 한국사회를 위협했던 학원소요사태를 배후 주동하고 학원소요의 위력을 과시하면서 최규하 과도정권의 즉각 퇴진을 압박한 것이다.
무정부 상태로 몰아가
그는 구심점을 잃고 있던 과도정부의 취약함을 틈타 한국사회를 무정부상태로 만들어 정권을 잡을 욕심으로 그를 추종하는 반체제 집단인‘국민연합회’‘민주헌정동지회’‘민주연합청년동지회’‘한국정치문제연구소’ 유신체제에서 제적된 복학생 등을 이용하여 과도정부를 전격적으로 붕괴시킨 후 정권을 잡으려는 뜻을 품고 학생소요를 선동했다. 1980년 화염병을 무기로 한 대규모 극렬시위는 김대중의 작품이었고, 그를 따르는 세력은 이를 ‘5월의 봄’이라 불렀다. 신바람 난다는 뜻이었다.
북악파크가 혁명 모의 아지트
국민회의 지도부 인물들인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문열, 한완상, 한승현, 서남동, 이해동, 심재권, 장기표, 이헌배, 계훈제 등은 북악파크호텔에서 수차 회동하여, 장기표와 심재권으로부터 각목과 화염병을 사용한 폭력시위를 과격하게 벌여 민중의 호응을 얻어가지고 정부중요부서를 점령하여,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를 만들어 김대중의 집권 계기를 마련하겠다는 보고를 받고 이를 추인했다. 1980년 5월 14일 및 15일에 발생한 소요는 극렬함의 정도로 보나 양적으로 보아 경찰력의 한계를 이미 넘어선 것이었다.
김일성 믿고 국가에 선전포고
이 양일간의 학생소요는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연합 산하인 민주청년협의회의(장기표 등 복학생 조직) 사주에 따라 전국 33개 대학총학생회장들에 의해 유도됐다. 5월 15일 서울역 10만 시위에 고무된 김대중은 5월 16일 제2차 민주화촉진선언을 했다. 최규하 정부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5월 19일까지 최규하 정부가 김대중에게 계엄령 철폐와 최규하 내각을 해산하겠다는 통보를 하지 않으면 5월 22일 정오를 기해 전국적 봉기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군과 경찰은 상부의 명령에 불복하고 전 국민은 검은 리본을 달고 전국에서 봉기하라고 선동했다.
5월 22일로 계획돼 있던 전국규모의 소요는 국민연합 등 재야정치 단체들과 전국 59개 총학생회장단회의와의 연대 하에 이루어지는 대대적인 민중봉기이기 때문에 군에 의한 대대적인 대책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5.17 된서리
5.16일, 국방장관은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에서 돌아오자마자 청와대에서 열린 시국대책간담회에 참석하여 이 사실을 보고했다. 정부는 이런 발칙한 선전포고를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5월 17일, 군장성들이 분노했고, 전국지휘관회의와 국무회의가 긴급하게 열렸다. 지역계엄이 전국계엄으로 강화됨과 동시에 자정을 기해 김대중 혁명내각요원 24명이 긴급 구속됐다.
모든 지역이 5.17 자정을 기해 예비검속이 발동했고, 젊은이들은 경찰 눈에 뜨일까 무서워 꼭꼭 숨었다. 모든 지역에 냉기가 엄습했다. 그런데 광주만이 ‘반역구역’이 됐다. 모든 지역에서 젊은이들이 겁에 질려 숨어있었는데 광주의 젊은이들만 두려움을 모르는 홍길동일 수 이었겠는가? 지금 와서 보면 북한 특수군이 아니면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북한군 개입이라는 것은 그 누구의 상상 속에도 없었다. 광주 폭동은 북한 특수군 600명만으로는 일으킬 수 없었다. 김대중이 광주 지역에 구축한 조직들이 배후에 있었다. 광주에서도 천대받던 구두닦이 급 철부지들을 소모품과 같은 부나비로 동원한 것이다. 그 전라도 배후자들 중에 37세의 복학생 정동년이 있었다.
구두닦이소년들 불길 내몬 김대중 조직
정동년은 김대중으로부터 김상현을 통해 자금 500만원을 받아 광주시위를 계획했다. 대법원 판결문에 의하면 이들은“민주화운동을 구실로 국민연합과 국민연합의 조종을 받는 복학생 단체인 민주청년협의회 등 지지 세력을 동원하여 학생시위를 폭력시위로 조종하고 이에 일반국민을 가세시켜 폭력으로 국헌을 문란하여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12가지의 중대한 범행을 저질렀다.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 기소 및 재판
5월17일 19시경 김대중 등에 대한 수사가 착수됐다. 중앙정보부 김근수 안전조사국장은 수사내용을 수시로 이학봉 합동수사단장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겸 중앙정보부장서리에게 보고했고 5월 20일경 중간수사결과 발표 문안을 작성하여 이학봉과 전두환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계엄사는 5월22일 중간 수사결과를 이렇게 발표했다.
변칙과 반칙과 허위로 산 일생
“김대중이 학생소요를 배후에서 조종 선동하여 온 확정을 잡고 연행 조사 중이다. 김대중은 정상적인 정당활동을 통해서는 정권획득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변칙적인 혁명사태를 일으켜 일거에 정권을 장악할 계기를 마련하기로 하고 복직교수와 복학생을 통하여 5월 중순 대학의 교내 및 교외에서 벌어진 학생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예춘호, 문익환, 조성우, 장기표등과 회동하여 5월 22일 정오를 기해 일제히 봉기를 획책하는 등 대중선동과 민중봉기로 정부전복을 기도하였다.”
대학생들에 돈 뿌려
계엄사는 위 발표에서 김대중의 선동 사례로 1980년 3월초 서울대생 심재철에게 100만원을 제공하고 심재철이 학생회장에 당선되어 시위를 주동한 사실, 복학생 박계동의 소개로 만난 고대생 박일남에게 45만원을 제공하고 박일남이 고대 총학생회장 심계륜을 조종하여 시위를 벌인 사실, 1980년5월 부산대 복학생 조태원에게 34만원을 제공한 사실, 김대중이 반국가 단체인 한민통을 결성하여 일본본부 의장으로 취임한 사실들을 적시했다. 그리고 5월 하순 이학봉 합동수사 단장은 한민통 관련 부분을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입건하여 수사할 것을 김근수 국장에게 지시했다.
반역의 온실, 전남대
5월 31일, 계엄사는 광주사태에 발단이 계엄군과 전남대생들의 충돌에서 일어났으나 사태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 간 데에는 간첩과 간첩에 협력하는 불순분자들에 책동이 있었고 이와 동시에 학생소요를 배후조종해온 김대중이 전남대 및 조선대의 추종 학생 주로 복학생들을 선동하여 온 것이 소요사태의 발단이 되었으며, 사태악화 과정에서 광주시내 골수 추종자들이 이를 격화시킨 사실이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정동년과 홍남순
여기에서 김대중을 면담하고 그로부터 시위를 일으키도록 조종 받은 복학생 정동년(500백만원 수수)과 조선대생 김인원이 5.18 학생 배후를 조종한 사실, 10.26이후 김대중과 6회에 걸쳐 접촉한 홍남순 변호사가 조선대 교내 시위를 조종하고, 5.23과 5.26사이에 전남도청을 출입하면서 폭도들에게 100만원을 주며 조종 격려한 사실들이 적시됐다.
1980.7.4, 조사완료 검찰 송치
계엄사는 7월 4일, 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군법회의 검찰부에 송치한다고 발표했다. 5.22 민중봉기를 꾀함으로써 유혈혁명사태를 유발하여 정부를 타도한 후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권을 수립하려 한 내란음모 사실이 드러났기에 김대중과 그 추종 세력 37명을 계엄보통 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송치할 방침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계엄사는 또 김대중이 반국가 단체인 재일 한민통을 발기-조직-구성하여 북괴노선을 지지 동조하고 외화를 불법 소지-사용한 혐의도 드러났다고 밝혔다.
1980.7.12. 군법회의 기소
합수부 합동수사단은 연행 53일 만인 7월 9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구속 영장을 발부받은 다음 7월 12일 김대중 등 24명은 육본 계엄 보통군법회의로, 나머지 계엄법 위반 13명은 수경사 계엄법 보통 군법회의로 송치했고 군검찰부는 8월 14일부로 전원을 구속기소했다. 육본 계엄군법회의는 기소 당일인 8월 14일 제1회 공판을 시작으로 9월 17일까지 17회 공판을 열었다. 8월 14일 오전10시에 개정된 제1회 공판에서는 13만 여자로 구성된 피고인 24명에 대한 공소장 낭독이 있었다.
김대중 내란음모 재판과
전두환 내란 재판
13만자이면 신국판 250쪽 분량이다. 이를 모두 검사가 피고인들 앞에서 낭독한 것이다. 하지만 1996년에 시작된 전두환 내란 재판에서는 검사가 10분 간 낭독했다. 날림이었다. 인간 취급을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1995년 12월 3일 새벽, 합천에 있던 전두환을 안양구치소로 체포해 올 때 검찰은 화장실을 호소하는 전두환에게 페트병을 주면서 거기에 용변보라고 했다. 이런 작태는 1980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인권학대였다. 1980년은 양빈들이 정치를 했고, 1995년에는 저질들이 정치를 한 것이다. 김대중은 신중하고 정중한 재판을 받은 반면 전두환 등은 날림재판을 받았던 것이다.
1981.1.23. 선고
9월 11일 결심 공판에서 군검찰은 김대중 피고인에게 사형을 다른 피고인에게는 7년에서 20년 사이를 구형했다. 9월17일 1심 선고 공판에서 재판부는 김대중에게는 내란 음모, 국가보안법, 반공법, 계엄법, 외국환 관리법위반죄를 적용 하여 사형을 선고했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징역2년에서 20년을 선고했다. 11월7일 김대중 등 12명은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81년 1월 23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했다. 하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국민 화합을 위해 김대중을 무기 징역으로 감행하고 피고인 12명 전원에 감형조치를 취했다.
김대중(55,정치인 사형) 문익환(62,목사 15년) 이문영(53,교수 20년) 예춘호(52,전국회의원 12년) 고은태(47,시인 15년) 김상현(45,정치인 10년) 이신법(30,학생 12년) 이해찬(27,학생 10년) 조성우(30,학생 15년) 이석표(27,학생, 7년) 송기원(32,학생 10년) 설훈(27,학생 10년) 김종환(47,정치인 4년) 심재철(22,학생 5년) 서남동(62,교수 2.5년) 한승헌(45,변호사 3년) 이해동(45,목사 4년) 한완상(44,교수 2.5년) 송건호(52,전동아일보편집국장 2년) 유인호(54,교수 2년) 이호철(36, 소설가 3.5년) 김윤식(66.정치인 집행유예) 이택문(45,전국회의원 집유) 김녹영(56,전국회의원 집유)
1980년 여론, 김대중 죽여야 한다
국내에서는 그를 즉각 사형시키자는 여론과 재야세력의 끈질긴 구명운동이 한동안 팽팽히 맞섰지만 사형시키자는 쪽이 매우 우세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1980년 레이건 대통령을 만난다는 조건으로 그를 사형하지 않기로 미국과 약속했다. 그 결과 그는 82년 2월에 20년으로 감형되었고 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옥중에 있던 김대중은 전두환에게 최고의 존칭을 써가면서 다시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을 것이고 국가안보를 허무는 일을 하지 않을 테니 신병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보내 달라 앙청하는 자필 편지를 보냈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국사에 전념하신 가운데 각하의 존체 더욱 건승하심을 앙축하나이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본인은 교도소 생활이 2년 반에 이르렀사온데 본래의 지병인 고관절변형증과 이명 등으로 고초를 겪고 있으며, 전문의에 의한 충분한 치료를 받고자 갈망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각하께서 출국허가만 해주신다면 미국에 가서 2 3년간 체류하면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자 희망하온데 허가하여 주시면 감사천만이겠습니다. 아울러 말씀드릴 것은 본인은 앞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체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일방 국가의 안보와 치안의 안정을 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음을 약속드리면서 각하의 선처를 앙망하옵니다.
1982년 12월 13일 김대중.
김대중과 북괴와는 약속을 말아야
일단 풀려나자 그는 약속을 뒤집었다. 83년 7월, 재미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개설하여 반정부 활동을 계속한 것이다. 그 결과 85년 2월 귀국과 동시에 가택 연금을 당하게 됐고,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그는 85년 3월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만들어 김영삼과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87년 5월에는 사면복권이 됐고, 이어서 87년 11월 평민당(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총재로 취임한 후 제13대 대통령 후보에서 3위로 낙선했다.
2022.7.2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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