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위]는 신의 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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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7-31 21:01 조회4,00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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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위]는 신의 한수
국보위의 경영학적 가치
경영학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판사든 검사든 언론인이든, 국보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다. 하지만 시스템 경영을 전공한 필자의 눈에는 신의 한수였다.
일반사회 공무원사회 모두가 곳곳이 썩어 있었고, 간첩 공작은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자행되고, 통혁당, 남민전 등 간첩단은 공권력을 희롱하고, 최규하는 아는 게 없고, 게으른 관료주의에 의존하자니 되는 일이 없고, 북괴는 혼란을 부추겨 남침의 기회를 만들려 하고. . 19세에 육사에 입교하면서부터 4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애국을 다짐했던 청년사관생도로서는 발을 동동 구르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를 급행으로 운영해야만 하는 위기의 계절에 순발력 높은 자문기구를 공자님 말씀만 하고 있는 대통령에 마련해 준 것은, 지금의 내 머리로 생각해도 신의 한수였다.
설치 배경
1980년 5월, 외교계에만 묻혀있었던 최규하는 세상 물정에 매우 어두웠다. 전두환은 이런 최규하에게 계엄 시에 한시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문기구의 설립을 건의했다. 이른바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였다.
설치 과정
1980년 5월 21일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은 국보위 설치 요강을 마련하여 이원홍 청와대 민원수석비서관에게 제시했다. 이원홍 수석은 조문화 작업을 마친 후 5월 25일, 국보위 설치에 대한 대통령령을 성안했다. 이는 계엄법과 정부조직법을 근거로 한 것으로 합법적인 것이었다.
5월 26일 권정달은 국무총리실에서 주영복 국방장관과 박동진 외무장관이 배석한 가운데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에게 국보위 설치안을 보고했다. 이는 5월 27일 16시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 주최로 열린 제46회 정례국민회의에서 의결되어 5월 31일 대통령령 제9897호로 공고됐다. 국보위 의장인 최규하 대통령은 5월 31일 오전10시 첫 국보위 전체회의를 열었다.
국보위 구성
국보위의 당연직 위원은 15명, 국무위원 및 각군 총장 이상의 군 수뇌들로 구성되었다. 임명직 위원은 육군소장 이상 10명의 장군들과 8명의 각료, 청와대 관계자 2명이었다. 국보위에는 상임위원회가 있었다. 위원장은 전두환이었고 그 밑에 13개 분과위원장이 있었다. 임명직 상임위원은 18명의 군장성과 10명의 공무원으로 구성되었다.
국보위 업적
계급 선동 근절, 국가 전복 기도의 제거, 불법 시위 근절, 사회 비리 척결, 정치 풍토 쇄신, 국가 이익을 우선시하는 언론 풍토, 종교를 빙자한 정치 활동 통제, 건전한 노사관 확립, 사회악 근절, 과외 과열 진정 등이었다.
부정축재자 발굴
6월 18일 계엄사는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혐의자들은 당국의 정화 의지에 순응하여 853억 원의 부정축재 재산을 자진 헌납하기로 하고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을 밝혀 형사처벌을 유보한다고 발표했다.
7월초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과 김만기 정화 분과위원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2급 이상의 공무원에 대한 숙정 결과를 마련하였다고 보고했다.
공직자 8,600여 명 숙정
상임위원회는 7월 9일 장관 1명 차관 6명 도지사 3명을 포함 2급 이상 공무원 232명을 숙정하였다고 발표했다. 그 후 7월 31일까지 입법부 11명, 사법부 61명, 행정부 5,418명 등 공직자 5,490명과 국영기업체 금융기관 및 정부 산하단체 등 127개 기관 임직원 3,111명 등 총 8,601명이 사임했다. 엄청난 숫자였다. 그야말로 공무/사회 기강이 해이해 있었던 것이다.
과외 금지
7월 30일 국보위는 과외 금지, 대입 본고사 폐지, 대학 졸업정원제 등을 골자로 하는 교육정상화 방안을 발표했다.
불량배 42,000여 명 처리
8월 4일 국보위는 사회악 일소를 위한 특별조치를 발표하고 불량배 소탕에 관한 삼청계획 제5호에 따라 11월 27일 제4차 단속까지 모두 57,561명을 검거하여 그중 3,052명을 재판에 회부하고 38,259명을 ‘군부대 정화교육’ 이른바 ‘삼청교육’에 회부했으며 16,250명을 훈방 조치했다.
불량식품과 연좌제
부정 불량식품 및 약품 단속을 실시하고 전과기록을 말소하는 등 신원기록에 대한 정비작업을 단행했고, 해외인력 송출절차와 수출입 절차를 간소화했고 ‘연좌제’를 폐지했다.
전두환은 대통령 보좌에만 몰두
이처럼 전두환은 5.18을 전후한 시기에 극심한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사회를 정화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광주사태에는 개입할 시간도 없거니와 이희성의 증언 그대로 개입할 처지가 아니었다. 광주사태가 발생하고 있던 그 순간에 전두환은 전국적으로 혼란을 일으키는 빨갱이 공작을 진압하고, 사회기강을 바로잡는데 혼신을 다했다. 특히 국보위를 통해 국가정책을 일신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좌익이 증오하는 이유
당시 전두환의 얼굴을 보았던 육사 선배들은 당시의 전두환 얼굴이 까맣고 여위였다고 필자에 말해준 적이 있었다. 5.18은 전두환 어젠다(agenda) 서열 저 멀리 등외에 자리하고 있었다. 빨갱이들이 전두환을 증오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출해낸 후 그 여망을 얻어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경제적으로 북한을 저 멀리 따돌렸기 때문이다. 전두환을 증오하는 이유는 미국과 맥아더를 증오하는 이유와 동일하다.
2022.7.3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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