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백서'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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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3-12-03 14:39 조회10,45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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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백서'의 정체
5.18의 비밀을 매우 잘 알고 있을 소준섭(53)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1982년에 ‘광주백서’(총44쪽)를 냈다. 82년 당시 그의 나이는 22세, 그는 중국에서 국제관계학 박사를 했고, 지금은 국회도서관 해외자료조사관으로 있는 것으로 인터넷에 떠 있다.
일본의 니시오까(西岡力)가 1992년 지은 저서 ‘일한오해의 심연’의 31-43쪽에는 “찢어진 깃발‘이 일본 말로 소개돼 있다. 이 일본 말 부분은 당시 한국말로 된 자료를 번역한 것이며 이 자료는 1980년 6월 5일 ‘일본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가 가지회견을 통해 배포한 것이었다. 이 협의회는 발행처도 없고 저자도 없는 이 모략용 책자에 대해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발표했다.
“이 자료는 우리에게 보내기 전에 내용의 타당성을 입증한 한국 가톨릭교회의 믿을 만한 소식통으로부터 입수된 것이다. 우리는 내용의 진실성에 책임을 진다” 이 증언은 광주에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탑승했던 고속버스에서 내린 5월 19일부터 증언자가 직접 목격했던 사태 설명에 대한 녹음테이프에서 베끼고 편집하여 번역한 것이다. 그는 그날 아침 서울로부터 도착해서 가족들의 안전을 점검하고 아래 사태가 일어났을 때는 서울로 다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증언은 증언자가 군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철도를 따라 5월 24일 새벽 7시 광주를 떠난 시점에서 끝난다. 그는 도로 이용을 피하려 애쓰면서 산을 넘고 계곡을 빠져 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 후의 보도에 의하면 그는 광주사태에 관해 이 증언을 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이 “찢어진 깃발”은 원본인 “찢어진 깃폭”을 일본말로 옮긴 후 다시 한국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원문은 인터넷 깊은 곳에서 찾아낼 수 있었고, 또 소준섭이 썼다는 “광주백서”(총44쪽)의 말미에도 붙어 있다.
“깃폭”이라는 단어는 북한에서 많이 사용하며 “붉은 혁명의 깃폭 아래”라는 표현이 북한사회를 도배하고 있다 한다. “찢어진 깃폭”이라는 표현은 결국 “붉은 혁명”의 의도가 갈기갈기 찢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필자는 최근 어렵게 소준섭이 1982년에 썼다는 “광주백서”를 입수하였다. 여러 번 복사한 것이라 글씨가 흐리고 활자체는 옛날 수동식 타자기 활자체이고 문장과 문단이 매우 엉성하다.
그 내용들을 읽으면 1)”죽은 사람이 2천명을 넘는다“는 등 허황된 내용들이고 2) 그 내용과 강조점 줄거리가 북한이 발행한 대남공작 역사책 ”광주의 분노“와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과 일치하고, 3) 어투와 표현이 북한 작가가 쓴 글처럼 보인다.
1982년에 소준섭이 지하에서 작성하였다는 이 ‘광주백서’를 소준섭은 2010년 12월 10일에 거친 팸플릿 형태로 1982년의 수동식 타자기 글체 그대로 합철하여 재 발간했다. 책자의 제목은 ”80년 민주화운동의 기록-‘광주백서’와 ‘학생운동의 전망’“
2011년 1월 1일 날짜로 신동아에 입력된 기사가 있다. 제목은 “땀과 발로 쓴 우리 기록 황석영이 베꼈다”이고 이 제목의 말은 소준섭의 말이었다.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광주백서’를 베낀 것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이 신동아 기사에는 이런 글이 있다.
“광주의 분노’(북한 조선노동당출판사 1985.5.16)는 ‘광주백서’(1982 발행)가 소개한 에피소드를 부지기수로 베꼈다. 그중 한 대목만 소개한다. 광주에서 직접 확보한 증언을 바탕으로 쓴 ‘광주백서’를 먼저 읽어보자. ‘광주의 분노’는 이 대목을 이렇게 베꼈다.
[여대생으로 짐작되는 세 명의 아가씨들이 공수병에 의해서 서서히 껍질이 벗겨지고 부라자와 팬티까지 모조리 찢어내고 그중 유독 험하게 생긴 공수병이 워커발로 아가씨의 궁둥이를 걷어차면서 “빨리 꺼져 이년들아. 지금이 어느 때인 줄 알고 데모하고 지랄이야.” 성난 늑대처럼 내몰았다. 그러나 이 일을 어찌하랴. 처녀들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같이 가슴을 쓸어안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린다. <중략> 이때 한 놈이 고함쳤다. “이 썅년들이 살기가 싫은가봐. 그럼 할 수 없지.” 순간 아가씨들의 등에는 대검이 똑같이 꽂아지면서 분수를 뿜어냈다] <‘광주의 분노’ 19~20쪽>
위 인용 대목은 소준섭이 썼다는 “광주백서”의 내용 중 “찢어진 깃폭”의 내용 그대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찢어진 깃폭”의 이동경로는 일본(1980.6.6.)-광주의 소준섭(1982, 소준섭 나이 22세)-북한(1985.5.16) 및 황석영(1985.5.15)이다. 그렇다면 대남모략의 극치인 이 “찢어진 깃폭”은 분명히 소준섭의 작품이 아니다. 소준섭은 황석영이 자기 책을 베꼈다 하고, 황석영은 자기 이름으로 낸 책은 자기가 쓴 것이 아니라 5.18관련 모임에서 황석영 이름으로 내는 것이 좋겠다고 의결하여 자기 이름으로 책을 냈다고 실토했다.
‘광주백서’와 ‘죽음을 넘어’와 ‘광주의 분노’는 한 작가가 쓴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소준섭과 황석영은 저작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저작자는 북한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래는 광주백서의 주요부분을 발췌-요약한 것이다. 중요한 사실들에서 검찰보고서(1995.7.18)와 정면 배치되는 허위소설임을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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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백서 소준섭 편저
발단 학생시위: 5월 18일
(1) 연행:
5월 18일 0시5분을 기해 전남대 복학생 김상윤 정동년 하태수 문덕희 박형선 박선정 윤명현 조선대 복학생 유재도 유소영 등이 연했됐다.
(2) 전남대 정문에서 충돌:
전남대 정문은 완전무장한 공수부대가 굳게 지키고 서 있었다. 10시가 되자 학생이 500명으로 불어났다. “계엄군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자 공수부대가 “돌격앞으로”를 감행했다. 착검한 총, 개머리판, 곤봉으로 무차별 구타해 상당수의 학생들이 부상당했고, 대검까지 휘둘러 2명이 대검에 찔렸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이 20분 도안 돌멩이를 던졌다.
(3) 학생 가두 진출, 시위확산:
300여명의 학생들이 대오를 지어 전남대-신역-공용터미널-금남로의 코스로 3km 정도 진출하고 11시에는 금남로 3가 카톨릭센터 앞에 이르렀다. 학생은 2천으로 늘어났다. 2천여 경찰이 페퍼포그 차를 몰고 포위망을 좁히려 하였지만 학생들은 보도 불록을 깨 투석전을 준비했으며 노변의 대형시멘트와 화분을 끌어다 바리키이트를 쌓았다.
(4) 공수부대 투입:
공용터미널에서 공수부대와 마주쳤다. 공수부대는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의 1차 작전부터 ‘충성’으로 끝나는 5차 작전까지의 임무를 띄고 이미 5월 10일부터 1차 1,000명 정도가 광주 상무대에 도착해 훈련을 받고 있었다. 이 7공수 특전단이 오후 4시부터 제1차 화려한 작전을 감행했다.
이들은 착검한 총을 등에 메고, 경찰용 곤봉보다 1.5배나 길고 두께가 2배나 되는 특수곤봉과 M16 개머리판으로 잔인하게 쓰러트렸다. 대검으로 무차별 난자하여 아스판트는 순식간에 검붉은 피로 물들었다. 최소한 3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공수부대는 이들을 트럭으로 실어갔고, 미처 실어가지 못한 시체 2구가 변소에서 발견됐다. 1,000여명의 공수부대들은 다방 건물 가택을 마구 수색했다. 시위대가 산수 5거리로 나가자 공수대가 발포를 했다. 공수대원들은 얼굴이 벌개 있었고, 눈이 충혈돼 있었고, 술 냄새를 역겹게 풍기고 있었다. 말투도 경상도 말투였다. 광주우체국 앞에서는 소령지휘관이 “전라도 새끼들은 모조리 죽여야 한다”며 공공연히 부하들을 독려했다.
시민합세, 민중봉기로 반전: 5월 19일
(1) 금남로 3가 ttlscnrrjsanf 공사장에서 시위대는 각목, 쇠파이프, 청근 등을 /듣어 공수대에 대항했고, 공수대는 곤봉과 총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공격하고 대검을 빼서 휘두르는 바람에 수많은 사상자가 났다. 시신이 도망하면 공수대는 끝까지 추적하여 무자비하게 난자했다. 특히 젊은 남자들은 팬티만 남긴채 때리고 찌르고 원상폭격을 시켰고, 여자들은 아랫배와 유방을 걷어차고 대검으로 유방을 마구 찔렀다. 수창국교 입구에서는 공수대가 산 사람을 전봇대에 거꾸로 매달기까지 하였다.
한 중령은 부상시민 수송을 지휘하던 안영택 전남도경 작전과장에게 “시위 학생을 피신시키면 당신들도 동조자로 취급하겠다”는 폭언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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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 무력진압: 5월 27일
드디어 계엄군은 27일 새벽 0시를 기하여 광주 외곽진입로를 봉쇄하면서 M16, 화염방사기, 스류탄 등 각종 무기를 동원, 탱크를 앞세우고 ANFURW3LSDKQ을 개시하였다. 와이엠씨에이에서 농성중이던 200여명은 도청으로 들어가 무장을 한 후 전일빌딩, 외이더블유씨에이, 계림국교로 배치되었다. 도처으로 뛰어오던 시민 100여명이 사살되고, 순식간에 시내 시내 곳곳에 시체가 나뒹굴었다,
수습위 대변인 윤상원은 계엄군 총탄에 옆구리를 맞고 휘청거리자 눞이고 이불로 덮어주었지만 수류탄이 터져 사망했다. 전일빌딩에서는 20여명이 끝까지 싸우다 오후 2시경 옥상에 올라가 최후 분투하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계엄군에 의해 끌려간 사람들은 고문과 폭력에 시달렸고, 수십명이 죽어갔다. 이리하여 열흘간 한바도를 뒤흔들었던 광주 민중봉기는 막을 내렸다, 씻을 수 없는 통한을 남기며,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 싸늘하게 식어간 내 재식들과 형제들의 영혼을 붙잡고 통곡하는 유족들의 오열이 80만 관주시민의, 400만 전남도민의, 아니 4000만 대한민국 국민의 가슴마다에 얽혀진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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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무엇인가?
아래는 수사기록 상에 나타나 있는 진실이다. 이를 위의 ‘광주백서’와 비교해 보면 ‘광주백서’가 이적 불순물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서석구 변호사님도, 종편방송을 진행했던 진행자들도 황석영 이름으오 발행된 ‘죽음을 넘어’를 5.18의 바이블 인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위 ‘광주백서’의 내용들을 진실로 믿고 있겠는가? 참고로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은 군에 없었다. 이 표현은 황석영 책에 중간제목으로 나타나 있다.
아래는 5월 18일 상황과 5월 27일 상황을 수사기록으로부터 정리한 것이다.
<5월 18일, 시위 첫날의 광주>
5월 18일 0시를 기해 전국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계엄포고 제10호로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겼으며 중요 대학에 계엄군이 주둔함에 따라 극심했던 학원소요는 진정되어 전국이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광주지역만큼은 격렬한 시위사태가 지속되었다. 전북 금마에 있던 7공수 2개 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 1개 대대씩 진입하여 31사단장인 전남출신 정웅 소장의 작전 지휘 하에 들어갔다.
정동년 등 5.18 고소자들은 신군부가 특별하게 광주에만 공수부대 2개 대대를 보냈다고 주장하지만 계엄포고 10호에 의해 배치된 공수부대 현황을 보면 광주에만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1공수여단 소속 4개 대대는 연세대, 서강대, 홍익대에 배치했고, 5공수 소속 4개 대대는 모두 고대에 배치했고, 11공수 소속 3개 대대는 모두 동국대에 배치했고, 13공수 소속 2개 대대는 성대에, 9공수 소속 3개 대대는 서울대 중앙대 숭전대에, 7공수 4개 대대는 전남대, 조선대, 전북대, 충남대에 각 1개 대대씩 배치했다.
고대에 4개 대대, 동국대에 3개 대대, 성대에 2개 대대가 배치되었던 것에 비하면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 1개 대대씩을 배치한 것은 당시 계엄사가 광주를 그다지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나마 7공수 2개 대대는 겨우 600명 수준에 불과했다.
오전 9시경, 7공수여단 제33대대가 주둔하고 있던 전남대 정문에 2백50여 명의 대학생이 몰려와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방 속에 숨겨온 돌을, 부동자세로 서 있는 공수대원들에 던져 7명의 공수대원들에 피를 흘리게 하는 부상을 입혔다.
공수대가 학생들을 향해 진격하자 학생들은 미리 예정한 대로 광주의 중심가 금남로와 충장로 쪽으로 도주하여 파출소를 파괴하고 불태우며 경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에 경찰들은 도망가기에 바쁜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광주에서 의외의 사태가 발생하자 최규하 대통령은 매우 빠르게 움직여 이날 12시에 대국민성명을 발표했다.
나라 사정은 어려워 가는데 광주시위가 불순한 정치세력들에 의해 유발되어 점점 악화돼 가고 있으니 진정하라는 경고와 당부의 뜻을 전한 것이다. 시위가 난폭해짐에 따라 경찰로서는 도저히 폭력 시위를 당해낼 수 없게 되자, 안병화 전라남도 경찰국장은 전라남도 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계엄군의 출동을 요청했다. 이와 동시에 계엄사령부와 2군사령부 역시 분주하게 움직였다.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정웅 31사단장에게 전남대와 조선대에 주둔중인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시내로 출동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로써 시위진압 임무는 오후 4시경부터 31사단장 정웅에게 넘어갔다. 공수대의 특성과 시위진압 작전에 서투른 정웅은 공수부대 2명의 대대장들에게 시위대를 쫓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모든 길목을 막고 주동자를 전원 체포하라는 무모한 명령을 내렸다.
기계와 같은 공수대원들은 하늘같은 2성 장군이 내린 명령에 따라 오후 4시경부터 4-5명 단위로 쪼개져 시내의 주요 길목을 차단했다. 대규모 시위대는 4-5명 단위로 서 있는 계엄군을 향해 돌과 화염병 등으로 공격을 했고, 수적으로 열세한 처지에서 피를 흘리게 된 계엄군 병사들은 보복 심리에서 무자비할 정도로 진압봉을 휘둘렀다.
광주시내에는 첫날부터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의 씨를 말리러 왔다거나 여학생의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냈다는 등 기상천외한 유언비어들이 나돌았고, 이 거짓 유언비어를 듣고 흥분한 시민들은 점점 더 많이 중심가로 모여들어 시위대가 공수대원들에 매 맞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이로 인해 더 많은 유언비어가 확대 재생산되어 시위대의 규모를 순식간에 키웠다. 악성 유언비어는 분노와 폭력을 유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으며 광주의 첫날에 퍼진 유언비어는 아래와 같았다.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 하에 데모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왔다. 벌써 40명이 죽었다.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을 이틀씩이나 굶기고 술과 환각제 등을 복용시켜 광주에 투입했다. 공수부대원이 임신한 여자의 배를 대검으로 찔렀다.
죽은 시민을 불도저로 밀면서 처리하는 과정이 TV에 나왔다.
대검으로 시민의 머리 가죽을 벗겨냈다.
특히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의 씨를 말리러 왔다는 종류의 유언비어는 묵은 지역감정에 불을 댕겨 광주시민들을 분노시켰다. 시위대가 갑자기 10,00여명 단위로 불어나 한일은행 및 도청 앞에서 시위를 계속하면서 자정까지 해산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 15명, 경찰관 310명이 부상을 입었고, 계엄군은 시위학생 615명을 검거했다.
진실이 위와 같은 데도 광주사태의 주모자요 영웅이라는 윤상원은 10시 30분경 불온서적을 취급하는 녹두서점 김상집씨에게 전화를 걸어 “전대 정문 앞인데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을 무차별살상하고 있다”며 정반대로 이야기했고, 이 거짓말은 녹두서점을 통해 전국 대학가 운동권으로 퍼져나가 그대로 대자보로 제작되어 대학가 벽보에 붙었다. 5월 19일, 윤상원이 민주투쟁회보 이름으로 뿌린 삐라는 아래와 같은 글귀로 시작 된다.
광주 애국시민 여러분! 이것이 웬 말입니까? 웬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죄 없는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에 실어가며, 부녀자를 백주에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들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 길은 전시민이 하나로 뭉쳐 청년학생들을 보호하고, 유신 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특전단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 보았습니다. 다 알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의 젊은 학생들이 그렇게 소리 높여 외쳤는가를. 우리의 적은 경찰도 군도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전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바로 유신 잔당과 전두환 일파들입니다. 죄 없이 학생들과 시민들이 수없이 죽었으며 지금도 계속 연행당하고 있습니다. 이 자들이 있는 한 동포의 죽음은 계속될 것입니다.
5월 19일 뿌려진 이 삐라의 내용은 5월 18일에 대한 내용이었을 것이며, 5월 18일의 실제 상황과 이 삐라 내용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5월 18일 공수대가 학생들을 총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에 실어가고, 부녀자를 백주에 발가벗겨 총칼로 찌른 적이 없었건만 윤상원은 첫날부터 이처럼 거짓 선동하는 삐라를 살포했던 것이다.
<5월 27일의 광주>
5월 27일의 날씨는 화창했다. 이날은 계엄군이 광주재진입작전을 수행함으로써 6박 7일간의 “해방군천하”에 종지부를 찍어준 날이다. 전교사 사령관은 광주재진입작전의 기습효과를 달성하기 위해서 27일 00시경 광주시 외곽으로 통하는 모든 전화선을 차단하고 26일 22시경에 열린 작전회의에서는 광주재진입작전을 무기연기 한다고 발표한 후 작전지휘관에게만 작전개시 직전에 “작전개시일은 27일 새벽1시”라고 통고하는 등 기밀유지에 노력했다.
광주도청 점령 명령을 받은 3공수여단 특공조는 11대대장 임수원 중령과 제1지역대장 편종식 대위를 위시한 장교 14명, 사병 66명으로 구성되었다. 3공수여단 특공조(11대대, 1지역대)는 23:00경 광주비행장을 출발하여 주답에 도착한 후 다시 조선대 뒷산으로 이동하여 조선대학교 종합운동장을 돌아 전남기계공고 담을 끼고 조대 앞, 노동청을 거쳐 5.27 새벽 4시경에 도청 후문에 도착했다.
기밀을 유지했는데도 불구하고 3공수여단이 숙영지를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은 27일 새벽 1시경에 확성기를 단 지프차가 광주 시내를 질주하면서 계엄군이 광주에 진입한다는 사실을 방송함으로서 광주 진입로의 주요 목 지점에 있던 무장시위대가 준비태세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지휘본부인 도청 건물 내에 있던 무장시위대 150여명이 광주공원에 있던 무장시위대 100여명과 합세함으로써 3공수여단 특공조(80명)가 예상 밖의 수적 열세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에 20사단 병력이 긴급 출동하여 도청 외곽을 포위함으로써 3공수 특공조는 27일 아침 4시10분경에야 겨우 전남도청으로의 진입을 시도할 수 있었다. 3공수여단 특공조가 도청으로 접근하자 도청, 전남대 부속병원, 상무관, 전남도청 옥상에 있던 무장시위대는 기관총 등으로 격렬한 총격을 가해왔다.
3공수여단 특공조는 이에 응사를 하면서 도청 후문을 3중대, 2중대, 1중대, 특공중대, 4중대, 11중대 순으로 타넘어 05:21분에 도청을 완전 점령하고 07:30분경 20사단 61연대에 도청을 인계한 후 08:00시에 부대로 복귀했다. 도청 안에서의 교전으로 3공수여단 특공조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도청 안에서 끝까지 저항하던 무장시위대 4명이 사살됐다. 이때 체포한 무장시위대 29명과 노획한 LMG등 무기류 502점은 61연대로 인계됐다.
11공수여단 특공조 37명(4/33, 61대대, 제1지대)은 광주비행장에서 주답으로 공수되어 27일 01:50분경 조선대 뒷산에 도착한 다음 전남도청 뒤로 침투하여 04:380분, 제1목표인 전일빌딩과 광광호텔에 도착했다. 특공조 제1지대가 관광호텔에 진입할 당시 그곳에는 30여명의 무장시위대가 무기조작법을 교육 받고 있는 중이었다. 이들은 11공수여단 특공조가 진입하자 순순히 투항했다.
그러나 전일빌딩에 진입을 시도하던 특공조 제2지대는 빌딩 안에 있던 40여명의 무장시위대로부터 격렬한 기관총 공격을 받았다. 상호간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진 후에야 특공조 제2지대는 6시 20분경 전일빌딩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특공조 2명이 부상을 당했고 무장시위자 3명이 사살됐다. 이어 06:20분, YWCA건물을 점령하여 06:40분에 20사단 61연대에 인계한 후 07:05분에 광주비행장으로 복귀했다.
7공수여단 특공조 201명(33대대 8-9 지역대 20/181)은 27일 01시경 주둔지인 광주비행장을 출발하여 목표지점인 광주공원으로 출동했다. 광주공원으로 가던 7공수여단 특공조가 용삼동을 지날 무렵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무장 시위대에 발견되어 상호 총격전이 있었으나 무장 시위대 1명이 사살되고 1명이 체포되자 나머지 무장시위대는 도주했다.
7공수 특공조는 그 후 산발적인 총격을 받았으나 커다란 저항 없이 27일 4시경 광주공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장시위대가 한명도 없었다. 그런데 이는 유인책이었다. 특공조가 다소 마음을 놓고 수색작전을 벌이는 동안 무장시위대로부터 기습을 받은 것이다. 이로 인해 특공조 병사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입었다.
후방지원임무를 담당한 20사단 3개 연대는 27일 02시경 숙영지를 출발하여 03시 30분경에 광주시내로 진출했다. 20사단 3개 연대는 비교적 순조롭게 광주시에 진입했다. 단지 61연대가 전남의대 근처에서 무장시위대의 총격을 받는 과정에서 부상 1명이 발생했고 무장시위대 2명이 사살됐다.
5월 27일 08시, 20사단은 광주 시내를 완전 평정하고 지역수색 및 잔여 무장시위대 수색 임무를 수행했다. 광주재탈환에 공조로 투입된 병력은 3공수 80명(도청), 7공수 201명(광주공원), 11공수 37명(전일빌딩)이었고, 공격부대는 20사단 4,557명, 31사단 749명이었다.
광주재진입작전 수행 중 무장시위대 17명이 사망하였으며, 295명이 체포되었고, 총기 2,836정, 탄약 83,724발, 차량 137대, 폭약 300상자, 수류탄 143발이 회수됐다. 이때 계엄군 피해는 사망 3명, 부상 10명이었다. 5월 25일 오후 6시경, 최규하 대통령이 전교사에 와서 광주재진입 작전을 허락하면서 김재명 육본작전참모에게 재진입작전에 피해가 얼마나 예상되느냐고 물었을 때 김재명은 150명 정도가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실제로 발생한 피해는 양측 사망자 20명(시위대 17명, 진압군 3명)에 불과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계엄군의 광주시내 진입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5월 27일 아침 05시 19분경 주영복 국방장관에게 작전종료를 보고했고, 05시 23분경에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시가 수복되었음을 보고했다.
2013.12.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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