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개명한 것은 정치집단의 흥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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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7-01 16:10 조회2,84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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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없던 공간, 5.18을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개명한 것은 정치집단의 흥정물
1988년 2월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88년 5공청문회와 광주청문회가 열렸다. 증거는 가공한 것들이었고, 광주에 유리한 말을 하는 자들만 증언대에 초대됐다. 거짓의 강도가 강할수록 박수를 받았다. 이때부터 기자들은 상상력으로 기사를 써댔다. 전두환 머리에 뿔이 날렸고, 전두환과 이순자는 악의 화신으로 묘사됐다. 여기에 간첩들의 공작이 작용됐을 것이다. 여기에 전라도 특유의 엄살과 눈물과 감성과 분노의 쇼가 오버랩 됐다. 그야말로 전라도 판 한풀이었다.
2010년 천안함 폭침의 원인은 오바마의 아이디어와 이니시어티브에 의해 북한 소행인 것으로 증명됐다. 행정부 단위에서 미국, 영국, 호주 등 여러 나라에서 보낸 과학자들과 국내 과학자들을 끌어 모아 사고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니까 정치꾼들과 좌익들이 난장판을 벌일 수 없었다. 반면 2014년의 세월호 사고에 대해서는 박근혜 행정부가 행정부 단위에서 이명박이 취했던 과학적 이니시어티브를 취하지 않았다. 과학을 떠난 ‘사고의 이슈’는 정치꾼들과 협작꾼들의 난장판 세계로 넘어갔다. 5.18도 마찬가지다. 1980년 바로 그때에 분석관들이 북한군 개입에 대한 의혹을 제기됐더라면 5.18역사가 지금처럼 난장판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1988년 4월에 치러진 제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됐다. 야당의 행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에 노태우는 1990년 꼬이는 정국을 3당 합당으로 돌파하려 했다. 합당에 응한 김영삼은 스스로를 민주화의 화신임을 자임하면서 인기를 상승시켜가고 있었다. 이런 김영삼이 노태우에게 합당의 조건을 제시했다. 그 조건 중 하나가 5.18을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개칭해달라는 것이었다. 결국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은 연구나 사법심리의 산물이 아니라 정치흥정의 산물이었다. 반면 김영삼은 5공의 5자도 꺼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2022.7.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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