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과 김덕홍 이야기의 음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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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3-06-08 23:37 조회10,92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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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과 김덕홍 이야기의 음미
김용삼 기자가 밝힌 인터뷰 내용의 요약.
황장엽: 광주사건은 북한이 저질러 놓고 남쪽에 책임을 전가한 사건이다. 남한에서의 모든 투쟁은 다 북이 지하조직을 통해서 지도했다. 대남사업 방향에 변화가 있었다. 노동자나 군인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학생들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김덕홍: 통전부에서는 분기에 한 번씩 강연을 하는데, 광주 문제를 자기네들이 한 것으로 이야기 했다. 북한에서는 북의 광주개입이 상식이다. 역사 앞에 책임질 장본인은 북한이다. 김일성 종합대학 옆에 있는 3호청사 사람들이 광주운동 이후 일제히 훈장을 받았다. 내 친구들이 그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들도 광주민주화운동 후에 훈장을 탔다고 축하 술을 함께 마셨다. 그 때 나는 그들로부터 직접 들었다.
역사상 최고급의 거물 간첩 출신 김용규의 증언
4.19 학생 시위를 직접 지도했다고 증언한 사람이 두 사람 있다. 한 사람은 1946년 대구폭동을 주도했던 간첩 ‘이석’이고, 다른 사람은 1960년대에 남파하여 15년간 거물간첩으로 활약했던 거물간첩(공화국영웅, 대좌) 김용규씨다.
김용규씨는 그의 대남공작 비화 “소리없는 전쟁”(1999. 원민) 81쪽에서 4.19를 이렇게 회상했다. "4.19 때에도 시위학생들이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런 구호를 외치며 왁시글거리지 않았습니까? 그 때도 제가 서울에 있으면서 학생시위를 지도했습니다"
“1970 및 1980년대에 걸친 모든 기간에 걸쳐 나라의 안보를 위태롭게 했던 갖가지 극렬사태가 바로 북쪽의 공작에 의해 야기된 필연적 결과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도, 재론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민주화는 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용어였고,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으며 남한에의 민주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다. 4.19를 북한에서는 4.19민중항쟁으로 부르고 실패한 통일기회로 기억한다. 5.18을 북한에서는 5.18민중항쟁으로 부른다. 4.19도 5.18도 북의 공작에 의해 야기된 필연적 결과였다. 김대중은 북이 키웠고, 호남은 적화통일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김일성의 3호청사 비밀지령과 김대중의 수상했던 행보
김용규는 1976.9.경 동료간첩 2명을 사살한 후 귀순했고, 그가 운영하던 동북아연구소에서 “김일성 비밀교시”를 작성하여 일본 산케이신문에 연재하였다.
그 중에는 김일성이 1979년 11월, 3호청사 간첩 간부들에게 10.26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남조선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전민봉기(주: 전국민의 봉기)를 적극 유도하라 했다는 비밀교시가 들어 있다.
“10·26사태는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박정희가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권력층 내부의 모순과 갈등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첨예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들은 지금 계엄상태를 선포해 놓고 서로 물고 뜯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연락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선 손을 써야 합니다. 남조선의 모든 혁명역량을 총 동원하여 전민 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합니다.” (1979년 11월 3호청사 부장회의)
김대중은 죽기 얼마 전에 간첩 곽동의를 집으로 불러들여 보란 듯이 접선을 했고, 곽동의를 민주인사로 둔갑시켜 입국시키려 했다. 이런 김대중은 김일성이 원하던 ‘전민봉기’를 획책했다.
김대중은 4월 10일, 5월 1일, 5월 10일 3회에 걸쳐 북악파크에서 문익환, 예춘호, 장기표, 심재권 등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 집단을 이끌고 전국 폭력시위에 의한 국가전복 계획을 수립하고 김대중의 혁명내각을 작성했다. 5월15일은 서울역에 10만 시위대가 모여 버스로 경찰을 깔아 죽이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에 극도로 고무된 김대중은 5월 16일,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감히 제2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했다. 5월 22일을 기하여 군인, 경찰을 포함한 전국의 모든 국민은 검은 리본을 달고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정부를 전복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이었던 것이다.
김일성의 ‘전민봉기 획책 지령’과 김대중의 ‘전민봉기 획책 행위’가 세트로 맞아 떨어진 것이다.
남한의 학생운동은 북의 지령에 의한 것
1977년 평양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전후 남조선청년학생운동”이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남한의 모든 학생운동이 김일성이 개발한 이론, 전략, 전술에 따라 의식화와 조직화라는 과정을 통해 벌인 적화통일 투쟁이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남한에 통용되는 ‘진보’라는 것은 4.19직후에 김일성이 남한 빨갱이들에게 지어준 호칭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의 235-270쪽에는 “전후 남조선청년학생들의 주요투쟁일지”가 부록으로 깨알처럼 나열돼 있다. 1953년 서울사범대학의 동맹휴학을 시작으로 1974년에 발생한 무려 40개나 되는 학생투쟁 일지가 꼼꼼히 기록돼 있다.
“남조선청년학생들은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밝혀주신 남조선청년학생운동에 관한 독창적인 사상과 리론, 전략전술적 방침에 따라 미일제국주의 침략자들과 그 력대 앞잡이 놈들을 반대하여 줄기찬 투쟁을 벌여왔다. 그들은 벌써 8.15직후에 학원민주화를 위한 투쟁으로부터 시작하여 미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과 민족분렬책동을 파탄시키고 나라의 자주적 통일을 위한 투쟁을 힘차게 벌였다. . .전후시기 남조선 청년학생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밝혀 주신 남조선청년학생운동 방침을 높이 받들고 의식화, 조직화 과정을 다그치면서 반제 반파쑈민주화투쟁을 힘있게 벌리었다”(1쪽 머리말)
“4월 봉기 직후 진보적인 정치 세력들이 대두하였으며, 진보적인 청년학생단체들도 합법적으로 조직되어 움직이었다. 남조선청년학생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내놓으신 전후 남조선청년학생운동에 대한 방침을 높이 받들고 광범한 인민들과 더불어 미제를 반대하는 투쟁에 예봉을 돌리고 반미 반정부 투쟁을 힘있게 벌리었으며 나라의 자주적 통일을 위한 대중적 투쟁을 벌려나갔다.” (증71, 61쪽 상단)
또 다른 하나의 책이 있다. 평양의 ‘사로청출판사’가 1973년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밝혀주신 남조선청년운동에 과한 사상과 그 구현을 위한 투쟁”이라는 책을 냈다. 그 머리말에는 아래와 같은 표현이 있다. 역시 남조선 학생운동은 김일성이 창안한 사상, 전략, 전술에 따라 벌인 것이라 강조한 글이다.
“남조선 청년학생운동을 줄기차게 발전시키는 것은 남조선 혁명을 촉진하여 우리 혁명의 전국적 승리를 앞당김에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혁명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첫날부터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청년운동에 구현하시여 남조선 청년학생운동에 관한 독창적인 사상과 전략전술을 창시하시고 혁명발전의 매 시기마다 남조선 청년학생들이 나갈 앞길을 환히 밝혀주시였다.” (증72, 머리말)
모두가 황장엽 김덕홍의 증언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2013.6.8.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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