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10호를 고대하는 국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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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3-03-06 12:53 조회14,25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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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10호를 고대하는 국민들
1979년 11월18일, 계엄군법회의에 선 김정섭은 김재규가 긴급조치 10호를 발령해 달라고 박정희에 여러 번 요청했지만 박대통령이 거절했다는 증언을 했다. 김정섭은 10.26 궁정동에 정승화와 함께 저녁을 했고,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한 후 B-1벙커로 이동한 당시 김재규의 심복이었다.
지금 이 시점이 바로 그 긴급조치 10호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는 시점이다. 긴급조치가 아니면 결사적으로 억지 부리며 사사건건 국정의 발목을 잡는 이 빨갱이 집단을 어떻게 달래고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박정희나 되니까 지금의 민주당과 같이 행패를 부리는 인간들을 묶어놓고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냈지, 장면 같은 인간이면 어림도 없었다. 현재 진행형인 야당의 행패를 보는 국민들은 "바로 저런 인간들이 있기 때문에 박정희가 긴급조치를 발동했다"며 긴급조치와 유신에 대한 향수를 물씬 느낄 것이다.
빨갱이들은 김재규를 놓고 ‘유신의 심장에 칼을 꽂은 민주화 인사“라고 극찬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빨갱이들에 다음과 같은 수사기록 내용을 선사하고 싶다.
“1979.8.9.10:00시경, YH회사 200여명이 회사 내 문제해결을 요구하며 신민당사에 집결하여 농성을 벌임으로서 발단이 됐습니다. 8.10.10:00경, 김계원과 김재규가 강제해산을 결의했습니다. 사람들이 투신을 하면 그물망, 매트리스 등의 안전장구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는 숫자가 부족함으로 며칠간 연기하자는 실무자들의 건의가 있었지만 김재규부장의 강행지시로 안전대책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8.11.02:00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 해산한 적이 있습니다.”
“1979. 8월 중순 경, YH사건의 후유증과 도시산업선교회 및 가톨릭 농민회의 등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한 청와대 회의가 있었습니다. 이때 김재규 부장은 ‘긴급조치 9호는 칼날이 무딥니다. 아주 강한 10호를 주십시오’라고 건의했습니다. 그 후 10월 하순경, CPX기간 중 B-1방카에서 같은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때에도 김재규 부장은 ‘각하, 긴급조치 10호를 주십시오. 그래야 정국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하고 건의했습니다. 이에 대해 각하는 ‘학생, 근로자, 종교인 모두를 적으로 돌리면 정국수습이 되겠느냐, 당분간 9호를 가지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방법을 연구해 보시오’라고 지시하셨고, 그 후 10호는 다시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김재규의 범행동기를 물었을 때, 김정섭은 이렇게 대답했다.
“부산 계엄사태로 부산에 다녀온 김부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산에 가보니 300만 시민 중 70% 이상은 유신에 호의적이더라. 시가와 항만이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30% 이하의 반대세력은 행정기관이 잘만 선도하면 회복될 것 같더라. ’김재규는 소영웅주의 과대망상에 빠진 사람으로 그를 따를 사람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1979년 11월 9일, 계엄군법회의 에 있었던 김계원의 진술과 일치한다. 김계원은 위 김정섭의 진술을 뒷받침해주는 보다 자세한 진술을 했다.
“1979.8.10. 10:00경 YH 노무자 200여명이 신민당 당사에 집결, 계속취업을 요구했습니다. 배후에는 도시산업선교회가 있었고, 장차 노동계와 종교계가 합세, 강력한 대정부 투쟁 세력으로 진전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수습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8.10.10:00경 청와대 제 사무실에서 김재규, 유혁인 정무1수석, 고건 정무2수석, 김정섭 등이 모여 논의를 했습니다. 중론이 나왔는데 그것은 보사부장관이나 노동청장이 신민당사에 가서 해명과 시책을 설명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재규는 정부 고위 관리가 신민당사에 가서 사과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전례가 될 것이다. 금일 중으로 경찰을 투입해 강제해산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그날 야간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해산을 시킨 바 있습니다.”
이 계엄군법회의에서 김계원은 긴급조치 10호에 대해서도 진술을 했으며 그 진술 내용은 김정섭의 진술과 정확히 일치했다. 김재규는 긴급조치 9호보다 더 강한 10호를 강구했고, 박대통령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박정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김재규가 다방면의 민주화 인사들과 만나 민주화를 의논한 바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증거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위 두 사람이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들이 정확히 일치하고, 그 진술 내용들은 한 결 같이 김재규가 박대통령보다 오히려 더 강경하고 탄압적이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2013.3.6.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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