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김일성이 만든 대남공작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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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5-21 12:23 조회2,64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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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김일성이 만든 대남공작 용어
[진보]=빨갱이
북한 정치사 문헌들에는 “남조선 역사는 진보와 보수반동 간의 모순투쟁 역사”’라고 정의돼 있다. 진보는 무슨 뜻이며 보수반동은 무슨 뜻인가? 진보는 김일성의 주체사상만이 사람이 사는 보람이며 행복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따르는 사람을 말하고, 보수반동은 미국의 식민지와 남한의 파쇼정부에 탄압당하고 매판자본가인 재벌의 노예로 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정의돼 있다. 1956년 조봉암이 [진보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었다가 1959년 환갑 나이에 간첩혐의로 처형됐다.
노무현 시대의 대법원, 조봉암= 애국영웅
2010년, 대법원장 이용훈은 조봉암 사건에 대해 재심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2010년 11월 18일 이용훈은 직접 전면에 나서서 조봉암에 대한 재심을 주도했다. 법정은 평양법정이나 다름없었다. 이승만은 독재자 친일파로 매도되고 조봉암은 극존칭의 표현들로 애국자가 되었다. 이어서 2012년 2월, 조봉암 가족들은 29억 원을 배상받았다.
조봉암 육신은 망우리, 명예는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① 조봉암의 묘는 망우리에 있지만 그의 가묘는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기라성 같은 빨갱이들과 나란히 애국열사릉에 모셔진 것이다. 아래는 중앙일보기사다.
“북한에는 우리의 국립묘지라 할 수 있는 묘역이 두 개 있다. 하나는 평양 시내를 굽어보는 대성산 주작봉 마루에 있는 ‘혁명열사릉’이고 다른 하나는 평양 시내서 서남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형제산 구역 신미리에 자리 잡고 있는 ‘애국열사릉’이다. 애국열사릉에는 시신이나 유골이 없는 가묘 형태로 묘비만 세워져 있는 인물이 많다는 점도 흥미롭다. . 6.25전쟁 전후 지리산 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로 소문이 났던 이현상,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돼 1959년에 사형된 진보당 당수 조봉암, 조봉암 등 혁신계 인사를 포섭하려 한 혐의로 체포돼 사형당한 박정호, 1968년 8월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체포돼 사형당한 통일혁명당 서울시위원회 위원장 김종태, 전라남도위원회 위원장 최영도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앞에서 언급한 김삼룡, 성시백, 최백근, 김달삼 등도 같은 경우이다. 여운형, 여연구(여운형의 딸.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도 이곳에 묻혔다.”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서에 기재된 조봉암
1)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평양 조국통일사, 1982)의 185~191쪽에는 왜 조봉암이 애국열사릉에 모셔져 있는지에 대해 그 근거가 제시돼 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었다. 남조선 혁명가들은 혁명 역량을 하나로 굳게 묶어세우며 투쟁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당을 내올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었으며, 그 실행을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습니다. 남조선 혁명가들의 줄기찬 투쟁의 결과로 그리고 남조선 혁명운동 발전의 필연적 요구를 반영하여 1955년 12월에 남조선 혁명가들의 합법적 정당으로서 진보당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김일성 저작집 5권, 제2판, 480~481페이지)
남조선 혁명운동 발전의 필연적 요구를 반영하여 1955년 12월에 진보당결당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남조선 혁명가들의 합법적 정당인 진보당이 나오게 되었다. 자주, 민주, 통일을 지향하는 모든 애국적 역량을 묶어세우고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기 위하여 진보당은 기성 보수정당에 대립하는 새로운 혁신정당을 표방하면서 발족하였다. 이것은 당의 합법적 지위를 전취(戰取)하며 광범한 애국역량을 묶어세울 수 있는 넒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남조선 혁명가들은 진보당을 나오면서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에 관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사상과 방침을 구현해 나가기 위하여 몸과 마음 다 바쳐 싸워나갈 굳은 충성의 맹세를 다지었다. 진보당의 당수인 조봉암은 당을 내오면서 위대한 수령님께 삼가 충성의 편지를 올리었다. 충성의 맹세를 다지며 적어나간 편지는 첫머리에서 지금 남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가 다 오물탕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다고 개탄하고,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슬기로운 민족의 운명을 바로잡아 나가실 분은 오직 경애하는 장군님뿐이시라고 하였다.
갈라진 민족, 갈라진 국토를 하나로 이어 세계만방에 이름 떨칠 민족 강국의 영도자로 조선을 빛내실 분은 남북조선의 민중이 그처럼 열화같이 우러르며 따르고 있는 김일성장군님이시라고 그는 목메여 아뢰었다. 그는 계속하여 민족의 운명을 영광스러운 길로 인도하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조국통일 위업에 적으나마 이바지하려고 진보당을 창당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앞으로 장군님의 자주적 평화통일 방침 따라 진보당의 투쟁강령을 틀어쥐고 나갈 것이라는 자기의 굳은 결의를 담아 삼가 맹세를 올리었다.
대회에서 연설한 조봉암은 남조선의 현 정세는 남북통일의 앞길이 가로막히고 인민생활은 도탄에 빠지고 있으나 보수 정객들은 여야를 불문하고 모두 다 권세욕에 혈안이 되고 있는 조건에서 기성보수정당과 다른 혁신정당의 조직과 혁신정치의 시행이 역사적 요청으로 나서고 있다고 강조하고, 합법적 당으로서의 진보당의 목적과 사명을 밝혔다.
그는 진보당의 목적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며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고 지적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진보당은 <정치적으로는 민주적, 평등적 방법으로 국토를 통일하며 완전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고 가짜 민주주의를 없애고 혁신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며 계획경제의 수립, 민족자본 육성, 산업부흥의 발전, 사회보장제 실시, 교육의 국가보장제도 실시, 새 민족문화 창조 등 체제건설에 기여한다>고 주장하였다.
진보당이 내세운 투쟁강령은 반제, 반파쇼, 평화통일을 기본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진보당의 투쟁강령은 무엇보다도 반제 자주적 입장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당은 그 강령에서 <8.15후……남조선에는 미군정 시기와 <대한민국> 수립 이후를 통하여 낡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형식적 모방 하에 불건전한 정치가 실시되었으며, 그 결과 사회적 불안과 경제적 혼란은 날이 갈수록 우심(尤甚)하여졌다>고 지적하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강요한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과 민족적 주체성을 잃고 그것을 형식적으로 모방하여 사대(事大) 매국적 정치를 해온 데 남조선 사회가 겪고 있는 모든 혼란과 위기의 근원이 있다는 것을 까밝혔다.
진보당의 투쟁 강령은 다음으로 파쇼독재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을 내놓았다. 당은 선언문과 강령에서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체계를 확립>하는 것을 중요한 과업의 하나로 내세우고 <미군정에 중용되어 있던 한국민주당 중심의 고루한 보수정객과 특권관료적, 매판자본적 세력의 과오>을 청산하고 <광범한 근로대중을 사회적 지반으로 하고 제반 건설을 추진>하여 사회를 변혁할 것을 강조하면서 <생산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과 농민, 노동자, 모든 문화인 및 봉급생활자의 생활권을 확보하여 조국의 부흥번영을 기할 데> 대한 민주주의적 변혁의 과업을 제기하였다.
진보당은 또한 파쇼독재의 악랄한 도구로 되어 있는 반공정책을 비판폭로하면서 <……반공을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하거나 부를 축적하기 위한 방패로 하여서는 안 된다. 반공의 소란한 구호와 물리적 힘만으로써는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더구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모략으로나 음모의 수단으로 만들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괴뢰법정에서의 진보당 당수 조봉암의 항변)
이 시기 남조선에서는 평화통일이라는 말조차 범죄시되고 있었고 오직 <북진통일>이 반공과 함께 <국시(國是)>로 선포되고 있었다. 미제의 침략과 전쟁정책, 민족분열 정책에 복무하는 <북진통일>을 거부하고 민족의 이익과 지향을 대표하는 자주적 평화통일을 정책화한 것은 대담한 정치적 발기(發起)이고 견결한 애국적 입장의 표현이었다.
진보당은 강령과 통일정책에서 <소위 무력통일은 이미 불가능하며 또 불필요한 것이다>는 것을 단호히 선포하고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추진하고……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거둘 수 있는 평화적 방식에 의한 조국통일의 실현을 기한다>고 밝히면서 광범한 애국적 민주역량을 단결시켜 민족 주체적 힘으로 평화적 방법에 의한 조국통일을 주장하였다. 자주적 평화통일의 실현을 위해서 진보당은 남북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조봉암은 진보당의 기관 잡지 <중앙정치>에 발표한 논설 <평화통일에로의 길>에서 남북총선거에 대한 진보당의 견해를 밝히면서 <이것은……현 대한민국의 해체, 해산을 전제로 하고 있다.>(<중앙정치> 10호)라고 하였다.
진보당은 또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공산주의자들과의 접촉과 협상이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진보당이 내세운 평화통일 강령은 우리 당의 자주적 평화통일 방침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로 남조선 인민을 불러일으키는 커다란 동원적 의의를 가졌다. 반제, 반파쇼, 평화통일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진보당의 투쟁강령은 자주, 통일,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남조선 인민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진보적이며 참신한 투쟁강령이었으며 남조선의 광범한 애국적 민주역량을 묶어세울 수 있는 애국적 기치였다.
진보당은 이러한 애국적이며 진보적인 투쟁강령을 내놓고 각계각층의 광범한 애국적 민주역량을 묶어세우며 미제와 이승만 도당의 민족분열 정책과 파쇼화 정책을 반대하는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려 나갔다. 이 투쟁 속에서 진보당의 위신은 남조선 인민들 속에서 높아지게 되었고 특히 이 당이 내놓은 평화통일강령은 남조선 사회에서 커다란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지지는 1956년 5월의 괴뢰 대통령 선거에서 명백히 표시되었다. 평화통일강령을 내세우고 선거에 임한 진보당의 후보자 조봉암은 선거가 폭압과 사기와 협잡 속에서 감행된 매우 불리한 조건에서도 이승만 괴뢰가 날조하여 얻은 투표수보다 약간 적은 수인 200만 표 이상의 찬성투표를 받게 되었다.
지금까지 신성불가침의 범주에 들어있던 이승만의 통일정책을 공격한 조봉암의 <조선의 평화통일 옹호>는 의심할 바 없이 남조선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던 것이다.>(<크리스챤 사이언스 모니터> 1956년 6월 26일)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보당은 인민들의 반미반독재 투쟁을 발전시키며 특히 남조선 청년학생들의 정치적 각성을 높이고 그들을 투쟁에로 준비시키는 사업을 줄기차게 벌였으며, 그 한 고리로서 청년학생들의 합법적 서클인 <여명회>를 조직하고 그들이 남조선 사회의 여명을 내다보고 투쟁하도록 영향을 주었다.
진보당의 영향력이 빨리 확대 강화되는 데 겁을 먹은 미제와 그 앞잡이들은 5.2선거를 앞둔 1958년 1월에 진보당을 그의 <평화통일구호가 ‘국시’에 위반>되며 <불온>하다는 황당한 구실로 비법화하였으며, 유혈적인 탄압책동을 벌려 수많은 진보당 당원들을 체포 투옥하였다.
놈들은 1959년 7월 31일에는 진보당의 당수 조봉암을 학살하는 야수적 만행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1958년 1월로써 진보당은 자기 존재를 끝마치게 되었다.
진보당은 비록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위대한 혁명사상의 진수를 심오하게 체득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그이께서 밝혀주신 남조선 혁명에 관한 전략 전술적 방침을 철저히 구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원수들의 야수적 탄압으로부터 자체의 혁명역량을 보존할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기세를 대중적 혁명운동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게 되었으나, 남조선에서 조국 통일의 기운을 더한층 높이고 인민들의 반미반독재 투쟁을 발전시키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안의 선진적 학생들은 1956년 6월 <신진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신진회>는 대학신문 <우리의 구상> 제6호(1957년 12월 9일)에 <새로운 형의 조국을 갈구한다…… 전체 무산대중은 단결하자!>고 주장한 글이 나가게 된 것을 계기로 수많은 간부들이 <적색논문 사건>에 몰려 괴뢰들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았으나 비합법적 활동을 줄기차게 계속하였다. <신진회>는 혁명적인 책들을 돌려 읽으며 미제와 괴뢰정권의 반동적이며 반인민적 정책을 폭로하는 토론회를수시로 조직하는 등으로 학생들 속에서 새로운 핵심을 키워내고 광범한 학생들에게 혁명적 영향을 주었다.(주: 신진회의 주역은 고건과 류근일)
1957년에는 고려대학교에 <정치경제학회>가 결성되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문리과대학의 일부 학생들은 1957년 1월에 다른 비합법적 조직을 결성했고, 그해 9월에 이 조직을 <반파쑈청년투쟁동맹>으로 개칭하고 혁명적인 사상과 이론을 탐구하였으며, 그 후에는 실천투쟁으로 넘어가 반미반독재 투쟁을 위한 삐라를 뿌리는 등 과감한 투쟁무대에 나섰다.
북한이 밝힌 조봉암의 일생
2) 평양 금성청년출판사가 2003년에 펴낸 [민족과 하나](김흥곤, 강현만 저. p.367~370)는 조봉암의 일생을 이래와 같이 썼다.
조봉암은 1897년 11월 9일 경기도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서 봉건 지방하급관리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호는 ≪죽산≫이다. 일찍이 망국의 비운에 가슴을 두드리며 독립운동에 나섰다. 대학을 나온 후 모스크바와 상해에서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하였다. 주체14년(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창건사업에 참가하여 그 검사위원으로 있었으며 같은 해 ≪고려청년회≫를 조직하고 그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8․15직후 남조선공산당 인천시위원장으로 있었다. 그 후 박헌영과 대립되여 주체35(1946)년 봄 ≪동아일보≫에 ≪박헌영에게 고함≫이라는 공개서한을 내고 남조선공산당을 탈당하였다. 남조선 괴뢰정부의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고 전쟁전 ≪국회부의장≫을 하면서 남북협상파-평화통일세력의 지도급 인물로 활동하였다.
주체44(1955)년 12월 22일 진보당 추진위원회를 무었으며(이룩했으며) 그 이듬해 11월 10일 정식 진보당을 결성하고 당수가 되었다. 주체45(1956)년 5․15 ≪대통령, 부대통령선거≫전에 평화통일의 구호를 들고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리승만파쑈통치지반을 세차게 뒤흔들어 놓았다.
그 후 조봉암은 1958년 ≪국회의원선거≫와 1960년 ≪대통령, 부대통령선거≫에서 승리를 목표로 하면서 리승만의 ≪북진무력통일≫정책을 짓부시기 위하여 진보당 안에 ≪통일문제연구위원회≫를 설치하고 평화통일방안을 연구 작성하였다.
주체 46(1957)년 9월에는 ≪평화통일을 위한 통일선거원칙≫을 발표하였다. 조봉암은 ≪평화통일을 위한 통일선거원칙≫을 보다 리론적으로 체계화하여 주체46(1957)년 10월 진보당의 합법적기관지인 ≪중앙정치≫창간호에 ≪평화통일에로의 길≫이라는 론문을 발표하면서 전민족적과제인 조국통일의 평화적 방도를 협의하기 위하여 ≪남북정치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호소하였다. 진보당의 호소는 위대한 수령님의 자주평화통일사상에 부합되는 것으로 하여 남조선의 각계각층 애국세력들의 지지와 찬동을 불러일으켰다.
≪북진무력통일≫소동에 미쳐 날뛰던 미제와 리승만괴뢰도당은 평화통일운동을 적극 추진하고 있던 진보당을 말살하고 그 당수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였다. 놈들은 우선 5․15≪선거≫직후인 주체45(1956)년 여름 재일교포로서 귀국한 정만갑을 재일본조선인 총련계 ≪간첩≫으로 날조하여 조봉암이 그와 접촉하였다는 사건을 조작하였다.
이어 놈들은 주체46(1957)년 가을에 체포된 통일혁명투사 박정호(주: 이 사람도 애국열사릉에 있음)를 심문하면서 그가 마치 진보당과 그 당수 조봉암과 접촉한 듯이 사건을 날조하여 일대 소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두 사건에서는 모두 증거불충분으로 조봉암과 진보당을 어쩔 수 없었다.
바빠 난 미제와 리승만 괴뢰도당은 괴뢰륙군첩보대 첩자로서 북반부를 래왕하던 량리섭(일명 량명산)을 조종하여 조봉암과 접촉시킨 다음 조봉암을 공화국북반부≪간첩≫으로 날조하여 제4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둔 주체47(1958)년 1월에 소위 ≪진보당사건≫을 조작하였다. ≪진보당사건≫으로 1월 12일에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의 주요간부들을 체포한 놈들은 2월에는 진보당을 강제해산해버리고 4월 3일 조봉암을 ≪보안법≫에 걸어 ≪대법원≫에 내세웠다.
그날 재판관이 ≪평화통일이라는 용어는 이북에서 쓰고 있는 말인데 진보당이 이런 것을 쓰는 리유는 무엇인가.≫고 물었다. 그때 죽산 조봉암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한다.
≪평화통일이란 말은 민중의 공통된 의사를 반영한 말이다. 민족의통일방도를 모색한 적중한 용어이다. 이북에서 평화통일이란 말을 썼다고 하여 우리가 그 말을 쓸 수 없고 쓰면 처벌한다는 론리는 강박이며 웃음거리이다. 가령 북에서 <밥>이라는 말을 쓴다고 해서 우리가 그 말을 써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으며 또 <밥>은 <밥>이지 <떡>이나 <죽>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방청석에서는 웃음소리가 터져 올랐다. 그런 속에서 죽산은 리승만≪정권≫의 ≪북진통일론≫은 전쟁의 방법으로 통일하자는 민족반역행위로서 민족의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고 당당히 주장했다.
이번에는 검사가 핏대를 돋구며 물었다. ≪진보당의 통일론과 정책정강은 반공국시에 위반된다. 피고는 인정하는가?≫
≪나는 <반공국시> 그 자체를 부정한다. 국시란 일반적으로 국가의 기조정책을 이름 할진대 우리 민족은 과거에 일제식민지통치를 반대하여 민중이 자유를 누리고 행복을 구가하는 민조의 복지사회를 성취하기 위해서 싸워왔다. 이 성스러운 조국광복투쟁에서 원쑤들의 감옥과 교수대도 두렴 없이 피 흘려 싸운 사람이 과연 누구였겠는가.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 못한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는 적대시세력일 수 없다. 그런데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 것은 론리이전의 미성숙문제이다. 더욱이 <반공>을 자기의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압하는 공간으로 삼는 것은 언어도단이고 용서를 바랄 수 없는 정치적강도행위이다. 민주주의와 자주정신이 꽃피고 우리 민족이 참 생활을 누리는 살기 좋은 사회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반공>이 아니라 마땅히 민주주의를 국시로 육성해야 하는 것이다.≫
조봉암의 사리정연한 론거 앞에서 재판관이나 검사들은 반론이나 부정할 근거를 못찾고 쩔쩔맸다. 공판전에서 패배한 파쑈교형리들은 그때로부터 석달 열흘이 지나 982페지에 달하는 장문의 기소장을 조작하여 살인재판을 다시 벌려 놓고 조봉암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주체 48(1959)년 7월 31일 사형장으로 나가던 날 놈들이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고 묻자 죽산은 말했다.
≪가족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할 말이 없다. 다만 마지막으로 한마디 남겨놓고 싶은 것은 이 나라에서 정치투쟁을 하다가 지면 이렇게 될 줄 짐작 못한 바 아니다. 그 희생물로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뿐 이다.≫ 그의 입가에는 승리자의 미소가 지펴 있었다.
이 시기 남조선에서는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을 목표로 한 비합법적인 투쟁조직인 ≪무혈통일남북협상위원회≫가 전국적인 활동을 벌렸는데 그 조직의 책임자가 바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통일혁명투사 박정호였다. 박정호로 말하면 성시백과 같이 유능하고 신념이 대쪽 같은 통일혁명투사였다. 자기의 집권유지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가리지 않는 리승만파쑈도당은 주체46(1957)년 10월 18일에 박정호를 체포하여 이른바 ≪간첩≫이라는 죄목을 들씌워 그 후 학살하였다.
2022.5.2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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