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고모델, 조사천과 조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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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5-06 14:45 조회3,97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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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고모델, 조사천과 조천호
계엄군 모략용 세일즈 광고판
위 사진은 조사천 부자의 사진이다. 아들 이름은 조천호. 들고 있는 사진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어린 아이가 시선 없이 멍하니 아버지 사진 들고 있는 모습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 사진 자체가 던지는 엄청남 공감력을 이용하여 좌파들은 이 사진을 5.18장사에 열심히 우려먹었다. “오월의 아이”, “오월의 꼬마 상주”.
좌파들의 세일즈 메시지, ‘이 불쌍한 아버지를 죽인 존재는 잔인무도한 계엄군입니다’
좌파가 팔아먹어온 메시지는 오로지 하나, 이 불쌍한 꼬마 상주를 탄생시킨 존재가 바로 인면수심의 계엄군이라는 것이었다. 5월 21일 도창 앞에 있던 공수부대가 이 가여운 아이의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메시지였다. 이 사진을 보고 눈시울을 적신 전 세계 인류들이 대한민국 국군을 멸시하고 증오했다. 이 한 장의 사진이 대한민국 국군을 살인마 집단으로 인식하도록 한 것이다.
5.18기념재단의 자료 조작
하지만 계업군은 절대로 조사천을 죽이지 않았다. 조사천은 무기고에서 탈취한 카빈총에 맞았다. 5.18자료를 관리하고 있는 5.18기념재단은 1980년 당시의 시체 검시 자료를 변조-조작했다. 그가 카빈소총에 사망했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차마 계엄군이 소지했던 M16에 맞아 사망했다고는 변조하지 못했다. 단지 “카빈총상”을 그냥 “총상”으로 바꾸는데 그쳤다.
한겨레신문의 황당한 모략
2019년 5월 16일, 한겨레 기사는 두 가지 허위주장을 폈다. 하나는 1980년 5월 28일 광주의 일반의사, 군의관, 일반검사, 군검사, 변호사, 광주유지 등 모든 관련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구성한 ‘합동조사반’이 검시한 자료는 계엄군에 의해 강제로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 사진에서 계엄군 1명이 들고 있었던 카빈총 사진을 제시하면서 “보라, 계엄군이 카빈총을 휴대하지 않았느냐, 조사천은 계엄군이 휴대한 카빈총에 죽은 것이다” 이런 주장이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area/894245.html
계엄군이 소지한 카빈총의 진실
한겨레신문이 게재한 위 사진은 공수부대가 아니라 20사단이다. 20사단은 5월 21일 기차를 타고 광주역에 도착하려 했다. 그래서 제3공수 5개 대대가 20사단 병력의 하차과정을 엄호하기 위해 광주역 앞에 집결했다. 하지만, 이를 눈치 챈 북한군은 광주시민 수만을 동원해 1천명도 안 되는 공수부대를 포위했다. 드럼통에 불을 붙여 계엄군 집단을 향해 굴리고 차량을 지그재그로 돌진시켰다. 3공수 5개 대대는 밤 10시까지 수만 시위대에 포위돼 몰살 위기에 있었다. 광주역을 포기한 20사단은 송정리에서 하차했다. 송정리역에서 트럭을 타고 광주시로 진입하려 했지만 이 역시 북한군이 간접 지휘하는 광주시민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결국 제20사단은 5월 20일 새벽부터 5월 27일,새벽까지 광주시내로 진입하지 못했다. 그리고 전남도청을 지키던 5개 공수대대는 5월 21일 오후 5시, 도청을 포기하고 구사일생으로 조선대로 퇴각한 후, 오후 7시어둠을 이용해 무등산 자락을 통해 시 외곽으로 야반도주를 했다. 이때 모 여단의 여단장 모 준장은 지프차를 타고 도주하다가 시위대로부터 스나이핑을 당해 지프차를 버리고 운전수와 함께 무등산 꼭대기 미 방공포 부대로 기어가 가까스로 생명을 부지했다. 그리고 5월 27일 새벽 1시. 극비리에 30명 내외의 단위로 특공조를 편성해 도청, 광주공원, YWCA, 전일빌딩, 관광호텔로 극비 진입했다. 그리고 새벽 4시에 시위대를 모두 정복함으로서 10일동안의 광주소요를 완전 진압했다. 공수부대는 5월 27일, 진압에 성공한 직후 모두 원대로 복귀했고, 20사단은 광주에 더 남아 40일 동안 평정에 필요한 잔무를 맡았다. 시민들에게 쌀 등 식품을 공급하고, 사상자들의 애로를 해결해 주고, 방화와 파괴로 얼룩진 도시 잔해를 청소하는 등의 복구작업을 맡아 했다.
한겨레가 계엄군을 모략하기 위해 게재한 위 사진은 5월 28일 이후에 촬영된 청소/복구 사진이고, 조사천은 5월 21일 죽었다. 20사단 병사가 광주시 청소 시기에 들고 있던 총은 5월 21일 조사천을 살해한 그 총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제20사단에는 왜 M16이 없었는가? M16 국산화는 박정희 대통령의 명에 의해 1971년 지휘부가 구성되어 1978년 첫 생산품이 나왔다. 이 신형 소총 M16은 가장 먼저 전방병력에 보급되기 시작해 1980년까지에는 공수부대에까지만 가까스로 보급되었다. 후방인 양평에 주둔한 20사단은 그래서 1980년 당시 카빈총으로 무장해 있었던 것이다.
조사천은 계엄군 총알이 날아갈 수 없는 곳, 옥상 스나이퍼에 조준 사격당했다
2021년 12월 27일 5.18 진상규명조사위원장 송선태는 출범 2주년 기념 주요 조사결과를 KBS방송을 통해 내보내면서 여러 가지 거짓말을 했다. 그 중 하나가 조사천에 대한 거짓말이다. “조사천은 전일빌딩 옥상에 올라가 있던 11공수 한 모 일병의 조준 사격으로 사망했다. 조사위원회는 한 모 일병의 증언을 확보했다. 당시 검시조서에는 사인은 칼빈에 의한 왼쪽 앞가슴 부위 맹관 총상이며 사입구 아래쪽 피하에 10X16cm 크기의 피하 혈반이 있었다.”
이 말이 사실인가? 100% 허위다. 조사위는 왜 허위를 조작하는 것인가? 조사천에 대한 진실이 5.18의 진실의 핵심모델이기 때문에 좌파들이 저토록 진실 뒤집기에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이용식 교수의 연구결과
이용식 교수는 전남대학교 5.18연구소가 작성한 증언자료와 1980년 5월 28일의 검시결과를 토대로 아래와 같은 결론을 냈다.
<조사찬을 저격한 총알의 궤적>
목격자들의 증언이 모든 면에서 일치하지 않는 점은 있으나 여러 사람의 증언을 종합해 추론해보면 조사천의 사인은 다음과 같이 추론된다.
그의 총상 부위는 좌측 머리, 좌측 턱, 좌측 목 부위와 좌측 앞가슴으로 보인다. 좌측 머리와 좌측 턱을 부순 총알이 턱밑 피부를 뚫고 나온 후 다시 좌측 앞가슴을 뚫고 가슴 속에 박힌 것이다. 그럼 머리와 가슴 중 어느 것이 치명상일까? 몇몇 목격자들은 머리에서 피가 솟구쳤다고 증언한 것으로 보아 머리는 가죽만 손상된 것이 아니라 머리뼈를 부순 총알이 측두골 부위의 뇌정맥동 즉 측정맥동(lateral venous sinus)에 손상을 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피가 나오면 순식간에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져 나와 주변을 흥건히 적시기에 충분하며 곧 사망에 이른다.
가슴에는 직경 1cm의 총알이 들어간 자리와 함께 가로 10cm, 세로 16cm의 피멍이 생겼는데 이 피멍은 총알이 피부 밑으로 진행하면서 벌려놓은 틈으로 피가 흘러내려 생긴 것이다. 즉 총알은 피부 밑을 지나며 흉곽과 나란히 진행하였던 것이므로 이 총알이 흉곽내부로 들어갔더라도 심장을 뚫지는 않고 폐 속에 박혔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가슴 총상으로는 피가 뿜어져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총알이 가슴 정면에서 뚫고 들어갈 경우는 이런 크기의 피멍이 생기지 않는다. 이상으로 볼 때 조사천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은 총알이 측두골을 깨부수고 측부 정맥동(lateral venous sinus)을 찢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럴 경우 대량의 피가 쏟아져 곧 죽게 된다.
조사천의 검시는 사망일로부터 7일이나 지나서 시신이 부패했을 때 행해졌기 때문에, 검시에 참여했던 의사나 검사들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는 부패할 대로 부패한 시신을 마주했을 것이다. 그들의 눈으로는 피범벅이 된 머리카락으로 덮인 측두부의 총상이나 일부러 턱을 치켜들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턱밑 피부 열상은 구분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검시관들 눈에는 가슴에 난 카빈 총알구멍과 그 구멍 아래로 16cm 정도의 길이와 10cm 정도의 폭을 갖는 피멍 자국만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사고 당시 증언자들의 증언을 종합해서 조사천의 상처부위를 다시 추론해보면, 탄도가 머리 위에서 가슴을 향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총알은 카톨릭센터 옥상에서 발사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현장 목격자 중 윤석진과 나상옥은 총알이 높은 건물 옥상에서 날라왔다고 생각했고, 이용일은 이 사건 바로 전에 카톨릭센터 옥상에서 총알이 날라와 자기 옆 사람이 죽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조사천이 탄 장갑차는 카톨릭센터에 가장 가까운 차로(3차로)에서 도청을 향해 천천히 운행하고 있었다(임병석).
당시 금남로에는 약 오천 명의 군중이 길을 메우고 있어서 그들이 길을 비켜 주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차의 속도가 빠를 수가 없었다. 금남로를 서서히 달리던 장갑차에서 상체를 내밀고 있던 그에게 누군가가 대형 태극기를 건네주었다. 그가 일어나 태극기를 양손으로 치켜들고 구호를 외치며 카톨릭센터 옆을 지날 때, 조사천의 앞 바로 머리 위 카톨릭센터 빌딩(지상 7층 건물) 옥상에서 발사된 총알이 두 손에 태극기를 든 채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있던 그의 왼쪽 머리 측두골을 깨고, 턱뼈 왼쪽 부분을 부수고(위 사진 참조) 턱밑 피부를 뚫고 나온 뒤, 다시 왼쪽 가슴 피부를 스치듯 뚫고 가슴속에 박혔던 것이다.
검안서에도 1x1cm 총상 주위에 16x10cm의 피하출혈이 있었던 사실이 총알이 피부 밑으로 16cm 정도를 주행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뒷받침한다. “머리에서 피를 내뿜으며 축 내려 앉았다”(서채원)는 표현에서 총알이 머리부분을 맞혔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위에서 쏜 총알에 맞았기 때문에 그 충격이 그를 짓눌러 “머리에서 피를 내뿜으며 축 내려앉았”던 것이었다. 이 총알로 인해 좌측 턱 근처 목 피부와 근육이 손상되어 “목이 터졌다”는 표현이 나올 수 있었고(장종필)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와 덜렁거린 인상(이규홍)을 주었던 것이다. 당시 검안서에도 사인은 카빈 탄환에 의한 왼쪽 앞가슴 맹관 총상(총알이 몸 안에 박혀 있다.)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건물 옥상에서 무장괴한이 보도 옆을 지나가는 장갑차에 탄 조사천을 저격하였다. 건물에서 장갑차까지의 거리가 약 7m, 건물의 높이가 약 21m 이므로 발사각이 약 72도였을 것이다. 이 각도는 실제 조사천의 피격 탄도각과 비슷하다. 사진 가장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동구청 건물이다.
34세 조사천의 시신은 5.21일 오후 1~1:30 피격되었고, 바로 직후 마치 시나리오가 있었던 것처럼 시체장사용으로 전환됐다. 장갑차에서 총일 맞은 직후 곧장 지프차 보닛 위로 옮겨져 선동에 이용되다가 기독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 후 시신은 도청으로 옮겨져, 상무관에 안치되었다가 5월 28일 오전 11시, 광주지방검찰정 검사 한광수의 지휘아래, 의사 최유섭과 군의관 박승일이 검안하였다.
5.18조사위, 증거는 없고 2년 동안 조사한 건 홍어들의 증언 잔치상 - 도로를 산보하던 개들이 웃는다
조사천이 총에 맞은 장소는 송선태의 말처럼 전일빌딩 앞이 아니라 전일빌딩에서 빌딩숲 거리로 300m 떨어져 있는 카도릭센터(현 5.18역사기록관), 그 현관문으로부터 5~6m 떨어진 도로상이다. 빌딩 숲에 막혀 전일빌딩 옥상으로부터는 사격 받을 수 없는 지점이다. 전일빌딩에서 카돌록센터 앞 도로에 차를 타고 있는 사람을 총으로 쏘려면 그 피저격자가 눈으로 보여야 하는데 아래 도면이 잘 보여주듯이 전일빌딩과 카돌릭센터빌딩(5.18역사기록관) 사이에는 5~6개의 다른 빌딩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서 시선이 막힌다. 군사용어로 사선(사격선)이 형성되지 않는 곳이다.
그리고 당시 도청을 지키고 있던 제11공수와 7공수는 도청의 넓은 울타리 벽을 따라 강강술레식으로 줄을 지어 서 있었고, 일부 병력이 정문에 집결해 있었다. 이들은 10만 인파로 로부터 공격을 받고, 장갑차가 지그제그 궤도를 그리며 쏜살같이 '집합해 있는 공수대원들'을 향해 돌진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하는데에도 벅차했다. 그런데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1공수가 전일빙딩 옥상에 어리버리 계급인 일등병을 저격수로 배치하여 카돌릭센터 앞길에 있는 장갑차 승차원을 저격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설사 저격병을 보낸다 해도 고참 중사 상사들로 팀을 짜서 보내는 것이 군대 상식이다. 그런데 어리버리 일등병 한 사람을 그 무서운 곳으로 보냈다 하니 말문이 막힌다. 공수부대 대대장이 얼룩무늬 공수복을 입은 일등병 하나를 전일빌딩으로 보냈다? 도청정문에서 전일빌딩으로 가려면 그 넓은 광장을 빽빽하게 채운 성난 군중을 뚫고 가야 한다. 공수복을 입은 일등병 한 사람이 그 군중 사이로 걸어 갔다면? 삽시간에 짓밟혀 가루가 됐을 것이다. 송선태와 그 휘하의 전라족들은 군대를 무얼로 알고 있는 것인가? 이걸 믿으라고 KBS를 통해 방송을 하는 것인가? 조사위원장이라는 송선태는 그 일등병이 한 모 일병인데, 조사위가 그 일병의 진술을 확보했다고 자랑스럽게 방송했다. 그 한 일병은 아마도 전라도 출신일 것이다.
5.18진상조사는 홍어족들의 후안무치 퍼레이드
당시 공수부대는 미CIA 보고사가 증명한 바와 같이 병사 가각각에 주어진 정당방위권을 포기한 채 광주시민을 보호했다. 폭탄 조립/해체 기술을 가진 군무원을 도청 지하실로 몰래 잠입시켜 폭도들이 광주시를 날려버리겠다고 조립해 놓은 2,100발의 나이너마이트 폭탄을 해체시키고, 500여 개의 수류탄 뇌관들을 제거케 했다. 광주족들은 지금 은인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전라도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이 국민적 상식이 돼 버린 것이 아닌가. 이처럼 조사위원회의 조사내용을 보면 증거는 단 한 개도 없고, 증언들 뿐이다. 증언자들의 대부분은 전라도 출신들이다. 조사위 족들이나 증언 족들이나 모두 전라족들이다. 전라도 것들이 국고를 탕진해 가면서 육갑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조사천이 금남로 옥상 저격부대에 의해 피살됐다는 증언들>
1) 광주 카톨릭교구 사무국장이었던 유팔동씨의 증언((유팔동, 5.18의 기억과 역사 5, 527쪽)
광주 카톨릭교구 사무국장이었던 유팔동는 무장 괴한들이 카톨릭센터 옥상에 올라가 금남로 시민들을 향해 총질을 했다고 증언한다.
“시민군들이 이렇게 총을 가지고 우리 (카톨릭)센터 옥상으로 올라갈라 그랬어요. 그래서 “왜, 그러냐” 그랬더니 옥상에서 봐야 (아까 말씀드린대로 우리 센터 건물이 그때는 광주 금남로에서 제일 높은 빌딩이라) 거기서 도청을 향해 총질을 좀 하겠다. 그 양반들이 총을 들고 그러니까 그래 가지고 그분 말릴 수도 없고… 그때 시민군하고 저쪽(공수부대)하고 교전이 조금 있었어요.”
2) 일본 프리랜서 기자 카지마 고이치 증언
“내가 촬영하고 있던 건축 현장에도 십여 명의 시민들이 달려와서는 커다란 나무기둥과 콘크리트 덩어리를 집어 올려서 군인들의 머리 위로 내던지고 있었다.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젊은이를 대여섯 명 태우고 있던 장갑차가 군이 바리케이트로 치고 있던 버스를 밀어 제치면서 군인들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대세는 완전히 데모군중들의 손에 장악되고 있었다.
그런데 군중 속의 한 사람이 우리들이 있는 곳을 손가락질하면서 “저기에 기자들이 있다”고 외쳐 대자 돌팔매가 일제히 우리들을 향해 날라왔다. 아래에서 공중 높이 날려 보내는 돌팔매여서 맞아도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무드가 너무 격렬했기 때문에 바로 옆에 있던 광주시 유일의 호화 관광호텔의 옥상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가까스로 관광호텔 뒷문으로 들어서자마자 그곳 종업원으로부터 “만약 이 빌딩에서 사진 촬영하는 놈이 한 놈이라도 발견되면 당장에 불을 놓고 말겠다는 통고가 있었으니 제발 다른 곳으로 가 달라”고 했다.
그때 독일인으로 보이는 남자 여행객 한 사람(힌츠페터)이 완전 소등되어서 깜깜해진 건물 안으로부터 커다란 백을 메고 나왔으며, 그는 호텔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면서 마치 탈출의 길이라도 재촉하듯 총총히 밖으로 사라져갔다. . . AP의 서울지국에 근무하는 젊은 기자와 나는 도청 뒤에 있던 東子여관으로 일단 돌아가기로 했다. . . 동자여관에는 나 외에도 한국 각 신문사의 사진기자 다섯 사람이 함께 투숙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여관으로 돌아와서는 “이젠 별 도리가 없다”고 하며 짙은 한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그들은 전남일보사 옥상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었다고 했으며, 때마침 나타난 무장데모대들이 “당장 나가라”고 몰아치는 바람에 여관으로 되돌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무장 데모대로부터 폭행은 안 당했다고 했다(風間公一 카지마 고이치).
3) 정건호 건국대학생 서울에서 광주로 귀가
5월 21일에는 길거리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계엄군이 도청 안으로 들어가고 도청을 제외한 시내 일원에는 계엄군이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 집에 와 있던 성일(정성일, 당시 전남대 경제학과 1년이었던 사촌동생)이와 안심하고 11시쯤에 밖으로 나갔다.
4) 나상옥: 나상옥 21세, 대학생
내가 탄 차가 관광호텔 부근에 이르렀을 때 총소리가 들렸다. 장갑차에 탔던 청년(트레이닝 바지를 입었음)이 장갑차 밖으로 몸을 내놓고 가다가 목 오른쪽 부위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봤다. . . 금남로와 도청 앞에서도 군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청년이 목에 맞은 것은 정조준에 의한 것이었다. 오른쪽 목에 맞은 점을 미루어 아마 관광호텔에서 쏘았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금남로에는 계엄군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그 자리에서는 도청 쪽을 보아도 군인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탄도에 대한 증언들>
1) 부인 정동순의 증언(1988년 8월, 5.18기념재단 사이버추모공간)
. . 목에 총알이 관통한 상태로 눈을 뜬 채였다.. .망월동으로 갔다. . 시체가 부패해서 관이 터지고 시체 썩은 물이 흘러 나왔으나 어떻게 손을 볼 수가 없어 관을 비닐로 싼 채 그냥 묻었다. .
2) 최인영 17세, 용접공
. . 정오쯤 되자 점점 불어나는 시민들과 차들로 금남로는 가득가득 메워져 있었다. . .공수부대를 향해 무섭게 달려든 청년은 머리에 횐 띠를 동여매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장갑차 위에 우뚝 서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금남로 사거리에 모여 있었다. 장갑차가 동구청 부근까지 가자 갑자기 총성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순식간에 시민들은 흩어져 도망갔다.
3) 김행주 17세, 고등학생
. . 오후 2시경이었다. 그 장갑차는 위 뚜껑을 열고 그곳에 태극기를 든 사람이 노래를 부르며 타고 있었다. . . 턱이 완전히 처지면서 두개로 나뉘어져 버렸다. 그 사람은 장갑차 위 구멍에서 팔을 뒤로 하고 처져 있었는데, 위턱부터는 완전히 뒤로 제쳐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
4) 윤석진 19세, 재수생
. . APC 장갑차 한 대가 도청을 향해 돌진해 갔다. 관광호텔 앞에서 장갑차 뚜껑을 열고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애가 나왔다. 안전벨트를 맨 상태에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어댔다. "탕, 탕." 총소리가 남과 동시에 그의 턱 부분이 아예 날아가 버렸다. 목뼈가 허옇게 보이고 피가 솟구쳤다. .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총을 쏘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총알이 뚫고 나간 것이 아니라 턱을 분리를 시켜버렸기 때문이다. .
5) 김용오 21세, 식당종업원
. . 21일, . 12시경 유동삼거리에서 장갑차 한 대가 오고 있었다. 차 위에선 대형 태극기를 든 교련복 차림의 고등학생이 "애국시민 여러분은 동참하라"고 외쳤다. 뚜렷한 목적은 없었지만 나이 어린 고등학생이 앞장서는 것을 보고 나는 장갑차에 올라탔다. 장갑차 안에는 6명 정도의 젊은이가 타고 있었다. 사방이 막혀 있어 밖을 내다보지는 못했으나 장갑차가 서서히 도청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 .제일은행 부근쯤이었을까? 갑자기 '땅!' 하는 총성이 울려 깜짝 놀랐다. 운전수는 급히 차를 돌려 유동삼거리로 되돌아갔다. 차에서 내려보니 장갑차 위에 탔던 고등학생이 온몸이 피투성이 된 채 쓰러져 있었다. 언뜻 보아 얼굴에 총을 맞았는지 입이 한쪽으로 처져 있었다.
6) 이규홍 26세, 당구장 지배인
5월 21일로 기억된다. 유동 삼거리에 많은 인파가 몰리고 어떤 청년 하나가 시위진압용 경찰장갑차를 타고 있었는데 이 상태에서 도청으로 진격하자고 했다. 그래서 도청 앞으로 올라가고 시위군중들과 함께 나도 따라 올라갔다.그런데 관광호텔 부근에서 장갑차에 타고 있던 청년이 상체를 드러내는 순간 도청 앞에서 쏜 Ml6총에 턱 부분을 맞고 쓰러졌다. 곧 유동 삼거리로 데려와 살펴보니 장갑차 윗부분에는 피가 흥건히 젖어 있고 청년의 목이 겨우 매달린 정도였다. 시위군중들은 얼른 그 사람을 장갑차에서 내려 지프차에 헝겊을 깔고 누이고 대형 태극기로 덮었다. 이어서 지프차를 시내로 몰고 다니면서 스피커로 구호를 외치며 시민들에게 그의 죽음을 알리고 궐기하라고 말했다.
7) 이용일 19세, 재봉견습생
아마 점심때가 좀 지나서 일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지하상가 쪽에서 누가 총을 싣고 와 박스 채 차에서 내렸다. 모두들 몰려가서 너나할 것 없이 총을 들었다. 그때 갑자기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바로 내 옆 사람이 총알에 맞아 쓰러졌다. 사람들은 충장로파출소와 현대예식장 쪽으로 나뉘어 모두 흩어졌다.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은 아예 밟혀버렸다. 잠시 후 사람들은 다시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 또 어떤 사람이 장갑차를 타고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러닝셔츠만 입고 머리에는 흰 띠를 두르고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장갑차의 뚜껑을 열고 상체를 위로 내놓고 서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총을 한 자루 던져주었는데 그는 필요없다며 받지 않았다. 그 장갑차는 얼마쯤 앞으로 나가는 듯싶었다. 그러나 도청 쪽에서 저격병이 쏜 총에 목을 맞고 쓰러졌다.
8) 장세경 25세, 소방공무원 시험 치루고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에 시민들 사이에서 총이 나오기 시작했다. 장갑차 위에 탄 어떤 청년이 태극기를 들고 카빈총을 거꾸로 매고 도청을 향해 간다고 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말렸으나, "죽어도 간다."고 하며 도청을 향해 전진했다. 청년이 탄 차가 관광호텔 앞에 이르자 연발 총성과 동시에 태극기를 든 청년이 장갑차 위에서 뒤로 넘어졌다. 장갑차가 되돌아오는데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도 사람들 사이에서 "으으!" 하는 저음의 신음 소리가 났다. 청년은 코에 구멍이 뚫리면서 머리는 반쪽으로 갈라지고 왼쪽 머리가 완전히 날아간 상태에 턱이 떨어져 가슴에 얹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으" 하는 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사람을 이렇게 죽일 수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9) 서채원 19세, 무직
12시 30분경 시위대의 장갑차 한 대가 유동 쪽에서 도청 쪽으로 왔다. 장갑차의 앞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태극기를 든 채 서 있었다. 모든 시민들의 눈은 그 장갑차로 향했다. 그 장갑차가 광주관광호텔 가까이 다가갔을 때 총성이 울려퍼졌다. 순간 태극기를 들고 앞에 서 있던 젊은이가 머리에서 피를 내뿜으며 축 내려앉았다. 분수처럼 솟아오르던 그 붉은 피,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보았던 그 장면을 결코 잊지 못한다. 정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었다. 그것을 본 시민들은 모두 울지 않을 수 없었다.
2022.5.6.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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