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욱의 고백, '물리학과 안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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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3-18 07:43 조회2,73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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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욱의 고백, '물리학과 안 다녔다'
이동욱은 대학시절에 자유의 의미를 찾아 헤맸다
이승만 학당의 로고 이동욱은 1987년에 8사단 중사로 제대해서 서강대 물리학교에 복학했다고 했다. 물리학 학사증을 따기 위해서는 주말에까지도 수학과 싸워야 제대로 졸업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대학시절에 ‘자유란 무엇인가’를 연구하기 위해 유명한 학자들을 찾아다녔고 곳곳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물리학도가 아니라 자유를 연구하는 프리렌서 방랑자였다는 뜻이다.
“자유란 뭘까요? 마음대로 멋대로 하는 게 자율까? 그거는 방종이나 마찬가지인데 그죠? 그러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마음대로 하는 거, 어떤 울타리 안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 정말 그것이 자유의 진정한 의미인가? 저는 그 학부시절에 이 물음을 가지고 곳곳을 다 찾아 다녔습니다. 유명한 학자라고 하는 분들도 찾아뵙고, 도대체 그 우리의 자유민주주의에서의 자유가 뭡니까? 어디를 봐야 됩니까?”<2022.3.7. 이동욱>
정규재는 고대 철학과를 나왔다고 한다. 그런 정규재가 “자유란 무엇인가?” 하고 유명 학자들을 찾아다녔다면 몰라도, 학부 과정에 있는 물리학도라면 신파극의 대사에나 있음직하고, 일제 봉숭아학당에서나 어울릴 법한 “자유란 무엇인가?” 고민하면서 어느 교수가 유명한지 수소문해서 그 유명한 학자들을 만나보았다고 한다. 만날 때는 용건을 말하고 예약을 받아내야 한다. 당시의 대학교수들은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이 만나자 앙청을 해도 문전박대하는 시기였다. 교수들은 개별 학생에게 단 1분도 주려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서울대, 고대, 연대 교수들과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적이 있고, 서울대를 포함해 7개 대학에 강의를 나갔기 때문에 학자들의 분위기를 잘 안다.
전화를 걸어 예약을 얻어내는 과정까지만 상상해보자. 다른 동기와는 6년정도 연상이라 친구도 별반 없었을 것이다. 친구가 알선해 줄 리도 없었을 것이다. 여기까지의 과정을 한번 상상해 보자. 먼저 전화부터 했을 것이다. 노태우 시대의 유명한 타 학교 교수들이 과연 30세 넘은 타대학의 대학생의 전화를 받아주었을까 싶기도 하다.
“교수님, 좀 만나 뵙고 싶어서 전화드렸습니다”
“자네 어느 학교 무슨 과에 다니는가?”
“네 서강대학교 물리학과에 다닙니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데 몇 살인가?”
“예 31세입니다”
“왜 그렇게 늦었는가?”
“예, 8사단에 사병으로 입대했다가 말뚝을 박았었죠, 중사까지 진급했다가 제대했습니다”
“그 나이에 어떻게 그 힘든 물리학계의 수학공부를 시작했나? 자네 대단하구먼, 수학에 천재적 소양이 있는 모양이지?
“네, 제가 수학을 좀 잘 하는 편입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물리학하고는 거리가 먼데 왜 나를 만나자 하는가?”
“네, 저 자유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요”
“지금이 노태우 시대인데 누가 자네의 자유를 탄압하던가? 그리고 지금은 자유방임 시대도 아닌데, 왜 하필 가장 바쁜 물리학도가 그런 철학적인 연구를 하겠다는 것인가? 서강대학교 물리학과는 적당히 때우는 학과인 모양이지, 나는 그런 대답 못해주니 만나지 않겠네. 부지런히 물리학 공부를 해도 어려운 나이에 참 별 학생을 다 보겠구먼, 다시는 전화하지 말게”
여기까지 대꾸해주는 학자도 교수도 실상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최근 득문한 바로는 이동욱이 유명한 사람들을 꽤 만났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박지만이고 또 다른 사람은 이름이 두 자인 중소기업 회장이고, 또 한 사람은 언론인이라고 한다. 나는 이들 중 한 사람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조갑제나, 정규재나, 류석춘 정도야 유유상종 차원에서 자주 보겠지만 앞의 세 사람은 좀 다르다.
“돈 좀 지원해 달라”, “먹고 살게 좀 해 달라”, 이런 이야기였다고 한다. 50대에는 이렇게 앵벌이 하고 다닌 사람이 30대에 유명한 학자들을 수소문하여 찾아다니면서 “박사님, 교수님, 자유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신파극 배우 노릇을 했다고 하니, 도저히 어울리지 않아서다. 이승만 학당의 격이 빨치산의 뿌리로 유명한 박현채 수준으로 격하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학도 김대령 박사에 의하면 박현채는 5.18에서도 핵심 역할을 했다고 한다. 빨치산의 뿌리 원조이자 5.18까지 주물렀던 박현채는 붉은 족보상 이용훈의 할아버지 격이 된다. 주사파를 양성한 원흉 안병직은 이용훈의 아버지 격이다.
[무등산의 진달래]에는 북한군 개입을 뒷받침하는 증거자료 22개가 있다. 그런데 광주법원이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여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 판결의 이유는 22개 증거가 허위사실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22개 증거를 하필이면 [북한군 개입]을 증명하기 위한 용도로 “해석”을 했느냐는 것이다. 광주에 기분나쁜 방향으로 해석한 것이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5.18답변서]에는 42개의 증거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5.18단체도, 서울재판의 1심도, 2심도 모두 무력화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 42개 증거 모두를 무력화시키지 못하면 북한군은 온 것이 된다. 이 42개 증거 중에 가장 저들이 무서워하는 증거는 5월 21일 08시부터 진행된 상황이다. 이동욱과 이승만학당이 지만원과 정면 결투를 하려면 5월 21일의 상황 증거부터 무력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 상황증거는 아래 파일에 있다.
http://www.systemclub.co.kr/bbs/board.php?bo_table=12&wr_id=20334&page=2
2022. 3. 18.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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