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 소정의 교수와 이영훈 연구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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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2-13 22:48 조회2,81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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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의 진실: 샌프란시스코대 교수의 논문
위안부는 일본의 탓이 아니라 조선가정의 여성 비하-학대의 산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434-476쪽에는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의 소정희 교수의 논문이 실려 있다. 아래가 그의 글이다. 이 글은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는데 있어 이영훈보다 앞서 있고 폭이 넓다.
식민통치의 마지막 10년(1935-45)은 조선의 산업혁명 시기였다. 농민들은 토지로부터 추방되고, 노동계급이 태동하고, 인구의 유동성이 증대하고, 도시 사회가 폭넓게 확산되고, 여성계에서는 소위 신여성에 대한 선망이 확산됐던 그런 시기였다.
1917년 이광수의 소설 '무정'이 연재되었다. 이 소설은 신문명의 보급서였다. 서구의 신문명이 유입되고, 개화사상이 확산되고, 신청년과 신여성을 연애의 표상으로 삼은 신소설이었다. 1935년 심훈의 ;상록수'는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농촌을 계몽하기 위한 계몽서였다. 당시의 농촌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고루하고 원시적이었는가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위안부 역시 이러한 개화기 시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190명의 위안부를 조사했더니 88%에 해당하는 168명이 바로 탈농촌 시기인 1937-44년 사이에 위안부가 되었다. 도시를 흠모하는 일종의 골드러시가 한창이었던 시절에 가정을 뛰쳐나온 여식들이 인신매매단의 좋은 먹잇감이 된 것이다.
181명의 위안부를 조사한 결과 그중 4분의 1 이상이 이미 가족과 떨어져 식모, 공장노동자, 식당 및 기생집 접대부 등으로 일하고 있다가 위안부가 되었고, 66% 정도가 만주, 대만, 중국 등으로 이송되어 갔다.
위안부로 가게 된 경우는 가정을 이미 탈출해 있던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가정에서 부모나 오빠들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있던 어린 여식들이 폭력을 피해 달아났다가 곧장 인신매매단의 덫에 걸려들기도 했고, 배움의 신기루를 찾아 넓어진 세상으로 도망쳐 나온다는 것이 곧 인신매매 단의 희생양이 되어 위안부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당시 인신매매단의 앞잡이는 대부분 조선인들이었고, 군대 위안부를 경영하는 사람들 속에는 조선인들도 꽤 있었다.
위안부로 가는 길은 두 가지 경로였다. 가정-노동시장-위안부업소로 가는 과정이 있었고, 곧바로 가정-위안부업소로 가는 과정이 있었다. 이런 과정을 촉진한 매개체가 인신매매단이었으며, 인신매매단에 걸려들 수 있었던 환경은 곧 여성에 대한 가정폭력과 학대 그리고 배움에 대한 선망을 무조건 억압하는 무지몽매한 조선 가정의 여성비하 문화 때문이었다.
소정희 교수는 가정에서 곧바로 위안부라는 구덩이로 떨어진 한 많은 위안부 6명의 케이스를 정대협 자료에서 쉽게 찾아냈다. 그러나 정대협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위안부 문제를 정치문제로 부각시키기 위해 사회에 그릇된 인식을 확산시켰다.
정대협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위안부는 가정에 있던 조신한 여식들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일본 순사들이 들아닥쳐 강제로 붙잡아다가 일본군이 운영하는 유곽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소정희 교수에 의하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소정희 교수가 조사한 6명의 위안부 사례는 이를 이해하는데 생생한 자료가 된다. 이하 소정희 교수의 논문 내용을 요약한다.
조선의 부모가 딸들을 위안부로 내몬 대표적 사례
1) 문필기: 정대협이 매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주최하는 시위에 늘 참가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1943년 후반부터 2년 동안 만주의 군위안소에서 일했고, 1992년 6월에 위안부로 공식 등록했다.
그녀는 1925년, 2남9녀를 둔 구멍가게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가장 하고 싶은 것이 공부였다. 아버지는 “가시내가 공부하면 여우 밖에 될게 없다”며 화를 냈다. 어머니가 몰래 쌀 한 말을 팔아 보통학교에 넣어주었다. 일주일 안 돼서 아버지가 딸을 교실에서 끌어내고 책을 불태워 버렸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딸을 죽어라 패고 집에서 쫓아내 버렸다. 큰집에 가 있다가 다시는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된 상태에서 9살부터 집에서 살림하고, 밭일도 하고, 목화밭을 매고, 물레질도 했다. 구멍가게에서 파는 고구마도 쪘다. 농사 일을 할 때마다 밥을 해서 들로 날랐다.
그러던 1943년 가을 어느 날, 마을에 사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하는 50대 정도의 아저씨가 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주겠다 해서 따라나섰다. 18세였다.
그 남자와 일본인 순사가 그녀를 곧장 차에 태워 부산으로 데려갔다. 긴 머리를 자르고 치마저고리를 벗기고 원피스를 입혔다. 그리고 다른 네 명의 여인들과 함께 곧장 만주로 이송됐다. 이 이야기는 물론 아래의 모든 이야기들은 정대협이 엮은 ‘증언집’에 수록돼 있다.
이 여인이 매주 수요일 12시에 일본 대사관 앞에 나와, 일본이 자기를 강제로 연행해 가서 위안부로 삼았다며 사죄와 피해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위안부 놀음은 간첩의 처이자 정대협의 사무총장인 윤미향이 꾸려가고 있다. 일본 사람들이 이 시위하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바로 이들의 이런 놀임 때문에 애꿎은 국민과 국가가 명예를 유린당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여인에 있는 게 아니라 정대협에 있다.
2) 이상옥: 이 위안부의 아버지는 경상북도 달성군 달성면 면장이었다.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짖는 부농이기도 했다. 9살에 학교에 들어갔지만 오빠가 “계집애를 학교에 보내서 어디다 쓰느냐”며 학교를 못 가게 하고, 책을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렸다. 그래도 학교에 가려 하자 죽인다고 협박했다. 옆집 언니가 학교에 다니는 게 너무 부러운 나머지 그해 어머니에게도 알리지 않고 서울로 도망갔다.
고모가 학교를 보내주었지만 오빠가 고모에게 집요한 압력을 넣었다. 고모집을 나와 소리개라는 집에 들어갔다. 9명의 처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버지에 의해 팔려왔다고 했다. 15세인 그녀가 가장 어렸다. 이 여인들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 보니, 시모노세끼였다. 그들을 인솔한 군속이 열명의 처녀들을 넘긴 곳은 바로 조선인 부부가 운영하는 군 유곽이었다. 그들은 이들 처녀들과는 아무 관계없이 돈을 주고받았다.
이 여인은 일본말을 한다는 것 때문에 일본 군병원에 일하면서 봉급도 받았다. 일본 군의관이 그녀를 가엽게 여겨 조선으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그날 폭격을 맞아 허사가 됐다. 이 여인 역시 여성에 대한 가정 폭력으로 인해 유곽으로 떠밀린 게이스였다.
3) 이득남: 이 위안부는 1918년생이다. 그녀는 1939년부터 3년은 중국에서, 또 다른 3년은 수마트라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주정꾼이자 노름꾼으로 이유 없이 마구 때렸다. “집에 있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17세에 시집을 가라 했지만 그녀는 이를 팔려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웃 친구와 함께 봉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을 찾기 위해 기차를 타고 인천 방직공장으로 갔다. 그게 위안부로 가는 길이었다.
4) 김옥실: 이 위안부는 1926년 평양시내에서 10리 되는 촌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김은례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공부하려는 딸에게 가혹한 매질을 했다. 11세 때, 동네친구 하나가 한글도 가르쳐주고 노래도 배워준다는 데가 있다 해서 같이 가서 며칠 있다가 아버지에 들통이 났다.
“에미나이새끼가 글 배워서 어디에 쓰갔네, 연애편지질이나 하려구 그러나!” 매를 든 아버지가 무서워 할머니 뒤에 숨었지만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린다며 때렸다. 그 후 아버지가 보기 싫어 집을 나왔다.
하루는 아주머니들로부터 평양에서는 기생이 최고라는 말을 들었다. 고운 옷 입고, 고운 가마 타고 다닌다는 기생이 되고 싶어 기생집으로 가서 양녀가 됐다. 불과 일주일만에 아버지에 들켰다. “이 에미나이가 조상 망신, 동네 망신은 다 시키고 돌아다닌다”며 매를 맞고 집으로 압송돼 왔다.
다시 양말공장으로 뛰쳐 나갔다. 거기에서 3년, 담배공장에서 4년 일하다가 드디어 인신매매단에 걸려들었다.
5) 배족간: 이 위안부는 1922년생이다. 이 여인은 자살까지도 기도했을 정도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광목공장에서 일하게 해주겠다는 동네 구장의 거짓말에 속아 집을 나간 것이 곧 중국행이 되었다. 중국의 여러 위안소들을 떠돌았다. 1946년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냉담했다. 어머니가 임종할 때 딸을 찾았지만 그녀는 가지 않았다.
6) 송신도: 이 위안부는 1922년 생으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16세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수많은 잡직들을 전전하다가 좋은 직장 구해주겠다는 이웃의 꼬임에 빠져 중국으로 갔다가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위안부 생활을 했다. 일본인 병사가 결혼하자고 하여 일본으로 동행했지만, 그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버렸다.
나의 생각: 정대협의 거짓과 만행
이 6개의 사례들은 극히 일부의 것에 지나지 않지만 당시의 조선의 사회상을 잘 비추어준다. 이들을 비극적인 나락으로 내몬 것은 일본 순사가 아니라 그녀들을 낳아준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빠들이었다, 당시 사회는 개화의 바람을 타고 있었다. 어린 처녀들은 바깥 세상에 대한 동경과 가정에서의 폭력 사이에서 탈출을 선택했고, 그 탈출은 곧장 인신매매단으로의 진입을 의미했다.
이런 사정들을 놓고, “당시 조선 여인들은 모두 가정에 있었으며, 일본순사들이 가정으로 쳐들어 와서 처녀들을 강제로 끌어갔다. 사과를 하고 보상을 하라” 이렇게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심미자의 경우처럼 일본 순사가 교실 등에서 강제로 끌어간 경우들도 있다. 하지만 모두는 아니었다. 오히려 위 사회상을 보면 대부분의 위안부는 가정폭력과 무지로부터 탈출했다가 인신매매단에 걸려든 여식들이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위 6개의 케이스는 모두 정대협이 작성한 증언록에 있는 내용들이다. 모든 사정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대협은 위안부들을 정치적 목적으로 거리에 내돌린다. 정대협은 이런 식의 게임으로 대한민국의 명예를 허무는 일을 속히 중단해야 할 것이며, 위안부들을 여러 번 죽이는 만행을 중지해야 할 것이다.
문필기는 매주 수요일마다 대사관 앞에서 "내 청춘을 보상하라"고 시위를 하지만 정대협이 엮은 '증언록'에 의하면 그녀는 일본에 요구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윤미향은 문필기는 진짜 일본군 위안부라 하고, 진짜 일본군 위안부였던 심미자 회장은 가짜라며 증언록에 넣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방송에 나와 심미자를 가짜요 남의 돈을 가로챈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며 명예까지 훼손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심미자 회장이 진실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심미자는 윤미향의 사술적 행위를 방해하는 걸림돌이었다.
“윤미향, 나를 ‘가짜 위안부’라 매도” 故 심미자 할머니 일기장 파장(한국일보 2020.5.26.)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2005261167715942
"정대협 악당" 심미자 할머니, 정대협은 피해자 명단서 뺐다(중앙일보 2020.5.19.)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779939#home
이렇게 심미자 할머니를 가짜위안부라고 왕따시킨 존재는 윤미향과 이영훈의 스승 안병직이었다.
2022. 2. 1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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