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개와 지조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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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10-14 20:34 조회23,36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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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개와 지조에 대해
신하가 임금에 대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한 결 같이 충성하는 자세, 사랑하는 여인이 남편에게 지키는 정조 같은 순결함 같은 것을 절개라고 필자는 생각해 왔다. 여기에는 순수함도 있고 지속성도 있다.
어제는 저 사람이 좋다 하고 오늘은 이 사람이 좋다하면 변덕이고 변절이지 절개가 아닐 것이다. 어제는 이것이 옳다 하고 오늘은 저것이 옳다하면 세월에 아부하는 것이지 신념에 대한 절개가 아닐 것이다.
변덕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한다. 어제에 비친 그 사람의 모습과 오늘 내게 비친 그 사람이 다를 때, “내가 사람을 잘 못 보았구나!”하고 그 사람을 내칠 수 있다. 이는 탓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해관계에 따라 어제 좋아했던 그 사람을 내치는 것은 변절이다. 이는 아름다운 행위가 될 수 없다.
변절이라는 것은 사람에 대해서만 있는 게 아니라 신념에도 적용된다. 신념! 사람에게는 판단력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의 판단력에는 균형감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의 판단에는 균형감이 없다. 판단에 보편타당성이 없는 것이다. 판단력에 A급이다 B급이다 하는 등급이 있다. 그래서 군에서는 경험이 많고 계급이 높은 사람의 판단력을 더 존중하는 것이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계급이 즉 판단력의 질인 것이다.
필자는 판단을 과학적으로 즉 수학적 사고방식으로 하는 훈련을 쌓았다. 그것이 평균의 사람들보다는 판단력의 질을 조금은 높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교육을 받아도 영혼이 뒤틀리면(Biased) “무식똑똑이”보다 더 형편없는 판단을 한다.
일반 상식 세계에서는 많이 배우고 적게 배운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필자가 배운 것은 오직 전문 분야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다. 상식 세계에서는 오히려 일반 상식인이 필자의 선생님인 경우가 허다하다. 결론적으로 절개라는 것은 건전한 판단력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절개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오늘 와서 생각해 보니 필자에게는 절개의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회를 지배하는 조중동 언론들과 사회의 온갖 저명인사들이라는 사람들이 일종의 쏠림현상으로 황장엽을 영웅시 했다. 그런 쏠림 현상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뭇 사람들로부터 돈키호테라는 비난을 받을 줄 알면서도 필자의 소신을 공개적으로 표현했다.
표현은 시간의 함수다. 시간이 지난 표현은 의미가 없다. 필자는 국가가 그에게 현충원의 대지를 공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대지 값이 비싸서가 아니다. 그 대지의 의미가 너무나 크게 때문이다. Sentimental Value!
필자는 안다. 필자가 수구꼴통으로 불리고 또라이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그러나 필자는 이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인생은 숨 가쁜 단거리 경쟁이 아니라 마라톤 경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필자는 인생을 늘 그림이라고 생각해 왔다. 지금도 아름다움 그림을 그려야 내가 절대자 앞에 내놓을 그림이 아름답지 않겠는가? “무엇이 내게 이로우냐?” 이렇게 살았다면 나는 부자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젊은 시절의 독서 덕으로 “무엇이 아름다우냐?” “무엇이 정의냐?”에 따라 인생을 살아온 것 같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필자는 그래서 오늘도 인심을 많이 잃을 줄 알면서도 필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공개적으로 표현했다. 그게 지조라는 것이라면 필자는 오늘날까지 인간적 의리에보다는 신념에 지조를 바쳐온 사람일 것이다. 신념은 하늘의 정도다. 돌쇠의 의리는 지상에 존재하는 인간적 연분일 것이다. 신념을 함께 하는 사람들끼리의 의리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의리, 쇼비니즘에 속하는 의리는 돌쇠의 의리요 빗나간 의리일 것이다.
필자는 골수꼴통으로 통한다. 필자는 이를 필자에게 좌익들이 부여해준 ‘절개’의 사나이라는 로고로 수용하고 싶다. 좌익들이 부여한 이 ‘절개의 사나이’를 영광스럽게 접수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우익 꼴통들에게 전하고 싶다. 더러의 우익들은 ‘신념의 싸움’, ‘정의의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좌우 패사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되돌아보라고! 정의는 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좌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현상을 보면 대체적으로 정의는 우에 많고, 좌에는 악이 많다.
그러나 악은 우에도 있다. 우에도 "무엇이 내게 이로우냐"에 따라 이익을 추구하는 인생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우리 모두는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아름다우냐" 에 따라 인생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게 떳떳한 것이고, 그로 인해 발생한 가난은 무지개보다 더 아름답고 꽃잎에 맺힌 이슬보다 더 행복할 것이다.
절대자는 이렇게 살아서 가난해진 사람을 먼저 데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삶이 아름답다며 세상에 더 머물게 할 것이다. 아마도!
2010.10.1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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