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표절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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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10-19 11:57 조회22,96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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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표절 성향
천하 황석영이 표절을 해서야!
황석영이 최근에 쓴 소설 ‘강남몽’은 조선일보를 선두로 하여 수많은 매체들에서 띄워주었고, 교보 등 대현 책방들에서는 사인회가 여러 차례 열렸다 한다. 북한 문제에 조예가 깊은 양동안 교수는 ‘강남몽’이 반국가-친북 서적‘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런데 이 책에 표절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신동아 조성식 기자의 책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라는 책을 표절했다는 것이다.
사실 황석영이 1985년에 쓴 5.18역사책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이라는 책도 필자가 보기에는 표절 품이었다. 북한 노동당 출판사들은 1982년 및 1985년에 두 개의 5.18역사책을 썼다. 그런데 1985년의 황석영 책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은 북한의 조국통일사가 1982년에 내놓은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이라는 책과 거의 일치한다. 허다 못해 5월 20일 가루수를 들이받고 멈추었던 대형 버스 ‘광진교통 전남 5아 3706호’라는 표현까지도 일치한다. 이 차량번호는 우리 기록에는 없다.
아래는 10월 19일자 동아일보 사설이다.
[동아사설]‘강남몽 표절 시비’ 황석영 씨는 답해야
서울 강남을 주제로 한 황석영 씨의 소설 ‘강남몽’이 표절 논란을 낳고 있다. 소설에 나오는 조직폭력배 관련 에피소드가 조성식 신동아 기자의 책 ‘대한민국 주먹을 말하다’에 나오는 조직폭력배의 증언 내용과 비슷하다고 신동아 11월호가 보도했다. 조 기자의 책은 2009년 1월 출간됐고 ‘강남몽’은 올해 6월 나왔다. 1년 5개월 시차가 있다. ‘대한민국…’은 수십 명의 조폭을 인터뷰하고 이들의 육성을 통해 주먹 세계를 파헤친 논픽션이다.
신동아에 따르면 ‘대한민국…’에 등장하는 ‘싸움의 달인’ 조창조 씨를 인터뷰한 사람은 조 기자가 유일하다. 조 씨는 ‘대한민국…’에서 “나는 여러 가지 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 약점을 다 간파하고 그것을 공략하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권투하는 놈은 유도로, 유도하는 놈은 씨름으로 무너뜨렸지요”라고 술회했다. ‘강남몽’에서 작가는 조창호라는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는 여러 가지 운동을 했기 때문에 각 부분의 약점을 잘 알고 있어서 상대방이 권투하는 자세로 나오면 유도 식으로, 유도하는 놈은 씨름이나 태권도로 공략했다’고 서술했다. 황 씨가 ‘대한민국…’의 내용을 옮겨 썼다는 의심을 받을 만하다.
‘대한민국…’은 조직폭력배 김태촌 씨를 인터뷰해 속칭 OB파와의 다툼에 관한 일화를 소개했다. ‘OB파와의 전쟁은 이동재 씨가 이석○ 씨를 찌른 동생들을 김태촌 씨 측에 보내 야구방망이로 맞게 함으로써 종결됐다’는 내용이다. ‘강남몽’은 사람 이름을 바꿔 ‘강은촌 부하들이 그들을 야구방망이로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팬 뒤 말썽은 종결됐다’고 쓰고 있다. 신동아는 두 책의 이처럼 유사한 내용을 10여 대목 소개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2008년 논문 표절과 관련해 발표한 가이드라인은 여섯 단어 이상의 연쇄 표현이 일치하는 경우와 다른 사람의 창작물을 자신의 것처럼 이용하는 경우 등을 표절로 규정하고 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강남몽’은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어렵고 최소한 저작권 침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법적 논란을 떠나 당당하게 출처를 소명하는 것이 양식 있는 작가의 도리다.
그럼에도 황 씨는 신동아 측의 의견 요청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5.18 표절 내용
(1) 청년의 두 손을 묶어 자동차에 끌고 다니다 죽였다는 내용
황석영 책: “대학생 하나를 잡아 발가벗긴 채 두 손을 묶어서 트럭 뒤에다 달고 달렸는데 도로에 질질 끌려 다니다가 절명한 광경도 얘기가 되었다.”(증44, 80쪽 5-7줄)
북한 책:“금남로 2가에서는 체포한 청년의 손을 묶어 자동차 꽁무니에 달아내고 질질 끌고 다니다 나중에는 자동차로 깔아 죽였다“(증38 북한책 ‘광주의 분노’ 20쪽 하 4-8쪽)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에도 위와 똑같은 장면이 들어 있습니다.
(2) 화염방사기에 대한 표현(주: 검찰기록에 계엄군은 화염방사기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확정돼 있음)
황석영 책: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로 20여 미터나 나가는 불길을 뿜어댔으며, 시위대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불에 타 죽었다.”(증44, 81쪽 10-12줄). “ 23일 오전 11시에는 광주세무서 지하실에 시체가 있다는 시민들의 신고를 받고 시민군 4명이 현장에 가서 직접 확인했는데, 시체는 유방과 음부가 도려내어져 있었고, 얼굴이 대검으로 난자당한 여고생이었다. . . 화염방사기로 그을린 시체 여러 구가 발견되기도 했다.”(증44, 155쪽 하2중-·56쪽 5줄)
북한 책: “악귀 같은 교형리(주:공수대)들은 녀학생들을 그들의 부모가 보는 가운데 발가벗기고 젖가슴을 도려낸 다음 화염방사기로 불태워 죽였다. 무차별 하갈의 잔학성은 어린이나 늙은이, 임산부들에 대한 만행에서 더욱 몸서리치게 드러났는데 놈들은 광주천 기슭에 쓰러진 어머니의 시체를 붙잡고 우는 4살짜리 어린이에게도 달려들어 ‘폭도의 종자를 멸종시키라’고 하면서 총검으로 참살하고 살인만행에 항거하였다 하여 70대의 할아버지도 하수구에 밀어 넣어 죽였고,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창자가 튀어나온 배에서 태아를 꺼내 던지는 귀축 같은 만행도 서슴치 않았다.”(증31, 590쪽 하4줄-591쪽 3줄). “광주시의 도청 지하실 한 곳에만도 얼굴을 알 수 없도록 화염방사기에 그슬리고 찢긴 475구의 시체가 쌓여져 있은 사실만 놓고 보아도 놈들의 살육만행이 . ”(증31, 591쪽 14-16줄)
(3) “총, 총이 있어야 한다”는 표현
황석영 책: “저놈들이 발포를 했다. 총, 총이 있어야 한다. 우리도 총이 있어야 한다”(증44, 101쪽 12줄)
북한 책: “총, 총이 있어야 한다!”(증38, 32쪽 상단 부제목) “동명로는 삽시간에 피와 시체로 뒤덮였다. 총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희생을 당한 것이다. 누군가가 군중들 속에서 ”총! 총!“ 하고 피타게 절규하였다. 총! 총이 없었기 때문에 군중들은 놈들이 순진한 여학생의 옷을 벗겨놓고 갖은 희롱을 다하며 심지어 젖가슴까지 도려내어 죽이고, 배를 갈라 태를 치는 것을 보고도 저지시키지 못하였다,. . .5월 21일, 광주고등학교와 숭일고등학교 학생들이 ‘학도호국단’의 무기고를 들이치고 많은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것은 광주인민봉기 과정에 봉기군중이 처음으로 벌린 무기탈취 투쟁이었다.”(증38. 34쪽)
황석영의 책이나 북한의 책이나 ‘총이 있어야 한다’는 절규가 표현돼 있습니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발포가 있은 후 ‘우리 시민도 총을 가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비로소 느꼈고, 그 필요성에 의해 무기고를 털었다는 요지로 무기고 탈취의 명분과 동기를 정당화한 것입니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무기고는 무기를 갖고 싶다 해서 즉시 위치가 폭로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광주시민들이 무기고를 털어 계엄군에게 대항하였다는 사실은 광주시위를 민주화로 규정하는데 엄청난 장애요소입니다. 5.18사람들은 광주시위를 탄압에 대한 반작용 즉 독재 군사정권에 대한 민중항쟁으로 부릅니다. 항쟁이 항쟁으로서의 정당성을 가지려면 항쟁이 사전에 기획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먼저 계엄군의 탄압이 있은 후에 이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저항을 시작해야만 독재에 대한 항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기고 탈취 사실이 이런 논리에 제동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44개 무기고를 일시에 탈취했다는 사실은 이들 논리에 제동을 거는 가장 큰 아킬레스근인 것입니다.
(4) “광전교통 전남 5아 3706”
황석영 책: “투석이 날아가는 중에 버스(광전교통 전남 5아 3706)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켜고”(증44,89쪽 3-4줄)
북한 책: ““짙은 가스 연기속에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던 버스1대(광전교통소속 전남5에이3706호)가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추어섰을 때 계엄군 100명이 들이닥치자 차안에 있던 10명의 청년들이 결사적으로. . ”(증31, 576하5-8줄).
(5) 전남대 부속병원 옥상 기관총 설치에 대한 표현
황석영 책: “시민군 특공대 11명이 LMG 기관총 2정을 메고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으로 올라갔던 것이다.”(증44. 125쪽 하2줄-126쪽 1줄)
북한 책: “봉기군은 시 중심부에 있는 전남대학교부속병원 옥상에 경기관총을 걸어놓고 계엄군과의 총격전을 벌렸다.”(증31, 581쪽 하8-10줄)
(6) 시위대의 질서관리를 칭찬하는 표현
황석영 책: “은행이나 신용금고 같은 금융기관에 대한 사고는 단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시민군들에 의해 시민에 일어난 폭력사건은 전혀 없었고, 평상시 정부의 통제 아래 있을 때보다도 범죄율이 훨씬 낮았다.”(증44, 184쪽 하2줄-185쪽 2줄)
북한 책: “민주주의적 자치하의 광주에서는 은행이나 기타 공공기관에 보관된 재산에 대하여 누구하나 손대는 사람이 없었으며, 닥쳐온 암흑한 생활상 시련도 유무상통의 호상협조로 타개해 나갔으며 . .”(증31, 587쪽 9-12줄)
하지만 위 황석영과 북한의 표현은 수사기록과는 정반대입니다. 참고로 이에 대해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에는 이렇게 표현돼 있습니다.
“한편 광주시내 무장 시위대들은 거리거리에 차량을 질주하며 총을 쏘아가면서 공포분위기를 연출했고, 가가호호 방문하며 장례비에 쓴다며 돈을 뜯어냈고, 여염집에 들어가 가족단위로 집단살인을 저질렀고, 평소 앙심을 갖고 있던 집에 들어가 가족을 몰살시켰고, 금품을 훔치고 강간을 자행하는 등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 시민들은 유언비어에 속아 거리로 나갔지만 이렇게 무법천지로 변한 다음에야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도를 다스리지 못하는 정부에 대해 불만을 토하기도 하고, 계엄군을 다시 보내 달라 애원하기도 했다.”
(7) 광주의 반골 정신에 대한 표현
황석영 책: “전라도에는 동학농민전쟁에서 의병으로 또한 광주학생반제투쟁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민중운동의 전통과 맥락이 혈연적으로 실존하고 있었다.. . 박정희 독재기간 내내 이루어진 매판정책 추진과 불균등개발로 인하여 “호남푸대접”이라는 광범한 대중적 불만의식이 만연했다. . . 가난하고 불우한 집에서 법관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내 고장에서도 인물이 하나 나와야 한다는 민중적 열망이 간절하였던 차에 전남의 대중적 영웅인 김대중이 대통령 출마에서 좌절당하고 고난을 받은 데 대한 반작용이 있었다.“ (증44, 19쪽 7줄-20쪽 하단)
북한 책: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 인민들은 원래 오래 전부터 억압자들과 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용감하게 투쟁하여 온 력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일찍이 봉건통치배들의 야합과 외세의 침략에 반대하여 감오농민전쟁의 봉화를 추켜들었으며.. 이승만 통치 때에는 독재정치를 반대하는 려수, 순천 군인폭동의 불길을 지펴 올려 민족의 력사를 빛나게 장식하였다.“ “(증31, 602쪽 하3중-603쪽 5줄).“예로부터 광주 인민들은 압제자를 반대하는 싸움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싸웠고, . .부패 무능한 봉건왕조를 반대하여 궐기하였던 갑오농민전쟁으로부터 1929년의 광주학생사건, 1946년의 화순탕광 로동자들의 폭동, 1948년의 려수, 순천 군인폭동에 이르기까지 . .”(증38, 21쪽 하5줄-22쪽 2줄)
(8) 해방구라는 표현
황석영 책: “그것은 해방이었다 . . 시민들 자신의 도시 광주는 모든 좌절, 압박, 부자유, 반민주, 분단 등등의 쇠사슬과 질곡으로부터 주체적으로 놓여난 해방지구가 되었다.”(증44, 132쪽 5-10줄).
북한 책: “영웅적 광주인민들의 봉기는 바로 자주성을 위한 성스러운 투쟁의 한 고리였다.”(증38. 3쪽 하3-4) “민주정권의 싹 <광주민주국>을 일떠세울 수 있게 하였다.”(증38’ 4쪽 11-12줄)
(9) 통일의 노래에 대한 표현
황석영 책: “날이(주:5월 26일)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여학생이 청아한 목소리로 광장의 모퉁이에서 ‘우리의 소원이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 . 노래는 군중등 사이로 차츰차츰 퍼져 나갔다. 드디어 광장 전체에 노래가 가득했다. . .통일이여 오라” 5.18의 주제가 통일이라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증44, 205쪽)
북한 책: “광주의 봉기자들이 쓰러진 동료들의 시체를 넘고 선혈로 물든 투쟁의 거리를 누비며 몸과 대오가 그대로 육탄이 되고 불덩이가 되어 원쑤들과 결사전을 벌리던 그 나날에 그들이 심장으로부터 부른 노래는 통일의 노래였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 . . 통일이여 오라.’ 광주인민봉기자들이 투쟁의 광장에서 부른 이 노래는 그대로 광주인민봉기의 숭고한 정신이고 위력한 추동력이었다. . .항쟁의 광장에서 꽃다운 청춘을 바친 광주의 이름 없는 한 녀학생에 대한 가슴 뜨거운 이야기가 그것을 잘 말하여준다. 그는 항쟁의 거리를 누벼가는 시위대오에 서서 동료들과 함께 통일의 노래를 부르며 전진하던 중 괴뢰도청 앞 광장의 격전장에서 불행하게도 흉탄을 맞고 피 흘리며 쓰러졌다.” ”(증31, 597-598쪽)
(10) 한국군 모략에 대한 표현
황석영의 책: “한손에는 대검을 또 다른 손에는 살상용 곤봉을 들고 눈에는 충혈이 되어 닥치는 대로 때리고 찔렀다.”(증44, 42쪽)
“시위학생을 잡으면 먼저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쓰러뜨리고서는 서너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군화발로 머리통을 으깨버리고 등과 척추를 짓이겼으며 곤봉으로 쳐서 피곤죽을 만들었다. 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사망자의 사망진단은 각기 특이한 양상을 보인다. 최초에는 타박상, 그 다음은 자상, 그리고 총상의 순서였던 것이다. 공수대원들은 피트투성이가 된 희생자가 축 늘어지면 멱살을 잡아 한 손으로 쳐들러 걸레를 던지듯 트럭 위로 던져 올렸다.”(증44, 47-48쪽) “제7공수특전단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사병처럼 육성되었으며, 시내에 최초로 투입 될 때부터 살인 허가를 받은 것처럼 잔인, 냉혹하였다. 이들은 부마항쟁 때에도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던 부대였다. ”(증44, 48쪽)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색이 보이면 그들은 가차 없이 대검으로 배를 쑤셨다.” (증44, 49쪽)
“어떤 경우는 터미널 뒤편이 막다른 골목까지 달아난 학생이 드디어 잡히게 되자 자지러지게 무릎을 꿇으며 살려달라고 연신 빌었다. 대문에 나와 내려 보던 할아버지가 너무도 애처로와 몸으로 가리면서 봐달라고 사정하자 공수대원은 “비켜 이새끼! 하면서 할아버지를 곤봉으로 내려쳤다. 할아버지는 피를 뒤집어쓰면 고꾸라졌고 쫓겨던 학생은 돌을 집어 들었으나 공수대원은 가차 없이 곤봉으로 후려친 뒤에 대검으로 등을 쑤시고는 다리를 잡아 질질 끌고 길거리로 나갔다.” (증44, 49쪽 하단)
“광주일고 부근에서는 길 가던 여학생을 아무 이유 없이 붙잡아 머리카락을 잡아 끌어내려 구둣발로 올려차고 상의와 브래지어를 찢어 버리고는 여러 시민들이 보는데서 ‘이 씨팔년이 데모를 해? 어디 죽어봐라’하면서 계속 피투성이가 되어 실신할 때까지 주먹과 발길질로 난타했다.” (증44, 50쪽)
“공수대원 7-8명이 반항하는 청년에게 달려들어 돌아가면서 난타한 후에 ‘광주 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려야 한다.’ 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안내양이 약간 반항의 기색을 보이자 ‘네 년은 뭐냐’ 면서 곤봉으로 후려갈겼고 안내양은 차 아래로 실신하여 굴러 떨어졌다.” (증44, 50쪽)
“공수대원들은 얼굴이 붉어져 있었고 눈은 술기운과 살기로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시민군에 잡힌 몇 명의 공수대원의 진술에 의하면 이들은 출동하기 전에 독한 술에다 환각제를 타서 마신 상태였으며, 수통에는 빼갈을 담고 있었다.” (증44, 50쪽)
“여자라도 몇 명이 붙들려오면 여럿이서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북북 찢어발기고는 아랫배나 유방을 구둣발로 차고 짓뭉개고 또는 머리카락을 휘어잡아 머리를 담벽에다 쿵쿵 소리가 나도록 짓찍었다. 손에 피가 묻으면 웃으면서 그 몸에다 슥 쓱 닦는 식이었다. 그런 식으로 살육을 즐기다가 군용차량이 오면 걸레처럼 희생자들을 던져 버렸다. . .공수부대는 그들의 작점명령이 그러했듯 ‘화려한 휴가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증44, 59쪽)
“수창초등학교 앞에서는 시위 군중 속에서 잡힌 청년을 발가벗기고 전봇대에 거꾸로 매달아놓고는, 여러 시민들이 보는 가운데서 공수대원 여럿이서 곤봉으로 난타질 했다. 처음에는 비명이 들리더니 피곤죽이 되어 버린 청년은 출 늘어져 버렸다.(증44, 60쪽)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로 20여 미터나 나가는 불길을 뿜어댔으며, 시위대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불에 타 죽었다.”(증44, 81쪽)
“5월 21일, 금남로에서는 도청부근 상공에 군용 헬리콥터가 나타나더니 갑자기 고도를 낮추며 MBC가 있는 제봉호 근처에서 기총소사를 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계속 희생되었다.” (118쪽)
“공수부대는 시의 변두리로 2,3명씩 조를 짜서 침입하곤 했다. 그들은 고립된 시민군을 저격하기도 하고 민가에 침입하여 민간인을 살해하고 나서 시민군들이 무질서한 폭도로 변해가고 있다는 역선전을 통해 시민과 시민군 사이를 이간시키는 공작을 벌였다.”(증44, 138쪽)
“산수동 일대에서는 계엄군이 청년 5명을 사살하고, 트럭에다 집어던지자, 위에 있던 자가 흰 페인트를 가지고 신원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사망자의 얼굴에 흰칠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도청 지하실이나 군부대로 시체를 빼돌리거나 다급할 때에는 아무 데라도 우선 시민들의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 버리거나 묻었다. 도청 지하실에는 시민군이 들어갔을 때 이미 석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증44, 151쪽)
“23일 오전 11시에는 광주세무서 지하실에 시체가 있다는 시민들의 신고를 받고 시민군 4명이 현장에 가서 직접 확인했는데, 시체는 유방과 음부가 도려내어져 있었고, 얼굴이 대검으로 난자당한 여고생이었다. . . 화염방사기로 그을린 시체 여러 구가 발견되기도 했다.”(증44, 156쪽)
“23일 오후 2시경 백군동 지역을 방어하던 시민군은 무장 헬리콥터가 상공에서 시내의 동태를 정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화망을 구성하여 지상에서 집중적인 대공사격을 가하여 헬기를 격추시켰다. 헬기에 타고 있던 중령 1명과 조종사 모두 3명이 사망했다. 저녁 무렵에는 시민군 4명이 군 찝차를 몰고 화순 너릿재고개를 넘어가던 중에 헬리콥터의 기총소사를 받고 전원이 몰살당했다.”(증44, 156쪽)
“시위 학생이 북동 우체국 옆 골목의 마지막 집으로 뛰어들어 다급한 김에 안방 장롱 속으로 숨었다. 공수대원이 곧 뒤쫓아와 혼자 집을 보는 할머니에게 방금 도망 온 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할머니가 전혀 모른다고 대답하자마자 “이 씨팔년이 거짓말을 해? 맛 좀 봐야겠구만” 하면서 할머니를 곤봉으로 후려쳐 실신시키고는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 마침내 안방으로 군화를 신은 채로 들어가서 장롱 속의 청년을 끌고 나와 역시 곤봉으로 안면과 머리를 짓이기고 끌고 갔다.”(증44, 49하단-50쪽 상단)
북한 책: “항쟁용사들에게 돌과 기와장을 날라다주었다고 하여 어린 고등학교 녀학생을 칼탕쳐 죽이고 빵과 물을 보장해주었다고 하여 할머니를 군견을 풀어놓아 물어뜯게 하고 부상자들에게 피를 뽑아주었다고 하여 폭도를 도와준 너도 폭도라고 하면서 불태워 죽이고 굴복하지 않는다고 하여 두 눈 알을 뽑고 심장까지 도려내어 죽이는 잔인한 학살참극이 전두환, 로태우 괴뢰도당에 의하여 가는 곳마다에서 헤아릴 수 없이 벌어졌다.” (증30 40쪽 좌하단). 이하 생략
2010.10.19. 지만원
http://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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