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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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07-15 20:32 조회22,77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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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문제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대부분일 것이고, 문제가 많은 것은 ‘정의’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대부분일 것이다.
정의(Justice)! 정의란 무엇인가? 최근 뉴스를 보니 미국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나와 베스트 1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베스트가 된 것은 이 나라에 정의가 사라졌기 때문에 정의를 갈구하는 독자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라 한다.
필자는 필자보다 연세가 많으시고, 경륜이 훌륭하신 산보동료로부터 ‘이 나라의 문제는 정의가 실종돼서 나타난 문제이니만큼 정의감을 북돋을 수 있는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다. 독일의 피히테가 쓴 ”독일국민에게 고함“에 버금가는 글을 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요구는 필자를 액면 이상으로 보신 그 어른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 요구에 대해 늘 생각한다. “언젠가는 써야지! 노력이라도 해야지!”
정의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정의’를 절대적인 개념으로 생각한다. Absolute, Static,(절대적, 정적) 그러나 필자는 ‘정의’를 Relative, Dynamic(상대적, 동적)인 개념으로 생각한다.
“믿거나 말거나”(Believe or Not) 필자는 사관학교 1학년 이후 인생을 ‘그림 그리기’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인생을 출세가 아니라 아름답게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가꾸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물론 독서 덕분이다. 이 세상에 가장 훌륭한 스승은 독서에 있다. 같은 책을 읽어도 어떤 사람은 거기에서 스승을 찾아내지만, 어떤 사람은 거기에서 스승을 찾지 못하고 한없이 헤맨다. “혹시 저 책에는 스승이 있을까?”
정의! 이 세상에서 정의를 실체로 본 사람은 없다. 정의는 마음과 영혼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과 영혼은 ‘물리적 실체’가 없는 존재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확실한 실체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나만이 존재하는 공간에 1억원을 실수로 놓고 갔다하자. 이 돈을 내 가방에 넣고 가면 참으로 신나는 일이다. 이익의 극대화,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사회덕목인 세상에서 “Why Not?" 그냥 가방에 넣고 가면 그만인 것이다. 뒷덜미를 잡힐 염려도 없다.
종교인들이라 해서 모두다 이 1억이라는 유혹을 물리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유혹을 아주 단호하게 물리칠 수 있는 종교 이상의 철학이 있다. “나는 인생 멋쟁이!” “멋쟁이는 절대자 앞에서 당당해 지는 거야!”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그 돈을 챙길 수 없다. “옳은 일을 위해 큰돈을 기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내가 이 돈을 가지면 나는 얼마나 초라한 인간이 되는 것인가?”종교의 힘이 됐든, 멋쟁이이기를 추구하는 개인적인 철학이 됐든 이 1억원을 주인에게 찾아주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 사회는 살만한 ‘정의의 사회’인 것이다. 이처럼 정의에는 분명 실체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경제적 동물이다. 필자는 이런 현상이 정의는 아니지만 뒤집을 수 없는 현실이라고 인정한다. 기업인에게 물어보자. 이윤극대화가 최고의 목적이요 사회적 덕목(Virtue)이라고 말할 것이다. 개인들에게 물어보자. 합법적 테두리 내에서 개인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당한 덕목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정당한 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인식들이 알고 보면 정의를 파괴하는 악, 암적 존재인 것이다. 이런 인식이 깔려 있는 한 정의는 가속적으로 파괴될 것이다.
가장 풍부한 정의는 품질과 효율을 숭상하고, 인생행로를 조각품처럼 다듬는 과정에서 샘솟을 것이다. 정의는 기준으로만 존재하는 이분법적 기준인가? 아니다. 옹달샘에서 뿜어나는 신선함이 곧 정의인 것이다. 정의는 어느 행위를 흑백으로 가르기 위한 딱딱한 기준이 아니라 옹달샘에서 한 없이 동적으로 보글보글 샘솟는 맑은 물인 것이다.
‘멋’으로 해설될 수 없는 정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딱딱한 정의는 인체에 흡수될 수 없는 정의이고 그래서 죽은 정의인 것이다.‘죽어있지 않은 정의’‘살아있는 정의’는 언제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예술의 정의다.
“황야의 무법자!”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 무법자가 필자에게 정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 무법자에서 필자가 발견한 정의가 과연 정의였을까? 그 무법자에게는 ‘멋’이 있었다. 그가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 기득권에 아부하는 코리타분한 기득권 인간들의 해석과 달랐다. 그가 설정한 정의는 그 사회가 설정한 정의와 달랐다.
그러면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바라는 정의, 현실적인 정의는 딱딱한 성서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양심에 있다. 그런데 양심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은 '방치한 야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꾸어지고 절제되어진 야생'에 있다. 이처럼 아름다운 양심에도 차이가 있다. 아름다운 양심은 어디에 있는가? 거친 야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꾸어진 야생에 있다. 독서와 사색을 통해 길러진 양심과 그렇지 못한 원시적 양심과에는 천지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정의는 사람들의 정의감으로 실현된다. 그런데 세상에는 두 가지 정의감이 있다. 하나는 가꾸어진 정의감이고 다른 하나는 덜 가꾸어진 정의감이다. 대한민국이 선진국들에 비해 정의감을 상실하게 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독서와 사색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정의에도 질적인 계급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의를 판단하는 법학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면 고도의 정의는 지식사회, 전문사회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그럴 수 있다. 그러면 서민사회에는 중저 수준의 정의만 존재할까? 그럴 수 있다. 왜냐하면 판단력에 따라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참으로 복잡한 것이 정의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정의의 문제는 무엇일까? 많이 배운 사람이든 덜 배운 사람이든 모두가 정의를 추구한다면 그 사회는 날로 발전하는 정의의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많이 배운 사람이든 덜 배운 사람이든 모두가 "무엇이 내게 이로운가"를 위해 세상을 산다면 그 사회는 '정의가 실종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제는 바로 후자의 문제인 것이다.
2010.7.15.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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