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솔로몬 앞에 선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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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07-10 15:00 조회23,43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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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솔로몬 앞에 선 5.18)
북한이 남한에 심어놓은 대남공작 인프라의 힘, 얼마나 강한가?
해방 후의 우리나라 역사는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과 대남공작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의 감격이 채 사라지지도 않았던 1946년 10월 1일, 남노당 경북도당 위원장 이석(李錫)이 대구폭동사건을 일으켜 대구시 전체의 경찰관들과 경찰서를 쑥대밭으로 만듦으로써 대구를 치안부재의 상태로 몰고 갔다. 해방 후 전라남도의 부속도서로 등재돼 있던 제주도는‘남노당 전남도당’지휘 하에 있었다. 전체 인구의 80%가 좌익으로 채워져 있었고, 도읍면장 모두를 인민투쟁위원회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지금은 평양 영웅묘지에 묻혀 있는 김달삼 등이 1948년 4월 3일을 기해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방해하기 위한 폭동을 일으켜 군경가족의 각을 떼고 얼굴을 짓뭉개고 임산부의 배를 가르는 등 공산당 특유의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폭동은 1953년 1월 29일 한라산 공비가 완전 토벌될 때까지 무려 5년 2개월 동안이나 지속됐고, 28,000명 정도의 사망자를 내는 등 제주도민의 10%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죽거나 다치게 했다. 이어서 1948년 10월 19일에는 여수 순천에 있던 제14연대를 장악한 빨치산들이 제주도 공비토벌작전을 방해함과 동시에 해방 2개월을 맞은 신생 공화국을 전복하기 위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남과 북으로부터 협공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승만 정부는 전군적으로 숙군작업을 시작했다. 1948년 9월부터 육군 정보국 내에 특별 수사과를 설치하여 1949년 7월말까지 4,749 명에 대하여 총살, 유기형, 파면조치를 당행했다. 폭동에 가담했던 좌익 군인들이 산 속으로 도망했고,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1949년 5월, 2개 대대 규모를 만들어 월북까지 했다. 반란군을 토벌할 임무를 받았던 토벌사령관 송호성은 6.25가 발생하자 서울에서 인민군으로 전신하여 인민군 소장이 되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우군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1948년 12월 1일부터 시행하면서 6.25직전에 이르기까지 4회에 걸쳐 대대적인 숙군작업을 실시하여 군내의 좌익들을 참으로 많이 청소했지만, 6.25가 발발하자 한국군은 간첩이 지휘했다는 역력한 흔적들이 매우 많다.
일선부대로부터 오는 수많은 적정보고와 포로심문으로부터 얻은 남침정보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했고, 6.25발발 불과 2주 전인 6월 10일을 기해 중앙 요직을 포함한 전후방 사단장과 연대장 급의 대대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함으로써 부하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전쟁을 치르게 했다. 6.13-6.20일에 걸쳐 전후방부대를 모두 이동배치하여 지휘관들이 미처 적정과 지형을 파악할 수 없게 했고, 그 동안 유지해오던 비상경계령을 6.25 발발 4시간 전에 해제함과 동시에 50%의 장병에 휴가를 주어 내보냈다. 6.25전날에는 육군장교클럽에서 밤새내 댄스-양주 파티를 열어 전후방으로부터 상경한 고급장교들을 모두 취하게 만들었고, 국군이 퇴각하고 있는데도 방송은 국군이 북진중이라고 허위방송을 함으로써 수많은 군과 애국자들을 희생시켰다. 이 몇 개만 보더라도 6.25직전의 군은 간첩이 지휘했다는 것을 능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간첩! 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
마귀도 상상할 수 없을 기상천외한 북한의 만행들
뜻하지 않게 미국을 선두로 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비록 전쟁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김일성은 이 간첩들이 이룩한 혁혁한 성과들에 대한 희망과 미련을 버리지 못해 집요하게 폭동공작과 테러를 자행하면서 적화통일을 위한 ‘결정적 시기’(Decisive Moment)를 만들어 내려 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은 1968년 1월21일의 김신조 사건이다. 어떻게 감히 살인무기로 훈련된 31명의 특수군을 보내 청와대에 있는 박대통령의 목을 따오라 할 수 있는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에 실패한 김일성은 집요하게도 그해 11월 울진 삼척에 120명이라는 엄청난 특수군(124군부대)을 또 다시 보내 남녀노소 대상을 가리지 않고 람보식으로 인명을 살상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박대통령을 믿다가는 다 죽는다는 정서를 불러일으키려 했다. 이어서 1974년에는 문세광을 저격수로 보내 박대통령을 살해하려다가 실수로 육여사를 저격했고, 경복궁 파티에서 원격폭탄을 터트려 박대통령을 포함한 정부 요인 모두를 살해하려다 무위로 끝나기도 했다.
북한의 만행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했다. 남한이 1988년의 올림픽게임을 유치하자, 이에 배가 아픈 김일성은 1987년 11월 KAL858기를 공중에서 폭파시켜 115명의 인명을 가루로 만들었다. 중동 모래밭에 가서 달러를 벌겠다며 오랜 동안 가족과 떨어져 고생하다가 광대뼈만 앙상하게 남아가지고 가족의 품을 향해 돌아오는 우리 근로자들이 공중에서 분해된 것이다. 마귀도 감히 생각하기 어려울 이런 만행을 어찌 감히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인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 멀리에 있는 남의 나라 미얀마에까지 가서 우리나라 대통령과 정부요인들을 한 번에 폭살시킬 생각을 다 했는지? 평화로운 우리 바다에 숨어들어와 천안함을 폭침시켜 무고한 어린 생명들을 수장시킬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할수록 소름 끼치는 일이다. 부시 전 대통령이 2002년 초에 명명했듯이 북한은 문명권 밖에서 악(Evil)밖에 수행할 줄 모르도록 훈련된 특이인종들인 것이다.
크고 작은 소요와 폭력 시위의 배후에는 반드시 북한이 있다
북한은 어째서 악을 수행하기 위한 악의 집단으로 훈련돼 왔는가? 남한이 누리는 부귀가 배 아프고, 탐이 나고, 그 부귀를 빼앗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거지 신세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남한의 부귀를 빼앗기 위해 북한은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는가? 남한에 무정부 상태라는 ‘결정적인 시기’를 만들어 놓고 그 순간에 남침을 하겠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남한에 대규모 간첩부대를 심어놓고, 해마다 규모를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더 많은 인간들을 살인무기로 훈련시켜 남파하고 있는 것이다. 남한에는 간첩에 포섭된 자와 동조된 자 그리고 386주사파와 같은 자생 빨치산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북한은 이들을 활용하여 끝없이 폭동을 일으키고, 테러를 자행해 왔다. 전 거물간첩 김용규가 우리국민에 애타게 경고하는 말이 있다. 남한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모든 소요사태, 폭력시위는 북한이 기획-연출한 것이니, 이를 명심하라는 것이다.
집요한 북한이 10.26이후의 권력 공백기를 이용하지 않았을 리 없어
박정희를 그렇게도 죽이려 했던 김일성, 박정희가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심복이라는 중앙정부부장 김재규로부터 학살을 당했으니 얼마나 좋아 했겠는가? 이 10.26사건으로 인해 야기된 급격한 권력의 공백기는 김일성에게 신이 내린 절호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남한에 엄청난 적화통일 인프라를 깔아놓고 있는 김일성, 한편으로는 국민의 숭앙을 받던 박정희에 질투와 열등감을 느끼고, 다른 한편으로는 박정희가 있는 한 통일의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을 김일성, 조그만 사회 불만이라도 생기면 이를 증폭시켜 사회교란과 국가전복을 위한 폭동으로 연결하려 안간힘을 썼던 김일성이 이런 호기를 그냥 방치했다는 것은 마치 사하라사막에 비가 내린다는 것을 믿으라 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5.18! 역사상 처음으로 무기고를 털어 정부군에 대항했고, 국법을 어긴 사람들과 국가를 전복하려 했던 2,700여 명의 수용자들을 광주교도소로부터 해방시켜 혁명군에 편입시키기 위해 여섯 차례씩이나 무장공격을 감행했고, 광주시 전체를 점령했고, 이 폭동을 전라도는 물론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국가를 전복하려 했던 5.18은 바로 위에서 열거한 바의 대남공작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것이 1980년 당시의 군사적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은 1980년부터 불어 닥친 민주화라는 열풍에 흔적도 없이 녹아 없어지고, 그 결과 한동안 역적의 편에 서있었던 5.18이 화려한 충신으로 등극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친공이 충신이 되고 반공이 역적이 되어 있는 지금의 사회 정서가 만들어진 것이다. 과연 386주사파로 대표되는 민주화와 그들의 성지라는 5.18은 이 나라의 충신들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5.18역사는 남한의 역사가 아니라 북한의 역사라는 것이 필자가 이 책에서 내린 결론이다.
5.18에 대한 4개의 역사 책
우리 사회에서 역사책을 쓸 목적으로 1995년부터 시작된 역사바로세우기 수사 및 재판 기록을 가장 먼저 입수한 사람은 필자다. 필자는 10만여 쪽에 이른다는 모든 기록들을 고무골무를 끼고 5년 이상 연구하여 2008년 10월 4권에 걸쳐 “수사기록으로본 12,12와 5.18”(1,720쪽)을 냈고, 이어서 이를 2권으로 요약한 책을 냈다. 5.18에 관한한 필자가 낸 3개의 책은 네 번째 역사책이요 다섯, 여섯 번째의 역사책이 되는 것이다. 5.18에 대한 역사를 가장 먼저 쓴 존재는 북한 노동당 출판사들이다. 1982년 조국통일사가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이라는 역사책을 썼고, 이어서 1985년 조선노동당출판사가 “광주의 분노”를 출판했다. 물론 더 많은 책들이 북한에 존재하겠지만 필자가 찾아낸 북한의 5.18역사책들은 이 두 권뿐이다. 그 다음의 역사책은 1985년 황석영이 쓴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일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다. 위 3권의 책은 한 사람의 저자가 썼다 할 만큼 내용과 분위기가 대동소이하다. 세상에 많이 나와 있는 책과 책자들, 인터넷 자료들, MBC가 방영한 제5공화국, 영화 ‘화려한 휴가’ 등은 모두 수사기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위 3개의 책 내용들에서 발췌하여 가공한 것들이다.
북한자료를 가공하여 만든 허위자료, 모략자료들이 지금까지 우리사회에 널리 알려지고 각인돼 있는 것이다. 5.18역사는 북한자료를 가공해 만든 사기의 역사요 위장의 역사인 것이다. 역적이 충신 행세를 해오는 동안 진실이 담긴 수사기록 및 재판기록들은 검찰의 창고 안에 꼭꼭 갇혀 있었다. 그리고 황석영이 5.18역사책을 내놓은 지 무려 24년이 지난 2008년 말에야 사상 처음으로 사실자료와 과학적 논리를 내용으로 하는 필자의 5.18역사책이 나온 것이다. 필자는 수사기록을 가지고 5.18관련역사들(10.26, 12.12, 5.17, 5.18)을 사진 찍듯이 묘사했다. 그리고 당시에 역사를 뒤집은 정치인들과 판검사들의 파행적 행태들을 고발하였다.
솔로몬 앞에 선 5.18‘이 밝히고자 하는 것
이렇게 잘못 알려진 역사를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을 통해 제대로 썼으면 됐지, "솔로몬 앞에 선 5.18"은 또 무엇을 위한 책이란 말인가?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은 겉으로 나타난 현상에 대한 진실을 밝힌 책이다. 예를 들어 국민들은 계엄군이 먼저 공격을 했다고 알고 있지만, 수사기록을 보면 학생들이 부동자세로 서 있는 계엄군에 돌을 던져 피를 흘리게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렇게 현상에 대한 진실을 추구한 것이“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이었다.
그러면 “솔로몬 앞에 선 5.18”은 무엇을 추구했는가? 본질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책이다. 5.18에 나타난 현상들을 기획하고 연출한 리더가 남한사람들인가 북한사람들인가, 5.18의 역사를 남한에서 주도한 사람들은 남한을 사랑하는 사람들인가 북한을 사랑하는 사람들인가, 5.18의 소유권은 남한에 있는가 북한에 있는가, 이런 것들을 추구한 것이 바로 본 책의 목적인 것이다.
모진 동토를 뚫고 나온 새싹 같은 역사책
이 책은 다른 책과는 달리 사회적 국가적으로 엄청난 의무와 책임을 지는 역사책이다. 그리고 수백 년 전 역사의 한 조각을 조명하는 식의 평범한 역사책이 아니라 살아있는 권력과 세도에 대항한 책이다. 감히 모두가 겁내하는 5.18세력과 민주화세력이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아성을 파괴하는 '당대의 역사'(Contemporary History)책인 것이다. 이 책을 쓸 때까지 필자는 5.18세력들과 광주의 공권력으로부터 폭력과 린치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등 수많은 수난과 수모를 당해왔고, 지금도 당하고 있다. 세도 편에 서 있는 당대의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이다.
딱딱한 동토를 뚫고 나온 새싹이 고귀하듯이 이 책 역시 동토를 뚫고 모진 바람 속을 헤쳐 나온 새싹 같은 역사책이다. 이러하기에 필자는 필자가 남기는 이 역사물이 후대에 영원히 이어지고 보존되고 사랑받을 것으로 감히 믿는다. 후세의 사람들은 이런 역사책을 도대체 어떤 사람이 썼는가에 대해 궁금해 할 것이고, 필자에 대한 인식이 본 역사물에 대한 신뢰도를 좌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책 말미에 필자의 삶을 간단히 소개한 “나의 미니이력서”를 첨부했다.
이후 많은 역사가들의 참여가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0.7. 지만원
http://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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