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체 총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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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1-24 15:39 조회3,30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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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체 총결산
5.18민간사망자 1980년에는 164명, 1995년에는 166명
5.18관련 광주에서 사망한 민간인은 1980년 결산 시 164명, 그 중 12명은 신원을 밝힐 수 없었다. 북괴인인 것이다. 이 164명은 1995년 김영삼이 5.18을 다시 재판할 때 166명으로 늘어났다. 이 중 12명을 빼면 154명이고, 지금 현재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는 154명의 영정사진이 진열돼 있다. 늘어난 2명은 1980년에는 중상이었는데 그 후 15년 사이에 죽은 것이다. 따라서 1980년 당시 광주에서 죽은 사람의 통계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광주 사망자 2,000명설, 3,000명설, 5,000명설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까지 광주에서 사망한 사람이 2,000명이라는 설, 3,000명이라는 설들이 떠돌고 있다. 북한이 1982년에 남한에 살포한 삐라에는 [광주대학살 5,000명]으로 기재돼 있다. 그런데 1980년 검안 당시에는 164명만 발견됐고, 혹 죽기는 했지만 발견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사람이 실종자라는 것인데, 지금까지 확인된 실종자는 겨우 76명뿐이다.
2,000명이 죽었다면 2,000명에 가까운 가족이 실종자 신고를 했어야 했다. 만일 이들 76명이 사망했다면 그들은 수많은 곳에서 벌인 북괴특수군 비밀작전에 부역자로 동원됐다가 비밀유지를 위해 사살되어 알 수 없는 곳들에 암매장 되었을 것이다. 당시 계엄군은 숫자에 밀려 살아남기조차 버거웠기 때문에 설사 그들이 악하다 해도 시체를 암매장할 시간적 환경적 여유가 없었다. 현재 광주가 국가예산을 물 쓰듯 하면서 여기저기 파헤치는 것은 내가 보기에 근거 없는 행위이며 계엄군과 국가를 모략하기 위한 생쇼라고 생각한다.
거대하게 포장된 5.18에 광주인 사망자 겨우 152명!
광주에서 1980년 당시 죽은 광주인의 숫자는 164명, 그 중에서 북괴인 12명을 빼면 152명뿐이다. 이 숫자는 태산같이 거대하게 포장된 5.18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다. 1995년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때에도 사망자 수는 502명이었다. 1993년 서해 페리호 사고에서도 292명이 사망했다. 이런 지역적인 사고에 비해 보더라도 거대하게 포장된 5.18 광주사망자가 겨우 152명이라니~ 이 숫자가 쪽팔리는 것이다. 그래서 땅을 파헤치는 생쇼를 쉴 새 없이 하는 것이다.
놀라지 말라. 1980년 현재 사망자는 총 627명(북괴군 475명 포함)
영화 [화려한 휴가]는 광주에서 수천 명이 살해됐다고 부풀렸다. 그런데 당시 광주에서 죽은 사람은 총 627명이다. 이중 152명은 광주사람이고, 475명은 북괴특수군이다. 독자들은 웬 475구가 솟아났느냐고 의아해 하겠지만, 이 475명은 확실한 북한특수군 시체다. 북한의 5.18노래 [무등산의 진달래]에는 광주에서 무리죽음(떼죽음) 당한 북조선 아들들이 무등산의 진달래로 피어났는데 그들은 동강난 조국을 하나로 잇기 위해 사랑하는 부모 형제를 떠나 광주에서 떼죽음을 당했다고 슬퍼한다. 그 숫자가 475명이다. 이는 아래 자료에 명시돼 있다.
1)[김일성 훈장을 수여받은 조선기록영화촬영소]가 1980년에 제작한 5.18기록영화 [군사파쑈도당을 반대하는 광주인민항쟁] 후반에 475명이 기록돼 있다,
2) 북괴 조국통일사가 1982년에 발행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제591쪽 14-16줄에 475구가 기재돼 있다
3) 북괴 노동당출판사가 발행한 [광주의 분노] 제86쪽에 475구가 명시돼 있다
4) 1980년 6월 5일, 일본에서 ‘천주교정의평화협의회’가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 [찢어진 깃폭-어느 한 목격자의 진술]에 475명이 무리죽음 당했다고 기재돼 있다,
북괴 시체 475구는 어디로 갔나?
1) 청주시 흥덕구에 1m 깊이에 가매장되어있던 430구, 청주시는 이번 서울중앙지법 제2심사건 관련하여 재판부에 흥덕구 유골 숫자가 정확히 430구라 했다. 나머지 45구의 행방은 아래와 같다.
2)광주가 확인한 164구 중 12구는 북괴군
3)국제신문 김양우 기자가 교도소 부근 창평에서 목격한 북괴군 시체 2구(1996.에 종로서적을 통해 발행한 [시민군 계엄군] 118쪽)
4) 김양우 기자가 보았다는 하얀 찔레꽃이 얹혔다는 상무관 소재의 숫자 미상의 관들(시민군 계엄군 149쪽)
5) 중상인 상태로 북으로 철수했다가 북에서 사망한 북괴군
청주 430구가 광주에서 운반된 사실을 어떻게 확인하나?
청주 흥덕구에 똑같은 규모의 칠성판에 흰색 비닐로 포장돼 군번처럼 일련번호가 쓰인 시체 430구가 광주에서 왔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나?
아래 두 개의 자료는 전남대학 5.18연구소가 공개한 증언자료다.
1) 여교사 최봉희의 일기장 증언
http://cnu518.jnu.ac.kr/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127)
“시립 공동묘지에서 일하는 사람이 어제(5.29)까지594구를 운구했다”
164구에 430구를 더하면 정확히 594구다.
2) 안병복씨의 증언
http://cnu518.jnu.ac.kr/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216
병복이 아버지가 도청에서 밤을 새웠다. 27일 새벽에 빨리 피신하라고 하는 말과 함께 도청 쪽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병복이 아버지는 집으로 간다고 상무관을 빠져나왔는데, 65세나 된 노인이라 눈이 어두워 송정리쪽으로 잘못 빠져나가버렸다. 그때 많은 군인 차들이 비아 쪽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화물차 같은 것에 뭔가를 잔뜩 싣고 가는데 얇은 것으로 덮어진 트럭 포장이 펄렁펄렁해서 보니 시체들이 가득 실려 있더라고 했다. 그 시체를 실은 차가 두서너 대 지나가고부터는 시내 쪽에서 총소리가 나지 않았다.
주1: 사람들은 총소리 나는 곳에 얼씬하지 않는다. 시체운반 차량이 시내를 통과할 때에는 총소리를 내서 누구도 보지 못하게 한 것이고, 일단 시내를 통과하면 더 이상 총소리를 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병복이의 아버지의 증언은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매우 유익한 관찰을 한 것이다.
주2: 군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비록 그가 장군출신이었다 해도 작전을 실제로 치러보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광주가 계엄군에 의해 물샐 틈 없이 봉쇄돼 있었는데 여러 대의 대형차량이 그 많은 시체를 싣고 청주로 빠져나갈 수 있느냐?”
나는 베트남에서 실제로 정글을 기어 다니면서 4년 동안 작전을 했기 때문에 현지 작전에 대해 잘 안다. 장군이라 해도 현지 경험이 없으면 작전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휴전선이 철통 같이 감시되고 있다느니, 해안이 물샐 틈 없이 봉쇄 돼 있다느니 하는 조갑제 류의 질 낮은 치언(癡言)에 냉소를 보낸다.
2022.1.2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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