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전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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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01-01 15:56 조회3,16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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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전후사
1980년을 전후한 역사는 박정희-김일성-김대중-전두환으로 상징되는 역사라 할 수 있다. 김일성은 1968년의 김신조에 의한 박정희 살해 작전, 1974년의 박정희 저격 사건, 경회루의 폭탄설치 공작 등을 통해 박정희를 살해하려 끝없이 노력했고, 종국에는 그의 뜻대로 박정희는 그의 심복 김재규에 의해 시해됐다. 박정희가 시해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타이밍을 맞춰 한국사회를 카오스 상태로 몰고 간 인물들이 있었다. 김일성, 김대중 그리고 김대중이 이끄는 종북-반국가 종자들이었다.
10.26이후의 권력공백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김대중은 선동, 모략, 폭력 수단을 다양하게 구사하면서 국가를 무정부 상태로 몰아갔다. 종내는 그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정부를 세우려 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는 심재철이 주동한 10만 시위대가 버스로 경찰을 깔아죽이고, 청와대를 점령할 기색을 보였다가 심재철이 회군을 결심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위기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튿날인 5월 16일, 김대중은 최규하 과도정부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5월 19일까지 최규하 정부가 계엄령을 철폐하고, 내각을 해산하지 않으면, 5월 22일 낮 12시를 기해 서울역 시위와 똑같은 폭력시위를 전국적으로 벌일 것이라 했다. 군과 경찰은 상부 명령에 복종하지 말 것이며, 모든 국민은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시위에 적극 참여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이에 계엄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5월 17일, 그 동안 수집했던 김대중 일파의 내란음모 행위를 최규하 대통령에 보고했고, 같은 날 국방장관 주영복은 전군 지휘관회의를 열어 김대중이 주도하는 학생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10.26이후 실시돼 왔던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할 것을 대통령에 보고했다. 이에 최규하 당시 대통령은 신현확 총리에게 국무회의를 열라고 지시했고, 국무위원들은 만장일치로 전국계엄 선포를 통과시켰다.
이에 같은 5월 17일 자정, 전두환은 대통령 재가를 얻어 평창동 북악파크호텔에서 4차례에 걸쳐 작성한 “김대중 혁명내각” 명단에 들어 있던 내란음모자 24명과 김종필, 이후락, 이세호 등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었던 부정축재자들을 긴급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5.17은 전두환이 앞장서서 김대중의 내란음모와 그가 주도해왔던 사회적 교란행위를 동시에 일망타진한 사건이었다.
이튿날인 5월 18일부터 10일간 발생했던 5.18은 반골의 고장 광주와 북한이 야합하여 공동으로 수행했던 남침내란행위였다. 김일성이 작성한 대남 게릴라작전 시나리오를 북한과 광주가 협동하여 실행한 사건이 바로 5.18이었다. 김대중에 줄을 섰던 광주의 반골들이 바람을 잡고, 개념 없는 어린 부나비들을 제물로 삼아 북한 특수군의 활동을 도왔다. 김일성은 살인무기로 양성한 600명의 특수군을 10~20명 단위로 잠수함 통로와 태백산맥을 통해 광주-전남 지역에 침투시켰고, 이와 함께 이들을 위장시키고, 국내외로 반한감정을 유발시키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 수행하기 위한 또 다른 600명 정도의 남녀노소 대원들을 대형선박을 통해 목포항 등 전남 해안을 통해 남파했다. 전남해안이 이 정도로 텅 비어 있었던 것은 손성모(5.18답변서113쪽) 등 수많은 고첩들의 공작 결과였을 것이며, 전남 해안을 텅 비워준 사람은 바로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유병현이었다(5.18변변서206쪽). 결론적으로 5.18은 북이 주도한 남침사건이고, 광주가 부역한 여적사건이었다. 1980년부터 1997년 4월까지 유효했던 대법원 판결은 이러한 필자의 분석을 100%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천지개벽이 발생했다. 주사파를 핵으로 하는 이른바 민주화 세력이 사회를 장악하면서, 여적의 고장 광주가 민주화의 성지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5.18은 북한이 수행한 남침 게릴라전이었는데도 광주는 이것이 광주가 주도한 민주화운동이라며 해마다 유공자 수를 늘려가면서 국민 세금을 착취해가고 국민 위에 군림하면서 정치적 세도를 행사하고 있다. 이것이 1980년 전후사의 대강이다. 1980년 전후사는 좌익과 우익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좌우 대결의 역사였다. 1980년의 대법원은 국가를 지켜왔던 우익 시대의 대법원이었고, 1997년의 대법원은 빨갱이들이 장악한 대법원이었다. 따라서 이 부분의 역사를 쉽게 이해하는 지름길은 좌-우 주역들의 프로필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022.1.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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