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인민봉기는 주체의 기치에 따른 것(북한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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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03-03 17:53 조회21,18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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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인민봉기는 주체의 기치에 따른 것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
<주체의 기치에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1982년 3월 20일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이라는 단행본이 있습니다. 65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단행본입니다. 7포인트 정도의 아주 작은 글씨이기 때문에 10포인트로 환산하면 분량은 아마도 1,000쪽에 달할 것 같습니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창시하신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은 남조선인민들의 앞길을 밝혀주는 위대한 혁명적 기치”라는 제목으로 시작하여 남한에서 발생한 ‘빨치산 혁명사건’들에 대한 역사들이 방대하게 기술됐으며 일부만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1946년 8월 광주화순탄광로동자들의 투쟁과 하의도(주: 김대중의 고향) 농민폭동의 역사
2) 남조선 로동자들의 9월총파업
3) 1946년 10월 인민항쟁
4) 1947년 3월 22일 총파업
5) 1948년 2.7구국투쟁
6) 제주도 4.3인민봉기
7) 5.10 단선반대투쟁
8) 려수군인폭동
9) 남조선혁명가들의 합법적 정당인 진보당의 출현
10) 1960년 4월인민봉기
11) 4월인민봉기 발단으로서의 마산봉기
12) 진보정당인 사회대중당과 통일전선적 련합체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의 결성
13) 주체형의 혁명적 당ㄱ건설을 위한 투쟁, 통일혁명당 준비위원회의 결성과 그 활동
14)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3.24-6.3투쟁
15) 한일협정을 짓부시기 위한 대중적 투쟁, 1965년 8월투쟁
16) 1967년 6.8 부정선거 반대투쟁
17) 1969년 ‘3선개선’ 반대투쟁
18) 남조선혁명의 전위부대-통일혁명당의 창립과 그 영향력의 강화
19)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하는 통일혁명당의 창립
20) 1971년 4월 청년학생들의 반‘교련’투쟁,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의 결성
21) ‘유신’독재를 반대하는 대중적 반파쇼 민주화투쟁
22) ‘전국민주청년학생총련맹’의 결성과 4.3투쟁
23) 울산조선소로동자들의 폭동
24) 1979년 10월민주항쟁(주: 부마사태)
25) 탄광로동자들의 폭동(주: 사북탄광)
26) 광주인민들의 영웅적 봉기
27) 광주민중봉기 후 민주와 통일을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5.18을 포함하여 위 27개 및 그 이상의 사건들은 남한에서 북한의 주도(주체의 기치) 하에 일킨 ‘반파쑈통일투쟁’이었다는 것입니다.
위 역사적 사건들은 대부분 북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국가 사건들이며 여기에 5.18 역사가 70쪽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비중으로 쓰인 것입니다. 이 책의 제목은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이며, 이는 위에 일부 발췌 열거된 27개 그 이상의 사건들이 북의 지령이나 개입에 의해 남조선에 있는 혁명세력과 민중세력이 일으킨 사건들이라는 뜻이 함축돼 있는 것입니다. 이들 “주체의 기치에 따라 남조선 애국인민들이 일으킨 반파쇼(반대한민국) 투쟁” 중에서 5.18은 가장 성공한 인민혁명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광주인민봉기는 유신체제를 전명으로 철페하기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반파쑈민주화투쟁발점의 가장 높은 단계이며 . .”(증31, 571쪽 12-13줄)
증31의 546쪽에서 590까지 44쪽에 걸쳐 깨알 같이 기술된 상황일지(5.18직전 및 5.18과정)는 검찰 및 군인, 안기부, 치안본부 일지와 대동소이하지만 이 책의 자료가 훨씬 더 자세했습니다.
북한이 발행한 책 증31이 남한 당국의 자료들보다 더 상세한 상황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짙은 가스 연기속에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던 버스1대(광전교통소속 전남5에이3706호)가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추어섰을 때 계엄군 100명이 들이닥치자 차안에 있던 10명의 청년들이 결사적으로. . ”(증31, 576하5-8줄). 남한 자료 어디에도 차번호까지는 없습니다.
“광주봉기자들은 버스에 나뉘어 타고 목포와 라주 등 전라남도 기타의 도시들로 출발하여 봉기를 확대시키는 한편 그곳 경찰서와 향토예비군의 무기고들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 라주에 진출한 봉기자들은 라주경찰서 관내 5개지서를 점거하고 경기관총을 비롯한 무기와 다량의 실탄을 빼앗았다. 화순, 승주, 호남탄광과 리양경찰지서에서도 . .화순광업소에 몰려간 봉기자들은 향토예비군에 사격을 가하여 물리친 다음 광주사이를 오가면서 무기와 폭약을 실어날랐다. 인민봉기는 라주, 화순, 함평, 완도, 승주, 담양, 령광, 해남, 목포, 장성, 송정, 려수, 순천, 광양, 보성 등 도 안의 많은 시,군으로 확대되어 . .”(증31, 580쪽 하반부). 모두가 수사기록들과 일치하는 내용들입니다.
“봉기군은 시 중심부에 있는 전남대학교부속병원 옥상에 경기관총을 걸어놓고 . .”(증31, 581쪽 하9-10줄). 수사기록의 상황자료들에는 전남대부속병원이 시 중심부에 있는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오후3시부터 봉기자들은 공격서열을 편성하였다. 봉기군중은 승용차 4대에 불을 달아 저지선을 향해 밀어보냈으며, 뒤이어 기름이 가득 찬 드럼통을 실은 화물차에 시동을 걸어 저지선쪽으로 나가게 한다음 솜뭉치에 불을 달아 차에 던졌다”(증31, 582쪽 7-11줄). ‘공격서열을 편성했다’는 말은 군사용어이며 리는 수많은 단위의 시위대들에 공격 목표를 배당해주었다는 뜻입니다. 광주시위는 누군가에 의해 통제된 조직적인 작전이었다는 뜻입니다.
“전라남도 26개 시,군 중에서 17개 시,군이 봉기에 합세하였을 뿐만 아니라 19일에는 서울에서 1,000여명 학생들이 반정부 집회와 시위에 떨쳐나섰고, 21일에는 전주, 리리에서 투쟁이 벌어져 전라북도에도 항거의 불길이 타번졌다”(증31, 584쪽 8-12줄). 이 말도 수사기록과 일치합니다.
더구나 증31에는 시위전략과 전술이 묘사돼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대부분 학생들이 단순히 경찰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시위를 하나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위에는 전략과 전술이 있었습니다. 이 전략과 전술은 남한자료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자료입니다.
1980년 5월의 남한시위들에는 군사 전략과 전술 이상의 시위전략과 시위전술이 있었습니다.
시위전략: 증31의 567쪽에는 남한의 시위전략이 기술돼 있습니다. “그들은 교외시위를 위주로 하면서 성토대회, 성명발표, 교내시위와 롱성투쟁 등을 결합하여 투쟁을 준단 없이 벌려나갔으며 시내 중심부를 시위구역으로 설정하고 역량의 집중과 통일행동을 보장함으로써 시위의 정치적 효과를 높였다”(증31, 567쪽 10-13줄).
실제로 당시 학생들은 이런 식으로 시위를 했습니다만 이것이 전략에 따른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전략의 요점은 1) 주력시위(주공)는 시내중심부에서 벌이고, 성토대회, 성명발표, 교내시위, 농성투쟁 등을 조공으로 하여 중단 없는 공격을 실시하고 2) 모든 시위대들은 집중과 통일된 행동을 통해 정치적 효과를 높여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정규전과 비정규전을 배합하라는 북한전략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시위전술: 같은 증31의 567쪽에는 또 시위전술이 기록돼 있습니다. “시위에서는 과감한 육박에 의한 경찰저지선의 정면돌파와 경찰의 포위를 역포위로 전환시켜 앞으로 열어나가는 돌파, 분산과 집합, 큰 대열과 작은 대열의 배합, 속도행진에 의한 빠른 기동과 바리케트에 의한 완강한 방어 등으로 주도권을 틀어쥐고 적을 피동에 몰아넣었다. 또한 작은 돌과 큰돌 심지어는 화염병까지 준비하여 적에 대한 타격력을 높였으며 의학대학 학생들로 치료대를 조직하여 부상자에 대한 응급조치를 받게 하는 등 치밀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시위와 대중선전을 밀접히 결합시키면서 광장과 큰거리에서의 집회에 큰 의의를 부여하는 한편 시민들에게는 <함께 싸우자!>고 호소하는 삐라를 뿌렸고, 공장지대에서는 로동자들에게 확성기로 <함께 나가자!>고 호소하였고, 경찰들에게도 함화를 들이대었다. 이것은 학생들의 투쟁전술에서도 종전의 투쟁에 비하여 큰 진전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증31, 567쪽 13-26줄)
여기에서 ‘돌파’,‘제 역량의 배합’, ‘역포위’‘속도전’, ‘주위선동’이라는 군사용어가 나오며 이는 북한 특유의 전술입니다. 북한의 전략 전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은“정규전과 비정규전의 배합”이며, 이 전술은 남한 시위에서도 응용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북한식의‘돌파’작전은 첨입작전으로 대표됩니다. 적의 약한 곳에 최강-대량의 군사력을 투입하여 나무에 쐐기를 박는 작전을 의미합니다. ‘역포위’경찰저지선을 뚫은(돌파한) 시위대가 저지선상에 늘어선 다른 경찰들을 뒤로부터 둘러싸는 전술이며 이는 휴전선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우리 군의 방어선을 돌파한 후 돌파병력에 의해 전면을 응시하고 있는 우리 군을 뒤로부터 포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한의 시위에 이런 고수준의 전술이 응용되었다는 것은 북한 전문가들이 시위에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국에서는 물론 서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던 1980년 5월의 시위들이 그냥 산발적으로 발생한 시위가 아니라 시위전략과 시위전술을 통달한 검은 ‘시위작전사령부’의 일사불란한 지휘(계획, 명령, 상황파악) 하에 이루어진 작전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하는 대목인 것입니다.
북한은 광주사태로부터 차후 대남폭동의 성공을 위한 3가지 교훈을 이끌어 냈습니다.
더욱 가공할 것은 증31의 609-610쪽에 기술된 ‘광주 반파쇼민주화투쟁에 대한 교훈’입니다. 앞으로 남한에서 일으킬 반파쇼민주화투쟁은 3가지 교훈을 참작하여 일으키자는 것입니다,
교훈1: “광주인민봉기는 새로운 단계의 반파쇼민주화투쟁을 위해서 귀중한 교훈들을 남기었는데 그 교훈은 첫째로, 남조선인민의 해방투쟁의 승리는 반미투쟁과 결합될 때에만 확고한 것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증31, 609쪽 16-19줄)
교훈2: “광주인민봉기가 남긴 교훈은 둘째로, 남조선인민의 해방투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청년학생운동과 로동운동과의 결합을 새로운 높은 단계로 심화발전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증31, 609쪽 하3-5줄).
교훈3: “광주인민봉기가 남긴 교훈은 셋째로, 남조선인민의 해방투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보다 광범한 대중적 지반 위에서 반파쑈민주역량을 형성하고 그것을 조직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증31, 610쪽 7-9줄)
광주인민봉기는 해방 후 남한에서 발생한 좌익소요들 중 가장 위대한 것이었다 합니다.
모든 역량들이 조직화되지 않으면 시위가 실패한다는 뜻을 뒤집어 보면 1980년 5월에 자행된 모든 시위들이 조직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뒷받침된다 할 것입니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인민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매 시기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여 새로운 구국통일방안을 내놓으실 때마다 그것을 전적으로 지지하여 나섰으며, 원쑤들의 파쑈폭압과 분령책동이 극도에 이른 어려운 속에서도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벌려왔다”(증31, 611쪽 하 10-15줄). 남한에서 조성된 정세를 이용하여 김일성이 구국통일방안을 내놓았다는 말입니다. 이 김일성의 교시를 남조선 인민세력이 적극 지지하면서 국가전복 투쟁을 끝없이 벌여왔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에 더해 이책(증31)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남조선에서의 투쟁들은 다 주체의 지휘아래 남조선 통일세력의 적극적인 지지와 투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며, 그 중에서 광주폭동이 가장 성공한 케이스라는 것입니다. 이는 다음의 내용으로 뒷받침됩니다.
“남조선인민의 해방투쟁의 력사에 불멸의 위훈의 탑을 쌓아올린 영웅적 광주 인민봉기는 커다란 력사적 의의를 가지는 사변으로 된다. 영웅적 광주인민봉기는 그 성격에 있어서 민주와 통일에 대한 남조선인민들의 한결같은 지향을 반영한 대중적인 애국적 항쟁이며 가장 높은 형태의 반파쑈민주화투쟁으로 된다.”(증31, 596쪽 8-12줄)
이 책에도 계엄군에 대한 모략이 지배적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악귀 같은 교형리(주:괴로군)들은 녀학생들을 그들의 부모가 보는 가운데 발가벗기고 젖가슴을 도려낸 다음 화염방사기로 불태워 죽였다. 무차별 하갈의 잔학성은 어린이나 늙은이, 임산부들에 대한 만행에서 더욱 몸서리치게 드러났는데 놈들은 광주천 기슭에 쓰러진 어머니의 시체를 붙잡고 우는 4살짜리 어린이에게도 달려들어 ‘폭도의 종자를 멸종시키라’고 하면서 총검으로 참살하고 살인만행에 항거하였다 하여 70대의 할아버지도 하수구에 밀어넣어 죽였고,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창자가 튀어나온 배에서 태아를 꺼내 던지는 귀축같은 만행도 서슴치 않았다.”(증31, 590쪽 하4줄-591쪽 3줄)
“광주시의 도청 지하실 한 곳에만도 얼굴을 알 수 없도록 화염방사기에 그슬리고 찢긴 475구의 시체가 쌓여져 있은 사실만 놓고 보아도 놈들의 살육만행이 . ”(증31, 591쪽 14-16줄)
북한의 단행본 <주체의 기치에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에 대한 소결
이 책을 보면 광주인민봉기는 해방 이후 북한의 개입과 지휘로 발생했던 남한의 모든 소요사태와 지하당 구축사업들이 모두 김일성(주체)의 지도 아래 남조선 혁명세력이 나서서 대한민국과 투쟁한 사건들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케이스가 광주봉기라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체의 기치에 따라 남한의 혁명세력과 인민들이 김일성의 지휘에 따라 이룩한 최대의 사건이 광주인민봉기라고 명확히 기술돼 있습니다. 북한에서 5월 18일을 전후하여 당정이 주최하는 5.18행사를 평양시, 도, 시로 확산하여 거행하고 있는 것이 이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기타 북한 자료
북한은 단행본들과 정기간행물들 심지어는 그림책까지 동원하여 광주인민봉기를 대남사업의 성공스토리인양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1) 금수강산이라는 월간지 2007년 5월호에는 “피에 젖은 광주의 웨침”이라는 제목의 기자의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광주투쟁이 미국을 몰아내고 파쑈정권을 철페하기 위한 투쟁이었으며 광주는 오늘도 빈미를 부르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증39)
2)조선녀성이라는 월간지 1982년 5월호에는 “항쟁의 불길 타오른 그날의 광주”라는 제하의 글이 있습니다. 5월19일 재봉공으로 일하던 성옥이가 쓰러진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두환을 찢어죽이라 하는 격문입니다.(증40)
3) 조선녀성 1995년 월호에는 “력사에 길이 빛날 광주 인민봉기”라는 제하의 글이 있습니다. 서울시위로부터 광주시위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을 요약한 글이며, 여기에서도 광주인민봉기를 대남공작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작품이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광주인민봉기와 같이 제국주의침략자들의 강점 밑에서 방대한 무력과 맞서 여러 날 동안 조직적으로 그리고 완강하고 격렬하게 진행된 인민들의 봉기는 일찍이 없었다”(증41, 37쪽 2단 중간 표시부분)
4) 사진집 “아! 광주여!”가 광주 시신들의 얼굴사진들과 일반시민들로 보이지 않는 무장한 시민군의 사진 등을 엮어 내놓았습니다.(증42)
5) “광주의 새벽”이라는 그림책도 내놓았습니다.(증43)
2010.3.3. 지만원
http://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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