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 전두환 전 대통령만큼 모략중상의 흑색선전(黑色宣傳)을 당한 대통령이 또 있을까? 그는 무엇보다도 광주 ‘5,18문제’에 관해 집중적으로 모략중상을 받았다. 모략중상의 원인자(原因者)는 누가인가? 대통령병에 환장하다시피한 DJ와 YS였고, 북한정권이었다. 지금도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남북한 좌파들의 모략중상은 진행중이다.
특히 DJ는 광주사건후 김모(某) 전 국회의장을 대동하고 전남지역을 순회강연하면서 뛰어난 웅변으로 전두환 전대통령을 광주사태를 일으킨 괴수요, 살인마로 만드는 모략중상을 대대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북한정권은 아전인수(我田引水)로 광주사건을 이용하여 영화를 만들어 전두환 대통령을 모략중상했다. 그것은 사상최대요, 전무후무할 모략중상으로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천추에 한이 될 지경으로 함정에 빠졌다.
남북한의 좌파들이 음모한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서 펼친 모략중상은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가? 호남의 일부 남녀들은 마주(魔酒)에 취한듯 모략중상술에 도취하여 일면식이 없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지목하여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보내 광주 사람 죽였다”는 것과 심지어는 “전두환이 대검으로 임산부를 찔렀다”로 발전하여 지껄이고 있기도 하다. 그렇게 악소문을 퍼뜨리는 남녀에게 직접 목격했느냐,를 물으면 하나같이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는 이구동성(異口同聲)이다. 소위 “카더라 방송”이 전국에 망령처럼 떠돌고 있는 것이다.
광주에 공수부대는 왜 갔나? 광주인들이 간디의 무저항식 시위를 하는데도 공수부대들이 무장하고 달려갔을까? 영국이나 미국 등 법을 지키는 평화적 시위를 하는데도 공수부대들이 달려갔을까? 입으로는 “민주화”를 외치면서 행동은 유혈사태를 부르는 폭력시위를 벌였기 때문에 광주의 경찰력이 도저히 질서유지를 해 볼 수 없는 치안부재의 무법천지였지 않는가? 투척된 화염병으로 파출소가 불타고, 경찰이 질서유지를 포기하고 피신한 무법천지를 누가 연출했는가? 무법천지를 연출한 그들이 군의 진압출동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
광주에 군의 출동은 누가 결정했는가?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독자적 권한으로 광주에 군출동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엄연한 국법이 있었다. 위로는 최규하 대통령이 있었다. 그 밑으로는 계엄사령관 대장 이희성이 있었다. 이희성의 육사 동기생인 광주를 관할하는 2군 사령관 대장 진종채가 있었으며, 역시 이희성의 육사 동기생인 전남,북 계엄사령관에 중장 윤흥정이 있었다. 그 밑으로는 광주 계엄 책임자 31사단장 소장 정웅 장군이 있었다.
현지 사령관인 정웅의 보고와 주청 시작으로, 전교사의 윤흥정 사령관과 계엄사령관, 대통령 순으로 보고되어 마침내 계엄군이 출동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대통령과 계엄사령관을 무시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출동시켰다는 것은 계엄군 지휘조직을 전혀 모르는 자나, 뻔히 알면서 억지주장을 하는 자로써 국제사회가 비웃을 모략중상의 극치라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규하 대통령은 그해 5월 25일 17시 49분경 직접 광주 전교사를 방문하여 다음과 같이 방송을 통해 광주시민에게 호소했다.
“친애하는 광주시민 여러분, 그리고 애국학생 여러분, 저 최규하 대통령입니다. 지금 광주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직접 만나 뵙지 못하고 이렇게 녹음 방송으로 대신함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중략-하루속히 여러분이 원하는 참된 민주주의로 광주시민이 평온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1.)
광주에서 최규하 대통령의 간절한 호소의 방송도 무장투쟁을 하는 시민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최규하 대통령은 시민군측에서 불행한 사태를 막는 소식을 기다렸으나, 일전불사(一戰不辭)의 각오로 대응하는 시민군측에 통석함을 금치 못하며 광주를 떠나갔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직접 찾아가 호소해도 시민군측은 받아들이지 않은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시민군측은 누구에게 복종과 명령을 들어야 하는 사람들인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진상에 있어 논란이 되고 있는 공수부대의 광주 발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이 역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요청하고 명령한 것이 아니다. 그해 5월 21일 19시 30분경, KBS 방송을 통해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광주사태(당시)에 관하여 담화를 발표했다. 계엄사령관은 담화문에서 광주시민의 자제를 호소하는 한편, “계엄군은 폭력으로 국내 치안을 어지럽히는 행위에 대하여서는 부득히 자위를 위해서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음을 경고한다”고 천명했다.
담화가 있은 직후인 20:00시경에 계엄사령부는 2군사령부에 자위권 발동을 전통을 통해 지시했고, 5월22일에는 계엄훈령 11호로서 자위권발동의 요건을 전 계엄군에게 시달하였다. 그리고 2군 사령부는 20:30분경 전교사에 한 것이다. 2)
총까지 보유한 압도적 다수인 소위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대가 소수인 군인들을 포위해놓고, 돌, 화염병을 포함한 각종 흉기와 대형차와 휘발유 드럼통을 가지고 집단살인을 기도하는 상황에서 계엄군에게 자위권발포를 금지 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군지휘부의 간접살인이었다. 광주시에서 사투를 벌였든 계엄군들이 21일 오후 8시 주남 마을과 광주교도소로 철수할 때까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스스로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위권으로 수십차례 발포를 했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대통령으로부터 자위권발포의 승인을 받아 지시한 것은 이미 현장에서 시민군측과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군의 발포를 정당화 시켜주는 것에 불과했다. 3)
5월 22일의 광주는 군병력과 경찰력이 상부의 명령에 의해 외곽으로 철수한 상태에서 광주는 민주화를 외치는 복면 무장시위대의 완전한 점령지가 되었다. 무장시위는 광주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광주시를 빼놓고 전남 23개 군(郡), 4개 시(市) 중에서 14개군과 2개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30∼200단위의 무장시위대가 경찰서 및 예비군 무기고를 기습, 무기를 탈취하여 광주시민군과의 연결작전을 시도했다. 이 무렵, 무장시위대는 2700여명이 수감되어 있는 광주 교도소를 총 6차에 걸쳐 공격했다. 4)
왜 무장시위대는 6차에 걸쳐 집요하게 광주 교도소를 공격했을까? 그것은 2700여명의 수감자들을 해방하여 그들의 손에 무기를 들려 대한민국 정부를 향해 무장투쟁을 가열차게 하겠다는 음모였다. 광주교도소를 공격하는 의도를 안 계엄군은 필사적으로 교도소를 방어했다. 무장시위대는 무차별 총탄을 발사하며 교도소를 공격했다. 계엄군과 무장시위대와의 치열한 교전으로 유혈이 낭자한속에 사람이 죽어갔다. 독자시여, 2700여명의 수감자가 손에손에 무기를 들고 대한민국을 향해 총탄을 발사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계엄군이 피흘려 이를 막은 것이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고, 그리고 산을 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광주에 왜 계엄군이 가서 유혈사태를 일으켰느냐, 에 초점을 두지 말라. 계엄군이 출동하지 않을 수 없는 광주의 상황을 연출한 자들에 대하여 통찰해야 할 것이다. 국군에게 총탄을 발사하는 무장시위대를 향해 계엄군이 손놓고 있었으면 불똥은 어떻게 비화 되었을까? 요원의 들불이 되어 전국적으로 비화 되었을 것이다. 만약 전국적으로 비화 되었다면, 사회혼란속에 경제는 파탄이요,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는 김일성이 특수부대의 밀파(密派)가 아닌 정규부대의 남침을 결행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80년 5월 10일, 중앙정보부는 일본 정보부격인 내각조사실 한반도 담당반장으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결행 하려 한다는 정보를 제공받았다. 북한정권은 박대통령 시해후 혼란기의 한국에서 내응의 무장폭동을 발발케 하고, 그 다음, 북한군이 남침한다는 음모를 꾸미는 대화들이 일본측에 감청된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광주에서 민주화를 명분세워 무장폭동이 일어났다. 광주로 간 계엄군은 시민군측의 총탄에 죽어가며 북한군의 남침 서곡을 잠재워 버렸다.
광주의 무장시위대는 선전선동을 하면서, 서울과 부산, 대구, 대전, 인천 등 전국 주요도시에서 자신들과 같은 무장시위대가 일어나 광주를 지원하기 위해 오고 있다고 선전선동했다. 또, 미 7함대가 무장시위대의 광주를 돕기 위해 오고 있다고 선전하며, 독전(督戰)했다. 그러나 광주시외 도시의 대다수 시민들은 현명했다. 국군과 교전하는 무장시위대를 꾸짖었다. 무장봉기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광주의 무장봉기가 북한군의 남침을 유발시켜 제2 한국전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고 개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전국적인 국민들의 불호응(不呼應)으로 꺼져가는 광주 무장봉기의 불씨를 가지고 신바람 나게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북한정권이다. 탈북 새터민 3인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정권은 ‘5,18 광주사태’를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반미 자주화 운동으로 변조시켰다. 국군은 주체사상으로 반미운동을 하는 선량한 광주시민들을 미군의 앞잡이가 되어 무차별 실육한 살인집단으로 몰았다. 새터민은 한국에 와서야 광주 민주화 운동이,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반미운동으로 잘못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증언했다.
새터민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정권은 광주사태를 소재로 영화 2편을 만들었다고 한다. ‘광주는 부른다’와 ‘님을 위한 교향시’다. 님을 위한 교향시는 1991년에 완성했다. 광주사태 촬영장소는 신의주였다. 신의주 시내 모든 대학생들이 영화촬영에 동원되었다. 신의주 대학생들은 한쪽은 광주 시민군, 한쪽은 계엄군으로 분장하여 연기했다.
북한정권은 자신들이 멋대로 만든 ‘5,18영화’에서 계엄군이 대검으로 임산부의 복부를 찌르고 가르는 모습 등을 연출했다. 잔인하게, 보다 잔인하게,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하는 국군상을 만드는데 광분했다. 결론은 무엇인가? 첫째, 북한인민을 기만하고, 둘째, 한국의 국민과 군을 이간질 시키자는 것이다.
북한정권은 해마다 5월 18일에는 거리마다 포스터를 걸어놓고, 추모행사와 군중시위를 벌인다. 노동자대표, 청년학생대표, 농민대표들이 차례로 나와 연설과 구호를 외친다. 인민들에게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은 남조선 인민들이 주체사상으로 반미 자주화를 위해 싸운 항쟁운동"이라고 선전한다. 또 김일성 수령을 위한 충성운동이었다고 선전한다.
또, 북한정권은, 인민들의 반미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해 "광주폭동은 미국이 지휘했다"고 주장한다. 주한 미 대사 글라이스틴이 전두환을 골방으로 불러 광주 진압에 대해 지시를 내리는 장면도 연출하여 방영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국내 대통령병으로 환장하다시피한 DJ, YS의 모략중상과 그에 부화뇌동하는 좌파 언론인, 학자, 운동권 등의 무차별 모략중상과 북한정권이 만든 ‘5,18영화’속에서까지 광주로 간 국군과 함께 회복하기 난망한 모략중상을 받은 것이다.
북한정권은 왜 전두환을 미워하고 죽이지 못해 발광하듯 하는가? 북한정권은 박정희, 전두환 두 전 대통령들을 극도로 미워했다. 왜? 반공의 국시를 수호하는 대통령들이기 때문이다. 북한정권은 오래전부터 한국에 좌파 정치인을 지원하여 정권을 잡도록 획책했다. 좌파 정치인이 대한민국을 통째로 바치게 하려는 속셈인 것이다. 좌파 정치인이 빨리 정권을 잡게 하기 위해서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에게 암살대를 보낸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북한정권이 파놓은 함정, 아웅산에서 무사한 것은 천운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이 반공투사가 아닌 좌파였다면, 북한정권은 절대 암살공작과 사상최대의 모략전을 펼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더 이상 국내 좌파들과 북한정권이 펼치는 모략중상에 기만당해서는 안된다. DJ와 그의 아류(亞流)격인 YS, 그리고 추종자들이 음모인 모략중상은 합천군까지 파급되어 일부 못난 합천인은 일해공원을 반대했다. 또 못난이들은 전두환 대통령의 생가까지 방화했다. 모두 모략중상에 도취하여 발광한 것이라 지탄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뭐라 해도 전두환 전 대통령은 합천이 배출한 대한민국 대통령중의 한 명이요, 영웅중의 한 명이다.
끝으로, 이제 국민들은 심기일전(心機一轉), 각성해야 한다. 세기의 모략중상극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날의 계엄군과 광주 민중항쟁의 인사들이 함께 사는 해원상생의 길을 활짝 열어야 한다. 광주항쟁의 민주화 인사들은 명예와 보상이 있다. 그날의 계엄군에게도 반드시 명예와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략중상극으로 고통속에 신음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위로하고, 명예회복을 시켜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이 법 철(bubchul@hotmail.com)
주(註)1,2,3,4) 지만원, '12,12와 5,18' 上(도서출판 시스템 2009, 10,23) 410,456p.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