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는 김재규-정승화 일당의 혁명행진을 저지한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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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12-18 20:29 조회3,13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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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는 김재규-정승화 일당의 혁명행진을 저지한 작전
12.12와 5.17 사이에는 사돈의 팔촌관계도 없다
사물에 대한 이해는 항목으로 이해하지 말고 패러다임(형틀)으로 이해해야 한다. 12.12는 10.26사건을 일으킨 김재규와 정승화 등 그를 옹호하고 나섰던 추종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애국작전이었고, 5.17은 북한의 지원을 받고 있던 김대중이 박정희가 제거됐으니 세상은 내 것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 무능한 최규하 내각을 분해시킨 다음 자기가 이끄는 혁명정부를 세우기 위해 미쳐 날뛰는 것을 제압한 반공 애국 작전이었다.
패러디임상 12.12와 5.17은 번지수가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도 민주화로 채색한 빨갱이들은 전두환이 12.12로 국권을 찬탈해 가지고 5.17을 통해 민주화운동가들을 감옥에 넣고, 5.18을 통해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결집한 광주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총으로 학살했다고 당치도 않게 얽었다. 내란 목적의 살인을 했다는 것이다.
12.12 작전 스케치
12월 12일, 오후 6시30분, 전두환은 수사국장 이학봉을 대동하고 국무총리 공관에서 집무하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에 가서 정승화 연행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다. 당시는 정승화에 대한 의혹이 사회적으로 확산돼 있었고, 이러한 것은 극비사항이기 때문에 곧바로 대통령에게 가져갔다. 전두환은 재가가 쉽게 나리라 생각하고 무조건 7시에 정승화를 체포하라는 사전각본을 짰다. 그런데 의외에도 최규하는 국방장관을 앉힌 자리에서 재가할 것을 고집했다.
정승화를 체포하는 일은 원체 큰일이라 전두환은 평소 군에서 여론을 이끌 수 있는 9명의 장군을 보안사 정문 맞은편에 있는 수경사30단으로 초청하여 재가가 끝나는 대로 체포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하려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승화와 가까운 장태완, 정병주(특전사령관), 김진기(헌병감)에게도 따로 설명해줄 요량으로 신촌만찬을 준비했다.
한편 허삼수와 우경윤 등은 4명의 보안사 서빙고 수사관들을 태우고 7시05분에 정승화총장 공관으로 갔다. 서빙고로 가자는 대령들의 권고를 받은 정승화는 순순히 응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고, 이로 인해 그의 부하들과 수사관들 사이에 총격전이 유발됐고 그의 부하들과 범수대 대령이 중상을 입었다. 그 자신이 한 때 보안부대장을 했으면 저항해야 피해만 발생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을 터인데도 불필요한 저항을 하다가 부하들을 다치게 한 것이다. 결국 박 수사관이 응접실의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M-16소총으로 위협하고서야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한편 국방장관 노재현은 대통령이 빨리 오라는 호출명령을 받고도 이리저리 피해 다녔고, 피해 다니는 동안 군에는 지휘공백이 발생하여 정승화 군벌과 30단 군벌 사이에 불필요한 긴장이 유발됐다. 긴장이 일자 불길한 생각이 든 5명의 장군은 밤 9시 반에 대통령에 가서 정중히 인사를 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하면서 재가를 빨리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대통령은 "장관 오면 해줄게" 하고 담소들을 나누었다. 3군사령관 이건영,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총장 권한 대행인 윤성민 참모차장 등 수도권 실세들이 나서서 30단에 모인 장군들을 무조건 반란군이라 규정하면서 병력을 동원하고, 30단과 청와대 지역을 전차포와 야포로 융단공격하려 했고, 상대방 장교들을 체포 구금함은 물론 장교들의 이름을 지정하여 사살명령까지 내리고, 대통령을 납치하여 정승화를 구하고, 무장헬기로 정승화를 구출하자는 막다른 단계에까지 이르다가 전두환에 의해 진압되고 체포되기에 이른다.
최규하와 노재현은 눈치 보는 쌩쥐족
이리저리 숨어만 다니면서 대통령의 호출에 불응한 노재현은 새벽 1시, 제1공수여단과 국방부 옥상에 배치됐던 수경사 병력 사이에 발생한 총소리에 겁을 먹고 부관과 함께 국방부 건물 지하 1층 어두운 계단에 숨어 있었다. 대통령과 함께 하루 밤을 새운 신현확 총리는 참다못해 자기가 나서서 노재현을 찾아오겠다며 국방부로 향했고, 이에 공수대원들이 국방부 건물을 샅샅이 뒤지다가 새벽 3시 50분에 계단 밑에 숨은 장관을 발견했다. 총구를 겨눴던 병사들은 “나 장관이다”하는 말에 경례를 한 후 장관실로 모셔왔다. 신현확은 장관과 이희성과 국방차관 김용휴를 태우고 총리공관으로 갔다. 노재현은 보안사에 들려 재가문서에 스스로 결재를 한 후 대통령에 가서 꾸중을 듣고 재가를 얻었다. 4시30분에서 05시 10분 사이였다. 최규하는 서명난에 05:10분이라 쓰고 서명을 했다.
김영일, 권성, 윤관 등 민주화 판사들의 지랄 춤
사실이 이러함에도 1996-97년에 진행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는 전두환이 죄 없는 정승화를 체포하고 정식 지휘계통에 있던 윤성민-장태완이 내린, 정승화를 풀어주라는 명령에 불복하면서 5명의 장군을 보내 대통령을 협박하고, 공관 주변을 경계하는 병사들에 의해 대통령에 겁을 주면서 새벽 5시에 재가를 강요했고, 무단으로 병력을 동원했기 때문에 군사반란이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1996.7.1. 제18회 재판정에 나온 신현확 전 총리는 장군들은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고 정중하게 건의를 한 후 돌아갔으며, 대통령과 하루 밤을 새우는 동안 공관 경비병을 의식한 적은 전혀 없다고 증언했다.
12.12는 한국 정통역사에서 우뚝 서야 할 만큼 매우 큰 위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국민 각자에게 비쳐진 12.12의 영상은 난무하는 소문에 따라 달라지고, 기자들의 글쓰기에 따라 달라지며, 누가 권력을 잡았으냐에 따라 달라지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의 요지경이 되었다.
세상은 각자의 머리 용량만큼만 보인다. 그래서 역사적 인물, 역사적 사건을 놓고도 사람마다 평가가 다른 것이다. 여기에 더해 한국 법관들의 판단력은 상당한 경우 권력과 분위기에 영합함으로써 연년세세 세간으로부터 지탄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같은 12.12 사건에 대해 전두환 시대의 재판관들은 정승화를 죄인으로 재판했고, 세상이 바뀌어 민주화 세력이 사회여론을 지배할 때에는 헌법이 규정한 일사부재리 원칙까지 위반해 가면서 전두환을 죄인으로 재판했다. 어제의 역적이 충신이 되고 어제의 충신이 역적이 된 것이다.
최규하-전두환 시대, 1980.3.13. 정승화는 국방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김재규 내란을 방조한 혐의로 징역10년을 선고받고 같은 해 3.18. 관할관의 확인조치에 의해 징역7년으로 감형, 동년 3.25.에 항소를 취하함으로써 3.26. 그의 죄가 확정되었다.
천하의 무개념 뚝건달 김영삼의 졸개들
바야흐로 정권이 바뀌어 민주화 시대가 됐다. 1997.4.17. 대법원은 헌법상에 명시된 일사부재리 원칙을 무시하고 1980년에 했던 재판을 다시 했다. 1980년도에 사법부가 했던 판결은 무효라는 것이다. 민주화 재판관들은 "12.12는 신군부의 정치적 야욕이 작용한 하극상 반란 행위이고, 5.18은 신군부에 의한 내란목적 살인행위이며, 정승화는 억울한 피해자"라고 결론지었다. 전두환을 무기징역에 처하고 금 2,250억원을 추징하며, 노태우를 징역 17년에 처하고 금2,628억 9,600만원을 추징한다는 판결에 따라 왕년의 군출신 대통령 전두환과 노태우는 감옥살이를 했다.
빨갱이 사냥시대와 빨갱이 전성시대
지난 1970-90년대의 역사는 김대중-도시산업선교회-위장취업-386 주사파로 연계되는 소위 민주세력을 한 축으로 하고, 이들 민주화세력을 좌익세력으로 간주한 군사정권들을 다른 한 축으로 하는 좌-우 양 진영 간의 끈질긴 투쟁의 역사였다. 이런 와중에 발생한 12.12 및 5.18은 이 두 세력 중 누가 정권을 잡았는가에 따라 정통역사가 반역의 역사로, 반역의 역사가 정통역사로 뒤바뀌어 왔다.
시류에 영합하는 법관들은 권력이 주도하는 역사재판에 도장을 찍어 준 들러리가 되었다. 전두환 시대의 법관들은 5.18을 김대중이 불순세력과 연대하여 일으킨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라고 판결했고,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잡은 시절에는 5.18을 '12.12로 정권을 탈취한 반란 수괴 전두환 일당이 민주혁명을 주도한 광주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자, 민주주의 혁명을 이룩해낸 광주시민의 위대한 성공사'로 규정했다.
12.12에 대해 빨갱이 편 들면 빨갱이 국가 초대해
5.18을 “광주사태-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 아니라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5.18을 탄압한 전두환 군부 세력을 불법 내란 세력으로 단죄해야만 했고, 이 설계도에 따라 12.12는 당시 2성장군에 불과했던 전두환이 4성장군인 정승화 총장을 불법으로 체포하고, 최규하 당시 대통령을 겁박하여 정승화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하극상 내란사건으로 몰아갈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5.18은 12.12와 동전의 앞뒤를 구성하는 하나이며, 5.18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12.12의 역사가 먼저 쓰여져야 했다.
5.18은 북한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민중혁명으로 칭송되고, 민주화세력에게는 그들이 세를 확산시킬 수 있는 가장 큰 명분과 금전적 보상수단으로 이용돼 왔다. 광주를 민주화의 성지로 부각함으로써 한을 품을 만큼 차별대우를 받아왔던 전라도의 위상이 변한 것도 사실이다.
5.18역사에 정치꾼과 법관은 간여하지 말아야
그러나 지금은 무시하지 못할 수많은 국민이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도 아쉬운 게 하나 있다. 5.18 이 민주화운동이었다는 데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12.12의 정당성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전두환의 비자금 문제에 격분한 나머지 그가 한 행위 모두가 나쁜 행위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정리되지 않는 이러한 생각들이 ‘전두환을 무조건 5.18의 원흉’이라고 몰아붙이고 싶어 하는 소위 민주화세력에 힘을 보태주고 있는 것이다.
5.18과 전두환은 역사의 천적이다. 5.18을 살려내려는 사람들은 전두환을 악마로 몰아왔고, 그러기 위해 12.12를 하극상에 의한 군사반란으로 매도해 왔다. 전두환 등 군부세력은 선동-선전에 훈련된 민주화세력이 장악한 언론과 출판에 의한 여론몰이 인민재판에 속절없이 무너져 광주시민들을 학살한 내란의 수괴로 몰려온 것이다.
5.18을 "광주사태"로 규정한 세력도 정치세력이며,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한 세력도 정치세력이다.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국민들의 인식이 달라진 것이다. 따라서 5.18은 권력에 영합하는 법관들이 써야 할 것이 아니라 남 보기에 객관적 위치에 있는 학자들이 다시 써야 한다.
수사기록 연구하기 전까지 필자도 전두환 오해했다
필자 역시 방대한 자료를 조사하기 전에는 12.12를 하극상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방대한 수사 자료를 검토한 결과 12.12는 당시 47세에 불과했던 신참 육군소장이 이룩한 위대한 역사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그가 아니었다면 한국사회는 부하를 신뢰하면서 부하의 집에서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를 풀려했던 박대통령과 그의 경호원 8명을 순식간에 살육한 패륜아 김재규, 그리고 그를 도와 세상을 장악해 보려던 정승화 일당들에게 한 시대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 같은 수사자료를 가지고도, 같은 공판자료를 가지고도 역사바로세우기 판사들은 다른 판결을 했다. 정승화와 김재규 그리고 이 두 사람이 거느리는 군맥들에게 세상이 넘어가지 못하게 저지했던 훌륭한 전두환을 놓고 반역자라 판결한 것이다.
박대통령이 시해당한 10.26의 밤에 최규하 총리 이하 수많은 장관들과 장군들이 보여준 행동들을 보면,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한자리하며 큰소리치던 인간들이 얼마나 비열할 수 있는지를 생각게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챙겨야 할 역사로부터의 교훈인 것이다.
생쥐 행세한 최규하
경호실장 차지철은 대통령을 방치한 채 제 몸 숨기기에 급급해 했다. 사고의 진상규명을 명령해야 할 최규하 총리는 김재규가 범인인줄 알면서도 김재규가 원하는 대로 국무회의를 주재했고, 회의 도중 빠져나와 김재규에 가결내용을 귀띔해주었다. 김재규 범행을 눈치챈 정승화는 국방장관 등 그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고 혼자서 김재규가 하라는 대로 계엄군 배치를 직접 주도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청와대 경호병력이, 청와대 울타리 밖에 동떨어져 있는 궁정동 사고현장으로 나가는 것을 차단하는 명령을 내리고 수경사로 하여금 청와대 외곽을 포위케 함으로써, 사고현장를 한동안 은닉시키는 등, 컴퓨터보다 더 치밀한 조치를 순식간에 해치우면서 김재규에 중간보고를 했다.
국방장관 노재현은 계단 밑에, 고건 정무수석은 병원에 숨어
노재현 국방장관은 멀리에서 나는 총소리에 놀라 8시간 이상 숨어 다니다 국방부 청사 어두운 계단 밑에서 초병에 의해 발각되었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김재규와 한편이 되었다가 2시간 만에 마음을 바꾸어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밀고했다.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내무장관, 법무장관 들은 있으나 마나였고, 대통령 정무수석이라는 고건은 사고 직후 병원으로 사라져 숨어있었다. 이처럼 박대통령이 사라진 이후에는 어른이 없었다. 모두가 김재규와 정승화의 위세에 눌려 소리 없이 몸조심만 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었다.
김재규 혁명에 올인한 정승화
정승화! 그는 자기 행적을 감쪽같이 속이고 대통령보다 더 막강하다는 비상계엄권을 휘두르는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약점을 알고 있는 전두환을 누르고 김재규를 옹호했다. 스스로 최규하를 2년 시한의 대통령으로 앉혔고, 김종필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는 과정에 뛰어들어 이를 저지시키는 등 정치를 직접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3군사령관,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을 위시한 수도권 일대에 포진돼 있던 내로라하는 군벌들은 모두가 김재규-정승화 계열, 대세는 이미 꺾여 있었다.
47세의 2성장군 전두환이 국가 살려냈다
고관대작들은 새 세상에 적응하려고 몸조심하기에 급급했다. 정승화는 대통령보다 더 막강한 계엄사령관이 되어 새 세상의 정상에서 칼을 치켜들고 한 시대를 호령했다. 세상은 오직 정승화의 세상이었다. 누구도 정승화 앞에서는 감히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던 세상이었다. 그런 정승화를 체포한다는 것은 상상을 넘어도 한참 넘는 일이었다. 그런데 육군 소장으로 진급한 47세에 불과했던 청년 장교 전두환이 이끄는 소수의 군인들에게 오아시스와 같은 기개와 애국심이 살아있었다. 그러했기에 전광석화의 속도로 김재규를 구속할 수 있었고, 이어서 정승화를 전격 체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념과 애국심이 없이는 꿈도 꿀 수 없는 생사를 건 도전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전두환 미워했던 국민들이 전두환 칭송
전두환이 대통령 직책을 어떻게 수행했고, 정권 말기에 어떻게 부패했는지 그건 별도의 문제다. 단지 필자는 12.12가 민주화세력이 매도하고, 민주화세력에 아부한 극소수의 법관들이 판결했던 바와 같은 그런 하극상도 아니며, 쿠데타도 아니며, 군사반란이 아니라는 것을 수사기록들을 통해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울러 헌법을 스스로 능멸한 민주화 법관들의 곡학아세적 매국행위도 함께 고발하고자 했다.
2021.12.18.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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