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306] 김경재 증언과 권영해 증언의 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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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8-02 16:39 조회11,56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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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메시지306]
김경재 증언과 권영해 증언의 해부
김경재, 2023.5.10.에 입 열었다.
김경재는 1942년생, 여수에서 출생해 순천고,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 정치학과와 경제학과는 예부터 간첩이 장악해 학생들을 세뇌 포섭하였다. 김경재 역시 반 박정희 운동을 벌이다 신변에 위협을 느껴 미국으로 건너갔고, 김대중이 반국가단체 한민통을 구성하면서 미국과 일본을 왕복할 때인 1971년에 김대중의 공보 비서가 되었다. 펜실베니아대에서 국제 정치학 석사를 했고, 박사 과정을 밟다가 포기한 모양이다. 그리고 ‘김형욱 회고록’을 썼다. 김대중 시절에 국회의원을 했고, 박근혜 시절에 자유총연맹 총재를 했다.
김경재는 새정치 국민회의 국회의원 시절인 1999년 12월 6일부터 14일까지 무려 8박 9일 동안 김대중 비밀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갔다, 그를 안내한 북한인은 김경락. 유럽 국가들의 대사, 남북 적십자 회담의 북한단장등을 역임한 거물이었다. 김대중과 김정일이 평양에서 6.15선언을 하기 6개월 전에 북한은 김대중이 보낸 특사를 무려 9일 동안이나 환대한 것이다. 환대를 받는 동안 북의 파크너 김경락은 김경재에게 극비 중의 극비 내용을 털어놨다. “5.18을 북이 주도했다”며 평양 신미리 애국 렬사릉 좌측 부지에 광주에서 전사한 인민군 애국 렬사들의 가묘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김경재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믿지 않으려 하자 김경재를 손수 안내한 노동당 중앙위 김학철 후보위원(거물)과 또 다른 김 씨가 “왜 우리 말을 믿지 않느냐. 우리가 왜 가짜 묘를 방대하게 만들겠느냐. 김 의장님도 진실하시겠지만 우리도 진실합니다” 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
김경재는 이 이야기를 24년이 지난 2023년 5월 10일, 전 연합뉴스 편집국장이자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겸 편집위원인 서옥식에 증언했고, 이 증언 내용은 KNews 오피니언 란에 A4지 34매의 분량으로 대서특필되었다.
北 애국열사릉에 ‘광주5‧18’ 참가 특수공작원 묘역 조성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대한언론 KNEWS (knews1.co.kr)
5.18은 북한이 주도했다는 북 고위층의 말은 1999년 12월 당시 김경재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충격이었고, 그래서 몸이 떨려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황급히 돌아섰다고 했다. 그리고 24년이 지난 2023년 5월 10일에야 그가 북에서 들었던 진실, 보았던 진실을 털어놓았다. 24년 전에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던 사실이 이제는 믿어졌다는 말이다.
김경재, 북한에서 본 내용, 김대중에 보고했다.
5.18을 북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보고받은 대통령은 김영삼, 1997년 2월이었다. 김영삼은 이를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알려지면 그가 벼락을 맞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1998년에 이 사실을 국정원으로부터 보고받았을 것이다. 김대중 역시 진실을 숨겼을 것이다. 5.18의 진실이 알려지면, 정권과 전라도와 빨갱이 세력 모두가 날벼락을 맞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밀을 알고 있는 황장엽과 김덕홍을 미워하고 탄압했던 것이다. 북한은 이 비밀을 왜 김경재에게 알리려고 애를 썼을까? 1999년 12월, 북한은 돈에 쪼들여 있었다. 그래서 김대중에게 비밀심복을 보내라 명령했을 것이다. 북은 김대중의 심복을 어떻게 활용하려 했을까? 김대중의 약점을 가지고 협박하려 했을 것이다.
그 약점이 바로 ‘5.18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약점이 잡히면 굴종해야 한다. 5.18은 김대중이 주도한 것으로 남한 사회 전체에 알려져 있고, 5.18로 인해 천지가 개벽하여 전두환 대통령이 감옥에 가 있는 엄중한 마당에 5.18을 북한이 주도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김대중은 물론, 전라도와 빨갱이 세력 모두가 멸망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하기에 김대중은 취임하자마자 이미 보안 조치를 강화시켜 놓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취임 2년이 다 돼 갈 때 김정일이 김대중의 심복을 보내라 했고, 그 심복에게 김대중의 약점을 주입시키고, 증거까지 보여준 것이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비밀 조치를 알 리 없는 김경재는 평양 방문 결과를 그대로 보고했다고 한다. “8박 9일, 제가 다녔던 곳마다 남측에 현찰을 원합니다. 쌀, 의약품 등 물품도 좋겠지만, 무엇보다 현찰을 원합니다. 정상회담 조건으로 거액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정상회담 대가로 현찰을 제공하면 언젠가는 부메랑이 되어 대통령께 책임이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이 김경재의 말에서 김대중은 김경재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을 것이다. 이로써 김경재는 김대중의 약점을 알고 있는 불편한 존재로 변했다. 심복에서 불청객 신분으로 추락한 것이다. 이후 김경재와 김대중은 소원 관계를 거쳐 갈라서게 되었다. 그리고 김경재가 우려했던 현금 4억 5천만 달러를 북에 몰래 주었다가 미국 정보기관에 의해 덜미가 잡혔고, 송금 심부름을 한 박지원은 감옥살이를 했다.
황장엽은 1997년 2월, 권영해에 490명 명단을 주었다. 그 명단은 김주호 박사팀을 통해 2012년 9월 27일 서울 정동 프란체스코 교육회관 기자회견 자리에서 밝혀졌고, 명단에는 성명, 출생지, 생년월일, 입대 연도, 전사 연월일, 계급(군사 칭호)순으로 작성돼 있고, 전사 연월일은 490명 모두가 1980.6.19.였다. 이 명단을 황장엽으로부터 접한 권영해는 “이걸 어떻게 믿느냐”며 짜증 섞인 말투로 추궁했을 것이고, 이에 황장엽은 “못 믿겠으면 청진시 낙양동 청진역 북쪽 800m 지점에 사람을 보내 추모비를 확인해 보라” 했을 것이다. 결국 국정원 공작팀은 청진 공업대학 부근 낙타산 해발 700m, 북위 41도 47분 53초, 동경 129도 47분 57초에 세워진 [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묘] 사진을 찍어온 것이다. 결국 이 [렬사묘]가 청진에서 평양 신미리 애국 렬사묘로 임시 가매장된 것이 된다. 1997년 2, 청진 묘가 탄로 난 사실를 보고 받았을 북한이 다시 보안을 위해 2년 후에 1999년 말에 [애국 렬사묘]로 이전시킨 것이 된다. 결국 5.18은 북한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김경재와 권영해로부터 동시에 크로스 체크 형태로 더불 확인됨으로써 이제는 만천하에 밝혀졌다. 그런데 5.18의 진실이 밝혀지면 김영삼도 지옥으로 가야 하고, 김대중도 지옥으로 가야 했다. 여기에 박근혜와 박근혜 시종 역에 불과했던 이병호가 마지막 방호벽을 쳐주었다. 여기까지가 5.18에 대한 진실이고, 정치꾼들의 협잡 행위들이다.
결론적으로 5.18은 북한이 주도했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확언했고, 광주에서 전사(?)한 인민군 490명의 명단이 기재된 문서를 2012년 김주호 박사에게 넘겨주어 발표케했다. 일련번호가 매겨진 이름에는 이름, 출생지, 생년월일, 입대 연도, 전사 연월일, 계급(군사 칭호)이 기재돼 있다. 생년월일은 대부분 1950~1951년이고, 입대 연도는 대부분 1968~‘70년이다. 중사와 상사는 불과 몇 명이고, 모두가 소위 중위 대위였다. 병사는 없다. 모두가 장교였다. 장기간 특수 훈련을 받은 살인기계요, 만능의 기술을 가진 맥가이버들이었다는 뜻이다.
깨끗이 풀려진 퍼즐
김정일의 리더십은 달러에서 나온다. 1995년~’98년까지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대로 300만이 아사했다. 달러가 없어서 리더십이 시드는 시기였다. 다급한 김정일은 [5.18의 진실]을 김대중에 대한 협박 수단으로 활용할 것을 생각해냈다. 그래서 밀사를 보내라 해서 김경재가 갔고, 북 간부들은 김경재를 만날 때마다 현찰을 아쉬워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협박 수단인 인민군 렬사묘를 보여주었다. 이 협박이 주효하여 김대중은 모사꾼 박지원을 통해 누구도 모르게 4억 5천만 달러, 북한에는 천문학적인 달러를 보냈다. 6.15 공동 선언은 이를 덮고 포장하기 위한 쇼였다. 이후 김대중은 재임기간 중 약점 잡힌 간첩이 되어 국정원을 ‘간첩원’으로 개조했다.
사기 수법에 능한 김대중은 입지를 굳히기 위해 ‘적진에 가서 적장을 만나 평화의 문을 연 위인’이라는 취지의 시나리오를 써서 스웨덴 한림원을 공작했고,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김대중에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다. 대한민국 역사, 참으로 더럽다. 김영삼이 더럽혔고, 김대중이 더럽혔고, 김대중에게 박정희 죄를 사죄한 박근혜가 더럽혔다.
5.18의 진실! 김영삼은 1997년 2월에 알았고, 김대중은 1999년 12월에 알았다. 이 두 인간은 전두환이 너무 억울하게 탄압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양심에 가책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이 김영삼을 만나자하여 전두환을 사면시키자 제안했을 것이다. 5.18의 진실에 대한 그림은 이제 명백하게 그려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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