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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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08-22 16:51 조회5,15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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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신화
박정희 모략자들
빨갱이 임헌영(본명 임준열) 등이 “백년전쟁” 동영상에서 한국경제 발전은 박정희가 이룩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영향을 받아 자연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고 모함했다. 빨갱이들은 거북선을 이순신 장군이 만든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위장된 간첩들은 박정희가 여성 편력이 있다고 비방한다. 박정희를 은근히 모략하는 숨은 간첩들의 모략이 지금 진행 중에 있다. 여기에서 하나 짚고 넘어갈 사건이 하나 있다. 정인숙이 누구의 아들을 낳았다는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2007.3.14. 경향신문의 보도 내용이 있다. 이는 정인숙이 박정희의 여자라고 회자됐던 모략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기사다. 필자는 필자가 쓴 [뚝섬 무지개]에서 정인숙이 정일권의 아들임을 실제 경험을 통해 밝혔다. 아래는 2007년 3월의 경향신문 기사의 요약이다.
“경기 골프장 사장 납치범 일당의 핵심 인물인 기업 인수·합병회사(M&A) 대표 정성일씨(38)가 3공 시절 한강변 의문의 권총피살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정인숙 여인의 친아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정씨는 골프장 매각을 통한 수입금 3500억원 중 1500억 원을 받기로 하고 납치사건의 기획부터 범행까지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 . ”
2010년 3월 9일, 경남일보 기사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이상의 기사들과 필자가 직접 겪은 에피소드 만으로 정인숙은 정일권의 애첩이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정인숙과 박정희를 연결시키는 인간들이 있다. 우익 진영의 최고 애국자라는 탈을 쓴 인간들이다.
5.16과 박정희에 대한 세계지도자들의 평가
키신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란 어렵다. 러시아가 동시에 하려다 붕괴되지 않았나. 박정희의 판단이 옳았다. 19-20세기에 무력으로 정권을 잡아 나라를 구한 혁명이 5개다. 일본의 명치유신, 터키의 게말파샤, 이집트의 나세르, 페루의 벨라스코, 한국의 박정희다. 이중 경제 기적을 이룩한 혁명은 오직 5.16이다.
엘빈토플러(제3의 물결): 민주화는 산업화가 끝나야 가능한 것이다, 자유는 그 나라 수준에 맞게 제한돼야 한다. 이를 놓고 독재라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박정희 모델은 세계가 본받고 싶어 하는 모델이다.
폴케네디(강대국의 흥망): 박정희는 세계 최빈국의 나라를 불과 20년만에 세계적인 경제 국가로 키웠다.
푸틴: 박대통령에 관한 책은 다 구해 달라. 그는 나의 모델이다.
아이젠하워: 박정희가 있었기에 한국은 공산주의 의 마지노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리콴유: 박대통령이 눈앞의 이익만 좇았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말레이지아의 마하티르 전 총리와 캄보디아 훈센총리도 박대통령 추종자로 유명하다.
등소평: 박정희는 나의 멘토다.
후진타오: 나는 새마을 운동을 공부한 사람이다. 상당수의 중국인들이 박정희를 존경한다.
김정일: 옛날에는 유신이다 해서 비판이 많았지만 새마을 운동 덕에 경제가 성장한 건 사실 아니냐. 서울은 도쿄보다 더 훌륭한 도시로 조선의 세계적인 자랑거리다.
일제 공간의 조선
본질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일제 강점기]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빨갱이들이 지어낸 말이다. 강점을 한 것이 아니라 고종 스스로 일본에 바친 것이다. 당시 세계의 유수 열강들은 누가 더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느냐를 국가의 프라이드로 여기면서 식민지 쟁탈전에 몰입했다. 그러나 조선만은 이러한 외부 세상에 눈과 귀를 막고 오직 정적을 모함-모략하여 죽이고 귀양 보내는 데만 열중했다. 당시 이러한 나라라면 누구에게든 먹힐 수밖에 없었다.
1905 년7월 29일,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육군장관 W.H. 태프트 사이에 비밀 협약이 맺어졌다. 미국이 필리핀을 갖는 대신 일본은 조선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며, 이 밀약에 의해 1910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요됐다. 러-일 전쟁이 발발 직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시 조선을 이렇게 평가했다. “1900년 이래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책임을 져서는 안 되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여 한국인에게 불가능했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능률 있게 통치한다면 한국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람과 민족의 DNA가 환경과 세월이 바뀌었다 해서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었던 것이다. 미국의 원자탄에 의해 한국이 해방됐을 당시에도 미국은 조선에 자치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혁명 공간의 한국 경제
1945년에서 1959년까지의 15년간,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원조액은 연평균 1억 8천만 달러. 현금이 아니라 물자였다. 정부는 미국에서 받은 잉여농산물, 유연탄, 석유 등을 시장에 팔아 그 돈(대충자금)으로 세출 예산을 세웠다. 기업이 없고, 80%의 인구가 피폐한 농촌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피똥을 누는 환경 하에서 세금이 어디에서 걷혔겠는가. 반면 잉여농산물 유입은 농촌을 피폐화 시켰고, 젊은이들의 이농현상을 초래하여 수백만의 실업자를 유발시켰다.
해방 이래 보잘것없긴 하지만 그 나마의 대기업들은 위에다 정부 예산을 부어넣고, 밑에서는 업주와 정치인 및 관리들이 빼가는 돈통에 불과했다. 밀수품이 범람하고 정경유착으로 사회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국가의 운명이 암담하기만 했다. 고관대작들은 축첩과 양주와 춤으로 사치와 방탕에 빠졌고 대부분의 정치꾼들은 사기꾼 같았다.
1961년, 박대통령은 장충단 공관에서 집필한 그의 메모식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 7개년간의 원조는 연평균 5억 달러였다. 경제 원조가 2.8억불, 군사 원조가 2.2억불이다. 환언하면 한국경제가 완전히 자립하자면 군사 면을 제외하고도 2.8억불과 무역적자 5천만 불을 합쳐 3.3억 불을 새로이 벌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렇게 된다 해도 이는 현상 유지하는 데 그치는 일이다. 이에 가중되는 연평균 2.88%의 인구 증가, 즉 72만 명의 압력은 어찌할 것인가? 원조를 받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기적 이외에 바랄 것이 못되지 않는가? 위기를 고하는 수많은 국민의 생활난, 해마다 늘어만 가는 식량부족, 30%의 실업률, 모두가 시급한 해결의 길을 바라고 있는데 반해 해결방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업률 30%! 지금의 실업률은 얼마인가? 3.5%. 매년 30만 명의 대학생들이 졸업을 하지만 겨우 5,000명 정도만이 취직을 하는 지금의 실업률이 겨우 3.5%라 하니, 당시의 30% 실업률이 얼마나 살인적인 것이었겠는가! 5.16혁명! 미국은 박정희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원조를 주면 미국이 세계의 군사 쿠데타를 지원한다는 선례를 남기는 것이기에 미국은 박정희를 거머리 보듯 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1964년, 서독에 광부를 팔고, 간호원을 팔았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손이 고우면 떨어질까 연탄에 손을 비비며 손을 거칠게 만들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하루 종일 닦았다.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을 캤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간호사와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할 수 있을까?” 이들에 붙여진 이름이 ‘코리안 엔젤’이었다. 이들을 방문한 박정희! “우리 열심히 일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합시다.” 얼굴이 찌든 광부와 간호사들에게 그는 이 말만 반복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광부와 간호사들이 몰려나와 육 여사와 박대통령의 옷을 잡고 통곡했다.
광부들이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 절을 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서도 박 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손수건을 주면서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 국회에서도 연설을 했다.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 등 이때, 한국은 68 달러였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북한은 우리보다 2배, 필리핀은 3배나 더 잘 살았다. 가발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가 다녔다. “머리카락 파세요!” 아낙네들이 머리카락을 잘랐다. 서울 간 아들놈 때문에 잘랐고, 쌀을 사기 위해 잘랐다.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수출을 했다. 곰 인형도 팔았다. 쥐잡기 운동! ‘코리안 밍크’도 만들어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내다 팔았다. 1965년, 수출이 1억 달러였다. 세계가 놀랐다. 그들은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1965년 박정희는 더 많은 대한민국을 부흥시키기 위해 더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 한국은 배상금만 달랑 받은 것인가?
한일회담 14년, 이승만-장면 정권에서 9년간 협상했고, 박정희 정권 5년 만에 타결을 보았다. 타결액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3억 달러, 총 8억 달러였다. 정부 부문 청구액 5억 달러는 66년부터 75년까지 10년에 걸쳐 나눠 받되, 매년 무상 3,000만 달러, 유상 2,000만 달러 총 5,000만 달러 한도 내에서 양국 정부의 협의에 의해 받기로 했다. 유상 2억달러에 대해서는 산업시설과 기계류 등 공공차관의 형태로 7년 거치 13년 분할 상환하되 금리는 연 3.5%가 적용됐다. 이에 대해서는 마치 선진국들의 은행이 기업 프로젝트에 자금을 빌려준 후부터 자금 사용 과정을 감시하듯이 일본 역시 빌려주는 돈을 받지 못할까봐 사용 과정을 감시했다.
박정희는 이 돈을 어디에 썼나?
76년 당시 경제기획원 발간 '청구권자금백서'에 따르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55.6%가 포항제철 건설 등 광공업 투자에 쓰였다. 유상 2억 달러는 대부분 포항제철 등 기간산업과 경부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 확충에 사용됐다. 사회간접자본 확충에도 전체 자금의 18%를 투입했다.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2,161만 달러).경부고속도로 건설(689만 달러). 상수도 확장(409만 달러). 한강철교 복구(89만 달러). 영동화력발전소 건설(178만 달러). 철도시설 개선(2,027만 달러) 등이 이때 이뤄졌다. 상대적으로 농어민에게 돌아간 자금은 많지 않았다. 농림업에 7.8%, 수산업에 5.4% 등 농림어업에 총 13.2%를 배정했다.
이 중 포항종합제철 건설에만 무상자금 3,080만 달러와 유상자금 8,868만 달러 등 총 1억1,948만 달러를 몰아줬다. 전체 청구권 자금의 23.9%에 이른다. 광공업용으로 도입된 원자재 1억 3,282만 달러도 대부분 포철을 짓고 공장을 돌리는 데 썼다. 원자재까지 합치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절반 이상을 포철에 투자했다. 이렇게 회계장부에 기록된 금액만 해도 엄청난 액수였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엄청난 이익은 장부에 없는 이익이다. 경제교류, 관공사업, 문화교류 등으로투터 유입된 이익은 장부 금액의 수백 배는 되었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은 청구권 자금을 어떻게 썼나?
일본 정부로부터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은 나라는 아시아 5개국. 필리핀, 한국, 인도네시아, 미얀마, 베트남이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2,000년에 펴낸 ‘대일 청구권 자금의 활용사례 연구’에서 연세대 경제학과 김정식 교수는 이들 5개국 중에서 한국이 청구자금을 최고로 잘 사용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상자금은 필리핀이 5억5,000만 달러로 제일 많았고, 한국이 3억 달러, 인도네시아 2억2,308만 달러, 미얀마 2억 달러, 베트남 3,900만 달러 순이었다. 일본이 차관 형태로 지원하는 유상자금과 민간이 자금을 지원하는 상업차관을 합칠 경우 한국과 필리핀이 각각 8억 달러로 제일 많았다.
인도네시아는 대통령의 개인별장이 있는 곳에 호텔을 짓고, 부유층을 위한 백화점을 지었다. 청구권 자금의 효율성이 가장 낮은 국가였다. 필리핀은 항만 및 도로건설 등에 사용했지만 당초 댐 건설 및 철도 연장 계획이 계획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대지주와 대자본가 등이 필리핀 정치를 주도하면서 일본의 배상금이 이들의 이권을 채우는 데 활용됐다. 미얀마는 파괴됐던 철도 및 도로 복구 등에 주력하면서도 당시 총리의 ‘복지국가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사회복지 부문에도 상당액의 자금을 투입했다. 베트남은 전체 자금의 50% 이상을 발전소 및 송전시설에 투입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박정희 대통령은 자금 유출에 대해 엄청난 단속을 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는 군의 공병대 장교들이 대거 파견되어 날림공사와 자재 유출을 감시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청렴한 집단은 그래도 군인들이었다. 포항제철 공사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기지 않았다면 자금의 수십%가 유출됐을 것이고, 중국의 등소평까지도 그토록 부러워했던 오늘날의 포항제철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씨에게 특별한 마패를 만들어 주었다. 세도가들이 찾아와 여러 가지 압력을 넣거나 회유를 할 때마다 보여주면서 이권과 청탁을 물리치라는 것이었다. 박태준씨는 그 마패를 보여주면서 모든 이권과 청탁을 차단했다.
박정희 집권 초기에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가 한국보다 3배 더 잘 살았지만, 지금은 한국이 이들보다 10-11배나 더 잘 산다. 이는 순전히 박정희가 이룩한 한강의 기적 때문이었다. 이 통계 하나만으로도 오늘의 대한민국은 박정희가 이룩한 신화였다. 아키오모리타와 마츠시타고노스케는 일본 국민의 신앙이지만 한국의 박정희는 세계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신화를 창조한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온갖 욕을 다 먹는다. 가론 유다 같은 이런 인간들에 대해서는 입에 들어가는 수저마저 빼내고 싶다.
월남 파병의 기적
1966-1972년간 월남에서만 직접 획득한 외화는 8억7,250만 달러였다. 이중에서 장병 송금액은 1억7,830만 달러로 베트남으로부터의 송금된 전체 외화의 20.4%에 불과했다. 나머지 80%는 베트남으로의 수출, 베트남에의 군납, 파월 기술자 송금, 파월 지원경비, 파월 건설 및 용역에 의한 수입이었다.
미국의 후원과 한국군의 맹활약, 월남특수가 일궈낸 "신인도"에 따라 외국자본이 물밀 듯 들어왔다. 원조, 차관, 상품 및 용역 수출의 물꼬가 터졌다. 1965-1972간 외자 도입액은 32억8,820만 달러나 됐다. 대미수출을 보자. 1964년에 3,600만 달러였던 것이 10년 만인 1973년도에는 무려 10억2,120 달러로 28.3배로 도약했다.
주한미군이 한국에 뿌린 돈이 8억 달러, 군원이관 중단액이 9,300만 달러 등 총체적으로 한국군이 월남특수로부터 거두어들인 경제적 이익은 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된다. 장병 1인당 17,000 달러씩 국가에 기여한 것이다. 이는 소위봉급 83년 치에 해당하는 돈이다.
이는 장장 14년간의 교섭 끝에 1965. 6.3일에 얻어낸 대일 청구자금 즉 무상원조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도합 8억 달러에 비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외화보유고를 보자. 1964년도 외환보유고는 겨우 1억 2,800만 달러였으나, 1975년에는 15억4,000만 달러, 1978년에는 49억4,000만 달러로 폭증했다. 남북한 1인당 GNP를 보자. 1953년, 남북한 1인당 GNP는 각기 67 달러와 53 달러로 남한이 1.2배 더 높았다. 그러나 1959-1965 6년간에는 역전됐다. 남한이 북한의 60-70% 수준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월남이 패망한 1975년에는 남한이 북한보다 1.4배 앞섰고, 지금은 29배로 앞서가고 있다.
한국군은 월남의 8개항만 중 5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월남의 주요 공사는 한국 기업이 맡았다. 당시 천막회사였던 한진과 현대는 기술도 없이 담요나 모기장 그리고 급수 대책도 없이 무작정 월남 땅으로 상륙했다. 한진은 월남에서 1.5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현대는 캄란 부두 공사 500만 달러를 비롯하여 연평균 100만 달러 이상의 계약고를 올렸다.
1974년초 청와대 오원철 경제 수석이 박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중동은 고온에다 모래 바람이 부는 열악한 땅이다. 금녀, 금주의 땅이라 선진국 근로자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가려 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군인 정신으로 무장된 수십만의 제대 장병이 있습니다. 월남 참전 용사들도 많습니다. 여자 근로자가 만든 상경공업 상품을 수출하여 지탱해오던 한국경제의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1965년-75년 9년간 중동건설 수주액은 불과 2,400만 달러였다. 1974년에는 8,900만 달러, 1975년에는 7억5천만 달러, 76년에는 24억3,000만 달러, 77년에는 33억 8,700만 달러, 78년에는 79억 8,2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오늘날의 기록과 비교해 보라. 그 엄청남 기술과 해외수주 기록을 가지고도 지금 현대를 비롯한 한국의 모든 건설업이 중동 수주에 냉대를 받으면서 줄줄이 도산하고 있지 않은가?
중화학 공업 육성과 생산기반 건설의 천재성
박대통령이 집권하기 이전에 한국엔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의 공식 통계만으로도 실업률은 1963년 29.9%, 1964년에는 29.7%였다. 공장이라고는 겨우 제분, 제당, 제약 회사들과 같은 것뿐이었고, 기계공업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손톱깎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강도와 정밀도를 규정하는 스펙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회 전체가 무력감으로 가득차 있었고, 청년들에겐 앞길이 막막했다.
박대통령은 월남에서 벌어들인 돈을 가지고 경부선, 댐 공사, 발전소 등 대규모 인프라를 건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학교들을 세워 기능공을 대량으로 양성했다.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박대통령은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장을 지어달라고 호소했다. 대통령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일자리가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눈물과 한숨의 대명사 "보릿고개"라는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1960년,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는 우리에게 한참 우러러 보이는 선진국, 모두가 우리보다 3배나 더 잘 살았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어떠한가?
필리핀은 1인당 1,030달러, 우리의 11분의1이다. 인도네시아는 968달러, 태국은 1,940달러, 북한은 580달러, 한국은 17,000달러, 모두가 한국에 비해 새카맣게 뒤떨어졌다. 박정희가 이룩한 신화는 기적 그 자체였다.
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 누구도 흉내 못내
세계인들은 뉴딜 정책이 8백만 일자리를 만들어 낸 것에 대해 두고두고 칭송한다. 하지만 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는 이보다 훨씬 더 기막히다. 앞이 보이지 않던 그 시대에 어떻게 기능공을 양성해서 일자리를 폭발적으로 만들어 낼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필자는 지금도 감탄하고 있다.
첫째 ,그는 기능학교들을 만들어 기능공을 대량으로 길러내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이들 기능공들의 친구가 됐다. 기능공들은 국제기능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는 게 소원이었다. 매년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공장장이 사장보다 더 높은 월급을 받았다. "대학 가야 소용없다, 기술을 배워야 대우 받는다"라는 말이 사회적 유행어가 됐다.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장을 지어달라 호소했다. 박대통령의 약속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하는 일이라 중간에서 공무원들이 장난질을 하지 못했다. 한국이 조립을 많이 해서 팔면 그만큼의 부품과 소재들을 앉아서 팔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공장을 짓는 것은 외국기업에게 또 다른 매력이었다. 한국의 일자리는 이렇게 해서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둘째, 그는 한편으로는 대규모 공단을 지어 기업인들을 입주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기업들에게 외국에서는 이미 사양화돼 가는 수많은 제품들에 대한 기술 도면을 얻어다 주었다. 그러나 공장에는 외국어로 쓰여진 기술 자료(TDP, Technical Data Package)를 해석하는 공학도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외국에 나가있는 과학기술자를 대거 유치하여 기업을 지도하게 했다. 생활필수품마저 고갈됐던 당시엔 한동안 물건이 없어서 못 팔 판이었다. 굶주린 배에 음식이 한없이 들어가듯 만들기만 하면 모두가 팔렸다. 이런 호황은 조선 역사에서도 없었고, 일제 치하에서도 없었다. 공장을 가진 기업들은 한동안 땅 짚고 헤엄치듯이 돈을 긁어 부자가 됐다. 기업은 날로 번창하고 생산 설비는 더욱 팽창했다. 그만큼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당장에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는 미래에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동력을 키우는 데에도 착안을 했다. 참고로 그가 얼마나 미래 지향적이었는지는 창원 공단에 나있는 광활한 도로 폭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주위의 의아심을 무릅쓰고 그는 넓은 도로를 건설할 수 있는 땅을 그때에 사두었다. 훗날 땅값이 오르면 넓은 도로를 건설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빠듯한 나라 살림에서도 오늘날의 과학 단지를 만들어 냈다. 과학 단지야말로 미래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핵심적 원동력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과학자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고 그들 곁을 자주 찾았다. 대통령을 좋아한 나머지 과학자들 중에는 과로를 반복하다가 순직한 이들도 꽤 있었다. 과학촌 수장들이 박대통령을 만나기 원하면 대통령은 국무회의 중에도 만나주었다. 대통령이 이렇게 하니까 장관들이나 공무원들이 과학자들을 지금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대전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에는 그가 며칠씩 머물던 방이 있었다. 그 방은 과학기술에 대한 그의 일선 지휘소였다. 그러나 그가 떠나고 난 지금까지 그 방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후의 대통령들에게는 과학이 입으로만 중요했다.
국가 경영 능력만을 보면 박대통령은 천년에 나올까 말까한 사람이라는 걸 필자는 믿고 있다. 외국 지도자들은 그의 국가 경영 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등소평이 박정희를 숭상한 이래 중국은 지금 박정희를 경제선생님으로 모시고 경제 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베트남의 도이모이 역시 그의 성장모델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국의 누가 뭐래도 박정희는 아시아 10대 인물 중 상석에 속해있다.
반면, 김대중의 일자리 만들기를 보자. 공공근로 사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세금을 배급해 주었다. 들에 가서 풀을 뽑고 코스모스를 심으면서 절반 이상을 놀다가 오면 하루에 22,000원을 주었고, 산에 가서 나무를 벤다며 소주 마시고 낮잠을 자다 오면 37,000원씩을 주었다. 이렇게 쉽게 돈을 버니까 이들은 공장이나 들에 나가 힘들게 일하지 않았다. 김대중의 일자리 만들기는 사실상 일자리 죽이기였다. 김대중 정부에서 무너진 기업 수는 사상 최고에 이르렀고, 김대중은 기업 죽이기의 명수였다. 시쳇말로 쨉이도 안 되는 매국-빨갱이 정치꾼이 배우지 못한 무리들을 이끌고 박정희를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한일협정 없었다면 한국은 지금도 거지국
“청구 자금이 적어도 50억 달러는 돼야 했다”는 근거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박정희 죽이기에 나섰다. 한일협정이 체결되던 1965년, 일본의 외화보유고는 겨우 14억 달러, 일본은 한국말고도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4개국에 돈을 주었다. 모두 14억 달러가 넘는 돈이었다. 청구권이라는 것은 일본이 지은 죄값을 의미했다. 주고받는 것은 손벽이 마주쳐야 한다. 당시 일본인들의 생각은 어떠했는가? 일본인들이 제로 전투기를 만들고, 항공모함을 만들어 미국에 대적했을 때까지도, 조선은 손바닥만한 왕궁에서 서로 모함하고 모략하면서 싸움질하기에 바빴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건설한 철로와 도로, 그리고 지금까지도 끄떡없이 공고하게 유지되는 교량과 터널, 항만, 발전소, 비행장을 당시의 위정자들이 건설할 수 있었을까?
한국 국민의 고혈을 짰다고 하지만 일본 총독부가 한국에서 거둔 자원만을 가지고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유수한 기업들이 자본을 투자했다. 조선왕조의 능력으로는 총독부건물, 화신, 신신, 반도 등 당시 최대 규모의 건물들도 지을 수 없었고, 더구나 항만, 철로, 발전소,도로 등을 건설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패전 후 일본은 그들이 이룩해 놓았던 모든 자산들을 고스란히 두고 갔다. 이들 자산들의 가치가 모두 얼마일 것인가? 23억 달러, 이것이 이른바 귀속재산(Vested Property)인 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북조선에는 29억 달러어치의 공공재산, 남한에는 23억 달러어치의 공공재산이 횡재로 굴러왔다. 남한에 쌓인 23억 달러어치의 일본 재산은 미 군정이 이승만 정부에 이양했다. 이는 당시 남한경제 규모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한마디로 이 귀속자산이 없었다면 당시 한국경제에는 실체가 없었다.
이로부터 만 20년 후인 1965년, 박정희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무상으로 공여 받은 액수는 3억 달러, 위의 23억 달러는 이 3억 달러의 약 8배였다. 이 엄청난 자산을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빼앗아 한국에 주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째서 한국에 돈을 주었는가? 미국 때문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윽박질렀다. 8억 달러는 일본의 국력으로써는 상당한 거액이었다. 이로 인해 일본의 대학생과 지식층들이 '굴욕 외교'라며 길거리에 나서 일본 정부를 성토했다.
이명박-손학규-이재오 등을 앞세운 반역세력은 “일본에서 받은 돈이 적다. 더 받아내자”고 지금도 우물 안에서 소리를 높이지만 우리 못지않게 피해를 보고 학살까지 당한 중국은 한때나마 일본에 점령당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돈 달라는 소리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 중국은 앞으로도 배상금을 달라 하지 않을 것이다. 싱가포르 이광요 수상도 치사하게 배상금을 달라 하지 않았다. 바로 이게 자존심이다. 자존심도 모르는 거지근성을 가진 사람들, 영혼에 때가 묻은 이런 사람들 때문에 대한민국은 세계 도처에서 멸시를 받고 있으며, 유독 대한민국의 시계만 거꾸로 돌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것은 정확히 얼마인가? 무상 3억 달러가 전부인가 아니면 8억 달러가 전부인가? 8억 달러 말고 더 있는가? 국교가 정상화되고, 박대통령의 일자리 불리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포항제철에 들어간 기술 대부분이 일본 기술과 자재였다. 국가 전체에 유입된 일본과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비교해보면 7:3으로 일본이 앞섰다.
박정희를 비하하려는 사람들은 별로 배우질 못해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일본의 기술 및 자본 유입을 경제적 침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박정희를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는 함량미달들이다. 일본의 기술과 자본이 없었다면 1987년도에 이룩한 1만 달러 시대는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제조업을 생각해 보자. 눈에 보이는 비용은 불과 몇 개에 불과하다. 재료비, 인건비, 보증수리비, 검사비, 하자수리비, 테스트비, 재작업량, 반품 및 폐품 처리비들이 바로 눈에 보이는 비용들이다. 그러나 장부에 잡히는 이런 비용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이 더욱 크다. 단지 무식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제품이나 서비스에 불만을 품고 말없이 발길을 돌리는 고객으로부터 발생하는 기회비용이 무식한 사람들의 눈에 보이겠는가? 설계 변경으로부터 발생되는 비용, 설계 시간이 많이 걸려서 시기를 잃는 경우의 비용이 그런 이들의 눈에 보이겠는가? 기계 고장으로 발생되는 비용, 근로자가 자존심을 잃음으로써 발생되는 비용이 장부에 기록돼 있는가?
복잡한 행정으로 인해 야기되는 비용, 애매한 목표와 기준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 행정의 복잡성과 무능 그리고 행정 지연으로부터 발생되는 비용, 직장내의 불쾌감으로부터 발생되는 비용, 하청업체를 과도하게 경쟁시킴으로써 발생되는 비용, 비생산적인 회의로부터 발생되는 기회비용 등이 회계 장부에 잡히는 비용인가? 무능한 경영인들은 눈에 보이는 비용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유능한 경영자의 눈에는 수면 하에서 보이지 않고 유발되는 비용이 더 크게 보인다. 신중을 기한다고 행정을 미루고 있는 동안 경쟁업체는 새로운 제품을 가지고 시장을 누빈다. 이런 비용은 회계 장부에 없고 그래서 비용으로 보이지 않는다.
한일협정으로부터 들어온 이익 역시 이러한 식으로 무능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많이 받아내자고 떼를 쓰고 있는 동안 한국을 지지했던 미국의 마음이 식상해질 수도 있으며,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기회만 놓치고 시간만 허송한다. 만일 더 기다렸다가 그 배상금을 김대중이 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기다렸다가 그 후의 다른 대통령들이 받았다면 그들은 그 돈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자기들도 뜯어가고 집행 과정에서 온갖 세도가와 사기꾼들이 달려들어 줄줄이 새어나갔을 것이다.
2021.8.22.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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