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획] 운동권의 실체를 밝힌다.(전경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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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10-17 10:41 조회2,83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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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투쟁 극대화와 학생조직 활성화 시기: 1986년 ~ 1987년
1986년 4월 民民鬪, 自民鬪 사건
民民鬪는 반제 반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의 약칭으로 1985년 全學聯, 三民鬪사건으로 학생운동 조직이 붕괴된 후 1986년 3월 서울大 인문대를 중심으로 결성되기 시작하여 성균관大, 연세大 등 다수의 대학으로 파급되었다. 독재타도와 비타협 원칙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自民鬪와 차이점이 있다. 급진적 사회주의 계열 노선이다. 「민족민주선언」을 기관지로 발간하였다.
自民鬪는 反美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투쟁위원회의 약칭으로 民民鬪와 거의 동시에 표면화된 학생운동조직이다. 민족해방민중민주혁명노선(NLPDR), 즉, 主體思想을 받아들인 점이 民民鬪와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기관지「해방선언」을 발간했다, 1986년 4월 10일 서울大 사회대에서 결성식을 시발로 각 대학으로 확산되었으며, 처음에는 야당을 배격했지만 「5.3인천사태」이후, 개헌투쟁으로 급선회했다.
이후 학생운동에서 自民鬪는 공식적으로는 없어졌지만 이들의 추종 세력이 현재까지 운동권의 주류로 자리잡고있다. 특히, 自民鬪는 主體思想을 지도이념으로 받아 들였다는 점에서 운동권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 소위 말하는 主思派 계열(일명 NL 계열)인 것이다. 이 사건의 관련자는 안상종(연대 民民鬪위원장)등 상당수로 1986년도 학생 운동권 구속자의 대부분이 自民鬪, 民民鬪와 연관되어 있다고 보면 맞다.
1986년 5월 3일 5.3 인천사태
▲ 1986년 5월 3일 야당인 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추진위 경기, 인천지부 결성 대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재야인사, 학생, 노동자들의 격렬한 시위와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무산됐다. 사진은 민통련이 이날 신민당의 행사장소인 인천시민회과 앞에서 '민주화촉진 인천시민대회'를 열고 있는 모습
1986년 5월 3일 신민당의 개헌추진위 인천·경기지부 결성균관大회를 계기로 인천 주안동 시민회관 앞에 학생과 재야단체, 노동자 등 운동권 1만5천여명이 집회를 열고 시위를 벌인 사건. 이들은 '미제축출 파쇼타도'를 내걸고 개헌을 위한 여야간의 타협에 반대했다.
이 사건으로 제성민(연대 3제적, 징역 1년), 우제구(民統聯회원, 징역 1년), 윤영민(民統聯회원, 징역 1년), 서동석(民佛聯 회원, 징역 1년), 이종태(교원대조교, 징역 1년 6월) , 김희란(국민大3, 징역 1년 6월), 송대헌(民統聯회원, 징역 1년 6월), 이재영(인천대3, 징역 1년 6월), 한의석(서울大2, 징역 1년 6월), 민춘기(인하大2, 징역 1년 6월), 강경문(서울大4, 징역 1년 6월), 박병무(이천전기해고근로자, 징역 1년 6월), 김동범(성균관大4제적, 징역 1년 6월), 이병철(무직, 징역 1년 6월), 이헌필(성균관大제적,民靑聯회원, 징역 1년), 김경숙(무직, 징역 1년), 조은옥(서울신학大3자퇴, 징역 1년), 주성종(명지大4, 징역 1년), 국승보(운전사, 징역 1년), 이용주(인하大 무역3제적, 징역 1년), 이상명(인하大 철학3 휴학, 징역 1년), 이수영(연세大법학4 휴학, 징역 1년), 김창식(무직, 징역 1년), 김윤기(국민大 무역4, 징역 1년), 박종문(인하大영문4, 징역 1년), 이승민(서울大의대1휴학, 징역 1년), 심영찬(징역 1년), 강권구(동양피스톤해고, 징역 1년), 이상명(인하大4, 징역 1년), 윤택구(연세大3 제적, 징역 1년), 오희숙(연세大교육학4, 징역 1년), 김천석(연세大화공4, 징역 1년), 이건준(서울大경영3, 징역 1년) 등이 구속됐다.
한 편, 金敎興(김교흥)열우당 의원도 당시 인천大 총학생 회장으로써 5ㆍ3 인천사태에 참여,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1 년, 집행유예 2 년을 선고 받고 풀려났다. 졸업 이후에는 한국여론정치연구소, 제일리서치연구소 등 정치 컨설팅 활동과 국회의원 보좌관 생활을 하다가 산업자원부 장관의 추천으로 중소기업연구원장을 지냈다.
1997년 국민회의에 入黨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수배를 받았던 李光喆(이광철)열우당 의원은 이 사건 이전에도 1980년 5월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 회의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982년에는 반정부 유인물을 배포하다 체포되어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3 년을 선고 받았다. 1985년 졸업 후, 民統聯 지역운동협의회대표, 전북민족민주운동연합 집행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5ㆍ18 관련 강연회에 주로 참석했다. 전주 시민회 대표, 시민행동21 공동대표, 5ㆍ18 기념재단 이사 등을 지냈다.
2002년 개혁국민정당 전북추진위 실행위원장을 시작으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현재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열우당 전북 본부장, 전북발전 시민포럼 대표 등을 맡고 있다.張永達(장영달)열우당 의원도 民統聯 총무국장 시절, 이 사건으로 국가 보안법 및 집회 및 시위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張의원은 그 이외에도 1974 년 한국기독학생회 총연맹 활동 시절, 民靑學聯 사건에 연루되어 긴급 조치법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7 년을, 1975 년 긴급 조치법 9 호 위반으로 징역 1 년, 자격정지 1 년을 추가 선고 받았었다.
출소 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民靑聯) 부의장 및 상임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평민당 13 대 총선대책본부 기획조정실 실장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국민회의 원내 수속부총무,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현재 한-일 의원연맹 부회장을 맡고 있다. 작년 6월, 북한의 NLL 침범 당시, 『꽃게철 만이라도 NLL 부근에 공동어로수역을 설정하자.』는 성명을 발표했다. 韓總聯 합법화를 지지하는 서명,『미국의 對北강경발언이 남북화해 방해』성명서에 서명했다.
李浩雄(이호웅)열우당 의원 또한, 民統聯 상임 집행위원,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의장을 하면서 5ㆍ3 인천 시위 주도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 받았다. 그 후 民統聯 상임 집행위원, 인천지역 민족민주운동연합 의장, 全民聯 상임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91년 민주당 정무위원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하였다. 야권통합추진위 실무협상대표, 인천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 국민회의 당무위원, 새천년 민주당 총재특보 등을 지냈다. 현재 열우당 중앙위원을 맡고 있다.
1986년 7월 1일 고려大 애국학생회
애국학생회는 1986년에 고려大 학생들이 결성한 主體思想 계열의 지하학생운동단체이다. 당시 운동권은 사회구성체 논쟁으로 심각한 대립과 갈등을 빚었다. 이러한 대립을 중단하고 단일 지하 조직을 만든 것이 애국학생회였다. 그리고 이 조직을 전국적 차원으로 확대한 것이 反美청년회이다. 고려大는 애국학생회, 서울大는 구국학생연맹(救學聯), 연세大는 반제학생동맹 등이 결성됐으며 산하에는 무력투쟁을 위한 인민 무력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 단체는 1986년 애국학생투쟁총연합회의 건국大 발대식 사건을 배후조종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었으며 1987년 5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의해 26명의 조직원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조혁(고려大 82), 이종민(고려大 83), 박정호(고려大 83), 서민석(고려大 83), 안희정(고려大 83)등이 구속됐다. 이 중 조혁은 수배 중인 상황에서도 反美청년회를 결성하고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KAL 858기 폭파 사건이 안기부에 의한 조작이라는 說 을 퍼뜨리기도 했다.
현재는 主體思想 을 비판하며, 北韓탈북자지원 사업등 北韓민주화네트워크를 통해 활동하고 있다. 한편, 안희정은 1987년에도 反美청년회 사건으로 구속되었으며,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을 지내다 노무현 대선캠프에 합류,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불법대선자금 수사에서 뇌물알선수재 혐의로 징역 1년이 선고되어 올해 12월 출소 예정이다.
안희정은 2003년 2월 17일의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主體思想은 인간이 되라는 이론적 장점이 있다』며 主體思想과의 공식적 결별을 밝히지 않고 있다.
1986년 9월 17일 구국학생연맹(救學聯) 사건
구국학생연맹(이하 救學聯)은 「단재사상연구회(이하 단사그룹)」에서 시작되었다. 단사그룹은 최초로 이념투쟁을 표방하였으며, 서울大 학생운동의 기본틀인 이념써클체계의 즉각적 해체, 종파주의의 척결, 학번제의 철폐 및 운동조직에 있어 권위주의적 잔재의 해소를 주장하면서 이에 대안으로 통일된 학생운동조직의 건설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1986년 3월 29일 구국학생연맹을 결성했다.
救學聯의 활동은 1986년 4월 10일 自民鬪가 발족되면서 본격화되었다. 救學聯은 主體思想에 기초하여 투쟁의 영역을 反美자주화투쟁, 반파쇼민주화투쟁, 조국통일촉진투쟁으로 나누고, 전국적인 이념서클의 조직화를 위해 학생운동연합체를 만들었으며, 10월 28일 건국大에서 벌어진 「전국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이하 愛學鬪련)」발대식에서 당국의 진압·검거로 救學聯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 사건의 관련자들이 그 유명한 김영환, 정대화, 하영옥 등이다. 김영환은 강철 서신이라는 글로 6개월 만에 운동권을 모두 장악했으며, 主體思想을 운동권의 핵심 이념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김영환은 이후 민혁당 사건으로 구속된 후 자신의 조직원들과 함께 전향하여 현재는 계간지 시대정신을 통해 北韓민주화와 탈북자 지원활동을 펴고 있다. 한 편, 김영환의 전향을 변절이라며 폄하했던 하영옥은 민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현재 복역 중이다.
1986년 10월 28일 건국大점거농성사건(일명 건국大 愛學鬪聯 사건)
1986년 10월 28일 서울大, 고려大, 연세大, 등 전국 26개 대학교 학생 2천여명이 건국大에 모여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愛學鬪)발대식을 벌이다 교내로 진입한 3천여명의 경찰에 밀려 본관, 사회과학관 등 5개 건물을 점거하고 4일 동안 철야농성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천5백25명이 연행되고 이들중 1천2백87명이 구속되었으며 연세대 반제학생연맹, 서울대 구국학생연맹, 고려대 애국학생회 등도 함께 일망타진된다. 그러나, 愛學鬪는 한국 사회를 미제식민지반봉건사회로 보는 主體思想을 그대로 차용하여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폭력적 방식의 투쟁으로 인해 운동권이 대중적 지지를 잃는 시초가 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에 全大協 등과 같은 전국적 조직의 시초가 됐다. (konas)
전투적 운동의 쇠멸과 대중혁명역량 강화기: 1988년 ~ 1993 년, 上
1988년 10월 1일 反美청년회 사건
1987년 6월 이후 1987년 8월 충남大에서 전국적 총학생회의 협의체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全大協)이 전국 95개 대학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탄생하게 된다.
全大協은 대표자 협의체 조직이라고 선전했으나, 그 내부에는 主體思想을 신봉하는 정치적 노선과 흐름이 존재했는데 이를 주도한 것이 反美청년회였다. 反美청년회의 전신은 「전국사상운동추진위원회」로 1986년 10월부터 전국적인 학생운동 통일적인 지도부를 형성하기 위하여 활동을 하였으며, 全大協 결성을 조종한 조직이다.
反美청년회는 1986년 ~ 1987년까지는 직선제, 민주헌법개정, 美國의 光州학살에 대한 책임규명등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1988년 이후에는 통일운동을 벌였다. 反美 청년회는 1988년 3월 조혁(고려大 82, 노문과), 장원섭(고려大 농대 84), 양홍관(동국大 81), 안희정(고려大 철학 83), 안내상(연대 84), 이철우(시립대 83), 김철(연대 법대 83), 서민석(고려大 83), 한기원(연대 84), 김태원(고려大 법학 83)등 12명이 체포되고 1990년 2월에 해산됐다.
당시 사건 연루자였던 김기식은 현재 참여연대의 사무총장으로써 실질적인 참여연대의 수장 역할을 맡으면서 국가보안법 전면철폐, 주한미군 즉각 철수 등의 이슈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으며, 안희정은 고려大 애국학생회와도 연관이 있고(고려大 애국학생회 사건 참조)李哲禹(이철우)는 1992년에도 민족해방혁명 노선을 추종하는 민족해방 애국전선(일명 남조선 노동당 사건)활동을 한 것이 적발되어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4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포천문인협회 사무국장, 한탄강 네트워크 사무처장, 북부비전 21 공동대표, 민주개혁국민연합 운영위원 등 시민단체 활동과 행정 자치부 지방분권위원회 자문위원,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거쳐 현재 열우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250 만원을 구형 받았다. 반면, 의장이었던 조혁은 현재는 北韓민주화네트워크에서 다른 주체사상파 출신들과 함께 北韓민주화와 탈북자 지원활동을 펼치고 있다.
1989년 5월 3일 釜山 동의大 참사
1989년 5월 1일 동의大에서는 전날 집회의 원천봉쇄에 대한 항의로 가야파출소로 몰려가 화염병 투척을 했고, 가야파출소에서는 여기에 맞서 공포탄을 발사했다. 학생들은 이에 항의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항의 농성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경찰과 학생의 충돌 과정에서 경찰이 학생들에게 인질로 잡히게 되었다. 5월 3일 연행된 학생과 경찰의 교환협상이 결렬되고 나서 새벽 5시경 경찰은 도서관을 포위하고 최루탄을 쏘며 진입을 시도하였다. 이에 학생들이 옥상으로 대피하면서 도서관에 불을 질렀다. 이 사고로 경찰 7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중화상을 입었다. 이후 학생측은 아침 7시경 인질이 된 경찰들을 경찰에게 넘기고 자진 연행됨으로써 동의大 농성은 일단 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의大생 71명이 살인▪방화치사상 혐의로 구속 기소됐고 31명은 방화치사상 혐의로 징역 2년에서 무기징역에 이르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 외 40명은 집행유예 또는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관련 학생 81명이 제적됐다. 한 편, 화염병을 던진 윤창호(무기징역), 오태봉(총학생회 기획부장, 징역 15년) 등은 이후 사면복권되었으며, 2002년 4월 30일에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의해 사건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유공자로 인정돼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1989년 7월 1일 임수경, 문규현 密入北 사건
1989년 6월 30일 全大協 대표 林琇卿(임수경, 한국外大 불어과 4)이 密入北하여,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뒤 8월 15일 돌아온 사건이다. 정부는 원래 평양축전 참가를 허용하려 했으나, 文益煥(문익환)목사의 密入北사건을 계기로 참가봉쇄 쪽으로 태도를 바꾸었고, 이에 全大協은 한양大학교에서 「평양축전 참관을 위한 판문점돌파출정식」을 거행하고 林琇卿을 대표로 뽑아 독일을 경유해 평양에 파견했다. 林琇卿은 「통일의 꽃」으로 北韓의 환영을 받으며 北韓학생위원회위원장과 남북청년학생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에 참가했다.
축전이 끝난 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파견한文奎鉉(문규현) 신부와 함께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林琇卿과 文奎鉉 신부는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92년 성탄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당시 全大協 의장이었던 任鍾晳(임종석)은 이 사건으로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3년 6월을 선고 받았다. 졸업 후, 청년정보문화센터 부소장, 소장, 全大協 동우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다 1999년 새천년 민주당 창당에 가담했다.
새천년 민주당 당무위원, 同 청년 위원장, 대표 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盧武鉉 후보 선대委 국민참여운동본부 사무총장으로 盧武鉉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현재 民和協 회장, 열우당 국민참여운동본부 본부장, 同 공동 대변인, 원내 부대표 등을 맡고 있다. 宋斗律(송두율) 교수 귀국추진위원회 위원으로 宋斗律 입국을 위해 활동했다. 韓總聯 합법화 성명서 서명, 이라크 파병반대, 『美國의 對北강경발언이 남북화해방해하고 있다』는 성명서 등에 서명했다. 여중생 사망 사건 때에는 부시 美 대통령에게 사과 요구를 하기도 했다. 한편, 林琇卿은 한국외大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을 마치고, 어린이를 위한 통일 관련 서적을 내기도 했다.
1990년 11월 19일 ~ 현재, 凡民聯, 凡靑學聯 관련 통일운동 구속사건
凡民聯은 1988년 남한의 운동권 인사의 제의와 北韓조국통일위원회의 화답으로 北韓, 남한, 해외동포로 구성되는 통합단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北韓의 대남사업에 활용되는 전위조직에 불과하다. 이들은 1989년 문익환, 임수경, 문규현의 密入北으로 고무되어 1990년 8월 15일 판문점에서 남측 대표로 황석영(소설가)이 참가한 가운데 첫 출범식을 가졌다. 이들은 1990년대 들어 운동권의 투쟁 노선이 민주화에서 통일 운동으로 변화함에 따라 맞춰진 조직이며, 이런 이유로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자가 대단히 많다. 한편, 凡靑學聯은 凡民聯의 청년단체로 남측 대표는 韓總聯이 맡고 있다. 이 단체와 관련되어 구속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조용술(목사,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공동본부장),
이해학(범민족대회 집행위원장),
조성우(범민족대회 사무처장),
이창복(凡民聯실행위원장, 全民聯 공동의장, 全國聯合 상임의장),
김희택(凡民聯 준비위원, 全民聯 사무처장),
권형택(凡民聯 사무처 차장),
김희선(서울민협 의장),
김종식(全大協의장, 한양大 총학생회장),
한철수(全大協산하 학추위 위원장, 경희大 총학생회장),
허동준(중앙大, 全大協 대변인),
하태경(서울大, 서총련 조통위 연대사업담당),
손성표(고려大 서총련 사무국계열부문 담당),
김시몽(목포대 전 총학생회장)
신현욱(한양大全大協의장 수행비서),
박순경(목원대 명예교수, 凡民聯 남측본부 결성준비위 부의원장),
전창일(凡民聯 남측본부 조직위원),
홍근수(향린교회 목사),
김재용(한양大 총학생회장, 韓總聯 의장),
김병삼(韓總聯 조국통일위원장, 연세大 총학생회장),
황석영(소설가),
허현준(凡靑學聯 부의장, 전북大 회계4),
김세원(凡民聯 남측본부 光州전남연합 창립준비위원장),
오병윤(민주주의 민족통일 光州전남연합 사무처장),
김양무(凡民聯 중앙정책실장),
강희남(凡民聯 의장),
이종린(凡民聯 부의장),
전창일(凡民聯 부의장),
강순정(凡民聯 부의장),
안희만(凡民聯 간사),
황인성(凡民聯 집행위원장, 全國聯合 상임집행위원),
조성우(민족회의 정책위원장),
강재우 (凡民聯 남측본부 의장),
신창균(凡民聯 남측본부 상임고문),
유근삼(凡民聯 남측본부 대구경북연합의장),
정민주(凡靑學聯 남측대표, 인천대 건축3),
이혜정(凡靑學聯 남측대표, 가톨릭대 회계2),
박용모(법명 진관, 불교인권위원회 공동의장),
민경우(凡民聯 남측본부 사무처장),
이종린(凡民聯 남측본부 의장),
이천재(凡民聯 상임부의장) 등이다.
이들은 지금도 주로 운동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 민주주의민족통일 全國聯合(약칭 全國聯合), 통일연대, 민족문제연구소, 凡民聯 등의 단체에서 그 이름을 볼 수 있다. 한 편, 소위 원로라 일컬어지는 의장단들은 모두 1960년 결성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출신들이다.
이들 이외의 세력들은 대부분 운동권 출신들이다. 이들 중 조성우는 현재 열우당 중앙위원으로 동북아발전연구소장과 미래전략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이창복은 새천년 민주당에서부터 정치활동을 시작, 열우당 16代 국회의원을 거쳐 현재 열우당 강원도 지부장이다.
金希宣(김희선)은 열우당 의원으로 1995 년부터 국민회의에 入黨,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대표로 국가보안법 폐지, 친일파 진상규명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 7월, 北韓 경비정의 NLL 침범 당시 우리 군의 대응 및 보고 논란과 관련, 군 장성들의 리더쉽에 대해 『5ㆍ6 공 당시 초급장교로 리더십을 키웠던 사람이다』라는 발언, 조병옥 박사 親日派 의혹 제기, 본인의 가족사 문제 등으로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김시몽은 金在洪(김재홍) 열우당 의원의 비서관을 맡고 있고, 黃寅成(황인성)은 현재 청와대 비서실 시민사회 비서관에 재직 중이다.
한 편, 이 사건 관련자들 중 상당수가 모여 지난 8월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를 만들기도 했다. 최근에는 이 단체들과 全國聯合, 全大協, 韓總聯 관련자들이 사회 각계에서 큰 소리를 내고 있다. (konas)
2021.10.1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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