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답변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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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10-14 14:58 조회4,83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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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변 서
사건 2018고단4449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명예훼손)
2019고단8733, 2020고단5226, 2021고단2713 병합
피고인 지만원
위 피고인은 다음과 같이 답변서를 제출합니다.
1. 탈북자 고소사건의 배경
1) 5.18의 의미
대한민국의 정권역사는 크게 [건국-부흥-반공] 역사와 [건국부정-민주화-친공] 역사로 구분됩니다. 후자의 정권은 김일성을 신격화합니다. 정권의 정당성(legitimacy)을 확립하기 위해 이승만과 박정희를 격하하는 반면 5.18민주화운동을 성역화합니다. 대구폭동, 4.3반란, 여-순반란 등 과거의 좌경 폭동사건들을 민주화운동에 편입시키고 있습니다. 김일성 신격화의 바탕은 항일전쟁이기 때문에 종북세력은 온갖 허위사실들로 트집을 잡아, 시너지의 동반자야 할 일본을 무조건 적대시해왔습니다. 결과적으로 현 정권은 5.18역사, 4.3역사, 일제사, 위안부문제 등 이른바 ‘갈등의 역사’에 대한 그들 주장에 반하는 표현에 대해, 물리적 폭력, 해고압박, 소송, 처벌법 등의 전방위적 탄압수단을 가동해왔습니다.
2) 외신에 보도된 5.18 독재
2021년 7월 18일 뉴욕타임즈가 ‘한국정부가 보장해왔던 표현의 자유가 역사왜곡 문제로 인해 시험당하고 있다’는 제하에 [충돌하고 있는 몇몇 역사에 대한 “음모론”이 온라인을 통해 확산됨에 따라 정부가 이를 탄압하기 위해 사법적 처벌 장치를 깔고 있다]는 부제를 달고 A4지 8매 분량의 장편 기사를 냈습니다(증1). 5.18에 대해 정부와 반대되는 표현을 하면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는 법률이 이미 시행되고 있고 이에 더해 세월호, 일제 역사, 위안부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면 징역 10년형에 처하겠다는 법률이 제정 중에 있다고 했습니다. 문재인은 '역사왜곡'을 범죄행위로 다스리게 함으로써 위험한 정치적 지뢰밭으로 진입하고 있다고도 썼습니다.
뉴욕타임즈는 피고인의 사정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습니다.
“5.18이 북한공작임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 가장 앞장선 지만원씨는 ‘내가 옳으냐 그르냐에 대한 판단은 민주주의를 돌리는 엔진인 공론의 장에서 공개 토론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와는 반대로 정부는 역사를 자기식대로 강점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 . 지씨는 민주주의 가치를 위협하고 있는 자들은 본인이 아니라 바로 북한식 공산주의 시각을 가진 문재인 진영의 진보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한다. . 이 뜨거운 논란은 무시할 수 없는 온라인 수단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 팟캐스터(인터넷 콘텐츠 제작자들)과 유튜버들은 국가 단위 방송국 시청자들과 동등한 시청률을 가지고 있다.. . 지씨는 대세에 영합하지 않는 독자적 역사관을 피력하는 것은 한국사회에 대한 도전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데 대한 그의 경험을 말해주었다. 2002년 그는 일간지에 광주사태는 북한의 비밀작전이었다는 표현이 포함된 광고문을 실었다. 그는 즉시 수갑에 채여 광주로 압송됐다. 명예훼손 혐의로 100일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 후 그는 광주사태에 대해 10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명예훼손 혐의로 수많은 기소를 당해 싸우고 있다. 그를 가리켜 조악한 북한 음모론을 확산시키는 사람이라고 비난들하지만 그의 시각은 다음 표현에 응축돼 있다. ‘만일 2002년에 광주가 나를 그토록 잔인하게 학대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3) 5.18과 피고인
피고인은 1966년 육군사관학교를 제22기로 졸업하여 소위로부터 대위에 이르기까지 44개월 동안 베트남 전쟁에 전투요원으로 참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헌무공훈장도 받았지만, 전상6급 유공자에 해당하는 질병도 얻었습니다.
1974년, 합동참모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던 도중 전군에서 1명만 선발하는 유학시험에 100점 만점에 97점이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선발되었습니다. 헬기를 타고 전쟁터에 나가면서도 철모 속에 영문단편소설을 넣고 다녔기 때문에 사관학교를 졸업한지 8년 만에 치르는 영어시험에서 기록을 깰 수 있었습니다. 미 해군대학원에서 문과분야인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1974~75). 이어서 그 학교 창설 70년 이래 처음으로 문과에서 이과인 응용수학 박사과정으로 전환하여 수학공식 2개와 수학정리 6개 그리고 미 해군 항공모함 창고에 적재할 수십만 개의 수리부품 수량을 계산하는 알고리즘을 발명하여 절찬리에 박사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문과 석사가 이과 박사과정에 간 사실도 학교 창설 이래 처음이었고, 수학공식과 수학정리 알고리즘이 8개나 들어 있는 논문을 쓴 것도 처음이었기에 피고인은 지금도 그 학교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 후 중앙정보부에서 1년 동안 대북정책 보좌관 역할을 했고, 국방연구원에서 7년 동안 국방자원관리와 전투력개선 문제들을 연구하다가 1987년 2월 대령으로 예편하고 모교인 미 해군대학원 교수로 3년간 봉직하고 귀국하여 군사평론가와 시스템전도사라는 이름을 얻으면서 저술, 기고, 방송, 강연, 경영진단 등을 내용으로 하는 프리랜서 생활을 해왔습니다.
2002년 8월 16일 동아일보 등에 김대중 정부의 이적성 정책을 경계하자는 취지의 3,500자의 칼럼형 의견광고를 냈습니다. 이 중 35자에 해당하는 한 개의 문장에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에 당시 민주당이 3차례에 걸쳐 피고인을 성토했고, 5.18단체들이 깡패조직을 이끌고 상경하여 총무로 3가 소재의 피고인 사무실에 몰려와 소란을 피우며 집기를 파괴하고 5개 층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었습니다. 이어서 안양 소재의 피고인 아파트에 몰려와 대문과 차량을 파괴하였습니다. 중부경찰과 안양경찰이 피고인에게 가족과 함께 피신하라는 사전 연락을 주었기에 인신은 안전하게 보조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광주는 점령군 사령부였습니다.
2002년 10월 22일, 광주검찰과 광수서부경찰관 등 4명의 법집행자들이 아파트 거실에 구두를 신고 들어와 가족들이 울부짖는 앞에서 수갑을 뒤로 채우고 끌고 나갔습니다. 광주로 이동하는 6시간 동안 집행관 4명(김용철, 이일남, 박찬수, 이규행)이 쉴 새 없이 물리적 언어적 폭력을 가했습니다. 도착한 후에도 최성필 검사는 욕설을 하고 고성을 지르면서 뒷수갑 풀지 말고 밤새 조사하라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부어 오른 부기는 2개월이 가도 가시지 않았습니다. 난생 처음 생지옥을 경험한 것입니다. 행위자가 서울이고 주거지가 안양인 사람을 이송요청을 묵살하고 광주에까지 끌고 가면서 린치를 가하고 징역 10월형을 선고한 것입니다. 이런 곳이 민주화의 성지라 하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간단한 표현 하나에 청와대-정당-광주가 총동원되어 이렇게까지 가혹한 탄압을 하는 데에는 무언가 검은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나이 61세, 피고인은 남은 생을 5.18을 연구하는데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3~2008년 피고인은 전두환 관련 재판의 변호인단 단장이었던 이양우 변호사로부터 수사 및 재판 기록 18만 쪽을 빌려와 2008년 9월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이라는 4부작 1,720쪽을 발행했습니다.
전두환을 사모하는 모임 15명이 피고인의 글을 전파했습니다. 5월단체가 이들을 모두 고소했습니다. 광주검찰은 이들 모두를 광주로 출두하라 했습니다. 이들이 저항하였습니다. 덕분에 피고인은 천우신조로 광주법원을 회피하게 되었습니다. 안양법원-서울고법-대법원이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피고인의 책은 역사서라는 이유와 ‘집단표시에 의한 명예훼손’의 판례에 해당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재판 도중 피고인은 재판부에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서 대외비로 취급되는 북한자료를 열람 복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1심 재판장께서 피고인의 요청사항을 통일부에 반영시켜주셨습니다. 북한 자료 및 문헌들을 보니 5.18은 북한의 소행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5.18바이블로 자리해오던 황석영 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북한 문헌 2개를 짜깁기 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2010년, 이 사실을 [솔로몬 앞에선 5.18]이라는 책에 정리하였습니다.
피고인이 무죄를 받자 이는 뉴스가 되었습니다. 2013년 1월부터 5월까지 채널A와 TV조선이 피고인을 초청했고, 피고인은 1980년 5월 21일 시위대가 벌였던 군사 활동을 증거로 보여주면서 이는 광주의 어린 부나비들이 수행할 수 있는 작전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진행자들이 설득되었습니다. 이후 두 방송국은 경쟁적으로 수많은 탈북자들을 섭외하면서 5.18은 북한이 저지른 폭동이라는 취지로 방송을 했습니다. 2013.5.15. 채널A가 실제로 광주작전에 투입됐었다는 탈북자와의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이에 광주시장과 전라도 출신 국회의원들이 나서서 박근혜 정부를 압박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방송은 중단되고 방송을 진행한 실무 간부들이 감봉조치를 당했습니다. 광주시 전체가 5.18성역화 지키기에 나섰습니다. 2013년 5월 24일 광주시장이 주동이 되어 광주의 338개 단체와 광주 소재의 변호인들을 총동원하여 [5.18역사왜곡대책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이 대책위원회는 피고인을 목표로 하여 법적 조치에 나서겠다고 선언하면서 매월 회의를 하였습니다(증2).
이러한 상황에서 피고인은 5.18의 명예를 지키는 총본산인 ‘5.18기념재단’이 소장한 자료를 구했습니다. 5.18최고 유공자라는 사람들이 2001~2002년에 허심탄회하게 구술한 증언록들이었습니다. 이 증언록들에는 광주시위를 조직한 사람도, 시위를 지휘한 사람도 광주에는 없었다는 사실이 재확인되어 있습니다.
결론은 “5.18은 북한이 일으킨 게릴라전이었다, 5.18시위를 조직한 사람도, 지휘한 사람도 한국에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광주현장을 촬영한 사진들이 수 백매 쏟아져 나왔습니다. 폭동의 주역들이 북한특수군이라면 그 사진 속 얼굴들도 북한의 얼굴이어야 했습니다. 2015.5.5. 노숙자담요가 제1, 제2. 제3광수를 찾아내 광주현장 사진 속 얼굴과 북한인의 얼굴이 왜 같은 사람인가를 분석해 냈습니다. 1995년 7월, 황장엽이 제71광수, 김덕홍이 제72광수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얼른 보아도 같은 사람임을 알 수 있는 얼굴들이 속속 나왔습니다. 인터넷신문 [뉴스타운]이 호외지 1,2,3호를 각 10만장씩을 찍어 전국에 전파했습니다.
이에 광주시장과 5월단체들이 2015.10.~2016.2.까지 6개월 동안 광수사진들을 내걸고 “광주의 주역들은 제발 나서달라” 사진전을 열었지만 나서는 사람 없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5.18기념재단이 광주-전남인 15명을 동원해 “네가 제 몇 광수라고 우겨라” 위계에 의한 소송을 제기해왔습니다. 이에 대한 1심 재판이 4년 동안 진행됐습니다. 마지막 재판장이 광주일고 출신 김태호 판사님이었습니다. 그는 “피해자들의 주장은 자세하고 구체적이고 모순이 없지만 피고인은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데 대한 단 하나의 정황증거도 제시하지 않았고, 노숙자담요의 분석은 엉터리이고, 재판부의 육안 판독이 더 정확하다”며 피고인에게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하였습니다. 하지만 피고인이 4년 동안 제출한 정황증거는 20개를 초과하였습니다.
항소와 함께 피고인은 법원장님께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항소심 재판부에는 광주-전라도 출신 판사를 배당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항소심을 맡은 8-3재판부는 동등재판부이며 전라도 출신들이 없는 것으로 확인돼 있습니다. 오는 11월 12일은 결심공판이며, 이 자리에서 피고인은 법정 스크린에 PT형 답변서(증5)를 비춰가면서 3시간 동안 발표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는 밀실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기 위해 답변서를 시판용 책으로 내서 제2쇄를 제출하였습니다(증4).
이후로도 노숙자담요는 광수 찾기를 계속하였습니다. 2019.3.6.까지 3년 동안 총661명의 광수를 찾아냈습니다(증5).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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