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민복 1/12 (12명 중 1번째로 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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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08-02 22:01 조회2,93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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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민복
1957년 생
한국 도착일: 1995년 2월 18일
1) 증거 자료
① 장국진의 블로그. 이민복의 충격 고백 2006.4.17.
https://blog.naver.com/kookjinchang/40012239467
② 북한정보나침판(이민복tv), 경험한 김일성대와 김책공대의 실력차이, 2018.3.30.
https://www.youtube.com/watch?v=xehoPVjx8g4
4분 20초~6:00분
③ 왈가왈북 (홍강철),삐라 살포로 생계 유지,북한최고의 농업전문가 2019. 10. 24.
https://www.youtube.com/watch?v=LiW4FB4p2lY&list=PLNcV7rmJzKVT6dw47TwojInrF5RiuDQxA
37초~1분 35초
3분 10초~5분 02초
7분 54초~15분 25초
④ 중앙일보, 평등 좇아 월북한 부친, 자유 찾아 탈북한 아들…기구한 父子, 2020.08.31
https://news.joins.com/article/23860427
2) 증거 자료 내용별 분석
① 이민복의 충격 고백 20064.17.
◇ 한사랑통일출판사 기독탈북연합 이민복 대표 (전 북한사회과학연구원 출신)
“당신은 남한에 와서 제일 먼저 가 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 이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은 “남조선 감옥과 남조선 쓰레기장이다.”고 하였습니다. . .
“어떤 나라에 가든지 그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상태, 주민들의 생활 수준을 그대로 알려면 감옥과 쓰레기장 이상 좋은 견문 장소는 없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죠. . .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충성·지식 분자로 평을 받던 내가 인생 행로에 있어 탈북 망명자가 되고, 또 감옥 생활까지 해보리라고는, 그것도 탈북의 길에서 3개국의 감옥(북한, 중국, 러시아)에 갇힐 줄이야 꿈에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남한에 와서 조사받는 수개월의 기간까지도 감옥으로 포함시킨다면, 도합 네 나라의 감옥에 갇혀보는 셈이 되는 거죠. . . 체험은 나라마다의 감옥과 인권 실태를 비교해 볼 수 있는 객관적 처지에 나를 세워놓게 되기도 합니다. .
‘쌀은 곧 공산주의이다’라는 김일성의 교시를 받들어 전자 공학의 꿈을 버리고, 농업 연구로 인생 방향을 바꾸기까지 한 정도였으니까요. 나는 오직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한 일념으로 술·담배는 물론, 그 흔한 주패(카드놀이)와 장기 노름도 할 줄 몰랐었습니다. . 마침내 내가 맡은 연구 분야에서 공화국 제일의 권위자가 되었고, 그처럼 바라던 농업 생산 기술도 완성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훌륭한 연구 성과들이 집단 농장 제도의 북한 현실에는 이렇다 할 성과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농장 현실 속에서 6년간 직접 현장에 나가 체험해 보니 농업 실패의 근본 원인은 기술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뜻밖에도 농업 정책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근로자 개개인의 생산 의욕을 마비시키는 공산주의적 집단 농업 방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집단 농장 밭에 비해, 개인 밭에서 나는 알곡생산량을 3배가량 수확을 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 ‘개인 농장 제도’주장은 이색 사상으로서 북한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음은 물론이고, 권력 유지를 위한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정치 본성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나는 어버이 수령님으로 믿었던 金父子에 대한 우상화는 사상누각처럼 무너지게 되더라구요.
식량 문제 해결에 최고 목표를 두었던 나는 북한 사회에서 살 의미를 잃게 되었습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 앞으로 편지를 쓰기 전까지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망명과 월남의 의지가 불현듯 되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자체 분석과 중국교포들을 통해 남조선이 결코 북에서 선전하는 것처럼 독재적이고, 헐벗고 굶주린 사회가 아니라는 것도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언론의 자유가 있는 남한에 가서 ‘북한의 식량난은 개인농을 하면 해결된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죠.
탈북을 결심할 때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웠던 것은 ‘조국 반역자’가 된다는 죄책감이었습니다. ‘조국 반역자’라는 걱정부터 하는 북한 사람들은 그만큼 정치교양에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런 마음의 갈등은 남한도 내 땅인데, 내 조국에 찾아가는 것이 어찌 조국 반역자로 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으로 다소 위안이 될 수 있었습니다. . . 가족의 연대 처벌은 북한당국이 쓰는 가장 악랄한 억압 방법이며, 중세기적 인권 유린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혼을 함으로써 처자식은 무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고, 기타 친지들에게도 억압이 최소화되도록 소리 없이 사라지는 탈출 방법을 실행했던 거죠. 탈출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사선은 국경선 돌파였습니다. 군사 분계선을 택하기에는 너무 막연한 장벽이어서 중국 국경인 압록강을 넘어가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 국경은 최근 탈북자의 증가로 북한 당국이 가장 경계하여 감시병을 수배나 증강한 삼엄한 상태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국경을 돌파한 나는 ‘이제는 살았구나’하는 안도의 숨을 쉬는 듯 했지만, 북한 경비대가 아닌 중국경방대(국경경비대)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 중국 장백현 장백시가에서 체포·감금되었다가 압록강의 친선다리를 거쳐, 북한의 양강도 혜산으로 넘겨졌습니다. 북한 국경 초소에 이르니, 총을 든 군인은 나를 보자마자 날카로운 목소리로 "꿇어앉아!’라고 소리쳐 땅바닥에 그대로 꿇어앉게 하고, 간단한 인계인수 처리가 되자, 권총으로 무장한 호송 정치보위부원이 나의 손목에서 중국제 수갑대신 보다 많이 사용한 듯 보이는 도금이 벗겨진 북한제 수갑을 채우곤 감옥으로 후송했습니다. . .
나의 감옥살이는‘식량난 해결은 개인농을 해야 한다’는 제1호 편지를 중앙당에 감히 올렸다가, 김정일의 비위를 거슬려 탈북이 시작되면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중국·북한·러시아·한국의 감옥에서 ‘맛’을 톡톡히 봤고, 그것은 생명과도 바꿀 정도의 혹독한 것이었지만, 대신 각국의 감옥 실태와 인권 상황을 비교해 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
‘수용소 정치보위부 위원들이 정치범 처녀 음부에 삽자루를 박아 죽였다.’(전 정치범 수용소 경비병 안명철 증언), ‘임신한 여자를 강제 조산시켜 아직 살아있는 아기의 목을 비틀어 죽였다. (개천수용소 수감자였던 이순옥 증언)’들이 사실인지를 믿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심지어 그곳에 살다온 탈북자들 중에도 ’좀 과장된 것 아니냐’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무리는 아니죠, 겪어보지 않고는 믿기가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 월경자를 일차적으로 가두는 감옥은 정치보위부 집결소라고 부르고, 양강도에는 도청 소재지인 혜산에 있습니다. . . .
당시 국제 사회에서 북한의 인권 탄압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고, 조사를 받던 나는 상부의 지시를 받은 조사관들의 속삭이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너무 많이 잡아들여 적을 많이 만들지 말며, 또 세계인권 운동의 표적이 되고 있으니 될 수 있으면 근로 단체 조직들을 교양·개조시켜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국제 ‘엠에스티’라는 인권 단체들이 평양을 방문하고, 북한 당국자에게 정치범 사실여부를 물었다고 합니다. 이때 ‘북한은 정치범이 단 한명도 없다’고 하면서 내적으로는 이러한 지시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풀려났고, 나 역시 과거 충성심을 인정받아 풀려날 수 있었죠.
하지만 한번 마음먹은 탈북의 마음은 나를 북한에 가만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수용 생활을 마친 후 3개월간 몸을 추스르고, 다시 중국으로 탈출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모로 탈출 경로를 찾아보았지만, 방법을 찾을 수 없던 차에 차라리 러시아로 탈출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 국경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철조망이 이중삼중으로 쳐져 있어서 도저히 넘어갈 수도 없었고, 강으로 건너게 되면 철조망이 없을 거라 예상하고 막상 도달해보니, 철조망이 안 쳐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밤이 되면 화경(군사용 헤드라이트)을 계속 비치고 있었기에 그것 또한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그래도 '강을 건너는 편이 낫겠다’'싶어 날을 잡은 것이 어리석게도 보름달이 훤한 날을 택하니 내가 얼마나 미련했겠습니까 . . 달빛이 훤하다보니 경비병이 화경(군사용 헤드라이트)을 안 켜고 있더라구요.
얼마나 떠내려갔을까, 눈을 뜨니 몸은 벌써 국경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에 들어서서는 모스크바 등,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대사관에 이르니 정작 한국 대사관 측에서는 받아 줄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 다시 방황은 시작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교회를 찾아 들게 되어 그곳에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신학 대학을 다니고, 이후 겁 없는 생활을 하게 된 겁니다. 잡으러온 군인들도 알면서도 못 잡는 일이 여러 번 일어났고, 나 또한 너무 당당하게 행동했던 탓일까요, . 당시 탈북자가 교회에 다닌다고 하여 기자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저의 글을 특종으로 다루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인해 저는 유엔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북한 사람이 탈북하여 온 것이 처음이라면서 등록을 하게 되었던 거죠. 제가 탈북자로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1호입니다.. .
의견
“쌀은 곧 공산주의이다’라는 김일성의 교시를 받들어 전자 공학도의 꿈을 버리고, 농업 연구로 인생 방향을 바꾸어 내가 맡은 농업 분야에서 공화국 제1의 권위자가 되었다. 탈북시 가장 악랄한 연좌제를 피하기 위해 아내와는 이혼을 했고, 소리 없이 탈출하는 방법을 택했다. 강을 건너긴 했지만 중국측 경비대에 잡혀 북송되어 감옥에서 취조를 받던 도중 북한 인권에 대한 국제 여론이 나쁘니 교양시키는 방향으로 하라는 조사관들의 속삭임을 듣게 되었다. 이 바람에 나는 쉽게 풀려났다. 러시아로 갈 결심을 했다. 철조망이 없는 강을 건너기로 했다. 하필이면 달이 밝은 날을 택했다. 그런데 달이 밝으니까 탐조등을 돌리지 않았다. 떠내려 가다가 눈을 뜨니 국경을 넘어서고 있었다. 모스코바 등 여러 곳을 마구 돌아다녔다. 모스코바에서 신학대학을 다니면서 겁없이 행동했다. 군인들이 잡으러 왔다가 잡지 못하고 돌아가는 일이 많았다. 기자들이 찾아와 특종들을 날렸다. 보도들 덕분에 유엔 난민 1호가 되었다. 탈북 과정에서 중국, 북한, 러시아에서 감옥 생활을 했다.” 이상이 위 기사에 대한 요약이다.
달밤이라 국경경비대가 탐조등을 돌리지 않았다는 것도 상식에 어긋나고 모스코바에서 경찰이 아니라 군인들이 잡으러 여러 차례 왔다는 것도 이상한 말이고, 잡으러 왔다가 그냥 돌아갔다는 말도 우화에 가깝다. 쫓기는 형편에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지원을 받아 그 돈으로 신학대학을 다녔다는 것도 무협지 같은 이야기다. 김일성 체제에서 집단 농장을 폐쇄하고 자본주의식 농업을 경영하자고 감히 김일성 부자에게 편지를 썼다는 것도 스스로 머리가 우수하다는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대안일 수가 없다. 강을 2차례 건넜는데 두 번 다 어느 지역에서 건넜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전혀 없다. “천신만고 끝에 국경을 돌파했다”, “떠내려가다 보니 러시아 땅이었다” 이것이 도강에 대한 전부다.
② 북한정보나침판(이민복tv), 2018.3.30.
나는 김일성종합대학보다 더 우위인 김책공대 핵심학부인 반도체공학부에 입학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군대를 다녀와서 27살 정도였지만 나는 군대에 가지 않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이어서 17살에 대학생이 되었다.
의견
북한의 모든 주민은 거의 예외 없이 17세에 군대에 가서 10년 동안 복무한다. 그런데 이민복은 남들이 군대에 가는 17세에 곧바로 북한 최고의 명문대라고 하는 김책공대에 입학했다고 한다. 이민복에게 이런 특혜가 주어졌다면 그에 대한 특별한 이유가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부친 이포구는 전북 익산에서 1927년 태어나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간첩에 포섭됐고, 6.25가 나니 완장을 차고 다니다 23세에 인민군과 함께 북으로 가서 1985년에 생을 마친 사람이다. 특히 이포구는 1967년, 라디오로 남한 방송을 들었다고 이웃이 고발하는 바람에 끌려갔다고 한다. 이민복이 17세였던 해는 1974년이다. 아버지가 반동으로 잡혀가 있던 시기였다. 이민복에게 군복무를 생략시켜줄 수 있는 배경이 아니었다. 그가 징집에서 배제되었다면 그 이유는 반동의 자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동의 자식이 김책공업대학에 입학하는 것도 용납이 안 된다. 리민복은 거짓과 허풍이 매우 심한 뻥쟁이다.
③ 왈가왈북 (홍강철), 2019. 10. 24. (녹취록)
남자1: 이민복 씨 대북풍선단 단장인 이민복 씨에 대한 팩트체크를 해보려고 합니다. . . 그 사람 스스로 말한 경력에 의하면 김책공대 반도체학부를 다니다가 김일성 주석의 '쌀이 곧 공산주의자'라는 교시에 따라 남포에 있는 지방 농업대학으로 가서 농업 연구를 하고 그래서 자기가 농업 분야에서는 최고의 과학자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 이 사람이 보면 이제 북에서 김일성 주석한테 편지를 올렸대요. 그래서 자기가 탈북하게 된 계기가 김일성 주석한테 편지를 올렸는데 그것이 문제가 돼 갖고 김일성 주석에 대한 환상도 깨지면서 탈북하는 계기가 됐다 이러더라고요.
홍강철: 그거는 당의 농업협동화 방침에 대한, 당의 농업 협동화 방침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거란 말이에요. . 당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편지를 써서 김일성 주석한테 보낼 수 있었다는 거는 북한이 대단히 민주적인 사회라는 거잖아요.
남자1: 90년에 탈북하고 처음에 탈북했을 때는 중국에서 중국 국경경비대에게 잡혀가지고 북송돼 갖고 왔다가 두 번째 다시 탈북을 해서 중국을 통해서 러시아로 갔다 이러거든요. 러시아로 가서 이리로 왔는데 자기 스스로도 그렇고 북쪽에서 발표한 것도 보고 그러면 이 사람은 모든 나라에서 다 감옥생활을 했어요. 북에서 얘기한 거는 이 사람은 절도, 사기, 강간 이런 걸로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는데 이 사람은 자기가 어떤 이유로 감옥살이 했다는 얘기는 안 나오지만 4개 나라에서 한국이 가장 민주적인 감옥이라 그러더라고요,
홍강철: 김책공업종합대학 반도체학부라는 게 진짜 거기는 수재들만 가거든요. 그런데 그 반도체학부에서 저기 어디 지방에 있는 농업전문학교 거기로 갔다는 거예요, 2년제로. . 북에서는 이 이민복 씨의 학력을 중졸이라고 발표를 해요.. 이 사람은 거기에서 농업 관련 분조장을 했던 거여요. 분조장이라 그러면 한 분조가 한 열 네댓 명인데요, 그게 전부인데. . 이 사람은 지금 농업대학을 나와 갖고 국가과학원까지 연구원으로 했고, . . 농업계에서 권위자였다 이런 표현을 써요. . 북한에서 정말 그렇게 발표된 자료들이 있는지. 그러니까 얘네들의 특징이 그거더라고, 그러니까 자기는 북한에 있을 때 자기 경력을 내세우는 애들의 특징이 딱 찍어 말 안 해.
남자1: 물론 뭐 우리가 이거는 확인해볼 수는 없어요. 북쪽에서 발표한 것도 솔직히 그게 정확한 건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북쪽 발표와 이 사람의 말하는, 여기에서 말하는 것들 그런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인데 이 사람이 이제 자기가 쓴 글에 보면 문제가 뭐냐면 탈북하기로 결심을 했을 때 일단 국경을 넘는 것이 어렵고, 그러면서 북한에 연좌제, 자기가 한 사람의 죄가 가족들에게 피해 가는 게 너무 아주 반인륜적이어서 되게 걱정이 됐다. 자기가 탈북했을 때 자기 가족들이 받는 그 고통, 그런데 이 사람이 김 주석한테 농업을 개인농으로 바꾸자라고 그 편지를 쓰자고, 쓰려고 했을 때 부인이 반대했다는 거야. 그거는 너무 위험하다. 그러면서 부인이 이혼을 했다는 거예요. 뭐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차치하고, 그래서 자기는 이미 그래서 이혼을 했기 때문에, 다행히 자기가 탈북할 때는 이혼을 했기 때문에 부인이나 처자식에 대해서는 고통당할 게 없잖아요. . 그런데 표현이 웃겨요. “조용히 몰래 탈북을 했다.”야. 그 가족, 부모님들이 걱정이 돼서, 그런데 여기 와서 하는 행동을 보면,. .
홍강철: 연좌제를 한다면 지 그런 일하면 안 되지. 아버지, 엄마가 피해를 입겠는데.
여자1: 이민복이가 가족한테 피해가 갈까봐 조용히 탈북했다고 하잖아요.
남자1 :자기 글에 그렇게 쓰여 있어요.
여자1: 탈북자들 치고 소리치면서 탈북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몽땅 조용히 탈북을 하죠. 그런데 그렇게 탈북하고 와서 삐라 날리고 별 하여튼 제일 나쁜 짓을 많이 했잖아요.
의 견
유튜브 왈가왈북은 위 ① ② 항에 대한 남녀 탈북인 2명과 북한관련 박사공부를 하는 사람이 벌인 비판의 대화다. 북한은 이민복이 중졸이며, 절도, 사기, 강간 등의 범죄를 저질러 감옥살이를 한 것으로 발표했다 한다. 하지만 이 순간 그 내용은 제목만 존재한다. 여기에 나온 패널들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4년제 김책공대를 들어간 사람이 그걸 마다하고 농업을 연구하겠다며 먼 지방에 있는 2년제 대학을 간다는 것이 상식이 맞지 않는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가 그의 말대로 북한 최고의 농업 전문가라면 인터넷에 유명인으로 올라 있어야 하고 발표한 논문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리민복은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
17살에 김책종합대에 입학했다가 곧바로 지방의 2년제 농업전문대를 졸업하고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면 잘해야 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1991년 제1차 도강을 했을 때면 그의 나이가 34세였다. 2년제 농업전문대를 20세에 나와 34세가 될 때까지는 14년이 경과했다. 그 14년 동안 대학도 대학원도 졸업하지 않은 그가 어떻게 해서 북한 최고의 농업전문가로 명성을 떨쳤다는 말인가?
이혼에 대해서도 그는 결심만 하면 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북한에서의 이혼은 우선 재판과 당의 하가 과정을 거쳐야 한다. 김일성 부자에게 집단농장 제도를 개인농장 제도로 바꾸는 것을 놓고 부부간에 의견 충돌은 이혼 사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그 자체로 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이요 1급 반동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편지를 쓰고도 무사했다는 말은 사막에도 우기가 있다는 말과도 같을 것이다. 아래는 2012년 9.월 25일짜 신문기사다.
④ 중앙일보, 평등 좇아 월북한 부친, 자유 찾아 탈북한 아들…기구한 父子, 2020.08.31
부친: 이포구(1927~85), 전북 익산 출생, 남로당 골수, 6.25때 아내와 딸을 남겨두고 인민군 6사단을 따라 태백산맥을 타고 북으로 올라가 황해도 서흥에 정착해 재혼해 5남매를 생산했다. 1967년, 라디오로 남한 방송을 들었다고 이웃이 고발하는 바람에 끌려갔다.
리민복:1957년생인 리민복은 "쌀은 공산주의"라고 했던 김일성 교시에 마음이 움직여 쌀 문제만 해결되면 공산주의가 실현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공대 대신 평안남도 은산 농업전문학교에 진학했다. 이어 79년 남포농업대학 연구소로 옮겼고 82년 국가농업과학연구원 옥수수연구소에서 깜부깃병 전문가로 일했다. . . 1985년, 이 단장은 깜부깃병 퇴치 임무를 받아 양강도 김정숙군 협동농장경영위원회 연구원으로 파견가서 91년 탈북 때까지 일했다. . . 1990년 5월, 중앙당에 개인농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1호 편지'를 보냈다. 김일성이 받아보는 편지였다. 이 단장은 개인농과 집단농의 작황 비교 실험을 했는데 개인농이 5배나 많았다. 편지에는 전국에 개인농을 도입하면 수확이 2배는 늘어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썼다. . . 과학원 국장이 현지에 내려와 "중앙당이 개인농은 수정주의“라며 조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당신을 정치범으로 몰려다 순수한 과학자의 행동으로 봐주기로 했으니 더 고집부리지 말라"고 지적했다. . . 김일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 . . 90년 8월 강원도 철원에 출장갔다가 우연히 떨어진 남한 전단을 봤다. ..
전단을 본 뒤부터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 북침이라면 어떻게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했을까. 생존한 초기 참전자를 조용히 만나 진상을 들었다. 이 무렵 이 단장은 남북한 증오의 원천인 6·25의 진실을 북한 주민들에게 알려야 증오가 사라져 평화통일이 올 거라 확신했다. 그는 탈북에 성공하면 북한에 삐라를 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
북·중 국경지대를 몰래 넘어가서 개혁·개방을 실험 중이던 중국이 북한보다 잘사는 모습을 목격했다. . 남한에 고향 방문을 다녀온 조선족들이 남한의 발전상을 생생하게 전했다. . . 90년 11월1차 탈북에 실패한 뒤 91년 6월 압록강을 성공적으로 건넜다. 옌볜(延邊) 조선족 자치주에서 1년을 머물며 KBS 사회교육방송을 청취했다. 92년 6월 러시아로 넘어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95년 2월 18일을 한국 땅을 밟았다.
의 견
90년 11월 제1차 탈북 실패, 제2차로 91년 6월 압록강 건너 엔벤에 1년 머무르다 92년 6월 러시아, 95년 2월 한국 도착했다는 것이다. 2006년 [고백]에서는2차 탈북을 러시아 직행코스로 정해서 성공했고, 러시아 각 곳을 자유롭게 다니면서 성금을 모으고 그 돈으로 모스코바에서 신학대학을 다녔다고 했다. 1차 도강이 언제이고, 2차 도강이 언제인지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탈북 동기에 대해서도 2006년과 2020년의 말이 서로 다르다. 2006년에는 김일성 앞으로 보낸 개인농 제도 도입에 대한 건의가 탄압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김일성에 환멸을 느껴 탈북을 결심했다고 했지만, 2020년에는 90년 8월 강원도 철원으로 출장갔다가 삐라를 보고 남쪽으로 가서 6.25의 진실을 북한 주민에 삐라로 알려야 하겠다는 사명감이 들었다고 했다.
1957년생인 리민복은 "쌀은 공산주의"라고 했던 김일성 교시에 마음이 움직여 쌀 문제만 해결되면 공산주의가 실현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김책공대를 떠나 평안남도 은산 농업전문학교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끝내는 79년 남포농업대학 연구소로 옮겼고 82년 국가농업과학연구원과 양강도 김정숙군 협동농장경영위원회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옥수수 깜부깃병에서 공화국 최고의 전문가가 되었다고 한다. 1990년 5월, 개인농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1호 편지'를 김일성에 보냈고, 이로 인해 조사를 받았다 한다. 김일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 데다 90년 8월 강원도 철원에 출장갔다가 우연히 떨어진 남한 전단을 보고 남북한 증오의 원천인 6·25의 진실을 북한 주민들에게 알려야 증오가 사라져 평화 통일이 올 거라 확신해 남한에 가서 이를 알리는 삐라를 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종합 결론
리민복은 그의 정체를 판단할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 많은 말들 중에서 수긍이 가는 말은 단 한 개도 없다. 모두가 다 거짓이고 허풍이었다. 그가 가장 최근에 쏟아낸 말은 2020.8.31. 중앙일보와의 인터뷰 발언이다. 이것을 사실로 가정한다면 그의 부친 이포구는 6.25때 23세의 나이로 북으로 갔고, 가방끈이 겨우 초등학교 졸업이었다. 그런데 그는 1967년 리민복이 10세 때 남한 방송을 청취했다는 이류로 반역죄 혐의를 받아 체포돼갔다. 리민복은 다른 사람들은 17세에 군대를 갔지만 자기는 군대를 가지 않고 곧바로 김책공업종합대학에 입학했다고 했다. 입학은 했지만 김일성이 농업의 중요성을 역설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김책공업종합대학을 포기하고 평남 소재의 2년짜리 은산농업전문학교로 갔다고 했다.
그가 17세였을 때는 1974년이다. 바로 7년 전에 아버지가 반역죄로 끌려간 것이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김책공업종합대학은 성분 좋은 1%만의 자제가 여러 기관장의 추천을 받아 가는 곳이다. 그가 군대에 가지 않은 것은 반역자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갈 수 없었던 것이고, 반역자의 자식이 김책공대에 입학했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그는 김책공대를 스스로 그만두고 시골의 2년제 전문대학으로 갔다고 하지만 이러한 학교 이동은 개인이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에서 명령해야만 할 수 있다.
농업 연구원 처지에서 감히 김일성에게 집단 농장제를 폐지하자는 건의서를 올렸다는 말도 북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고, 그런 편지를 쓴 사람이 처형되지 않았다는 것도 이변에 속할 것이다. 그 건의서로 인해 처와 이혼했다는 말은 당의 명령 없이는 이혼이 불가하다는 북한 현실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탈북 동기가 년도에 따라 다르고 탈북 경로가 년도에 따라 다르다. 특히 북에 떨어진 삐라를 보고 자기가 직접 남한에 가서 6.25의 진실을 북한 주민에게 알리는 삐라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사명감에서 탈북을 결심했다는 말도 공상적 언어로 보인다. 이런 것들로 보아 그는 북한의 발표대로 죄를 짓고 왔던지 아니면 기획탈북을 했던지 둘 중의 한 가지 이유로 왔을 것이다.
2021.8.2.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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