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서(5.18은 북한군 소행이라는 설 국제사회에 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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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05-05 21:42 조회3,14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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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변 서
(5.18은 북한군 소행이라는 설 국제사회에 투영)
사건 2020노804 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위반 등
피고인 지만원
위 피고인은 새로운 정보가 나타남에 따라 다음과 같이 답변서를 제출합니다.
1. 2021.4.15. 미국에서 개최된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에서 있었던 5.18 증언들
2021.4.15. 미국에서 `대북전단금지법’을 중심으로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이인호 교수가 증언대에 나서서 증언을 했습니다. 이 증언 내용이 5.18에 대한 객관적 평가인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정리하여 제출합니다.
1)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가 개최된 사실과 여기에 이인호 교수가 증인으로 채택되었다는 사실에 관한 보도 (증247)
진행자) 김 기자, 먼저 청문회를 개최한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시죠.
기자)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는 톰 랜토스 전 하원 외교위원장과 존 에드워드 포터 전 의원이 1983년 공동 창설한, 인권 문제를 논의하는 미 의회 내 초당적 기구입니다. 위원회 명칭은 헝가리 출신으로 2차 세계대전 중 나치독일 정권에 맞서 저항하다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뒤 `홀로코스트’로 알려진 유대인 대학살에서 살아남았던 랜토스 전 위원장을 기리기 위해 명명됐습니다.
진행자) 청문회에 참석한 증인들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죠.
기자) 네. 총 6명이 참석했는데요. 동북아 전문가인 고든 창 변호사와 존 시프톤 휴먼 라이츠 워치 아시아 국장, 수잔 숄티북한자유연합 대표, 한국 김대중 정부 시절 러시아대사를 지낸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그리고 워싱턴 퀸시연구소의 제시카 리 선임연구원이 원래 예정돼 있던 증인 5명이었고요. 청문회가 열리기 이틀 전 한국 내 탈북 여성들의 인권 변호를 맡아온 전수미 변호사가 증인으로 추가채택됐습니다.
2) 이인호 교수의 증언내용 전문과 그 중 5.18에 대한 증언내용 발췌(증248)
2021.4.19. 펜앤마이크는 “이인호 전 주러대사 “문재인 집권 후 한국은 포퓰리즘의 전체주의 국가로 전락...공화국의 생존 위협 당해”라는 제목으로 관련 뉴스 및 이인호 교수의 증언내용 전문을 게재했습니다.(증248) 15쪽 분량의 전문 중 제12쪽에는 아래와 같은 증언내용이 있습니다.
Of these new enactments detrimental to the cause of freedom, the first to catch the attention of this commission seems to be the law criminalizing the sending of information balloons to North Korea. It is only a cap put on the Moon government’s steady refusal to endorse the UN efforts to intervene in North Korea’s human rights situation and reflects his determination not to do anything against the wishes of Kim Jong-un, even on matters affecting the life and death of Korean citizens including refugees from the North. Officially enshrined as the “5.18 democracy movement,” the tragic incident is seen by many witnesses and researchers as a student movement for democracy which was exacerbated into a massive anti-state insurrection through undercover incitement and participation of North Korean agents. This new law is tantamount to a death sentence to academic freedom as well as political freedom of discussion. The idea that historical truth can be regulated by law spells an end to rational thinking on the part of the lawmakers-a frightening prospect.
자유라는 대의명분에 해로운 새 법률들 가운데 이 위원회의 주목을 처음으로 끈 것이 북한으로 정보를 실은 풍선을 날리는 것을 범죄화하는 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문 정권이 북한의 인권 상황에 개입하려는 UN의 노력을 지지하는 것을 꾸준히 거부한 것이자 심지어 그것이 탈북민들을 포함해 북한 주민들의 생사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 할지라도, 김정은의 뜻에 반대되는 것은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는 문재인의 결심을 반영합니다. 동일한 정도로, (만일 더 심하지 않는다며), 불길한 것은 1980년 광주사태에 대해 집권 여당이 선호하는 버전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을 중대한 범죄로 만드는 법입니다. 공식적으로 “5.18 민주화 운동”이라고 신성시된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해 많은 증인들과 연구자들은 학생 민주화 운동이 비밀 선동과 북한군의 참가로 인해 대규모 반정부 봉기로 악화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법은 정치적 토론의 자유뿐만 아니라 학문의 자유에 내려진 사형선고에 버금갑니다.역사적 진실이 법률 주문에 의해 규제될 수 있다는 생각은 입법자들의 입장에서 이성적 생각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며 이는 두려운 전망을 불러일으킵니다.
3) 2021.4.15. 미국에서 개최된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에서 행한 미국 변호사 ‘고든 창’ 변호사의 증언(증250)
2021.4.19. 미디어워치는 같은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에서 고든 창 변호사가 행한 증언내용 전문을 게재하였습니다. 아래는 그 발췌문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언론의 자유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공격도 있습니다. 여당은 ‘5.18’에 대한 특정 발언을 처벌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5.18은 일부에겐 ‘광주화운동’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부는 그것을 ‘광주반란’ 또는 ‘광주항쟁’이라고 주장합니다. 새 법에 따르면,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있었던 사건을 부인하거나 비방하거나 왜곡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을 선고 받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법은 발언을 불법화했으며 정부가 비판자들을 감옥에 보낼 수 있는 여지를 넓혔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문재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문재인이 말하는 5·18 민주화운동을 ‘선동성 발언’으로 모욕하거나, 북한이 이 사건에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 법안은 역사에 대한 다른 견해를 탄압합니다. 추가로, 법안이 통과되기 전에 그 사건을 비판한 사람들도 고소당하고 감옥에 가고 협박을 받고 조롱당했으며, 그들의 유튜브 채널은 폐쇄당했습니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문재인 정부가 획일화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북한에 대한 비판이 실질적으로 중요한 범죄행위가 되었습니다.”
4) 소결: 일부 탈북자들을 중심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북한 안팎의 사실을 알리는 삐라를 지난 10여 년 동안 계속해왔습니다. 이 활동은 미국 정부와 슈잔 숄티를 중심으로 한 미국 사회 일각의 후원과 격려를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정부와 국회가 이를 탄압하고 나섰고, [대북전단금지법]이 2021.3.30.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 이 법은 일부 언론들과 사회일각으로부터 “수치스러운 위헌법률”이라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이와 아울러 [5.18왜곡처벌법] 역시 [대북전단금지법]과 동등한 수준으로 ‘위헌법률’이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이 두 개의 언론통제법은 이제 국제사회에서까지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인호 교수와 코든 창 변호사가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에 증인으로 출두해 증언한 것은 피고인의 노력에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이인호 교수의 증언에서 중요시되는 표현은 “공식적으로 ‘5.18 민주화 운동’이라고 신성시된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해 많은 증인들과 연구자들은 학생 민주화 운동이 비밀 선동과 북한군의 참가로 인해 대규모 반정부 봉기로 악화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라는 부분입니다. 고든 창의 증언 중 중요 부분은 ”5.18은 일부에겐 ‘광주화운동’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부는 그것을 ‘광주반란’ 또는 ‘광주항쟁’이라고 주장합니다. 새 법에 따르면,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있었던 사건을 부인하거나 비방하거나 왜곡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을 선고 받습니다“라는 부분입니다.
2. 5.18을 북한이 주도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북한당국의 문헌 및 당국행사와 피고인의 학설이 정확히 일치
북한은 5.18이 김일성 교시에 의해 지휘된 '반파쇼 민주화운동'이라 교과서를 통해 선전하고(증249), 북한당국은 5.18을 사실상 간첩 손성모가 지휘한 것이라 사상교육 시키고(증228), 아울러 평양시, 시, 군, 도시 단위에서 1주일 이상에 걸쳐 5.18을 성대하게 기념하고 있다는 내용(229, 230)이 신문기사와 방송 등을 통해 보도되고 있습니다. 피고인의 [북한군 개입] 주장은 북한의 이러한 행위들에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런데 5월 단체들은 ① 피고인을 상대로 툭하면 소송과 집단 폭행을 가하고, ② [북한군 개입]을 방송하던 2개 종편방송에게 집단 폭행을 가하는 반면, ① 북한 교과서에 대해서는 그리고 ② 광주에서의 5.18기념행사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수십 개 도시 단위에서 성대하게 행해지고 있는 북한의 5.18기념행사에 대해서는 절대 함구를 해왔습니다. 피고인의 입을 막으려면 북한의 입도 막고 북한의 행위도 막아야 할 것입니다. 최소한 항의성명이라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똑같이 [5.18은 북한의 소행]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어째서 5월 단체들은 북한의 노골적인 [명예훼손] 행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북한의 주장 및 행위와 일치하는 표현을 한 피고인에 대해서만 남 보기 딱할 정도로 균형감을 상실하면서 탄압을 가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 나라 국민이라면 생각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1) 북한 교과서 내용: 5.18은 김일성이 지휘한 남한의 민주화운동 중 최고의 꽃(증249)
2015.10.14. 연합뉴스는 “北교과서 南 민주화운동은 모두 김일성 교시 따른 것"이라는 제하에 5.18은 물론 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민주화운동은 김일성 영도 하에 수행된 것들이라는 내용과 이런 내용들이 북한 교과서에 실려있다는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보도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서옥식 초빙연구위원이 11월 출간할 예정인 저서 '북한 교과서 대 해부'를 통해 현대사 부분의 왜곡·날조 실태를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북한은 "주체의 기치에 따라 남조선 애국인민이 호응해 일으킨 반파쇼 투쟁 중에서 5·18광주인민봉기는 가장 성공한 인민혁명사건"이라 주장한다. . .학교 4학년 국어 교과서에는 '누나의 사진'이라는 제목으로 5.18 당시 계엄군의 총칼에 누나를 잃었다는 '남철'이라는 소년이 등장한다.. .” 그러나 이 책은 곧 절판되어 지금은 교보문고에서 구입할 수 없습니다.
2) 증194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1982.3.20. 조국통일사 발행) 내용과 위 북한교과서 내용이 일치
① “남조선 혁명가들과 인민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매 시기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여, 새로운 구국통일 방안을 내놓으실 때마다 그것을 전적으로 지지하여 나섰으며, 원쑤들의 파쑈폭압과 분렬책동이 극도에 이른 어려운 속에서도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벌려왔다” (증194, 밑에서부터 10~15행)
② “남조선인민의 해방투쟁의 력사에 불멸의 위훈의 탑을 쌓아올린 영웅적 광주인민봉기는 커다란 력사적 의의를 가지는 사변으로 된다. 영웅적 광주인민봉기는 그 성격에 있어서 민주와 통일에 대한 남조선인민들의 한결같은 지향을 반영한 대중적인 애국적 항쟁이며 가장 높은 형태의 반파쑈민주화투쟁으로 된다.”(증194, 제596쪽 8~12행)
③ 증194의 제567쪽에는 광주시위에 대한 전략이 묘사돼 있습니다. “그들은 교외시위를 위주로 하면서 성토대회, 성명발표, 교내시위와 롱성투쟁 등을 결합하여 투쟁을 중단 없이 벌여나갔으며 시내 중심부를 시위구역으로 설정하고 역량의 집중과 통일행동을 보장함으로써 시위의 정치적 효과를 높였다”(567쪽 10-13행). 실제로 당시 학생들은 이런 식으로 시위를 했습니다만 이것이 전략에 따른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전략의 요점은 1) 주력시위(주공)는 시내중심부에서 벌이고, 성토대회, 성명발표, 교내시위, 농성투쟁 등을 조공으로 하여 중단 없는 공격을 실시하고 2) 모든 시위대들은 집중과 통일된 행동을 통해 정치적 효과를 높여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정규전과 비정규전을 배합하라는 북한전략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④ 같은 책 같은 쪽에는 시위전술이 기재돼 있습니다. “육박에 의한 경찰 저지선의 정면돌파와 경찰의 포위를 역포위로 전환시켜 앞으로 열어나가는 돌파, 분산과 집합, 큰 대열과 작은 대열의 배합, 속도행진에 의한 빠른 기동과 바리케트에 의한 완강한 방어 등으로 주도권을 틀어쥐고 적을 피동에 몰아넣었다. 또한 작은 돌과 큰돌 심지어는 화염병까지 준비하여 적에 대한 타격력을 높였으며 의학대학 학생들로 치료대를 조직하여 부상자에 대한 응급조치를 받게 하는 등 치밀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시위와 대중선전을 밀접히 결합시키면서 광장과 큰거리에서의 집회에 큰 의의를 부여하는 한편 시민들에게는 <함께 싸우자!>고 호소하는 삐라를 뿌렸고, 공장지대에서는 로동자들에게 확성기로 <함께 나가자!>고 호소하였고, 경찰들에게도 함화를 들이대었다. 이것은 학생들의 투쟁 전술에서도 종전의 투쟁에 비하여 큰 진전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증194의, 567쪽 13-26행)
여기에서 “함화((喊話)를 들이대었다”는 말을 북한 사전에서 찾아보면 “가까이 맞선 적군을 향하여 큰소리로 들이대는 정치군사적인 선동을 하였다”는 뜻입니다. ‘돌파’, ‘제 역량의 배합’, ‘역포위’‘속도전’, ‘주위선동’은 군사용어입니다. 광주 민간 시위에 무슨 군사용어가 나오겠습니까. 이 용어들은 북한 특유의 전술 용어들입니다. 북한의 전략 전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규전과 비정규전의 배합”이며, 이 전술은 남한 시위에서도 응용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북한식의 ‘돌파’작전은 첨입작전으로 대표됩니다. 적의 약한 곳에 최강-대량의 군사력을 투입하여 나무에 쐐기를 박는 작전을 의미합니다. ‘역포위’는 경찰저지선을 뚫은(돌파한) 시위대가 저지선상에 늘어선 다른 경찰들을 뒤로부터 둘러싸는 전술이며 이는 휴전선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우리 군의 방어선을 돌파한 후 돌파병력에 의해 전면을 응시하고 있는 우리 군을 뒤로부터 포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한의 시위에 이런 고수준의 전술이 응용되었다는 것은 북한 전문가들이 시위에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국에서는 물론 서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던 1980년 5월의 시위들이 그냥 산발적으로 발생한 시위가 아니라 시위전략과 시위전술을 통달한 검은 ‘시위작전사령부’의 일사불란한 지휘(계획, 명령, 상황파악) 하에 이루어진 작전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하는 대목인 것입니다.
⑤ 증194의 제609쪽 16-19행에는 광주시위에 대한 3개의 교훈이 내려져 있습니다.광주사건에 대해 남한에는 [북이 사용한 전략, 전술]도 없고 [교훈]도 없습니다. 5.18이 북한 역사라는 뜻입니다. 북한은 광주사태로부터 차후 대남폭동의 성공을 위한 3가지 교훈을 이끌어 냈습니다. 앞으로 남한에서 일으킬 반파쇼민주화투쟁은 3가지 교훈을 참작하여 일으키자는 것입니다.
교훈1:“광주인민봉기는 새로운 단계의 반파쇼민주화투쟁을 위해서 귀중한 교훈들을 남기었는데 그 교훈은 첫째로, 남조선인민의 해방투쟁의 승리는 반미투쟁과 결합될 때에만 확고한 것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교훈2:“광주인민봉기가 남긴 교훈은 둘째로, 남조선인민의 해방투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청년학생운동과 로동운동과의 결합을 새로운 높은 단계로 심화발전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교훈3: “광주인민봉기가 남긴 교훈은 셋째로, 남조선인민의 해방투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보다 광범한 대중적 지반 위에서 반파쑈민주역량을 형성하고 그것을 조직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⑥ 증194의 제546쪽에서 590까지 44쪽에 걸쳐 깨알 같이 기술된 상황일지(5.18직전 및 5.18과정)는 우리나라 검찰, 군인, 안기부, 치안본부 자료보다 더 자세합니다. 현장에 북한 기록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짙은 가스 연기 속에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던 버스1대(광전교통소속 전남5에이3706호)가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추어 섰을 때 계엄군 100명이 들이닥치자 차안에 있던 10명의 청년들이 결사적으로. . ”(576하5-8줄).
“광주봉기자들은 버스에 나뉘어 타고 목포와 라주 등 전라남도 기타의 도시들로 출발하여 봉기를 확대시키는 한편 그곳 경찰서와 향토예비군의 무기고들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 라주에 진출한 봉기자들은 라주경찰서 관내 5개 저서를 점거하고 경기관총을 비롯한 무기와 다량의 실탄을 빼앗았다. 화순, 승주, 호남탄광과 리양경찰지서에서도 . .화순광업소에 몰려간 봉기자들은 향토예비군에 사격을 가하여 물리친 다음 광주사이를 오가면서 무기와 폭약을 실어날랐다. 인민봉기는 라주, 화순, 함평, 완도, 승주, 담양, 령광, 해남, 목포, 장성, 송정, 려수, 순천, 광양, 보성 등 도 안의 많은 시,군으로 확대되어 . .”(580쪽 하반부).
한국 당국이 작성한 모든 5.18관련 자료는 2004년 대법원의 [공개]명령이 있을 때까지 검찰 지하 창고에 보관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한 문헌에는 1982년에 남한 당국의 문헌 내용과 일치하는 내용들이 훨씬 더 자세하게 묘사돼 있었습니다. “봉기군은 시 중심부에 있는 전남대학교부속병원 옥상에 경기관총을 걸어놓고 . .”(581쪽 하9-10줄). “전라남도 26개 시,군 중에서 17개 시,군이 봉기에 합세하였을 뿐만 아니라 19일에는 서울에서 1,000여명 학생들이 반정부 집회와 시위에 떨쳐나섰고, 21일에는 전주, 리리에서 투쟁이 벌어져 전라북도에도 항거의 불길이 타번졌다”(584쪽 8-12줄).
“오후3시부터 봉기자들은 공격 서열을 편성하였다. 봉기군중은 승용차 4대에 불을 달아 저지선을 향해 밀어보냈으며, 뒤이어 기름이 가득찬 드럼통을 실은 화물차에 시동을 걸어 저지선쪽으로 나가게 한 다음 솜뭉치에 불을 달아 차에 던졌다”(582쪽 7-11줄).
‘공격서열을 편성했다’는 말은 군사용어이며 이는 수많은 단위의 시위대들에 공격 목표를 배당해주었다는 뜻입니다. 공격서열을 정했다는 말은 시가지 전투를 기획했다는 뜻입니다. 광주시민들은 수많은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인 시위를 기획하여 계엄군을 압박할 수 있을 정도의 기획능력이 없습니다. 북한 집단이 내려와 기획하고 상황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수많은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수많은 상황들을 일목요연하게 묘사하고 정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 피고인의 분석입니다.
3) 증229, 2005.5.1. DailyNK 보도: 북한은 1980.5.18.부터 광주사태를 보도했다. 지금도 5.18행사를 거국적으로 거행한다.
“ 평양시에서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고 각 기관마다 만든 대형포스터를 들고 군중시위를 하는데, 노동자대표, 청년학생대표, 농민대표들이 차례로 나와 연설과 구호를 외친다. 광주에서 시작된 선혈들의 넋을 헛되이(?) 하지 말고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 . 지금도 <노동신문>은 계엄군이 시민들을 거리로 끌고 다니는 모습, 철사로 결박한 모습들을 보도한다. 영화관에서는 광주봉기를 주제로 한 ‘님을 위한 교향시’를 상영한다. . . 80년 5월 18일 북한 방송은 저녁 7시와 9시 뉴스 말미에 갑자기 “남조선에서 광주폭동이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노동신문>은 ‘광주폭동’ 소식을 싣고 사진들을 실었다. 시내회관에서는 조총련을 통해 입수한 다큐멘터리 영상물을 무료로 방영했다. . . “
“광주인민봉기는 북한에서 불리는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표현이다. 해마다 5월 18일 기념행사가 평양에 이어 전국의 도, 시들에서 대규모로 열린다. 북한당국은 행사에 참가한 북한주민들에게 ‘광주민중항쟁의 염원을 기어이 달성하자’, ‘전 국민적 봉기를 일으켜 미군을 몰아내자’,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 ‘친미정권을 타도하고 조국통일을 이룩하자’는 구호를 외치도록 강요한다. . .노동신문 사설, 조선중앙텔레비죤, 3방송 등 언론매체들을 통해 5.18광주인민봉기의 정신을 강조하면서 미군철수, 친미정권 타도, 자주적인 조국통일을 위해 남조선인민들이 들고 일어나 싸우라고 선동한다. 중앙보고대회 보고에서 북한당국은 ‘5.18광주인민봉기는 자주적이고 민주화된 새 세상에서 살려는 남조선 인민들의 강력한 지향과 염원을 반영한 정의의 반미-반파쇼 항쟁이었으며, 파쇼적인 정규 무력에 맞서 결사항전을 벌인 대중적 무장봉기’였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노동신문 사설에서는 ‘최후 승리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남조선에서 미제의 식민지 통치를 끝장내기 위한 전 인민적인 반미자주화투쟁을 과감히 벌여야 하며 광범한 각계각층 인민들이 단합하여 전 남조선적인 공동투쟁을 힘 있게 벌여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5월 18일 대외선전매체 ‘조선의 오늘’ 을 통해서도 북한당국은 5.18을 거론했다. ‘5. 18광주인민봉기’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에서 북한당국은 ‘광주인민봉기는 전두환군사파쑈도당이 《유신》파쑈독재를 지탱하기 위하여 1980년 5월 17일 남조선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것을 계기로 하여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에 걸쳐 광주에서 진행된 반《정부》적인 대중적 무장봉기’라고 설명했다. 또한 ‘인민봉기는 5월 18일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시위투쟁으로부터 시작되어 삽시에 온 광주 시내를 휩쓸었고 여기에 시내의 모든 인민들과 시주변의 노동자, 농민들까지 합세하여 그 수는 5월 21일에 무려 30여만 명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봉기군중들은 도청, 시청을 비롯한 통치기관들을 들이쳐 그를 장악하였고 무기고를 습격하여 수천정의 무기를 탈취했으며 《계엄군》의 많은 탱크와 차량들까지 빼앗아 타고 용감히 싸워 5월 21일에는 《계엄군》을 몰아내고 광주시를 완전히 자기들의 통제 밑에 넣었다는 것이 기사의 설명이다. . .”
5) 남한 자료보다 북한 자료가 더 정확
더욱 놀라운 것은 증46으로 제출한 [솔로몬 앞에 선 5.18]의 제140쪽 등에 묘사돼 있는 내용입니다. 안기부 상황일지나 검찰수사보고서는 2004년에 서울고등법원, 2005년에 대법원 판결이 있고서야 공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985년 북한 노동당 출판사에서 발행한 [광주의 분노](증251)가 묘사한 기본 자료와 일치하며, 묘사는 북한 책 [광주의 분노]가 더욱 자세합니다.
안기부가 1985년에 작성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보고서 96-97쪽(증59의 57~58쪽)에는 사망한 33명의 어린 학생들의 인적사항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광주의 분노'(증251)가 눈물 나는 사례로 거명한 학생 이름 9명을 안기부자료와 대조해 보니 이름도, 나이도, 학교명도 모두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박창권은 증251의 71쪽 3줄에 광주숭의중학교 2학년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은 안기부 자료(증59의 57쪽) 14번에 [박창권 나이 14 숭의중 2년 산수동]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김완봉은 증251의 제 74쪽 중간에 광주무등중학교 3학년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안기부 자료 증59의 57쪽 5번에 [김완봉은 무등중 3학년]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증251의 76쪽 상반부에는 7명의 학생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최연(광주학운초등학교 1학년 7살)은 증59의 58쪽, 32번 학생과 일치하고, 증251의 76쪽 상반부에 기재된 전재수(호덕초등학교 4학년)는 증59의 58쪽 30번과 일치하고, 박광법(전남중악교 1학년)은 증59의 57쪽 16번과 일치하고, 증251쪽에 있는 김명숙(서광여중 3학년)은 증59의 57쪽 3번과 일치하고, 증251의 76쪽 박성용은 증59의 57쪽 13번과 일치하고, 증251의 76쪽 안동필은 증59의 57쪽 19번 안종필과 일치합니다. 북한자료 증251은 이들 학생들이 죽는 과정을 극화하여 계엄군을 모략하는 데 사용했지만 거리이름, 사람이름, 파출소 이름은 매우 정확하고 자세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5.18 자료가 2005년까지 나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북한이 우리 정보기관들이나 군의 상황일지에 기재된 객관적 자료를 확보했을 수 있는지 그리고 이에 더해 현장들을 더욱 자세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인지, 북한이 현장 관리를 주도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주의 분노'(증251)의 36쪽에는 시민군이 탈취한 무기고의 이름들이 나열돼 있습니다. 안기부 자료 및 검찰보고서와 비교를 해보니 북한자료가 훨씬 더 자세했습니다. 예를 들어 안기부 자료(증59의 57쪽) 및 검찰자료(증59의 14쪽)에는 '화순군'의 '동면지소' 등 4개지서의 무기고를 털었다고 되어 있는데, 북한자료에는 '전투경찰중대무기고' '동면지서' '통주지서' 향토예비군무기고'로 특정하고 있습니다. 라주군의 5개 경찰서에 대한 기록도 북한자료(증251의 36쪽 상단 3개줄)가 훨씬 더 정확한 것입니다. 무기고를 탈취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상황들도 자세히 기록돼 있고, 시가지의 방향까지 자세히 묘사돼 있습니다.
“괴뢰군 제179지원단의 무기고를 습격할 때의 일이었다. 폭동군중이 무기고를 향해 밀려들자 보초놈들은 사격을 가하며 완강하게 저항하여 나섰다. 그리하여 무기고 기습초기에 벌써 적지 않은 청년들이 희생되였다. 정면으로 밀고들어가면 막대한 희생을 낼 수 있다고 본 폭동군중은 정면에서 사격전을 벌리는 한편 몸이 빠른 청년들로 놈들의 배후를 기습하게 하였다. 정면의 폭동군중을 막는데 급급하던 놈들은 배후에서 불의에 달려들어 내려치는 청년들의 각목 세례를 받고 모두 나가너부러졌다.. 보초병들을 까눕힌 군중들이 무기고를 열어제끼는 순간이었다. 꺼꾸러졌던 보초 한놈이 정신을 차리고 무기고앞에 모인 군중들을 향하여 사격을 가하였다. 그릭하여 또 여러명의 폭동군중이 희생을 당하였다. 괴뢰도청을 탈취하기 위한 격전을 한창 벌린 때에는 죽어자빠진 괴뢰군의 시체에서 총을 벗기려던 5명의 어린이들이 <공정대>놈들에게 붙잡혀 무참하게 참살당하기도 하였다..”(증251의 36~37쪽)
“상무동 부근에서였다. 중앙여자공등학교 학생이 공정대의 총검에 찔리워 피가 콸콸 쏟아지는 상처를 그러안고 달려오며 <군인이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지금 마구 찔러죽이고 있어요! 교장선생님도 총검에 찔려 죽었어요>하며 웨쳤다. . . ”(증251의 22쪽)
“무등운동장 부근에 있는 버스 정류소에서도 격노한 주민들이 공정대를 향하여 사생결단으로 달려들었다 . .”(증251, 23쪽 10-11줄)
“북쪽의 신전동으로부터 남쪽의 학동에 이르기까지, 동쪽의 우산동으로부터 서쪽의 상무동까지 시민들은 큰 길가와 골목들에서 놈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렸다. . ”(증251, 23쪽 하2-4줄)
“5월 19일 시내 중심부인 금남로1가에서부터 류동까지의 거리에서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이곳에서는 공정대 31련대놈들과 폭동군중이 맞붙어 . .”(증251, 24쪽 6-8줄)
“금남로에서 있은 일이다. 수천명의 군중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달려드는 한 개 중대 가량의 공정대놈들을 . .”(증251, 24쪽, 13-15줄)
“싸움은 <계엄군통신지휘소>가 있는 <카톨릭센터>에서도 격렬하게 벌어졌다. 공정대의 만행에 격노한 시민들은 카톨릭센터 차고에서 끌어온 4대의 승용차에 불을 달아 놈들의 저지선 안으로 몰아넣었다.” (증251, 25쪽 15-19줄). 카톨릭센터에 계엄군 통신지휘소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북한이 알고 있는 것인지, 북한의 개입이 없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됩니다.
“동아일보 광주지국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주민들은 옳은 보도를 하지 않은 문화방송국과 방송공사를 불태워버렸고 기독교방송국도 점거하였다. . . 이날도 비는 계속 내렸다”(증251, 26쪽 하3-9줄). 평양에 앉아서 비가 내리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금남로 남쪽에 자리 잡은 관광호텔 앞에서였다. 100여명의 공정대 놈들이 . .”(증251, 27쪽 하1-2줄). 관광호텔이 금남로 남쪽에 있다는 것, 거기에 100여명의 공정대원이 있었다는 세세한 사정을 어찌 평양에 앉아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까?
“카톨릭센터 앞에서는 200여대의 택시와 20여대의 버스, 3대의 화물자동차가 폭동군중에게 돌을 날라주었다. 그런가 하면 15대의 버스와 50대의 각종 자동차들이 야밤에 일시에 조명등을 켜서 놈들의 앞을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면서 봉기 군중을 진전시켰다.”(증251, 28쪽 하3줄-29쪽 3줄). 이런 자료는 계엄사 일지와 비슷하지만 계엄사 일지도 이렇게까지는 자세하지 않습니다.
“이날(주:5.19) 폭동군중은 도청차고와 괴뢰세무서, 8개의 괴뢰경찰파출소, 3개의 신문사와 방송국, 우체국, 은행 등을 불태워버렸고, 놈들의 자동차 50여대를 파괴 소각하여 버렸다.”(증251, 29쪽 8-11줄). 매우 자세하며 계엄군 상황일지와 비슷합니다.
증251의 34~35쪽에 기재된 내용입니다.
“누군가가 군중들 속에서 ”총! 총!“ 하고 피나게 절규하였다. . .그 총이 없었기 때문에 군중들은 놈들이 순진한 녀학생들의 옷을 벗겨놓고 갖은 희롱을 다하며 지어 젖가슴까지 도려내어 죽이고, 배를 갈라 태를 치는 것을 보고도 저지시키지 못하였다,. 시민들은 드디어 ‘피를 피로 갑자면 총을 들어야 한다’는 구호를 들었으며 무기획득을 위한 투쟁에 떨쳐 나갔다. 5월 21일, 광주고등학교와 숭일고등학교 학생들이 ‘학도호국단’의 무기고를 들이치고 많은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것은 광주 인민봉기과정에 봉기군이 처음으로 벌린 무시탈취투쟁이었다. . . .이 때부터 봉기군들은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놈들의 무기고를 본격적으로 들이치기 시작하였다. 폭동군중들은 괴뢰들의 군용차령 공장인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습격하여 314대의 군용차량을 로획하였으며 그 밖에도 414대의 각종 차량들을 탈취하였다. 봉기군들은 이 로획한 차량들을 타고 다니며 놈들의 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무기를 로획하였다.600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어 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 내었다. .. 이리하여 무기탈취 투쟁을 시작한21일 오전부터 오후 4시 현재까지 폭동군중이 탈취한 무기는 카빙총 2,240정, 엠-1 보총 1,235정, 권총 28정, 실탄 4만 6,400여발이었고 장갑차 4대, 군용차량이 400여대에 달하였으며 수백 키로그람에 달하는 폭약과 수백개의 뢰관들도 획득하였다.. . 괴뢰군 제 179지원단의 무기고를 습격할 때의 일이었다. 폭동군중이 무기고를 향해 밀려들자 보초놈들은 사격을 가하면 완강히 저항하여 나섰다. . .정면으로 밀고 들어가면 막대한 희생을 낼 수 있다고 본 군중들은 정면에서 사격전을 벌리는 한편 몸이 빠른 청년들로 놈들의 배후를 기습하게 하였다,. 고등학교 학생들은 ‘돌격대’ ‘특공대’를 두었고 대학생들은 ‘전남지역학생총련맹’의 지휘에 다라 대학별로 전투대오를 조직하였다, . .”(증38, 37-38쪽)
남한측 자료들이 검찰 창고에 잠겨 있을 1985년 당시 수많은 현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상황들이 북한 문헌들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지 음미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20년에 걸쳐 남북한 양측 자료를 공부하고, 5.18기념재단 자료와 통일부 문서 등을 폭넓고 깊이 있게 분석비교한 학자가, 위와 같은 것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연구하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대학원 수준에서 학문적 훈련조차 쌓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학대당하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갑갑합니다.
6) 소결
증229와 230은 남한의 뉴스이며, 해마다 북한이 1주일에 걸쳐 전국의 수십 개 도시단위에서 5.18을 성대하게 거행하고, 미국과 남한 정부를 쳐부수자는 선동을 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줍니다. 증249는 연합뉴스의 보도로 5.18은 북한 김일성의 영도로 남조선에서 일으킨 민주화운동 중 최상위에 해당한다는 점 등이 북한 역사교과서에 실려있다고 전합니다. 증194는 1982년 북한 조국통일사에서 발행한 대남공작 문헌인데 2005년에야 비로소 공개된 남한당국의 수사기록 내용들과 대략 일치합니다. 하지만 북한 책을 보면 북한의 지휘소 및 상황실이 광주에 있었고, 현장 기록요원들이 광주 곳곳에 있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남한 당국의 자료는 황망하게 기습당하는 처지라 기록들이 부실한 반면, 북한 자료는 사전에 기획한 전략, 전술, 현장기록, 교훈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증194 및 251의 내용을 읽어보고, 이를 남한 기록들과 대조해 본 사람이라면 ‘5.18을 현장에서 주도하고 지휘한 존재가 북한’이라는 느낌과 아울러 한국군은 기습을 당하는 입장에 있었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증59의 98~175쪽에 수록돼 있는 [5.18항쟁 증언자료집]을 보면 5.18유공자 최고인물들은 5월 18일부터 24일까지 각자 흩어져 도망다니고 숨었습니다. 그런데 남한 당국의 공식자료와 북한 당국의 자료를 보면 모든 폭동적 행위들이 5월 18일부터 5월 24일 오전까지만 발생했습니다. 그러면 5월 18~24까지의 폭동현상은 누가 일으킨 것입니까? 별책 [역사로서의 5.18]은 5월단체가 유네스코에 등재시킨 자료들을 가지고 쓴 책입니다. 사태의 현장들에 있었던 주로 어린 사람들이 목격한 외지인의 행동들이 주를 이루었고, 그런 증언들에 의해 이 책의 저자는 5.18을 외지인이 주도했고, 그 외지인은 북한특수군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증251만 보아도 5.18현장 기록은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자세하게 남겼습니다. 북한이 현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결 론
1.제1항은 이인호 교수, 고든 창 변호사가 국제 인권단체에 증언했다는 내용입니다. 5.18의 주역이 북한이라는 설이 한국사회 일각에 형성돼 있다는 사실과 문재인 정부가 이 설을 법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시한 것입니다.
2.제2항에는 5.18은 북한이 주도한 역사였고, 계엄군은 무망결에 기습을 당한 처지에 있었다는 사실이 묘사돼 있습니다. 이 사실은 북한 교과서 내용과 북한의 대남공작 문헌에 의해 자세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3.남한의 방대한 수사자료, 북한의 방대한 문헌, 통일부 자료, 5.18기념재단 자료를 20년 동안 꾸준히 연구한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개-돼지처럼 학대 받고 있는 이 허망한 현실을 제발 직시하여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증거자료
증247.2021.4.16. v.o.a , [기자문답] 톰 랜토스 인권위원장 "친구의 인권 문제 잘못 지적해 주는 게 진정한 친구"
증248. 2021.4.19. 펜앤마이크, 이인호 전 주러대사 “문재인 집권 후 한국은 포퓰리즘의 전체주의 국가로 전락...공화국의 생존 위협당해”
증249. 2015.10.14. 연합뉴스 , 北교과서 "南 민주화운동은 모두 김일성 교시 따른 것"
증250.2021.4.19. 미디어워치 고든 창, 미 하원 ‘한국 자유·인권 청문회’ 증언 전문
증251.광주의 분노(1982. 노동당출판사)
2021.5.6.
피고인 지만원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항소 제8-3부 귀중
2021.5.5.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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