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지만원의 특이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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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03-05 16:53 조회3,71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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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의 약력
1942년 강원도 횡성에서 출생, 경기도 양평군 영화마을 구둔에서 초등학교 졸업, 동네 형들 따라 상경하여 고학을 했다. 돈이 생기면 가고, 없으면 그만 두는 식으로 변두리 학교 야간반 6년 중 3년 정도 다녔다. 육군사관학교 필기시험에 합격은 했지만, 신체검사에 미달, 키가 모자랄 땐 낯선 소령이, 몸무게가 모자랄 땐 낯선 대령이 나타나 천우신조로 입교하여 1966년 육사22기로 졸업했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했던 시절, 위인전, 영웅전, 성능이 증명된 고전소설을 정독했다. 10쪽을 읽고 다시 1쪽부터 훑어가면서 ‘내가 배워야 할 점’을 찾아 상상하며 노트했다. 주말마다 외출하지 않고 도서관에 달려가 책을 고르는데 2시간 이상 보냈다. 이 세상 최고의 스승은 책 속에 있었다.
소위로 임관, 유격훈련을 마치자마자 32사단에 배치, 포대장(대위)이 사고를 당해 장기간 대리근무를 했다. 회의 때마다 대대장의 지시내용을 기록했다. 업무가 무겁다며 대위들이 상을 찡그렸다. 천진난만한 나에게 대대장이 지시내용을 잘 이해하느냐고 물었다. 잘 몰랐지만 나는"네 네 이해합니다" 하고 활짝 웃었다. 분대장들을 모아놓고 지시내용을 가르쳐 달라 했다. 분대장들 덕분에 나는 대대장의 총애를 받았다.
죽지 않으면 병신이 된다는 투이호아 지역의 백마 28연대. 주월군에서 전과가 가장 높은 기동타격 중대에 배속됐다. 작전이 끝날 때마다 맥주파티를 하면서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살을 꼬집었다. 살아서 고국에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다.
중위로 진급하면서 포병상황실을 맡았다. 시간대 별 상황지도판을 만들어 상급부대로부터 매일 받는 정보일지에서 상황발생 지역을 표정케 했다. 한 달 동안의 분포를 보면 시간대 별 베트콩 활동 개념이 눈에 보였다. 각 지역에 시간을 맞추어 포를 쏘았다. 후에 노획된 베트콩 문서에는‘한국 포에는 눈이 달렸다’는 문장이 있었다. 미군 공수사단을 지원하는 포병 대대장이 찾아와 포를 헬기로 공수하는 시범을 하는데 1개 포반을 지원해달라 했다. 포차에 1개 분대를 태우고 포를 끌고 미군 비행장 옆 모래밭에 갔다. 뚱뚱한 미군소령이 오더니 검열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도움을 주려고 왔지 당신에게 검열받으러 오지 않았다”고 했더니 “한국에서는 장군들이 내 말에 복종했는데 너 처벌받고 싶으냐”며 호통을 쳤다. 나는 병사들에게 소령의 발밑을 조준하여 일제히 사격하라 낮은 소리로 말했다. 사격이 집중되자 소령은 삽살개처럼 달아났다. 다음 날 미군 대대장이 내게 선물을 가지고와 사과했다. 그리고 포병사격을 협조해 달라며 미군 병장을 상황실로 파견했다.
1969년, 월남참전 22개월 만에 몸무게 47kg으로 귀국해 육군본부에 근무,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상병이 말썽을 부려 구타했다. 정일권 총리가 김계원 참모총장에게 전통(통신문)을 보내 ‘지중위를 엄벌에 처하고 결과보고하라’명령했다. 서교동 상병의 집에 찾아가니 정인숙과 애기가 있었다. 엄포를 놓던 여인에게 상병이 저지른 행위를 말해주고, “누님이 제 입장이 되셨다면 어떻게 했겠느냐”물었다. “저 같으면 반쯤 죽여놓지요”그녀는 내게 사과를 했다. 그래도 전통은 취소되지 않았다. 난 중위 계급을 단 정복을 입고 퇴근시간대에 정일권 총리실에 갔다. “일국의 총리가 일개 상병을 챙겨주는 일을 다 하는 것이냐” 따졌다. 보좌관은 통신문을 취하하겠다고 약속했다.
귀국 7개월 만에 주월사령부 장군의 전속부관으로 재파되었다. 대령 참모들이 결재서류를 들고 부관 방 소파에서 대기했다. “어이, 지대위 담배 있나?”, “저 담배 안 피는데요” 이튿날 나는 PX에 가서 담배를 종류별로 사다가 돌돌 말아 올린 작업복 틈 속에 3개씩 꽂았다. 팔뚝이 화려해졌다. 대령들은 언제나 내 팔뚝에서 담배를 가져갔다. 이후 나는 대령들이 미리 와서 오래 대기하지 않도록 전화 서비스를 했다. 몇 달 후 대령들은 나를 장군으로부터 떼어내 낙하산으로 포대장을 시켜주었다. 다시 투이호아로 갔다.
백마 28연대 지역 포대장이었을 때 사단장이 고지로 날아와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훗날 사단 부관참모가 이를 인헌무공훈장으로 바꿔쳤다. 부관참모가 훈장 장사를 한 것이다. 하루에 36발의 포탄만 할당돼 있었는데 나는 하룻밤 상황에 1,800발을 퍼부었다. 이로 인해 ‘나민하 중위 매복사건’에서 포에 의해 사살당한 베트콩이 18명이나 되었다. 작전과장은 포탄을 많이 쏘았다고 질책을 했지만 포병사령관으로부터는 배포 크다는 칭찬을 들었다. 무덥고 뜨거운 상하의 땅, 나는 병사들에게 군복을 궁둥이 높이로 잘라 입으라 했다. 점호 등 모든 집합을 없앴다. 분대장들은 매일 익일의 과업에 대해 나와 토의를 했다. 병사들은 피동적 존재가 아니라 주인이 되었다. 토의는 지혜를 창출해내는 가장 위력 있는 방법이었다.
사관학교 졸업 9년 만에 미해군대학원(NPS) 경영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대학원 위치는 캘리포니아 해변 몬터레이반도, 일명 존 스타인벡 컨트리였다. ‘에덴의 동쪽’, ‘피서지에서 생긴 일’의 촬영지이며 클린튼 이스트우드, 킴 노박이 사는 시인의 고장이다. 회계-감사 분야에 통계수학을 접목시키는 수학모델을 개발하여, 그 학교 창설 이래 처음으로 문과석사가 수학박사 과정에 허용됐다. 국가는 나를 위해 스탠포드 대학 학비의 2.5배를 지불했다. 장비의 ‘기동도’라는 새로운 분야에서 수학공식 2개, 수학정리 6개를 발명했다.
1980 귀국하여 중앙정보부 지휘부에서 1년 근무하다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이 되었다. 공기나 물처럼 자유재로 인식되던 군수품에 책임자를 지정하는 책임회계 제도를 창안했다. 윤성민 국방장관은 5년 동안 군 예산개혁을 추진했고,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이를 모든 정부부처에 적용했다. 사단마다 자원관리참모가 새로 생겼고 대형 컴퓨터가 도입되었으며, 전산요원과 공인회계사들이 대거 투입됐다. 율곡사업(무기구매)의 허술성과 부정을 지적하는 보고서를 낸 결과 국방장관과 총장 등이 전두환에 야단을 들었고, 이들의 보복이 시작되자 1987년 봄, 대령으로 예편하여 미해군대학원에 3년 동안 교수로 봉직했다.
1989년 말, 차세대 전투기로 선정된 F/A-18기를 F-16으로 바꾸는데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당시 F-16 제작사인 GD사가 나를 초청해 제조공장을 견학시켜주었다. 국빈대접이었다. 이에 더해 GD사는 사업권을 주겠다 했지만 내 인생이 상인(Merchant)으로 분류되는 것이 싫어 사양했다.
1991년, 처녀작 [70만 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 하나]를 김영사를 통해 냈다. 소설을 제치고 베스트1위를 7주 동안 했다. 이어서 [시스템이냐 신바람이냐]라는 경영서와 [J의 사관생활 멋]이라는 책을 내면서 KBS 방송을 타게 되었다. 전국 경영학 베스트 강사 3위에 올랐고, [멋]을 읽은 김상근 PD가 사관학교 입학과정에서 나를 도와주었던 은인들을 수소문해 만나게 해줌으로써‘TV는 사랑을 싣고’의 효시가 되었다. 각 정당에서 장관을 하라, 전국구를 해라 제의해왔지만 나는 창작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육사에서 독서를 하면서부터 나는“영원한 자유인”으로 살고자 소원했지만 지금은 매월 180쪽 분량의 [월간 시국진단]을 손수 작성해 유료 회원들께 배포해야 한다. 평론과 저술로 인해 1998년부터 지금까지 근 200건의 송사사건에 말려들어 답변서 쓰는데 내 삶을 저당 잡혔다. 법원과 검찰조사가 내 일상이 돼있다. 그토록 동경했던 영원한 자유공간은 영원한 감옥이 되었고, ‘신선한 충격’, ‘장안의 지가를 높인 샛별’이라는 평을 듣던 나는 반공활동을 시작한 1999년부터 ‘괴물’ ‘극우 또라이’, ‘망언자’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있다. 위 내용들은 [뚝섬 무지개]에 담겨있다.
2021.3.5.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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