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의 위험한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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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02-01 17:55 조회4,28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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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들의 위험한 가면
탈북자 숫자가 33,000명을 넘어섰다 한다. 이들 모두는 오로지 자유를 추구한 나머지 사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찾아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그들의 정체를 속이기 위해 고안된 만병통치약이었다. 2016년 9월 27일자 조선일보는 2012-2016년 동안 군에 침투한 남파간첩 13명 중 12명이 탈북자 신분이었다는 기사를 냈다. 군 장교를 상대로 한 간첩 원정화, 서울시 공무원으로 간첩혐의로 재판을 받았던 유우성 등 우리가 최근 접했던 간첩사건들도 탈북자들이 주인공이었다.
1966년 드라마틱하게 판문점을 넘어온 이수근은 당대 대한민국 최고의 애국자로 숭앙되었다. 하지만 그는 간첩혐의로 1969년 처형됐다. 1983년 인민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휴전선을 넘어 귀순한 신중철은 이웅평이 몰고 온 전투기보다 더 값진 선물을 들고 내려왔다. 양구에 있는 제4땅굴 위치를 가지고 온 것이다. 198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애국자는 신중철이었다. 1986년, 나는 국방연구원에 근무하면서 신중철과 이웅평을 각기 3일간씩 빌렸다. 이때 신중철은 내게 이런 말을 털어놓았다. “나는 연합사 부사령관인 한 대장(육사12기)과 의형제를 맺었다. 그의 제안으로 나는 전방 20개 사단을 다 돌면서 정부 및 작전 브리핑을 들었다. 모 대장은 나에게 말했다. 휴전선 모든 사단의 브리핑을 듣고 네가 북괴 사단장이라면 어떤 결심을 하겠는지 사단장들에게 알려줘라” 신중철은 이런 종류의 정보를 다 수집하면서 국군정보사령부에서 1995년 대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13년 동안 근무한 후 2001년 김대중 시대에 가족들을 버리고 사라졌다.
200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애국자는 장진성이었다. 그는 위대한 시인이자 세계적인 문호 정도로 숭앙받던 탈북자였다. 그는 10년에 가까운 세월에 걸쳐 철옹성처럼 성역화된 인물이 됐다. 그에게 성역을 지어준 사람은 주로 조갑제와 정규재였고 그가 광수가 절대 아니라는 방패막을 쳐준 사람은 변호사 차기환이다. 위키백과에 나타난 장진성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2014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시장경제대상 문화예술부문 수상, 2012년 영국 옥스퍼드 렉스 워너 문학상 수상, 2015 네덜란드 레이던대학교 북한학 초빙교수. 베스트셀러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는 일본과 미국에서 번역출판, 수기 〈시를 품고 강을 넘다〉는 일어 출간, 해외 계약과 판매에서 한국 작가들 중 가장 압도적 1위 기록, 수기 〈DEAR LEADER〉는 영국 랜덤하우스가 유럽판권 획득, 2012년 5월 29일 한국인 최초로 옥스퍼드 문학상 수상.
북조선에서는 평양음악무용대학 졸업, 조선중앙방송위원회 TV총국 문예부 기자,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중앙당 통일전선부 101연락소 근무, 2004년 망명, 2005.01~2010.12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2011.12 뉴포커스 발행인 대표. 위키백과에 소개된 장진성은 눈부시게 화려했다. 그런데 장진성이 덜미가 잡힌 순간이 있었다. 2008년 11월 23일,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오익제는 자진해서 월북한 사람이 아니라 대남공작부에서 공작 차원에서 납치했다”는 내용으로 증언했다. 김대중과 오익제의 앞가슴에 붙어있는 빨갱이라는 딱지를 떼어내 주는 기사였다. 천도교 교령 오익제는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의 창당발기인이자 핵심 고문이었다. 그런 그가 1997년 8월 갑자기 북한으로 자진 월북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오익제가 김대중 앞으로 쓴 편지가 국제우편을 통해 김대중에 전달됐고, 이 편지는 당시 안기부에 잡혔다. 그 편지는 김대중 보라고 쓴 편지가 아니라 안기부에 의해 국민에 발표되라고 쓴 공작물이었다. 오익제의 월북사건과 편지사건은 김대중에 대한 색깔론을 불렀고, 김대중은 이를 영리하게 이용하여 김대중이 안기부에 의해 탄압받고 있다는 동정론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오익제는 김대중을 당선시키기 위해 북한과 짜고 스스로 월북했던 것이다.
이 글을 뒤늦게 접한 나는 2016년 3월 23일, 시스템클럽에 “국정원은 장진성을 위장 간첩 혐의로 조사하라”는 글을 썼고, 뉴스타운은 이를 전재했다. 이에 대해 장진성은 4월 12일, 3일 내에 사과하지 않으면 고소를 하겠다 했고, 이에 응하지 않자 2016년 5월 28일 고소를 했다. 이 고소사건으로 인해 장진성은 고소인 자격으로 법정에 나와 2시간 30분 동안 나의 질문을 받았고, 여기에서 그가 간판 학력과 경력으로 내걸었던 김일성 종합대학 졸업과 대남사업부 근무 경력 그리고 탈북 스토리 자체가 모두 허위라는 사실이 들통났다.
2021년 1월 24일 오후 7: 25분, MBC 프로 ‘스트레이트’에서 유명 탈북 작가 장진성 "그에게 당했다"는 프로에 50분 정도 방송되었다. 이 프로에 의하면 장진성은 나에게 고소를 시작했던 바로 그 시기인 2016년 6월에 한 20대 여성 탈북자에게 연락하여 그 스스로도 국정원을 배경으로 팔아가며 성폭행을 하고 나체사진을 찍어 그녀가 다니는 학교게시판에 공개하겠다고 협박하며 재력가들에게 성매매를 시켰다고 한다. 변호사가 나서서 그를 상대로 고소를 했다고 한다.
장진성은 탈북사회의 별이었다. 교회를 배경삼아 신뢰를 증폭시켰고, 북한인권 운동계의 별로 등장해 있었다. 그래서 더 많은 탈북 여성을 착취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가장 숭고한 애국시인이고, 세계적인 문호이고,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했고, 북한의 국정원인 대남사업부에서 근무했고, 남에서는 6년 동안 국정원 산하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으로 보직돼 있었다는 등 눈부시게 화려한 프로필의 소유자였다. 이런 가짜 프로필을 가지고 국정원 배경을 팔아가면서 의지할 곳 없는 탈북여성들을 상대로 포주 노릇을 해왔다는 것이다.
나는 외국의 영상분석팀의 도움으로 탈북자 60명 정도가 1980년 5월에 광주 현장에 왔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1980년 5월 23일, 전남도청 앞에서 촬영된 한 장면의 사진 속에 50여 명의 탈북자 얼굴이 있었다는 점을 영상분석 결과와 함께 발표했다. 이들 중 장진성말고도 이순실, 김영순, 리민복 등 12명의 탈북자가 추가로 나를 고소했다. 2019년 2월 8일, 내가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개최된 [5.18 진상규명 대공청회]에서 4시간 여에 걸쳐 “5.18은 북한이 저지른 게릴라전이었다”는 연구 결론을 발표했다. 이에 국회의원 설훈, 민병두, 최경환, 5월단체들이 나를 고소했다. 모든 방송과 언론들이 “지만원은 망언자”라는 꼬리표를 달아 전국에 알렸다. 전직 주사파였던 하태경이 탈북자 12명을 선동하여 “나는 광주에 절대 오지 않았다”는 취지의 고소를 하게 했다. 나는 이들 12명이 오랜 동안 남한 사회에 확산시킨 방송과 저서들에 대해 여러 달 동안 분석했다. 한마디로 이들은 무협지보다 더 무협지 같은 거짓말들을 꾸며 남한 국민들을 농락했다. 눈물을 흘리게 했고 그들을 존경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그들이 돈을 버는 방법이었다.
내가 벗긴 가면의 수는 13개다. 이들은 한국 사회를 조롱하며 돈을 벌어왔다. 거짓말을 더 잘 꾸며 낼수록 한국 국민들은 환호하며 눈물을 흘렸고, 지갑을 열었다. 그럴수록 더욱 신이 나서 한국 국민을 조롱했다. 한국 국민들을 더욱 많이 착취하도록 도움을 준 사람은 국정원 직원, 조갑제, 정규재, 차기환 등이다. 교회도 큰 몫을 했다. 한국 언론들이 수족 노릇을 했다. 이들 13명은 한국 사회에서 유명세를 즐기며 거칠 것이 없이 한국 국민을 조롱하며 주머니를 털었다. 나는 내가 분석한 이들에 대한 내용들이 탈북자들이 하는 말이면 무조건 믿고 눈물을 흘려대는 마음씨 착한 한국 국민들을 일깨우는 자극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1.2.1.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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