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성의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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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02-15 09:05 조회3,25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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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성의 가면
아래 사진은 2018년 3월 18일 노숙자담요에 의해 분석되어 공개되었다. 아래 사진은 1980년 5월 23일, 북한 사진사들에 의해 촬영되었고, 힌츠 페터에게도 전달된 사진이다. 제381광수는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참사 리명철, 제382광수는 장진성, 제383광수는 김정일 처형 성혜랑의딸 이남옥인 것으로 판독되었다. .
이에 대해 장진성은 2016년 4월 12일, “4월 15일까지 사과하지 않으면 소송하겠다”며 나를 향해 협박했다. 이에 응락하지 않자 장진성은 2016년 5월 28일에 고소를 했다. 이 사건은 당시 1심 재판부 사건 2017고단9358이었고, 이는 광주단체들이 나를 향해 대규모 집단으로 고소한 5.18사건(2016고단2095)에 병합돼 있다. 그의 고소 요지는 1980년에 광주에 온 적이 없고, 위장 탈북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는 제382광수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를 광수로 지목했고, 그가 위장 탈북자일 수 있다고 의심하는 글을 게시했기 때문에 명예가 훼손됐다는 것이다.
나는 그를 법정에 증인으로 신청했고, 그가 증인석에 섰을 때 물어 볼 말들을 준비하는 데 130시간 이상을 투입했다. 40쪽에 걸쳐 140개의 질문 항목을 준비했다. 그에 관한 모든 기사와 인터뷰 자료를 모으고, 그의 탈북스토리 두 가지를 정밀 분석했다. 2009년 12월 30일, 그는 ‘탈북자 동지회’ 홈페이지 ‘탈북자 수기’ 게시판에 A4지 70여쪽 분량의 [나의 탈북스토리]를 게시했고, 2011.2.18.에는 이 내용을 보강해 조갑제닷컴을 통해 204쪽 분량의 [시를 품고 강을 넘다]라는 제목의 업그레이드 된 탈북스토리를 내놨다. 이 모든 자료를 분석한 결과 나는 그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은커녕 입학조차 하지 않았고, 그가 자랑으로 앞세웠던 대남사업부 근무 경력도 허위이며, 탈북스토리는 무협지보다 더 황당한 거짓말들로 얽어맨 5류 소설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하였고, 이 평가를 장진성 입을 통해 법정에서 사실로 확인받기 위해 140개의 질문을 준비했다. 그리고 법정 질의 응답은 160분 동안 지속됐다. 그는 허름한 점퍼를 입고 증인석에 반 정도 누워서 대부분 고개로 대답했고, 때로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고 버티었으며 나중에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정신병자라 소리치면서 법정을 나갔다. 이를 지켜본 방청객들 모두가 그를 향해 혀를 찼다. 시인이 아니라 살쾡이요, 애국자가 아니라 길들지 않은 3류 인생이었다. 그래도 그의 입을 통해 그가 남한에 내놓은 말들은 중요한 부분이 100% 모두가 다 허위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본명도 허위
장진성은 한국에서 장진성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그는 본명이 장철현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는 여러 차례에 걸친 질문 끝에 본명이 위철현이며 대동강구역 문수동에 부인과 아들(위금성)이 있다는 사실을 실토하였다.
문: 북한에 있을 때의 본명은 무엇인가요?
답: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증인의 본명은 장철현이 아니라 위철현이 아닌가요?
답: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본인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물이라 숨길 것이 없을 것 같은 데 왜 위철현이라는 본명을 숨기고 장진성 또는 장철현으로 활동하는 것인가요?
답: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문: 본 법정에서 이야기할 수 없는가요?
답: 예
문: 증인이 이곳에서 다른 이름을 사용하면 위철현이 탈북한 것을 모르는가요?
답: 압니다.
문: 대동강 구역에 문수동이 있는가요?
답: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증인과 연관이 있는 지역인가요?
답: 예
문: 증인은 그 문수동에서 처와 아들 위금성이랑 결혼생활을 했었지요?
답: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도 허위
문: 증인은 탈북스토리를 자세하게 다룬 책 ‘시를 품고 강을 넘다’의 표지 안쪽에 증인이 나온 학교를 김일성 종합대학으로 기술했지요?
답: 예
문: 증인을 취재한 언론들의 기사를 보면 증인이 나온 학교는 “평양음악무용대학교’로 소개돼 있는데 어떤가요?
답: . . 통전부는 대남공작부서이고, 그러한 특수성 때문에 음악대학을 졸업하는 사람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통전부에 김일성종합대학 위탁교육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위탁교육은 종합대학교를 졸업한 것과 똑같이 취급해주어서 그 위탁교육으로 종합대학교를 졸업한 것입니다.
문: 그런데 증인의 책에는 김일성종합대학으로만 기재되어 있는데 어떤 것이 사실인가요?
답: 위탁교육이 졸업장과 같습니다.
문: 어느 곳에는 평양음악대학 출신이라고 되어 있고, 다른 책에서는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이라고 되어 있는 데 어떤가요?
답: 음악대학을 94년도에 졸업하였고 중앙방송에 기자로 96년까지 있다가 통전부에 차출되어 가면서 그곳에서는 직장에 다니면서 교육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으로 치면 대학원 과정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종합대학 졸업장을 주기 위해서 하는 교육시스템이기 때문에 졸업으로 똑같이 취급해 줍니다.
문: 김일성종합대학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다녔습니까?
답: 1997.부터 1999사이에 3년 동안 다녔습니다.
문: 북한에서는 평양음악무용대학과 김일성종합대학이 쌍벽을 이루는 명문대로 알려져 있고, . . .증인이 어떻게 그 두 개의 명문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인가요?
답: 다니지 않았으니까.
문: 예술대학 5-6년 과정에서 음악-무용공부를 한 사람이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를 졸업한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시를 썼고, 조선중앙방송국 기자로 특채되었다면 증인은 이미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고, 수습과정도 생략한 천재라는 결론인데, 이러한 천재가 단지 시를 쓰기 위해 구태여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를 또다시 4년 동안 다닌 것인가요?
답: 제가 원해서 다녔다기보다는 통전부는 음악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심리전을 하는 부서이기 때문에 북한은 자격을 매우 중요시해서 자격증 획득을 위해 위탁교육을 시켜서 위탁교육으로 간 것입니다.
소결: 위 문답 내용을 보면 통전부 요원이 되려면 반드시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졸업장이 있어야 하는데 장진성은 졸업장 없이 대남사업부에 특채되었고, 규정을 준수하기 위해 통전부는 장진성에게 위탁교육 형태로 졸업장을 주었는데 실제 학교를 나간 것이 아니라 근무는 통전부에서 하고 서류로만 졸업을 시켰다는 주장이다. 이는 상식에도 맞지 않고 진짜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를 졸업한 70대의 탈북자가 들려준 말과는 매우 다르다. 결론적으로 장진성은 김일성종합대학을 학력의 간판으로 내세울 수 없는 사람이다.
2021년 1월 26일, 탈북자 홍강철이 진행한 [왈가왈북] 프로에서 홍강철은 내가 인터넷에 게시한 장진성과의 문답 내용에 대해 이래와 같이 밝혔다.
홍강철: 그리고 1997년부터 99년 사이에 3년 동안 김일성종합대학을 위탁으로 다녔다는 겁니다. 그리고 2001년부터 2004년 1월까지는 해군 협주단 작가로 근무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여기에서 웃기는 거는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증은 내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장진성이 원해서 한 게 아니고 “101연락소에서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증을 만들어줬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은 97년부터 99년 3년 사이에 위탁교육을 받은 것으로 해줬다는 거죠. 3년 동안 위탁교육을 받은 것으로, 위탁교육이지만 한국의 대학원처럼 했고, 그러니까 한국 대학원이 이렇게 대학에 계속 나가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죠.
학교에 나간 것이 아니라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101연락소에 출퇴근했고, 그래서 그 101연락소에서 그런 것처럼 김일성종합대학도 같은 겁니다. 해군에서 위탁교육을 맡겼으면 김일성종합대학에 나와서 공부를 해야 되는 거죠. 이 남한에서의 대학원처럼 학교에 안 나가고 그래도 뭐 졸업증을 받고 이런 게 아닙니다, 북은. 사실 무조건 공부를 해야 되는 거죠, 앉아서. 그러니까 위탁교육이 뭔지 잘 모르는 겁니다. 우리 초등학교 때 보게 되면 이런단 말이에요, 우리는. 그럽니다. 그런 것처럼 그런 위탁생들이 오는 거죠. 그렇지만 그 위탁생들이 학교에 오지 않고 자기 군부대에 있으면서 공부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 거는.(녹취록 12쪽)
통전부 근무 경력도 허위
문: 인터뷰 내용들과 그 외 자료들을 보면 증인은 1971년 3월 황해북도 사리원에서 출생했고, 1994년 24세로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했고, 평양음대 시절에 썼던 시가 김정일의 눈에 들어 1994년 졸업 즉시 조선중앙방송국 기자로 특채됐고, 1996년부터 노동당 통일전선부 101호 연락소 소속 시인으로 발탁되었고, 거기에서 8년 동안 남한의 민중시인 ‘김경민’이라는 가명으로 시를 써서 남한운동권에 내려 보내는 일을 하다가 갑자기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4년에 탈북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맞습니까?
답: 예
문: 증인은 탈북스토리에서 “한국 대학가에 떠돌던 상당수 민중시가 통전부 시인들의 작품이었다”고 말했지요?
답: 예
문: 탈북을 하여 남한에 와보니 증인의 시들이 한국 대학가나 운동권에 얼마나 퍼져 있던가요?
답: 제가 쓴 시가 아니라 101연락소는 남한의 문화침투연락소입니다. . . . 그러니까 저의 시가 아니라 선배들의 것입니다.
문: 증인의 시가 우리나라 대학가나 운동권에 퍼져 있다는 것은 모르는가요?
답: 그러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문: 인터넷을 보니 2001.부터 2004.1월 초까지 증인은 인민군 해군협주단 배우를 했다고 하던데 . . .
답: 배우가 아니라 해군협주단 작가로 있었습니다. . . .
장철현이 언론에 공개한 것을 보면 그가 101연락소에 특채된 이유는 남한의 민중시인 김경민이라는 이름으로 시를 써서 남한의 대학가와 운동권에 보내기 위한 것이었고, 그 일을 위해 8년 동안(1996-2004) 통전부에 근무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증인 신문 내용을 보면 그는 김경민 이름으로 시를 쓰지도 않았고, 그의 시를 남한에 내려보내지도 않았다. 더구나 그는 2001부터 2004.1월.까지 해군협주단 작가로 일했다고 했다. 101연락소에 근무하면서 서류로만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했고, 서류로만 해군협주단 기자를 했다는 해괴한 주장이다. 더욱 신뢰할 수 없는 것은 통전부라는 어마어마한 곳을 채용의 대전제인 김일성종합대학 어문학부 졸업장 없이 특채되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탈북자 홍강철은 2021년 1월 26일 [새날] 프로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홍강철: 자기는. “통일전선부에 속해서 시인으로 활동했다.” 그런 자기가 남한에 내려 보내는 민중시를 쓰는 시인으로 활동했다는 거죠. 이 김경민이라는 그런 이름으로 자기가 활동했다 그래요. 그런데 그 “자기가 지은 시들이 민중시로 대학가하고 운동권에서 많이 읽혔다.” 이렇게 말하고 있거든요, 90년대에. 그러니까 96년부터 거기에서 일했다니까, 그런데 재판에서 뭐라 하는지 아세요? 지만원이 이렇게 묻습니다. “증인은 탈북스토리에서 한국 대학가에 떠돌던 상당수 민중시가 통전부 시인들의 작품이라고 말했죠?” 그러니까 “예.” “탈북을 하여 남한에 와서 보니 증인 시들이 한국 대학가나 운동권에 얼마나 퍼져있던가요?” 하니까 “제가 쓴 시가 아니라 저희 선배들이 쓴 시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이전까지는 그 이제 김경민이라는 시인이 쓴 민중시가 자기가 썼다고 했었는데 재판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거죠, 법정에 가서는. [새날 녹취록 3쪽]
홍강철: 그리고 또 장진성이 또 뭐라고 말했는가 하면, “2002년부터는 협주단 군복에 중위 계급을 달고 101연락소에 출퇴근하면서 한 주일에 한 번씩 협주단에 가서 자신의 당위원회, 당 생활 결과를 보고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원도 아니라는 거죠. 당 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겁니다. 어떤 경우로 또 실례를 들 수 있냐면 내가 만약 김책제철연합기업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두산에서 백두산성군청년발전소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발전소 건설장이 우리 김책제철연합기업소에서 노동력을 보내야 됩니다, 돌격대로. 그러면 내가 지원을 하는 거죠. “나 돌격대 가겠습니다.” 또 혹은 또 공장기업소에서 “동무, 돌격대로 백두산에 가서 일하시오.” 하게 되면 “예. 알았습니다.” 하고 가는 거죠, 내가 당원 돌격대에 가는데 그럴 때는 당원 이동증을 떼어가지고 그 조직으로 가는 겁니다. 거기 가면 돌격대에 임시 당세포, 임시 당위원회가 조직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임시 당위원회, 임시 당세포에 내가 내 당원 이동증을 바치고 거기에서 당 생활을 시작하는 거죠. 이제 장진성이처럼 101연락소에 가서 근무를 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협주단에 와서 당 생활 총화(결산)를 하는 그런 일은 없다는 거죠. 여기로 … 가지 않았습니까?
101연락소. 그러면 그 101연락소에 있는 당세포에 내 당적을 붙이고 거기에서 당 생활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원이 아니니까 모르는 거죠, 이거를. 그런 거죠. 그리고 또 보게 되면 군사복무를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뭐라고 말하냐면 여기에서, 지만원이 이렇게 묻습니다. “증인은 북한에서 군복무를 했나요?” 하니까 장진성이 “군복무라기보다도 북한에서 2002년부터 의무병력제를 실시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병력제 아니었다는 거 아닙니까? 2002년부터 실시했다는 거죠. 그래서 “행정부 현직에 있는 상태에서 군복을 입고 잠시 가있었던 적은 있습니다.” 이런단 말이에요. 이제 장진성이 뭐라고 했습니까? 앞에서. 2001년부터 2004년까지는 해군 사령부에서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작가로 근무했다 하지 않습니까? 작가지만 또 군인인 겁니다, 그것도. 중위 계급장을 달았으면 군인인 거죠. 그런데 왜 의무병력제를 실시했다고 해서 또 가야 됩니까? 그거는 아닌 겁니다. 그래서 장진성이 뭐라고 말하냐면 지만원이 이렇게 묻습니다. “잠시라는 것은 얼마 동안을 이야기하는 건가요?” 하니까 장진성이 “3년 동안은 의무적으로 무조건 군복을 입어야 된다고 해서 1년 반 정도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아니 3년 동안 의무병력제를 하면 3년을 입어야지 왜 1년 반을 입습니까? 이렇게 말도 안 되죠.(녹취록 13쪽)
평양에서 무산역까지 가는 데 필요한 특별통행증도 허위
문: 2011.2월에 증인이 쓴 책 ‘시를 품고 강을넘다’의 제14쪽에서 증인은 통행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일반통행증’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통행증’이라 했고, 일반통행증은 내륙에서의 통행증이고, 특별통행증에는 ‘평양행’ ‘DMZ지구행’ ‘국경연선지구행’이 있다 하였으며, “국경연선지역 특별통행증에는 빨간 줄 두 개가 가로 질러 있다“고 했지요?
답: 예
문: 여기에 더해 DMZ지구행 특별통행증도 있는가요?
답: 예
문: 인터넷과 탈북자들에 확인한 결과, 북중 국경선에 접근하는 통행증은 빨간 줄이 아니라 푸른 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를 뒷받침하는 언론 기사가 있습니다(증114). 증인이 말한 빨간 줄 두 개가 그어진 통행증은 DMZ 방향으로 가는 통행증이라 하는데 어떤가요?
답: 그렇다면 제가 혼돈했을 것입니다.
문: 빨간 줄과 파란 줄에 대해서 쉽게 혼돈을 하는가요?
답: 저는 통행증 위조범이 아니기 때문에 열심히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문: 증인은 “시를 품고 강을 넘다”의 제15쪽에서 “평양시 보위위원회에서 백지통행증 2장을 100달러를 주고 불법으로 샀다” 라고 하였지요?
답: 예
문: 다른 한 장은 동행한 친구 황영민을 위해 산 것으로 짐작이 되는 데, 그 많은 돈을 주고 두 장을 사서 왜 한 장은 사용하지 않았는가요?
답: 책을 보면 있습니다.(주: 책에 없음)
문: 통행증에는 ‘통행목적지’와 ‘통행목적’ ‘동행인원’을 쓰는 난이 있고, 증인은 거기에 증인의 필적으로 통행목적은 ‘출장’ ‘동행인원’란에는 ‘외 1명’으로 기재했다 했는데 통행목적지는 무엇으로 기재했는가요?
답: 무산이라고 썼습니다.
문: 책에는 무산시라고 기재돼 있는데 어떤가요?
답: 시든 군이든 그냥 무산으로 썼습니다.
문: 무산은 ‘무산시’가 아니라 2004년에도 지금에도‘무산군’이 아닌가요?
답: 출판사에서 난 오타입니다.
문: 만일 ‘무산시’라는 글자가 통행증에 있었다면 증인은 즉각 의심 받았을 것인데요, ‘출장’은 통행목적으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통행목적에는 용무를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기재해야한다고 탈북자들이 말하는데 특별통행증 발급이 “출장” “외 1명” 이렇게만 기재해도 될 정도로 허술한 것인가요?
답: 예
문: 황영민이 증인처럼 독립객체의 자격으로 따로 통행증을 마련하지 않고 동행인으로 설정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답: 같이 가기 위해서 설정하였습니다.
문: 통행증을 검문하는 보안원, 보위부원 등이 “외1명‘ ”외3명’ 이런 식으로만 쓰인 통행증을 보면 증인 한 사람의 신분만 확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통행증에 이름이 특정돼 기록되지 않았는데도 통과될 수 있는가요?
답: 예
문: 피고인 지만원이 여러 탈북자들로부터 얻은 지식에 의하면 황영민의 경우에는 직장이 다르기 때문에 황영민이 속한 기관에서 중앙당을 통해 ‘동행자 의뢰서’를 발행해야 하고, 그것에는 동행자 명단이 기록되어 통행증에 부착되어야 하는데 그 의뢰서에는 아무나 함부로 위조하지 못하게 중앙당 직인을 찍어주는데, 이는 위조가 불가능하고, 거래가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답: 중앙당직인이 통행증에 찍히는 것은 없습니다(주: 동문서답)
문: ‘외1명’이면 그 1명의 이름인 황영민이라는 글자가 특별통행증에 기재돼 있어야 하고, 황영민을 증인과 동행하도록 허가한다는 중앙당 의뢰서가 필요할 것이란 것쯤은 누구나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증인은 그렇지 않은가요?
답: 그러한 중앙당 의뢰서가 없습니다. 그리고 중앙당직인이 찍힌 국경통행증이 북한에 없습니다.
북한의 특별통행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북쪽 ‘국경연선지구’로 가는 통행증, 다른 하나는 DMZ로 가는 통행증이다. 전자에는 푸른색 두 줄이 그어져 있고, 후자에는 붉은색 두 줄이 그어져 있다, 그럼에도 장진성은 2009.에 그가 인터넷에 게재한 게시물 “나의 탈북스토리‘(증114)와 2001.에 발행한 책자 ”시를 품고 강을 넘다“(증115) 모든 기록에 거꾸로 기재했다. 이는 탈북과정 자체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평양시 보위부원으로부터 붉은 색 두 줄이 그어진 백지 특별통행증 2장을 불법 구매해 그 중 한 장만 사용했다고 한다. 백지 통행증에는 통행목적지를 ’무산‘, 여행목적에는 ’출장‘, 동행인원은 ’외1명‘으로 기재했다고 한다(증115의 15쪽 중간), 동행한 친구 황영민은 통행증이 없고, 장진성의 통행증에도 황영민이라는 동행자 성명을 기재하지 않았다 한다. 이런 상태로 평양에서 두만강 변 무산역까지 기차 내에서 있었을 수많은 검문 과정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무사통과했다고 한다. 장진성은 2017.11.30. 증인 신문을 받는 순간까지도 무산이 ’시‘인지 ’군‘인지 알지 못했다.
장진성의 탈북 지참금 2~3천 달러에 대한 거짓말
문: 101연락소에서는 당시 달러로 환산해 몇 달러를 받았는가요?
답: 북한 원화를 받았고, 그 당시에 제가 받았던 월급은 2,500원입니다.(주: 약 10달러)
문: 증인은 2011.3.28. 자유아시아방송에서 탈북당시 미화 몇 천 달러를 가지고 출발했고 그 중 700달러를 중국 국경지역에서 처음 만난 창용-아저씨에게 주었다고 말했지요?
답: 예
문: 가지고 있던 달러는 정확히 얼마인가요?
답: 2,000 ~ 3,000달러 되었습니다.(주: 북한 당국 방송에서는 3천 달러의 부대 자금을 가지고 튀었다고 함)
문: 어떻게 구했는가요?
답: 북한은 원화가치가 없기 때문에 달러로 . . 시장에서도 그렇게 통용되기 때문에 달러를 구할 수도 있고 가능합니다.
문: 증인은 탈북스토리 제7쪽에서 중국 쪽 국경지대에서 가장 먼저 만난 창용 아저씨가 “가죽 잠바와 바지를 꺼내 던지며 함북 말투로 말했다”고 표현했는데 그 때 그가 내준 가죽잠바와 바지로 옷을 바꿔 입었는가요?
답: 바꿔 입었습니다. (주: 가죽점퍼는 보온성이 낮아 영하 30도 내외를 감도는 중국 연변지역에서 견딜 수 없는 옷임)
문: 이때 달러는 어디에 보관했고, 노트 두 개는 어디에 보관했는가요?
답: 주머니 안에 보관하였습니다.
문: 그 때 갈아입으면서 주머니에 있던 달러를 잠바나 바지에 넣었는가요?
답: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문: 친구는 어째서 달러를 1푼도 보관하지 않았는가요?
답: 돈을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 그와 같이 했습니다.
문: 친구는 달러 없이 맨손으로 움직인 것인가요?
답: 예, 저와 같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문: 증인은 2009년 12월에 기고한 “나의 탈북스토리” 제9쪽에서 창용 아저씨 “장모집 건너편 빈집”에 자물쇠를 밖으로 채우고 “삼일”간 있었는데 마지막 날 밤중에 공안들이 들이닥친 황망한 순간에서도 황영민이 방바닥에서 무엇인가 찾고 있어서 증인이 “뭘 해?”하면서 친구의 등을 세차게 때린 후 도망을 했고, 결국 두 사람은 산중턱에서 만났는데 그 때 증인은 돈이 들어 있는 외투와 짐 보따리를 챙기지 못했고, 황영민은 방바닥에서 증인의 노트 두 권을 챙겨왔는데 그 노트에는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라는 시 등이 있었다 하였지요?
답: 예
문: 그 노트 두 개는 방바닥에 개별적으로 놓여 있었나요?
답: 짐과 같이 있었습니다.
문: 그렇다면 황영민은 노트 두 권은 챙겼으면서 수천 달러가 들어 있는 배낭이나 외투를 챙기지 않았고, 증인 역시 달러를 챙기지 않고 도망했다는 것입니까?
답: 예
월급 10달러 정도를 받던 장진성이 2,000 달러가 넘는 거액을 가지고 탈북했다고 한다. 그는 이 엄청난 달러를 어떻게 구했는지에 대해 밝히기를 거부했다. 그가 그 엄청난 달러를 친구 동행자 황영민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혼자 가지고, 폐가에서 자다가 새벽에 들이닥친 중국 공안에 쫓기는 바람에 두 개의 커다란 수첩은 챙기면서 생명과도 같은 달러가 들어있는 외투를 버리고 영하 30도를 밑도는 추위에 맨발로 도망을 했다는 것은 지어낸 소설이지 현실이 아닐 것이다.
장진성은 2004.1월.에 평양역에서 무산역으로 출발하지 않았다
문: 탈북당시 추위를 이기는 것이 매우 중요했을 텐데 탈북채비 복장, 옷에 보관한 지참물, 배낭에 준비한 물품 등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는가요?
답: 책에 다 있습니다.(주: 책에 없음)
문. 후드가 달린 파커나 보온용 운동화를 준비했었나요?
답: 아니요(주: 두만강을 통해 탈북할 결심을 하는 평양시민이 추위를 이겨낼 준비를 전혀 안 했다는 것은 언어도단임, 누군가의 안내를 받아 편히 왔다는 의심이 가는 대목임)
문: 나의 탈북스토리 제16쪽을 보면 “나는 그날 심화조에 의해 간첩혐의로 숙청된 친구의 장인에 대해서, 남한 서적들을 친구들에게 몰래 돌린 혐의로 국가보위부의 엄격한 조사를 받았던 자신에 대해서 김광선에게 이야기해주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무슨 서적들이었는가요?
답: 월간조선, 신동아, 말 잡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문: 그 ‘엄격한 조사’를 받고 탈출을 결심하였는데 그렇게 중한 죄를 지었다면 조사당국에서 조사 직후 증인을 풀어주지 않고 곧바로 구속시켰을 텐데, 어떤가요?
답: 북한도 증인 증거가 있어야 형사집행할 수 있습니다.
문: 증인은 증인이 쓴 이 책(증115) 제72쪽에서 보위당국이 증인을 빨리 체포에 나서지 않은 이유를 증인이 김정일과 두 차례 20분 이상씩 만났기 때문에 ‘김정일 접견자’로 분류돼 증인을 체포하려면 김정일의 서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라 했는데, 탈북자들에 물어보니 이는 일반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고, 반역 반동 배신으로 확인된 범죄의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합니다. 더구나 중앙당 핵심층 일꾼이 아무런 허가 없이 결근할 때에는 즉시 전국에 수배령을 발동하고, 가장 먼저 전파되는 곳이 열차, 10호 초소, 국경연선지대’ 경비총국이라고 하는데 맞는가요?
답: 예
문: 증인의 경우에는 설사 김정일 접견자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았다 하더라도 황영민에게는 그런 대우가 없습니다. 황영민이 속한 기관에서도 비상이 걸렸을 것입니다. 황영민은 김정일 측근에서 일한 사람이고 집안 성분이 원체 굵기 때문에 결근한 사실이 발견되면 그 즉시 전국 수배령을 내렸을 것이고, 그가 잡히면 증인도 잡히는 것 아닌가요?
답: 그 내용은 책에 다 있고, 북한이 한국과 같이 통신이 발달하여 바로 연락하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문: 통신문제가 아니라 증인은 그러한 대우를 받을 수 있지만 황영민은 그러한 대우가 없기 때문에 둘이 같이 다니면 이 사람이 잡히면 저 사람도 잡히지 않느냐는 취지인데 어떤가요?
답: 그러한 것을 다 감안하고 움직였고, 그 내용은 다 책에 있습니다. (주: 책에 없음)
문: 증인은 증인의 위 저서의 제11쪽에 무산역에 기차가 도착한 시각은 2004년 1월 25일 아침 6시였는데 그 시각은 기차가 3일 연착한 결과였다고 했습니다. 제 시간에 도착했다면 1월 22일, 오후 7시 15분이었을 것이라고 했지요?
답: 예
문: 그러면 평양은 언제 몇시에 출발하였는가요?
답: 3일전에 떠났고, 시간까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문: 그렇게 해서 25일에 도착했으면 연착되지 않는 차 아닌가요?
답: 그렇지 않습니다.
문: 3일이 연착되어서 25일이라면 22일에 도착할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평양도 22일에 출발하였다고 하지 않았는가요?
답: 22일인지 21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주: 무안역 실제 도착 시각과 정시 도착 시각은 분 단위로 기억하면서 그 중요한 평양 출발 시각에 대해서는 개념 없이 오락가락함)
문: 탈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탈북이야기 중 평양역에서 표를 끊을 때, 동행자가 제대로 된 증명서를 안 가지고 있어서 문제가 될 때가 가장 잊을 수 없고, 다른 사람들도 가장 관심이 많이 가지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자세하게 기록될 부분이 아닌가요?
답: 그렇다면 언제 한 번 다시 쓰겠습니다.
문: 나무위키와 언론 기사들을 찾아보면 평양에서 라진까지 가는데 23일이 걸렸다고 하는데 그런가요?
답: 예, 연착이 되었을 때 그렇게 됩니다.
문: 회령에까지 가는 데에는 빨리 가야 열흘이 걸린다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열차의 80%가 전기차이고, 전기는 증인이 책에서 말했다시피 평양에도 하루에 4시간 밖에 흐르지 않을 정도로 열악하여 기차는 가다서다를 반복하고 어떤 때는 며칠씩 정차하는 때가 있어서 차 안에서 추위를 이기지 못해 얼어 죽기도 하고 굶어 죽기도 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빨리 달리면 노후된 궤도가 휘어지고 나무를 베어 4각으로 다듬지도 못한 채 레일침목에 사용하기도 하고, 철로 자갈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철로가 뱀처럼 꼬불꼬불하여 시속 20km 이상의 속도를 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증인 역시 책의 11쪽에서 “단선레일, 견인차 부족, 고장, 잦은 정전, 낮은 전압”이라는 단어들로 북한 기차의 열악성을 강조하였지요?
답: 예
문: 그런데 탈북과정에서 만일 증인이 증언 그대로 기차를 타고 무산역까지 갔다면 기차가 어떻게 달렸는지, 몇 번, 몇 시간씩 레일 위에서 정지해 있었는지, 기차 안에서 어떤 검문들이 있었는지, 기차를 탄 이웃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백미였을 터인데 증인이 작성한 책에는 그러한 것들이 없지요?
답“ 예
문: 왜 그러한 것을 못 썼는가요?
답: 제 이야기에 충실하고 싶어서 생략을 하였습니다.
문: 증인이 탄 기차 내에서 검문은 몇 번 정도 있었습니까?
답: 경계를 지날 때마다 있었던 것 같은데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문: 검문은 어떤 식으로 했는가요?
답: 지나가면서 한 명씩 일일이 검사합니다.
문: 황영민은 검문을 받을 때 아무 문제가 없었는가요?
답: 예
문: 기차가 가는 동안 대지에는 눈이 얼마나 쌓여있었는가요?
답: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문: 눈이 내리고 있는 지역도 있었습니까?
답: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문: 두만강 지역의 기온이 어느 정도였는지 기억나는가요?
답: 잘 모르겠습니다.
문: 1월이면 영하 20도~35도 왔다 갔다 하는 것 아닌가요?
답: 예, 그런데 재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장진성은 2004.1.25. 새벽 6시, 두만강변 무산역에 도착했다고 한다. 1월 하순이면 평양과 두만강변은 영하 20-40도의 맹추위가 엄습하고 있을 때다. 그보다 더 추운 중국 연변으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한 옷이나 신발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고, 10-25일 동안 가다서다를 반복할 열차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극복하기 위해 아무런 준비 없이 떠난다는 것은 지능이 있는 사람이 취할 행위가 아니다. 장진성은 북한에서 최고의 핵심부서인 대남공작부(통전부) 일꾼이고, 그의 친구 동행자 황영민은 김정일 기쁨조 악단(왕재산악단)의 일꾼이었다(증거: 동 18쪽 하 4-5행). 이렇게 중요한 두 사람이 동시에 사라졌는데 전국 수배령이 내리지 않은 채 최소한 10일이 걸렸을 평양역-무산역 사이의 열차에서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무사통과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장진성은 검문에 대한 이야기, 열차에서 추위를 이기는 이야기, 배고픔을 극복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열차에서 얼어 죽고 굶어 죽는다. 이런 환경에서 파커도 입지 않고 보온용 운동화도 없이 그 오랜동안 열차에서 추위를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대한 설명을 일체 회피하였다. 눈이 얼마나 왔는지, 눈을 보았는지에 대해서도 기억이 없다 한다. 무산역에 도착한 시간에 대해서는 예정시간, 연착시간을 분 단위까지 기록해놓은 그가 평양역을 언제 출발했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홍강철은 2021년 1월 26일 [왈가왈북]에서 아래와 같이 밝힌다.
홍강철: 앞에서 이야기했죠? 김정일 위원장을 20분 동안 2번씩 면담했다. 접견했다. 우리 북에서는 접견자로 취급합니다. 접견자로 취급해서 접견자는 또 많은 또 이렇게 사회적으로 우대라고 해야 되나요? 혜택이라고, 어쨌든 접견자는 … 할 때 또 순위가 높아지죠. 선순위인 겁니다. 그런 거는 사실이고, 그런데 접견자라고 해서 그 접견자를 체포할 때는 뭐 김정일 위원장의 승인을 받는다? 그거는 아닙니다. 그거는 체포영장을 발부할 당시에는 벌써 그 사람의 범죄행위가 완전히 증명됐기 때문에 체포영장을 발부하는 겁니다. 제가 늘 이야기하지만 체포영장을 발부하게 되면 당 책임비서, 조직비서, 내가 일하는 공장의 당위원회 내가 소속된 당세포비서, 그리고 보안서장, 검찰서장, 재판서장의 연명 사인이 있어야 됩니다, 6명. 이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사인하지 않게 되면 못합니다. 체포영장 발부 안 되는 것이죠. 우리 세포비서가 거기에다 사인 안 하면 안 되는 겁니다. 범죄가 설사 확인됐다 하더라도 이 사람은 원래부터 성실한 사람이었고 일 잘했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범죄를 범할 수 있지 않습니까? 범죄의 유혹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당세포에서 “이 사람을 우리가 책임지고 교양을 하겠습니다. 법적제재를 가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우리 당세포비서가 보증을 선단 말이죠. 그러면 체포영장이 발부 안 됩니다. 김정일 위원장 승인 받을 것까지 없다는데요. 그렇죠. (녹취록 14쪽 )
장진성은 두만강 건너지 않았다
문: 증인은 책의 12쪽에서 무산역에서 내리자마자 눈보라가 확 휘몰아쳤다고 날씨가 사나웠다 하였습니다. 그 지역에 눈은 얼마나 쌓여 있었는가요?
답: 잘 모르겠습니다.
문: 눈보라가 친 것은 기억이 되면서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는 기억이 없는가요?
답: 그 당시에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경치를 구경할 상황입니까?
문: 눈이 있었는가요 없었는가요?
답: 있었습니다.
문: 내렸을 때 기온이 영하 몇 도나 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가요?
답: 예
문: 그 무산역에 오전 6시에 내렸다면 어두웠을 때인데, 그 사나운 눈보라를 맞으면서 걷기 시작해 하루 종일 100리 정도를 걸었다면, 발자국도 남기게 되고 눈 딛는 소리도 꽤 났을 텐데, 맞는가요?
답: 예
문: 무산역에서 백두산 쪽 상류를 향해 걸었습니까, 아니면 동해 쪽 하류를 향해 걸었습니까?
답: 제 기억으로는 하류 쪽으로 갔던 것 같습니다.
문: 증인은 책의 제18쪽에서 신분증의 위세만 믿고 비포장도로를 걸었는데 1km마다 망루가 있었고, 그 사이에는 잠복초소들이 있었고, 군인들은 지나가는 차량들과 사람들을 예외 없이 세워 이동 경위를 물었다고 했는데 증인은 그 때마다 위압적으로 생긴 신분증을 보여주면서 통과했다 했지요?
답: 예
문: 국경의 경비가 꽤 허술해 보이는데 맞는가요?
답: 예
문: 증인은 칠흑 같은 밤 10시에 두만강에 발을 짚었다가 풀숲에서 병사가 불쑥 나타났다했고, 책의 17쪽에서는 두만강에 와보니 풀 한포기 없는 민둥산이라 망연자실했다고 했는데 증인이 붙잡힌 곳에만 겨울 풀이 우거져 있었고, 그 숲은 증인 등 두 사람이 바로 옆에 경비병들이 숨어있는 것을 모를 정도로 짙게 우거져 있었다는 것인가요?
답: 그 때 밤이었습니다.
문: 증인을 발견한 경비경이 호각을 불었고, 불자마자 수많은 경비병들이 전등을 들고 증인을 둘러싸서 6중대병실(내무반)까지 연행했다고 하였지요?
답: 예
문: 그 거리가 얼마나 되었는가요?
답: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문: 대략 시간은 어느 정도 걸렸는가요?
답: 대략 15분 정도 걸렸습니다.
문: 중대병실이 강변 가까이 있었는가요?
답: 그만하면 가까이 있었습니다
문: 증인은 책의 22쪽에서 “왜 국경에 접근했습니까?”라고 묻는 중대장의 질문에 “우리당 위원회에서 무산시당에 들려 뭘 좀 알아보라고 지시주어 가던 중이었는데, 밤이 너무 깊었고, 춥기도 해서 군인병실이라도 찾아서 하루밤 자고 가려 했을 뿐인데. . ”라고 대답했는가요?
답: 예
문: 여러 탈북자들에 알아보고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무산시당(사실은 군당)도 무산역도 다 읍내에 있다고 하는데 평양에서 무산시당에 출장을 가려면 먼저 시당 당원이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야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답: 그것은 억측입니다
문: 그리고 증인은 무산역에서 내려 100리 정도를 걸어와 중대본부 막사에 와 있는 상황에서 무산시당을 향해 가는 도중이라 둘러대면서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것인가요?
답; 상황이 그랬습니다.
문: 북한의 국경연선 경비 구조나 남한의 해안선 경비 구조는 개념이 일치합니다. 이 그림의 좌측으로부터 보자면 강이 있고 강변이 있습니다. 그 강변의 내륙 쪽에 장애물 지대가 형성돼 있고, 뒤에 철조망이 있습니다. 장애물 지대에는 사정에 따라 대못판이 설치된 지역도 있고, 너비 4미터에 깊이 3미터 되는 함정이 패어진 곳도 있고, 목함지뢰가 설치된 곳도 있다 합니다. 그 다음에는 철조망이 있고, 사람이 뛰어넘을 수 없는 넓은 폭의 흔적선 즉 모래강이 이어져 있습니다. 잘 쓸어놓은 모래 위에 난 발자국을 발견하기 위해 모래강을 따라 순찰길이 이어져 있는데, 순찰길을 따라 초소들이 있고, 그 초소들을 관장하는 중대본부 막사가 내륙 쪽으로 나 있습니다. 맨 우측 도로는 읍과 읍을 연결하는 비포장도로인데 증인이 하루 종일 걸었다는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이런 장애물은 지형과 경우에 따라 1겹 또는 2겹으로 되어 있지만 철조망은 늘 있다 합니다. 구글에서 ‘두만강 철조망’으로 검색해 발췌한 세 장의 철조망 사진이 있습니다. <1>번 사진은 강변 경비철조망인데 여기에는 “국경표식과 철조망 등 변경시설을 파괴 이동하는 것을 엄격히 타격한다”라는 경고문이 쓰여 있습니다. <2>번 사진은 중국 쪽에서 북한 초소를 찍은 것인데 북한병사가 감시경으로 강쪽을 감시하고 있고, 그 앞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습니다. 두만강과 북한초소 사이에 철조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3>번 사진은 중국 쪽에도 철조망이 있고, 중국감시병이 순찰을 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철조망은 중국쪽과 북한쪽 다 설치돼 있습니다. 철조망이 없는 곳에는 흔적선이 있거나 다른 장애물이 설치돼 있다 합니다. 증인은 국경 연선에 갖추어진 위 경비 시스템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가요?
답: 철조망은 2010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2004.에는 북중국경 사이에 철조망이 없었습니다.
문: 증인이 차도를 따라 걷다가 강에 발을 터치하려면 수많은 초소의 감시망을 피하고 흔적선이라는 모래강을 넘어야 하고 철조망과 장애지대를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증인의 수기에는 마치 이 모든 장애물이 단 한 개도 설치돼 있지 않은 환경, 남한의 여느 강변 정도에서 행동한 것처럼 묘사돼 있습니다. 증인은 1월 25일 밤 10시에 강가에 있었다 했고, 26일 낮에는 내륙 방향에 있는 철로에 앉아 있었다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대낮에 강가에 가서 강의 얼음 위를 달렸다 했습니다. 장애지대, 철조망, 모래강을 세 번씩이나 건너지 않으면 증인의 글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정말 장애물이 없었는가요?
답: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러한 장애시설은 2010. 이후에 만들어졌던 것들이고 굉장히 허술하였습니다.
문: 책의 22쪽에는 밤 10시, 6중대장이 증인의 출장 사실을 무산시당에 확인해보라 해서 부하가 전화를 걸었는데 하늘이 도와 마침 전기가 나가서 전화가 불통이었다고 했지요?
답: 예
문: 그런데 전화와 전기는 무관한데, 병영공화국인 북한에서는 물론 남한에서도 유선전화와 무전전화는 전기가 아니라 배터리와 자석으로 운용됩니다. 정전이 돼서 전화가 불통된다는 말은 군출신인 피고인은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다 전쟁은 언제나 야전에서 밀고 밀리면서 하는 것인데 정전이 됐다 해서 통신이 두절되는 시스템이라면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닐 것입니다. 증인은 평양에서도 전기는 하루에 4시간 밖에 오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러면 국경변방에는 전기가 하루에 잘해야 두세 시간 흐르지 않겠습니까? 통신 없는 국경경비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정전이 되면 탈북을 막는 국경선 경비통신 전화가 두절되는가요?
답“ 무산군당까지 이러한 전화를 쓸 수도 없고 그것이 사실입니다.
문: 시를 써서 남한 운동권에 보내는 101연락소 직원이 먼 지방 군당에까지 출장을 간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다른 기관(왕재산악단)에서 일하는 당 일꾼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변방 군당에 출장을 나간다는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기가 어려울 텐데, 증인의 말에 의하면 국경 경비중대장과 소대장, 평양역 및 무산역의 수많은 공안 요원들, 기차 속의 공안 요원들, 국경연선에서 만난 수많은 경비-공안 요원들이 줄줄이 다 이런 경우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무산역에 도달할 때까지 검문을 제대로 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가요?
답: 50달러를 주고 탈북을 방조해준 국경 군인들이 많습니다. 북한의 실상을 너무 엄하게 보지 마십시오. (주: 장진성은 탈북스토리에서 달러를 주지 않고 말보로 한 값씩만 주면 해결되었다고 강조했음)
문: 6중대장은 몇 살쯤 되어 보였습니까? 증인보다 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까?
답: 그 당시 20대 말인가 30대 초로 보였습니다
문: 증인보다 위라는 생각이 들었는가요?
답: 비슷하거나 아래라고 생각했습니다
문: 군인들 중에도 계층상 중앙당 소속인 군인도 있지요?
답: 잘 모르겠습니다
문: 중앙당 기관의 신분이면 다른 신분의 나이 먹은 사람, 계급이 높은 사람에게 반말을 하는가요?
답: 어쨌든 북한은 신분사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됩니다
문: 증인은 책의 23쪽에서 “그럼 내일 확인하기로 하고 일단 좀 자게 해줘, 어? 중대장! 우린 피곤해” 라고 표현했는데 실제로 이와 같이 말하였는가요?
답: “피곤하니까 같이 잡시다”라고 하였습니다.
문: 초면에 반말을 하지 않았다면 책에 쓴 것과 좀 다르지 않는가요?
답: 저는 그 병사에 한해서 이야기를 하였지 중대장에 한해서 그렇게 했다고는 안 하였습니다(주: 책에는 “일단 좀 자게 해줘, 어? 중대장! 우린 피곤해”로 표현돼있음)
문: 탈북스토리’ 제3쪽에서 증인은 “도강하는 방법은 기상천외야, 군인들이 우릴 보는 밤이 아니라 우리가 역으로 그들을 볼 수 있는 대낮이야, 지금 뛰자!” 이렇게 말했고, 이어서 증인과 황영민은 대낮에 두만강 얼음 위를 달렸고, 바로 그 때 여러 경비병들이 나타나 “저 놈들 봐라! 저 놈들 잡아라.” 소리를 치면서 증인 등을 향해 “격발장치를 당기며 총구를 겨누는 것까지 보고” 달렸는데(증112 5쪽) 경비병들이 총을 쏘지 않은 이유를 창용 아저씨로부터 들어보니 국제법 때문에 중국을 향해서는 총을 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지요?
답: 예
문: 이어서 증인은 북한주민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해 탈출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하였지요?
답: 예
문: 그런데 구굴에서 ‘두만강 탈북 총격’을 검색하면 두만강을 건너다 총격을 당해 사망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뉴스들이 많이 있던데 증인의 말은 사실과 다른 것 아닌가요?
답: 저렇게 쏠 때도 있고 안 쏠 때도 있을 텐데 제가 있을 때는 쏘지 못하였습니다.
문: 중국과의 사이가 총을 쏘거나 안 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요?
답: 쏘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했는데 북한군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문: 책의 제 25쪽에는 증인이 경비중대의 병실(내무반)에서 밤을 지나는 동안 “경비병들의 순찰근무 교대는 한 시간에 한 번씩 하였고 초소로 나갈 때마다 병사들은 실탄과 심지어는 수류탄으로 무장하곤 했다”고 기록돼 있고, 증인의 말대로라면 그 실탄과 수류탄은 도강하는 탈북자들에게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실탄과 수류탄은 어떤 경우를 위해 쓸 수 있다는 것인가요?
답: 잘 모르겠습니다.
문: 증인이 경비병 막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풀려나 철로에 앉아있던 날은 2004년 7월 26일이었는데 이날 증인은 친구에게 “우리가 출근을 안 한지도 3일이 되었다” 하였지요?
답: 3일인가 4일인가 했습니다.
문: 연착시간만 3일이고, 여기에 하루 밤만 보태도 4일입니다. 여기에 기차가 실제로 달린 시간을 보태면 가장 이상적으로 달렸다 해도 증인이 사무실에 안 나간 날은 줄잡아도 10일은 될 텐데 증인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아닌가요?
답: 그것이; 아니고 우리가 출근을 했던 날에 기차를 탔기 때문에 그 당시에 우리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3일이 맞습니다. (주: 시간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사실로 탈북스토리를 쓴 것이 아니라 소설로 썼기 때문)
장진성은 그의 책(증115)에서 2004.1.25. 새벽 무산역에서 내리자마자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쳤다고 기술했다. 그런데 증언대에 서서는 눈이 왔는지 얼마나 쌓였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했다. 그는 두만강 하류를 따라 하루 종일 100리를 걸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날씨가 얼마나 추웠는지 눈이 얼마나 왔는지 기억이 없다 한다. 영하 20-40도를 맴도는 강추위에 보온용 운동화도 없고 파커도 없이 100리를 걸었고, 밤중에 강을 건너려다 잡혔다고 했다. 일반 차량도로와 두만강변 사이에는 철조망, 흔적선(모래강), 지뢰, 함정 등 다양한 장애물이 깔려 있었을 터인데도 장진성은 아무 장애물이 없어서 3차례나 도로와 강변을 왕래했다고 한다. 무안군 당사와 무안역은 바로 이웃인데 장진성은 무안역에서 100리나 떨어진 곳에서 경비병들에 붙들려 무산시당에 가는 길이라 둘러댔다한다. 무산시당이라고 말했다면 곧장 의심받았을 것이다. 경비병이 무산시당에 전화를 걸어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 했지만 전기가 나가 전화가 불통이어서 천만다행이었다 했다. 하지만 전기와 전화는 무관하다. 무선 유선 모두가 전기와는 무관하다. 대낮에 두만강 얼음 위를 달렸는데 여러 명의 경비병들이 총을 장전했으면서도 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두만강은 아무나 건넜을 것이다. 장진성의 탈북스토리는 한두 곳이 아니라 전체가 황당한 소설이다. 1월 26일, 두만경변 철로에 친구랑 둘이 앉아 ‘출근하지 않은지 벌써 3일’이라고 썼다. 그는 1월 25일 새벽에 무산역에 도착했다 했다. 그렇다면 평양에서 무산역까지 2일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북한의 철로 사정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망루에 대해 탈북자 홍강철은 2021.1.26. [왈가왈북]에서 이래와 같이 밝혔다.
홍강철: 뭐냐 하냐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탈북하려고 지금 평양에서부터 함경북도 무산까지 왔다는 거죠. 무산이 제 고향입니다. 그런데 무산에 가보니까 거기는 한 백리정도 자기가 걸어갔다는 거죠, 무산역전에 대해서. 그런데 “가면서 보니까 1km마다 망루가 하나씩 서있고 잠복초소도 있었다.” 이런단 말이에요. 무산국경경비대에 보게 되면 망루라는 게 없거든요.(녹취서 13쪽)
경비병이 호각을 불었다는 것에 대해 홍강철은 이래와 같이 밝혔다.
홍강철: 그런데 호각을 불더라는 거죠. 잠복근무 서는 그 경비대 군인들이, 그런데 경비 설 때에는 호각을 불지 않습니다. 무슨 호각을 불고 뛰어다닙니까? 말도 안 되는 거죠.
장진성이 중대장에게 반말을 했다는 데 대해 홍강철은 아래와 같이 밝힌다,
홍강철: 야 중대장” 뭐 무슨 “야 너무 추워서 그러는데 좀 자자.” 뭐 이랬다는 거죠. 반말했다는 겁니다, 중대장 보고. 어디 … 반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말도 안 되죠.(녹취서16쪽)
경비전화가 정전으로 인해 불통이었다는 장진성의 주장에 대해 홍강철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홍강철: 전화가, 뭐 하늘이 도와서 전기가 나가서, 그러니까 정전이 됐다는 소리죠. 그래서 전화가 불통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정전이 됐다고 해서 전화 안 되는 거 아니거든요. 북쪽의 국경경비대 인민군은 어떤 전화기를 쓰냐면, 물론 우리는 빛섬유도 갑니다. 빛섬유, 우리 광케이블이라고 하죠. 우리 전화 보통 쓰는 전화기, 빛섬유 전화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전자전에 대비해서, 전자전, 빛전화는 전자전에 약하지 않습니까? 미국이 전자방해 작전을 쓰면 빛전화는 먹통이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전자전에 대비해서 수동전화기를 씁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쓰던 거 아시죠? 잡고 드르르륵 발전기 돌리는 거요. 돌려서 전화를 하거든요. 거기에는 전지약이 들어갑니다, 전지약. 큰 전지약 있죠? 큰 거. 우리 그 가스버너에 쓰는 거 같은 거요. 가스버너에 마가레트 탁 튀는 거 불꽃 튀는 거 거기에 쓰는 전지약 같은 게 들어갑니다, 이거는 인민군에서 군사복무 해본 사람이라면 전기가 나가서 전화가 먹통이 됐다. 이런 말은 안 하거든요. 그리고 또 우리는 경비전화라는 게 있습니다. 경비전화는 그 어느 곳에나, 공화국 연내에서는 그 어느 곳이나 순간에 전화를 할 수 있습니다. 경비전화는 왜 그렇게 되냐면 우리 철길 있지 않습니까? 철길. 철길은 웬만해서 끊어 안 지거든요. 그 어떤, 뭐 지진이 나서 완전히 붕괴가 되기 전에는, 철길에 전화선이 한 선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철길을 이용해서 전화를 하는 거죠. 이거는 처음 들어보는 소리죠? 경비전화는 그렇게 연결돼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자연재해가 나서 뭐 정전이 되고 뭐 전화선이 다 끊어지고 이래도 전화는 된단 말이에요. 경비전화는 되는 겁니다. 이런 걸 이런 장진성이 같은 이런 애들은 모르는 거죠. (녹취록 14쪽 하)
중국땅에서 처음 겪었다는 7일간의 탈북스토리는 터무니없는 소설
문: 무사히 도망을 하여 산 중턱에 도달하고 보니 증인은 양말조차 신지 않은 맨발이라 했지요?
답: 예
문: 그 추운 폐가에서 증인은 닭털 침낭으로도 견디기 힘든 밤에 자물쇠가 밖에 채워진 폐가에서 잠을 자면서 외투도 벗어놓고 양말도 벗고 잠을 잔 것인가요?
답: 그 때 창용 아저씨가 무엇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문: 무엇을 가져다주었는가요?
답: 손난로와 옛날에 쓰던 숯불도 가져다주었습니다.(주: 이는 탈북스토리에 없는 지어낸 변명)
문: 나의탈북스토리 제10쪽, 폐가에서 탈출할 때를 묘사한 글인데, “나는 낮에 내다보군했던 높은 울타리를 어떻게 날아 넘었는지 모른다. 앞에서 달려가는 형체를 쫓아 정신없이 뛰면서 나는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이렇게 계속 중얼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친구인줄로만 알았던 앞의 그림자가 송아지였던 것이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다시 돌아섰다. 이 골목 저 골목 헤매면서도 우리가 숨어있던 빈집 근처를 어지럽게 비치는 12개의 손전등을 빠짐없이 세었다. 저 12개 불빛 중 하나라도 놓치지 말아야 나의 은밀한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친구가 처음 뛸 때와 추정 방향을 추적해보려 애쓰며 허리를 굽히고 이리저리 헤맸다.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보니 손전등 불빛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오고 있었다. 허둥거리던 나는 마침 앞에서 서성거리던 황소 뒤로 몸을 숨겼다. 공안과 나와의 거리는 불과 5미터도 안되었다. 황소 배 밑으로 뻗은 내 두 다리를 보지 않을까 숨이 컥컥 막혔다. 나를 의식해서인지 황소는 비실비실 피하다 못해 달렸고 나는 그 뒤에 숨어 어쩔 수 없이 가시나무에 찔리고 뜯기는 채로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찰나의 위험을 넘기는 동안 어느새 날이 푸름푸름 밝아왔고 공안 승합차가 가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그때야 쑤시다 못해 무감각해진 발이 양말도 안 신은 맨발이라는 것을 알았다.” 라는 내용이 있는데 암소도 아닌 황소가 송아지를 데리고 있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데 모르겠는가요?
답: 그것은 소의 사정입니다.
문: 송아지와 황소를 키웠다면 중국에서는 소를 외양간에 키우지 않고 방목한다는 이야기인가요?
답: 외양간에 있는데 나와서 다니곤 합니다.
문: 폐가 옆에 누가 황소와 송아지를 키우는 것인지, 도망을 하는 입장에서 친구가 폐가 근방에 있을 거라 생각해서 멀리 도망쳤다가 다시 폐가를 찾아왔다가 공안을 불과 5미터 앞에 두고 황소와 함께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뛰었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가요?
답: 예
문: 쫓기는 입장에서 12개의 불빛을 세었는가요?
답: 예: “나의 은밀한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라는 표현도 이러한 상황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아닌가요?
답: 아닙니다.
문: 나의 탈북스토리 17쪽과 책의 85쪽에는 “그날 밤 연길에서 멀리 떨어진 용정리 어느 집 소 외양간에 나란히 누운 우리는 백 원을 들여다보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대목을 보면 중국도 소를 방목하지 않고 외양간에서 키우고 있는 것이 맞지요?
답: 예
문: 책의 86쪽에서는 “소 울음소리에 깨어났다”고 했는데 한 외양간에서 소도 누워서 잠을 자고 증인 및 친구도 “나란히 누워 잤다”는 것인가요?
답: 저도 지금 가을 날씨에도 산에서 이틀을 자라고 하면 제가 어떻게 그때 이틀을 잤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지에 몰려보았으면 이와 같이 쉽게 질문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 증인은 2004년 1월 26일 낮에 강을 건너 중국 연선에서 한 여성을 만났고, 그 여성이 손가락질 해주는 대로 창용아저씨 집에 가서 아저씨를 만났고, 만나자마자 20분 후에 도착한 버스를 타고 연길 시내 창용아저씨의 장모집에 도착했고, 도착 즉시 아저씨는 자기 집 부인에 전화를 걸어 공안이 장모집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아가지고 증인 등을 감추어주기 위해 1월 27일 새벽 2시에 장모집 맞은편 폐가로 들어갔다 했는데, 나의 탈북스토리 제8쪽에는 증인과 황영민이 중국 공안에 살인자로 수배되었다는 사실이 담겨 있고, 9쪽에서는 중국에서 증인을 맨 처음 만난 여성이 밀고하여 창용 아저씨까지 수배대상이 되어 있고, 그래서 공안이 창용아저씨 장모집까지 찾아온다 하여 장용아저씨가 증인 등을 2004년 1월 27일 새벽 2시에 장모집 바로 건너편에 있는 폐가의 방으로 들여보낸 후 문을 밖에서 잠근 후 여러 날 동안 계속 장모집에 머물면서 증인 등을 도운 것으로 되어 있지요?
답: 예
문: 그리고 아저씨는 장모집에 계속 머물면서 1월 28일 밤, 29일 밤, 빵을 사다 증인 등에 공급해주었습니다. 1월 30일 새벽 시간대에 증인은 증인 등을 잡으려 들이닥친 공안 12명을 따돌리고 한차례는 송아지와 함께 뛰었고 그 다음엔 황소와 함께 뛰어 산 속으로 도망을 가서 먼저 도착한 황영민을 만났다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맨발로 하루 종일 산속에 있다가 그날 저녁 때 다시 장모집에 왔고, 아저씨는 공안이 증인의 짐보따리를 다 가져 갔다 하면서 옷가지를 내주고 모포 한 개를 주면서 산에 가서 이틀만 더 있으라 했다고 하였지요?
답: 예
문: 산에서 하루를 지냈더니 아저씨가 30대 초반의 신광용씨를 데리고 나타나 증인 등을 인계했는데, 맞는가요?
답: 예
문: 공안요원들은 증인과 황영민이 폐가에서 도망을 쳤다는 사실을 알았고, 두 사람 뿐만 아니라 두 사람에게 도움을 준 창용 아저씨도 체포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장모집을 향해 달려왔다는 공안이 아저씨를 그냥 방치하면서 아저씨로 하여금 며칠씩 증인 등을 도와주도록 많은 기회를 주었지요?
답: 예
문: 이틀 동안 빵을 사다 주게 했고, 도망 간 후에도 계속 장모집에서 만나게 했습니다. 한국 같으면 장모집은 잠복근무의 대상이 되어 아저씨가 나타나는 즉시 체포했을 것 아닙니까? 북한은 중국은 이곳과 좀 다른가요?
답: 잘 모르겠습니다
문: 중국공안은 증인 등이 남긴 배낭, 보따리, 외투, 양말, 신발, 수천달러의 현금을 모두 가져갔는데, 양말과 신발까지 버린 채 맨발로 도망갔다는 사실에 착안한 공안은 증인 등이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대대 연대 병력을 풀어 근방 산 속을 수색하고 즉시 창용아저씨를 체포해 추궁했을 텐데 이 세 사람을 더 이상 추적하지 않은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데 어떤가요?
답: 잘 모르겠습니다.
중국 공안이 창용아저씨를 범인 은닉자로 지목하고 멀리 장모집에까지 추적을 하였다 한다, 그런데도 창용아저씨는 공안의 제지를 전혀 받지 않고 장진성과 황영민을 폐가에 숨겨주었고, 3일간 빵을 사다 주었다한다. 공안은 1월 30일 새벽 장진성 일행이 들어있는 폐가로 들이닥쳤고, 장진성은 양말도 신발도 외투도 보따리도 다 버리고 잠자던 옷만 입고 산으로 도망을 했다 한다. 장진성 일행의 보따리와 2천여 달러와 신발 양말까지 습득한 중국공안 12명은 맨발의 정진성을 더 이상 추적하지도 않았다 한다. 창용아저씨는 산에서 내려온 장진성 일행에게 옷을 주고 담요를 주면서 산에 가서 2일을 자고 오라했다한다. 그 엄동설한에 장진성 일행은 산에서 담요 하나로 지새며 옛날이야기를 했다 한다. 밤에 얼어죽어야 상식에 맞는다. 산에서 내려오자 창용아저씨는 신광용이라는 사람에게 장진성 일행을 인계 했고, 신광용은 무일푼이 된 이들을 백화점으로 데려가 옷도 사주고 선글라스도 사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비씬 요리도 사주었다고 한다. 폐가 옆에는 황소가 송아지를 데리고 돌아다녔으며, 한번은 송아지와 함께 달아났고, 친구를 찾으려고 폐가로 다시 돌아왔다가는 황소와 함께 달아났다고 한다. 무협지에도 이런 황당한 이야기는 쓰일 수 없을 것이다.
2009년 인터넷에 올린 탈북스토리와 2011년의 책으로 낸 탈북스토리 내용이 불일치
문: 증인은 ‘나의 탈북스토리’ 제16쪽에서 심화조에 의해 간첩으로 숙청된 사람이 황영민의 장인이라 했고, 책 ‘시를 품고 강을 넘다’의 제70쪽에서는 심화조에 관련해 희생된 사회안정성(경찰청) 참모장 3성장군이 황영민의 아버지라 하였지요?
답: 예
문: 사회안전성 참모장을 놓고 2009년에는 친구의 장인이라 했고, 2011년에는 친구의 아버지라 한 것인데 어느 것이 맞는 것인가요?
답: 그것은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제가 같이 오다가 잘못된 친구(주: 죽은 친구)이기 때문에 그 친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아버지 혹은 장인이라고 바꿔서 이야기 하였습니다.
문: 남한에 와서도 그렇게 두 가지로 다르게 이야기해야 보호가 된다고 생각한 것인가요?
답: 그 당시 황영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기 전에는 제가 그냥 돌려서 이야기 했는데 잘못 된 것을 알고 난 이후에는 . . . (주: 장진성은 그의 친구 황영민이 중국 공안에 잡혀가는 도중 자살하였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런데 ‘나의 탈북스토리’와 ‘시를 품고 강을 넘다’는 2009와 2011. 즉 탈북한지 6년 및 8년 후에 쓴 글이다. 중국에서 사망한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2009년과 1011년에 다르게 증언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문: 증인은 2011년에 펴낸 책의 77쪽에서 “백 위안, 그 돈의 가치”라는 소제목 하에 신광호와 헤어지면서 그로부터 백 위안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2009년에 쓴 ‘나의 탈북스토리 제16쪽에는 증인의 탈북동기를 자세하게 들려주었던 사람도 김광선이었고, 작별하면서 증인에게 백 위안을 준 사람도 김광선이었고, “훗날 한국으로 탈출한 김광선에게 백 위안에 대한 보답을 했고, 어제도 노원구에 사는 김광선의 가족과 함께 식사를 했다”고 되어 있는데 왜 이야기가 다른가요?
답: 본인이 그와 같이 요구하였습니다. 그분이 신광용인데 이름도 김광선으로 해달라 하였고, 이분이 중국에 계속 출국을 하기 때문에 자신의 공안을 의식하여 웬만한 것을 빼달라 혹은 바꿔달라고 요구를 하였습니다 (주:100위안을 준 사람에 대해 2009에는 김광선이라 했고, 2011에는 신광호라 했음. 신광호라는 이름을 아예 지워달라는 것이 신광호의 요청사항이라 주장하지만 증115의 ‘시를 품고 강을 넘다’에는 장진성의 이 주장과는 정반대로 김광선이라는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나의 탈북스토리에는 김광선과 신광호는 별도의 두 존재로 기술돼 있고, 상당 부분에 걸쳐 두 사람의 역할도 각기 전혀 다르게 기술돼 있다)
사실로 글을 쓰면 100번을 써도 기억이 일치한다. 하지만 거짓으로 글을 쓰면 쓸 때마다 기억이 변한다. 대공전문가가 간첩이나 범인을 잡을 때 여러 번 쓰게 하고 시일을 두고 여러 번 묻는 것은 바로 거짓말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장진성은 신광용이라 썼다가 신광호라 썼다가 혼돈한다. 그는 2009년에 ‘나의 탈북스토리’를 자기 손으로 인터넷에 게재했다. 여기에는 신광용과 김광선이라는 두 이름이 독립적으로 등장했다. 두 사람의 역할도 달랐다. 그 후 신광호를 만나 식사를 했고, 100원을 갚았는데 신광용이 보안상 자기 이름을 김광선으로 써달라 부탁을 했다고 녹취서에 진술하였다. 그 많은 이름 중에 왜 하필 김광선이라는 이름을 찝어서 선택했는가? 장진성은 그의 부탁을 받아들여 2011 내놓은 '시를 품고 강을 넘다'에서는 신광용이라는 이름을 김광선으로 썼다고 녹취서에 진술하였다. 그러나 2011년에 쓴 ’시를 품고 강을 넘다‘에는 김광선이라는 이름이 없고 신광용의 이름만 등장했다.
제382광수가 자기 얼굴이 아니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정신병자가 한 일에 관심 없다고 일축하고 논리적 방어 포기
문: 이들 50명(피고인에 의해 위장탈북자로 국정원에 신고 된) 중 증인과 같이 위장 광수로 발표한 사람들 중에는 탈북자동지회 초대 회장인 홍순경(전직 외교관), 요덕에서 15년동안 고생했다는 김영순, 국정원 산하연구소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 고영환, 김일성 주치의 김소연, 유명한 기자 강철환, 삐라로 애국자 반열에 오른 박상학, 북민주화운동 공동대표 안혁, 수자원공사 김광일, 대왕버섯 회장 김유송, 유명세를 타고 있는 영화감독 정성산, 국회의원 조명철, TV를 주름잡는 강명도, 황장엽, 김덕홍 등 유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중 증인이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이들 중 “저건 아니다”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있는가요?
답: 대부분 아는 것 같습니다.
문: 이들 중 저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있는가요?
답: 100% 아니라고 말하기보다도 사기 혹은 질병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것을 가지고 갑론을박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문: 이들 중, 피고인 지만원에 협박을 하다 만 사람들이 여럿 있고, ‘9살짜리 특수군이 어디 있느냐, 지만원은 또라이다, 그 사람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고 험담하는 사람들, 생활에 지장이 있으니 저는 좀 빼 달라 솔직히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50명중 아무도 피고인 지만원을 상대로 고소를 하지 않았습니다. 지만원의 애국행위에 대해 탈북자가 고소를 하면 역풍을 맞는다는 정서가 작용했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사회에서 “애국시인”으로 엄청난 추앙을 받고 있는 증인만 유독 고소를 한 이유가 있는가요?
답: 노년에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변명하기 때문에 동정심에 고소를 하지 않았는데 제가 고소한 이유는 누구라도 한명이라도 나서서 이러한 악은 제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이러한 사기가 어디 있고 비정상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곳에 온 탈북자들을 다 간첩이라고 하는 피고인이야말로 이상한 것입니다.
문: (증18의 189-193쪽을 제시하고) 피고인 지만원은 함부로 판독한 것이 아니라 얼굴의 특징, 구조, 기하학적 얼굴 지문이라는 정당한 영상분석 기법에 따라 분석하였는데 증인은 증인의 얼굴이 이렇게 분석되어진 것을 책이나 인터넷에서 자세히 보았는가요?
답: 답할 가치도 없습니다‘
문: (증20을 제시하고) 이마에서부터 미간, 눈썹, 눈, 산근, 코, 인중, 입, 턱으로 이어지는 형상등고선이 30년 전후의 시차가 난다해도 어릴 적 얼굴과 성인이 된 이후의 얼굴에 형상의 변화가 적게 일어나 두 얼굴의 모든 치수와 비율, 각 부위의 대면각, 각 부위의 등고선 등 모든 점과 면에서 #1과 #2는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분석하였는데 증인은 이 부분에서 틀린 점을 지적할 수 있는가요?
답: 저 자체를 논하기가 쉽지 않고 가치도 없습니다.
문: 특히 광대점과 귓불 부위의 외형선이 특징적으로 일치하고, 이마의 대면각과 미간에서 산근으로 이어지는 3D입체 형상등고선이 완전하게 일치하고, 양쪽 눈의 폭과 거리, 양쪽 눈과 코와의 위치와 거리 폭과 간격이 일치하고, 명암과 음영의 농담으로 측정한 코의 높이가 일치하고, 이마의 골상각도와 안와상(눈두덩)의 골상각도가 연동되어 완전하게 일치하고, 안와상의 골상 등고선과 산근의 높이와 선형 그리고 면각을 나타내는 형상등고선이 완벽하게 일치하고, 눈썹이 위치한 비율과 눈과의 폭, 눈썹의 두께와 폭, 거리, 눈썹의 방향각과 볼륨, 눈썹과 미간골과 산근골과의 입체적인 3D형상, 그리고 눈썹을 받치고 있는 미릉골의 형상과 등고각을 살펴볼 때 #1과 #2는 일치한다고 판독하였는데 어디가 잘못되었는가요?
답: 저도 저 사진을 보고 광수 사진들을 보니까 비슷한 사람이 지만원 광수도 있었습니다.
문: 네모선 안에 있는 코와 인중, 법령과 위아래 입술과 턱의 형상이 일치하고, 코의 폭과 코끝의 라운드 각이 일치하고 인중의 폭과 면적, 대면각, 등고선, 등고면이 일치하고, 인중에서 윗입술의 상방향각과 등고면은 붕어빵처럼 똑같이 일치하고, 윗입술과 아랫입술의 면적과 두께, 폭과 입을 벌린 정도 모두 일치한다고 분석하였는데 틀린 점이 있는가요?
답: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문: (제18호증의 89-93쪽을 제시하고) 증인은 황장엽과 증인의 얼굴을 영상분석기법의 모델케이스로 하여 인터넷과 ‘5.18영상고발’이라는 대형 화보집에 게재된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요?
답: 관심 없습니다.
문: (제20호증을 제시하고) 지문은 모든 범죄현장의 입증지료로 쓰입니다. 지문인식은 지문의 중요한 부분들을 선으로 연결해놓고 그 도면의 외형이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지문에 도면을 그리는 지문인식을 넘어 얼굴의 중요한 포인트들을 연결하는 기하학적 방법을 얼굴인식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피고인 지만원은 증인의 얼굴과 황장엽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얼굴지문을 그렸습니다. 그려보니 #1얼굴과 #2얼굴은 어느 점을 연결하더라도 기하학적으로 일치합니다. 이런 기하학적 분석의 잘못된 점을 지적할 수 있는가요?
답: 저것은 지만원의 분석이지 무슨 과학적 분석입니까.
판사의 문: 꼭 했으면 하는 말이 있으면 하십시오
답: 저는 피고인이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사리사욕을 위해서 이것으로 무슨 돈벌이를 하는 것인지 꾸짖고 싶습니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어떻게 사회에 대고 공공연히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인간모독에서 분수가 있지 어떻게 그러한 험한 누명들을 돌아가면서 씌울 수 있는지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주: 녹취서에 기록돼 있지는 않았지만 장진성은 피고인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오늘 내가 온 것은 증언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저 정신병자 치료하기 위해 왔다’고 소리쳤다)
장진성은 두 개의 얼굴이 왜 같은 사람의 얼굴들인지에 방어하지 못했다. 피고인인 나는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분석했지만 장진성은 무조건 “아니다” “피고인이 마쳤다” 이렇게만 반응했다.
장진성에 대한 소결
1. 법정신문을 통해 밝혀진 장철현의 정체는 위장탈북자: 장진성은 위장 탈북자다. 본명도 숨겼다. 대동강구역 문수동에 부인과 아들(위금성)이 살고 있고, 68세 된 아버지(증거: 동 녹취서 7쪽 7행), 어머니, 누나, 누나의 조카 등이랑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탈출해야 할 동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탈북스토리에서 자기의 친족들은 3족에 걸쳐 멸문당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그의 탈북스토리를 보면 그의 가문은 성분이 좋았고, 그 자신은 부인과 아들 이렇게 단란한 가정도 꾸리고 있었다. 이 행복한 가정을 버리고 부모형제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안겨주면서까지 탈북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김일성종합대학졸업도, 통전부 근무도 사실이 아니다. 탈출할 때 사용했다는 특별통행증도 거짓말이고, 그가 2004년 1월에 평양을 떠나 무산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는 것도 거짓말이고, 두만강 강변에서 행동했다는 이야기들도 거짓말이고, 7일 동안 엔벤의 맹추위를 보온대책 없이 이겨냈다는 것, 공안에게 쫓겼다는 것도 다 서투르게 지어낸 어설픈 소설로 보인다.
2. 피고인에게 범죄 의도(범의)가 있었는가? 피고인의 광수 지정은 공익적 행위다. 피고인의 광수 지정은 장진성 단 한 사람에 대해서만 한 것이 아니라 2018.2.25. 현재 538명에 대해 한 것이며, 이 중 탈북자들도 60명 정도 있다. 2015.5.5.부터 영상분석을 시작해 29개월째 계속하고 있는 중노동이다. 이런 노력이 오로지 장진성 한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범의를 가지고 수행한 일일 수는 없는 것이다.
3. 영상분석 기법은 무시될 수 없는 기술: 피고인측의 영상분석 절차와 기법은 영상분석 교과서에 따른 적법한 것이다. 최근 수많은 보도매체에서 안면인식이 실용화되고 있다는 보도들이 있었고, 피고인이 법원에 제출한 보도내용도 꽤 된다. 이를 아무런 근거 없이 불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2021.2.1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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