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서의 5.18'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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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1-01-23 19:59 조회3,45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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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요지의 내용들은 [역사로서의 5.18] 제2권에 집중돼 있습니다.
먼저 이 책의 1,3,4권 내용의 성격을 약술하겠습니다.
이 책의 제1권에는 유언비어 잔치판의 성격과 그 원천에 대한 분석, 5.18 이전에 이미 선동되었던 무장폭동, 5.18에 대한 북한의 입장, 광주사태의 날짜별 상황 정리와 그 상황들에 도시 게릴라가 출현해 있었다는 등의 분석이 412쪽에 걸쳐 정리돼 있습니다.
이 책의 제3권에는1988년 김대중과 광주 청문회 증인들이 벌인 위증들, 엉뚱한 판결들, 1,2심 재판 법리들의 모순점, 광주 시위대가 헌법수호 결집이라는 법원 정의에 대한 비판, 북한 지령문 빼닮은 5.18 주동자들의 성명서 내용들, 군용 차량 탈취하고 경상도 차량에 불지르는 폭도를 헌법수호기관이 정의하는 재판에 대한 비판, 재판부가 헌법기관이라고 정의한 중학생, 고등학생들의 민낯, 고등학생의 설익은 무용담, 보상금 2억원 받고 월북한 윤기권도 헌법기관인가 등 광주 시위대를 준헌법기관으로 정의한 법원에 대한 비판, 광주해방구에 대한 법원의 법리 해석에 대한 분석과 비판 등이 406쪽에 걸쳐 전개돼 있습니다.
이 책의 제4권에는 5.18이 북한이 주도하는 통일 운동의 일환이이라는 결론이 도출돼 있습니다. 5.18의 씨앗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라는 점, 남민전은 북한이 주도하는 통일 운동이라는 점이 죄경운동권 역사의 뿌리로부터 설명돼 있고, 5.18 성명서들에 빨치산 용어, 대남 공작용어들이 등장하고 대남 공작 냄새가 진동한다는 데 대한 분석들과 함께 김일성의 역할, 서경원 간첩사건, 김낙중 간첩사건, 5.18 배후자 정기표의 역할, 광주일고 동문들의 박정희 암살음모 사건, 황석영의 지하 반역행위 등이 441쪽에 걸쳐 전개돼 있습니다.
이제 북한군 개입 정황을 증명하는 제2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저자 김대령이 제기한 정황들은 주로 광주시민들의 증언들을 근거로 한 것이라 5.18옹호세력들이 반박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 책의 제2권에는 5.18이 북한의 작품이라는 데 대한 각종 사실들이 403쪽에 걸쳐 전개돼 있습니다. 저자 김대령 박사는 첫 부분에서부터 ‘시민군’과 ‘시위대’를 구분하였습니다. ‘시민군’은 외부 침투세력이고, ‘시위대’는 이들에 의해 선동된 광주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낯선 외지인들이 수행한 역할 중 하나는 시민팀을 구성하여 여기저기에 배치시켜놓고 시민팀과 시민팀 사이에 오인 사격을 하도록 유도한 작전입니다. 외지인이 여러 명의 시민들을 차에 태워 총을 주고 철모를 쓰게 한 후 어디론가 데려가 내려놓으면 다른 쪽에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광주 사람들이 새롭게 나타난 그 팀이 계엄군인 것으로 오인하고 총을 쏘게 함으로써 쌍방 교전을 하게 만들었다는 광주 시민의 증언이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게 하여 교전을 유발시키는 고도의 게릴라전 수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를 증언한 광주인은 양화공 최영철 등이며 이 책의 138쪽에 그의 증언이 수록돼 있습니다. 제2권의 131쪽에는 “제5장, 외부에서 침투한 시민군”이라는 제목에 이어 탈북자 장철현(가명 장진성)의 강의 내용이 소개돼 있습니다.
“탈북 시인이자 전 통일전선부 작가였던 장진성은 그의 2010녀 12월 20일 강연에서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통전부 영웅관이라고 있습니다. 간첩들의 공적을 기리는 전시관 같은 곳인데, 거기에 보게 되면 여러 관 중에 광주관이라고 있습니다. . . 통전부 안에서 제가 듣기로는 . . 북한에서 들어가서 계엄군 옷을 입고 대학생을 쏘고 대학생 옷을 입고 계엄군을 쏘고 이런 교란 작전을 했다고,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광주의 양화공 최영철의 증언과 일맥상통합니다.
제2권 제5장에서 저자는 ‘시민군’을 외부 침투세력으로 정의하였습니다. 제2권 제5장의 제목은 “외부에서 침투한 시민군”입니다. 목차에 잘 요약돼 있듯이 5.18에는 자발적인 불순 세력이 있었고, 외지에서 온 시민군이 있었다고 합니다. 가짜 스님 행세를 한 간첩 손성모(무기징역)와 또 다른 빨치산 스님 이관영의 역할이 컸다고 소개돼 있습니다. 제2권의 166쪽에는 간첩 손성모와 가짜 빨치산 스님 이광영이 무등산 입구 증심사에서 만난 사실이 기록돼 있고, 171~173쪽에는 이 두 사람이 있는 증심사를 시민군이 엄격하게 경호하였다는 증언들이 소개돼 있으며, 북한군에게 길 안내를 하였다는 죄로 종신형을 받았던 손성모는 광주지역 빨치산의 도움 없이는 북한 침투자들에게 길을 안내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담겨있습니다(177쪽). 황석영도 증심사를 경계하는 시민군의 존재를 증언했다고 기대돼 있습니다(171쪽). 결론적으로 간첩 손성모는 증심사에서 다중의 경호를 받고 있었다고 했습니다(172쪽).
제2권의 166~168쪽에는 증심사가 5.18의 핵심 기지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가짜 스님 이광영이 증언하였고, 이광영은 그 스스로가 시민군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탈취해온 새 차량들에 “계엄을 철폐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언론자유 보장하라“, ”최후의 일각까지“, ”오호 통재라“, ”오후 3시까지 도청으로 집결“ 등의 구호를 페인트로 써주었다는 증언을 했다고 소개돼 있습니다.
제184~192쪽에는탈북자들, 5.18주역들, 검찰 모두가 광주에는 300명 단위로 두 개의 무장 세력이 활동하였다는 사실에 일치된 입장을 보였다는 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184쪽에는 탈북자 최중현 대위가 2006년에 발표한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광주에 남파된 북한군은 총 600명이었고, 300명은 2군단 정찰대대 소곡이었고, 또 다른 300명은 각 부대로부터 차출되었다고 발표한 사실이 소개돼 있습니다.
제185~186쪽에는 전 빨치산 장두석이 1980.5.15. 전남대 박관현에게 300명의 시위대를 요청하였다는 기재, 북한 도서 [광주의 분노] 34~35쪽에 광주의 폭동 군중 600명이 무기 탈취를 주도하였다는 기재가 소개돼 있습니다. 서울지방검찰청 [5.18관련시간 수사결과 92~93쪽에도 두 그룹의 300명이 합류한 600명이 아사아자동차공장을 털었다는 기재가 있다고 소개합니다. 제186~187쪽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김영택 기자(주: 5.18증언으로 유명한 기자)의 증언이 소개돼 있습니다. 제188쪽에는 광주가 서울에서 온 대학생 500여명에 대한 환영식을 5.22.에 거행했다는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기록이 소개돼 있고, 이를 입증하는 김영택 기자의 증언이 소개돼 있습니다.
제189쪽에는 미공개된 조선일보 취재 일지 408쪽에도 300명이라는 숫자가 기재돼 있다고 소개돼 있습니다. 제190쪽에는 고3, 3수생인 김원갑이 도청시민군 600명을 배치하고 지휘했다는 김영택 기자의 증언이 소개돼 있습니다. 도청에는 600명이 시민군이 있었는데 그 600명에 대한 배치와 지휘를 고3, 3수생인 김원갑이 맡고 있었다는 말은 믿기 어려운 말이라는 저자의 판단이 소개돼 있습니다. 저자는 그 600명의 바지 지휘자를 광주사람으로 내세우기 위한 북한의 위장술이었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제191쪽에는 1989.1.26.에 광주청문회에 출석한 김영택 기자가 서울에서 온 시위대 300명이 합세했고, 이들은 복면을 쓰고 총기 반납을 방해했다는 증언이 소개돼 있습니다. 300명을 언급한 전교사 상황일지도 소개돼 있습니다. 제194~195쪽에는 화순 무기고로 곧장 달려가 무기를 탈취한 트럭의 운전수가 산수동에 와서도 산수동 가는 길이 어디냐를 물었는데, 아시아자동자공장을 떠난 트럭 운전자가 화순 무기고에까지 달려갔으면, 광주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을 텐데 산수동에 와놓고도 산수동 가는 길을 물었다면 그 운전자는 광주인이 아니라는 한일남 씨의 증언이 소개돼 있습니다.
다시 제2권의 목차를 보겠습니다. “낫 들고 20사단 지프차 탈취한 시민군”, “21일 오전 9시 무기 탈취 및 무장 봉기 시민군 600명 출현”, “시민군 중 불순 세력 있었다는 낌새들”, “낫으로 5.18광주의 영웅 되고, 도끼에 전사한 대남공작원 장중한”, “무기고 배치도를 이용한 무기 탈취”, 시민군 차량 돌격부대의 공격“, ”시민군 수류탄과 다이너마이트“, ”군경과 시민군의 뒤바뀐 제복“, ”학생없는 학생 시민군“, ”가두 시위에 응용된 유격전 전술“,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낌새와 단서들”, “북한방송 청취로 시사정보를 입수한 시민군”, “시민군에 의한 언론 탄압” 등의 제목들이 보입니다.
제209~220쪽에는 “시민군 중 불순세력이 있었다는 낌새들”이라는 중간 제목을 입증하는 증언들이 실려 있습니다. 박금희 양의 부모의 증언(209쪽), 한일남의 증언(210쪽), 전 조선동맹작가의 증언(211쪽), 윤석진의 증언(212쪽)이 위 탈북자 증언과 일치한다는 분석도 기재돼 있습니다(212쪽). “. . 도로에 총을 쌓아놓고 나누어 주었는데 나누어준 사람이 학생도 아닌 것 같았다. 그날부터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거의 안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민군의 대부분은 외지인이었다는 최영관 전남대 정외과 교수의 증언이 소개돼 있습니다(214쪽),. 운동권 동생 박중열의 증언도 간첩의 개입을 시사하고 있었다 합니다(214쪽). 215쪽에는 고교생 이지형의 증언이 소개돼 있습니다. “도청은 시민군들이 지키고 있던 때였다. 노동청 앞에서 웅성웅성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아저씨들이 상당히 선동적인 말을 했는데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북에 대해서 찬양하는 말을 많이 했다. . . 대개 모이는 곳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한 명씩 끼었는데, 40대 정도로 굉장히 잘 생겼고 회사원같이 생겼다(이지형, 1988).” 제218쪽에는 사태를 수습하려는 시민들을 향해 공포를 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수상한 시민군에 대한 증언이 소개돼 있습니다. 제220쪽에는 이 부분의 결론에 해당할 수 있는 내용이 소개돼 있습니다. “북한이 방송으로 시민군 작전 지휘를 하고 있었기에 북한 간첩들이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낌새를 알아챈 시민군들이 있었다. 며칠간 북한 방송을 들었으며, 북한이 발송해 주는 대로 시민군 작전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던 시민군 이재춘(주: 당시 방위병)은 광주에서 간첩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24일에 이미 간파하였다.”
“우리는 전반적인 광주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주 이북 방송을 청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의 방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광주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그곳에서 그렇게 빨리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이재춘,1988).
제2권의 제336~340쪽에는 광주시위가 북한의 유격전 전술에 따라 실행됐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저자는 1982년 북한의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제567쪽을 이 책 336쪽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시위대가 경찰 저지선을 뚫은 다음 역포위하는 작전에 대하여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당시 시위대와 시민군이 감정이 이끄는 대로 우왕좌왕 이리저리 몰려다녔던 것이 아니라, 치밀한 게릴라 전술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주: 시위자들)은 교외 시위를 위주로 하면서 성토대회, 성명 발표, 교내시위와 농성 투쟁 등을 결합하여 투쟁을 중단없이 벌려나갔으며 시내 중심부를 시위 구역으로 설정하고 역량의 집중과 통일 행동을 보장함으로써 시위의 정치적 효과를 높였다. 시위에서는 과감한 육박에 의한 경찰 저지선의 정면 돌파와 경찰의 포위를 역포위로 전환시켜 앞으로 열어나가는 돌파, 분산과 집합, 큰 대열과 작은 대열의 배합, 속도행진에 의한 빠른 기동과 바리케이드에 의한 완강한 방어 등으로 주도권을 틀어쥐고 적을 피동에 몰아넣었다.(조국통일사, 1982, 567)”
“남한에서는 전문가들도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까맣게 모르고 있던 사실을 북한에서는 그 당시 이미 상세하게 알고 있었는가? 정말로 포위를 역포위으로 전환시켜 앞으로 열어나가는 돌파, 분산과 집합이 있었는가? 실제로 이미 5월 14일 그 방법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전남대 법대 학생회장 이성길이 증언한다”(337쪽). “14일은 싸움하는 데 필요한 전략과 전술까지도 계획하여 종합운동장에 모여 집회를 한 뒤 . . 함성과 구호 속에 단과 대학별로 대오를 정비하여 순식간에 정문, 후문을 돌파, 도청앞 관장을 향해 질주해갔다. .” (제337쪽).
광주 시위가 [조국통일사]가 기재한 그대로 수행되었다는 점을 저자는 여러 광주인들의 증언들을 인용하여 증명하였습니다.
“광주사태 사흘째인 5월 20일 시위에 대해 [정사 5.18] 제256쪽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는 기재 아래 그날의 시위 작전이 북한의 [조국통일사] 기재 그대로 공수 부대를 역포위한 사실이 1쪽 분량으로 소개돼 있습니다. 이 작전은 2008년 광우병 반미 시위 때 점과 선밖에 확보하지 못한 경찰 병력이 시위대에 역포위되어 전원 납치되어 무장해제당하는 수모를 겪은 장면에 반영돼 있다고 소개돼 있습니다. 제2권의 339쪽에는 이러한 시위 전술은 “김대중의 동교동 사람들이 많이 동원되었던 서울역에서의 5월 15일 시위”에서도 적용되었다는 내용도 상술돼 있습니다. 이어서 “두 형님이 빨치산이었다는 김결은 그 다음날인 16일 광주에서도 ‘분산과 집합’, 큰대열과 작은 대열의 집합‘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는 기재 아래 김결의 1989년 증언이 제340쪽에 소개돼 있습니다.
제340~355쪽에는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낌새와 단서들”이라는 제목으로 북한의 광주 개입 정황들이 나열돼 있습니다.
[조선대백과사전]은 광주사태를 “광주인민봉기”로 정의하였다는 내용이 소개돼 있습니다. “파쇼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주의적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 . 남조선 인민들의 반파쇼 민주화투쟁에 빛나는 장을 기록한 력사적인 사변이었다”(341쪽). 이어서 같은 취지의 표현이 담긴 [김일성 저작집 35:340] 문장들이 제341쪽에 소개돼 있습니다. .
제341쪽에는 남한에서도 30년 동안 알지 못했던 광주 시위대 편제를 당시의 북한은 북한 월간지 [남조선문제] 4~5월호에서 밝혔다는 사실이 소개돼 있습니다. “적의 무장을 빼앗아 자체를 무장한 봉기자들은 ‘시민군’, ‘특별경계부대’, ‘돌격대’ 등 군사 지휘 체계를갖춘 지위적 무장대오로 편성되었으며, 투쟁 핵심들로 조직된 ‘민주투쟁위원회’의 통일적 지휘 밑에 무장투쟁을 벌려나갔다(김윤봉. 1981, 17~18)”.(제2권 341쪽). 이에 대해 저자의 평가가 이어져 있습니다. “무장봉기 주동 세력이 ‘민주투쟁위원회’라는 명의를 사용했었다는 것은 남한에서도 3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밝혀지는 사실인데, 북한에서는 광주사태 당시 이미 상세히 알고 있었다는 것은 ‘민주투쟁위원회’라는 명의를 사용하던 봉기 지도부는 실제로 북한 세력의 관리하에 있었음을 시사한다”(341~342쪽).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이후 조국통일사)의 599쪽은 광주인민봉기는 종전의 인민봉기와는 전혀 다른 최고의 민주화투쟁이라고 평가하였으며 그 상세한 표현이 343쪽에 기재돼 있습니다. 같은 쪽에 이어진 기재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의 시위 군중은 평양방송을 들으며 시위하고 있었다. 이상우 저널리스트의 아래 기록은 북한이 광주사태 배후에 있었음에 대한 아주 강력한 단서이다” 이상우의 기록은 343~344쪽에 기재돼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5.18을 앞에 붙인 시설의 명칭들이 수두룩하다는 내용이 탈북자들의 증언들이 소개돼 있습니다(345쪽). “5.18 청년호, 5.18무사고 정시견인 초과운동, 5.18청년제철소, 5.18전진호, . . ”.
제355~362쪽에는 광주 시민들이 사태파악을 위해, 들을 수 있는 방송은 북한 방송밖에 없었다는 데 대한 수많은 광주 시민들의 증언들이 수록돼 있습니다. 홍순희, 안은경, 전성준, 이용일, 위성삼, 김영택의 증언들이 차례로 소개돼 있습니다. 제362~371쪽에는 광주에는 시민군만이 촬영을 할 수 있었고, 사진 촬영이 전면금지 되었으며, 시민군이 보도를 전면 통제했다는 사실들이 소개돼 있습니다.
요약
[역사로서의 5.18] 1,2,3,4권 중 북한군의 개입을 강력히 시사하는 책은 제2권이며,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광주에 북한군이 왔다는 인식을 압도적으로 갖게 될 것입니다. 북한이 발간한 문헌을 보면 우리 정보기관들이 아직도 알지 못하는 광주 현장 상황을 읽을 수 있습니다. 광주에서의 폭동 및 시위에 전략, 전술 그리고 조직 체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광주 작전은 당시 임시적으로 북한에 존재했던 [민주투쟁위원회]의 지휘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광주폭동은 북한군이 앞장섰고, 그 수족 역할을 남한의 빨치산 조직원들과 손성모와 같은 간첩들이 수행했다는 인식을 갖게 합니다.
이 책에 나타난 정황증거들은 북한군 개입을 믿게 하는 압도적인 존재들이며, 더구나 이 증거들은 광주인들이 제공한 것들이기에 누구도 쉽게 뒤집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닐 것입니다. 압도적인 정황 증거들이 과학적 수단에 의해 허위 증거로 뒤집히지 않는 한, 북한군 개입에 대한 인식은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021.1 2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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